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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는 남자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11 - チャプター 20

83 チャプター

10화

에이펙 그룹 본사, 32층 대회의실의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감성이 밥 먹여 줍니까?”도윤의 낮은 음성이 회의실 벽을 타고 서늘하게 흘렀다. 그는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만년필 끝으로 짚어낸 도표 하나가 기획팀장의 안색을 잿빛으로 물들였다.“타겟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랬지, 누가 당신들 희망 사항을 소설을 써오라고 했어요?”도윤은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감은 눈을 쓸어내렸다. 터져 나오려는 냉소를 짓누르듯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 반동으로 걷어붙인 소매 아래 드러난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억눌린 힘이 근육의 결을 따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그 찰나의 순간, 회의실 내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데이터 수치 0.2% 오차, 이거 현장에서 얼마나 큰 손실로 이어지는지 몰라서 이럽니까?”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회의실 안, 사람들의 숨통을 조였다.“내일 오전까지 다시 가져오세요.”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나는 그의 움직임은 소리 하나 없이 매끄러웠으나, 카펫 바닥을 딛는 구두 굽의 묵직한 무게감이 회의실 전체를 짓눌렀다. 벗어두었던 수트 자켓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쥐어 어깨 뒤로 넘긴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복도의 공기마저 도윤의 냉담함에 얼어붙은 듯했다.집무실로 향하던 도윤의 발걸음이 비서실 데스크 앞에서 멈췄다.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무채색 수트를 차려입은 비서가 인기척에 즉각 일어섰다. 그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며 도윤은 무심결에 해인을 떠올렸다. 이 자리에 저런 정장을 입은 해인이 앉아 있다면……. 아침에 같이 출근하고, 퇴근길엔 함께 장을 봐서 들어가는 평범한 일상.그 달콤한 상상이 스친 찰나, 도윤은 제동을 걸듯 비서에게 물었다.“이 비서, 입사할 때 스펙이 어떻게 됐었죠?”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 비서가 잠시 눈을 깜빡였으나, 이내 막힘없이 대답했다.“K대 경영학 학사에 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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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옷을 갈아입은 해인은 사물함 안에 쇼핑백을 조심히 밀어넣었다.‘서우를 다시 만나면 카드를 달라고 해서, 환불처리 해야겠다.’예쁘기만 하면 뭘 하나, 어차피 입고 갈 곳도, 입을 일도 없을 텐데.게다가 말이 동생이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아니었던가.굳이 선물을 받아야 한다면, 도윤에게 먼저 말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백화점 직원용 출구를 나서는 해인의 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하루 종일 꼿꼿하게 서서 가식적인 미소를 팔았던 대가는 타는 듯한 발바닥의 통증이었다.“하아…….”해인은 구석진 벤치에 앉아 퉁퉁 부은 발목을 잠시 주물렀다. 아침에 도윤이 쏘아붙였던 [대학 갈 준비나 해]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에겐 당연한 미래가 자신에겐 구걸해야 할 기적이라는 걸, 그는 영영 모를 것이다.해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 가만히 펼쳐 보았다. 한때는 연필심이 시커멓게 묻어 있거나 물감 얼룩이 지워지지 않던 손가락 끝. 이제는 거친 박스를 뜯고 포장지를 만지느라 생긴 굳은살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그림…… 다시 그릴 수 있을까?’손마디를 굽혀 보지만, 굳어버린 건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꿈꾸던 마음조차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진짜 오빠 말대로 해볼까.”도윤이 던진 '대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전 같으면 코웃음을 쳤을 텐데, 오늘 서우가 안겨준 그 과분한 드레스를 입어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여전히 이 화려한 세계를 동경하고 있으며, 그것을 파는 사람이 아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엄마가 또 내 돈만 안 가져가면, 어떻게든 해볼 만할 것 같기도 한데……. 윽, 모르겠다.”어차피 여기서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기기지개를 켜며 벤치에서 일어선 해인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퇴근길, 늘 향하던 곳이 아니라,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윤의 집으로 간다는 사실은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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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건, 여자친구랑 나랑 체형이 비슷하대서 피팅해달라서 해준 것 뿐이야. 다른 고객들도 종종 그래.”해인의 변명은 애처로울 정도로 절박했다. 하지만 도윤의 시선은 해인의 해명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사진 속 그녀의 노출된 어깨선과 붉게 달아오른 뺨에 고정되어 있었다.그가 천천히 핸드폰을 거두며 해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해인의 등이 차가운 벽면에 완전히 밀착되었다. 퇴로를 차단한 도윤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낮게 읊조렸다.“강서우 말은 다르던데? 자기 이상형이라서 옷 선물했다고.”도윤의 숨결이 닿은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해인은 울컥 치미는 서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정작 서우 앞에서는 꿋꿋하게 버텼던 자존심이, 가장 믿고 싶었던 도윤의 불신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러니까.”“뭐?”“이렇게 화내니까!”해인이 고개를 번쩍 들어 도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떨리는 눈동자에는 억울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제 어깨를 누르는 도윤의 그림자를 밀어내려 애쓰며 말을 쏟아냈다.“그리고 거짓말 아니고 그냥 말 안 한 것뿐이야. 옷은 환불하려고 백화점에서 가지고 나오지도 않았어.”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해인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쏟아냈다.“이상형이니 뭐니 그런 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애초부터 오빠한테 사진 보낸다고 해서, 내가 보내지 말라고 얼마나 화내고 지우라고까지 했는데……. 오빠 말대로 나 같은 애가 권도윤 여동생이라고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 꼬맹이가 심술이라도 났나 보지.”해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하루 종일 감당해야 했던 무례한 고객들, 매니저의 독설, 그리고 서우의 도발까지. 그 모든 피로가 도윤의 차가운 눈빛과 만나 독처럼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었다.“이제 됐어? 오빠 말대로 내가 주제도 모르고 동생 어쩌고 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그만해.”해인은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항변을 마친 그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거실의 정적 속에서 해인의 거친 숨소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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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클럽 VIP 라운지.심장을 울리는 육중한 베이스음이 가죽 소파까지 진동시켰다. 값비싼 샴페인 향과 진한 담배 연기가 뒤섞인 그곳에서, 서우는 화려한 조명보다 더 비현실적인 얼굴로 앉아 있었다.그리고 그의 곁에는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 애쓰는 여자들이 나비처럼 펄럭였다.“오빠, 내 말 듣고 있어?”옆에 앉은 여자가 서우의 팔을 흔들며 애교 섞인 앙탈을 부렸지만, 서우는 대답 대신 핸드폰 액정만 무심하게 만지작거렸다.‘왜, 반응이 없지?’형의 성미라면 당장 전화를 걸어 폭언을 퍼붓거나, 사람을 보내 제 뒷덜미를 낚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핸드폰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그때, 짧은 진동음과 함께 화면에 알림이 떴다.[입금 완료: 12,500,000원]정확히 오늘 백화점에서 결제한 원피스 값이었다.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 하나가 서우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균열을 일으켰다.[옷 잘 받았다. 해인이한테 잘 어울리네. 참, 너한테 전해달라더라. 꼬맹이 귀엽다고.]“……하.”서우의 입술 사이로 짧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꼬맹이? 귀엽다?권도윤이 보낸 메시지였지만, 그 뒤에 숨은 해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남자가 아닌, 형의 뒤나 쫓아다니는 애송이 취급하는 그 무심한 다정함이 그의 심연을 난도질했다.서우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 소리가 멀어지고, 낮에 보았던 해인의 하얀 목덜미가 잔상처럼 떠올랐다.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매만졌던 순간. 손가락 끝이 보드라운 귓불에 닿을 듯 말 듯 스칠 때 해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그 찰나의 떨림, 손끝을 타고 전해지던 그녀의 맥박. 그때 보았던 해인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꼬맹이? 아니지, 윤해인. 그때 분명히 귓가가 붉어졌었는데.’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입으로는 꼬맹이라고 했어도 그 순간의 열기까지는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아니면……, 애당초 꼬리 흔드는 연하남이 취향인건가?’서우는 앞에 놓인 독주를 단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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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서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소파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던 여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한 여사. 서양인의 깊은 눈매와 동양인의 매끄러운 골격이 절묘하게 섞인 그녀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미인이었다. 서우의 그 묘하게 이국적이고 퇴폐적인 이목구비는 명백히 그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축복이었다.“웬일이니, 네가 이렇게 일찍 들어오는 날이 다 있고.”“짐 싸러 왔어. 당분간 딴 데 가 있으려고.”서우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단을 오르려 하자, 와인 잔 속의 액체가 파들거리며 한 여사의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떠서 입 앞에 갖다 주는 것도 제대로 못 먹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집안에서 이런 눈치를 보는데.”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 여사는 한숨을 내쉬며 와인을 들이켰다.“언제까지 형 뒤처리나 받으면서 살 거야? 도윤이는 벌써 그룹 후계 구도 다 잡고 약혼녀 집안까지 구슬리고 있는데, 넌 어쩜 그렇게 매번 애처럼 굴어. 도윤이 반만이라도 닮아봐라, 좀.”‘애처럼.’ ‘반만이라도.’서우에게 그 말은 저택의 공기처럼 익숙하고도 지겨운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난간 너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혼혈 특유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는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어머니. 어머니 눈엔 권도윤이 그렇게 대단해 보여? 자기가 낳은 아들보다, 남이 낳은 그 완벽한 기계 덩어리가 그렇게 탐나냐고.”“말조심해! 도윤이가 이 집안의 기둥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게 싫으면 더 악착같이 네가 잘났어야지. 도움은커녕 내 입지만 더 좁아지게 만드니!”“아, 내 걱정이 아니라 어머니 입지 걱정이었구나.”서우는 헛웃음을 삼키며 제 방으로 올라가 거칠게 여행 가방을 펼쳤다. 어머니의 멸시와 도윤의 오만함. 그 거대한 두 벽 사이에서 서우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은 도윤이 가진 그 완벽함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내는 것이었다.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집어넣고 가방 지퍼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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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다음날 오전 백화점 직원용 사물함 앞.해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철제 사물함의 차가운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지만, 쇼핑백 안에서 꺼낸 드레스의 감촉은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부드러웠다.이미 도윤이 본사에 내린 지시를 받았는지, 사나운 눈매의 매니저는 평소처럼 독설을 내뱉는 대신 멀찍이 서서 팔짱을 낀 채 해인을 관찰했다. 그 무거운 침묵이 해인의 목덜미를 짓눌렀다.[서우가 아니라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이거 입고 나와.]다정한 배려라고만 하기에는 어딘지 모를 서늘함. 어제 제 귓가에 박혔던 도윤의 명령이 환청처럼 맴돌았다.해인은 탈의실의 비좁은 공간 안에서 숨을 몰아쉬며 유니폼 단추를 풀었다. 속옷 위로 실크 원피스가 미끄러지듯 감겼다.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택배 상자를 뜯고 포장지를 만지느라 거칠어진 손가락 끝이 섬세한 원단에 걸릴 때마다, 해인은 제 존재 자체가 이 옷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조여왔다.“……아.”등 뒤의 지퍼를 올리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꽉 조여오는 허리선은 마치 도윤의 손길이 자신을 구속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겨우 옷무새를 가다듬고 거울 앞에 섰을 때, 해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거울 속의 여자는 낯설었다. 유려하게 흐르는 옷의 곡선은 그녀가 잊고 살았던, 아니 평생 가져본 적 없는 여자로서의 자각을 강제로 일깨우고 있었다.‘내가……, 아닌 것 같아.’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가짜. 해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살짝 드러난 하얀 어깨가 유난히 시려 왔다.“……다 됐니?”밖에서 들려오는 매니저의 무심한 목소리에 해인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사물함 안에 남겨진 낡은 운동화와 때 묻은 가방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버려두고 가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숨을 뱉으며 탈의실 문을 열었다.“쯧,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결국, 안 듣는구나.”매장을 나서는 해인의 뒷모습을 보며 매니저가 고개를 흔들흔들했다.“저렇게 나가면 열이면 열, 다 석 달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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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요새처럼 솟아오른 석조 외벽은 차갑고 단단했다. 서우는 그 벽에 등을 기댄 채 캐리어 뒤로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뺨의 부기는 더 단단하게 올랐고, 눈가는 마치 검붉은 꽃이 핀 것처럼 피멍이 번져 시야를 압박해 왔다.“……윽.”살짝 숨을 내쉴 때마다 말라붙은 입술 끝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터진 입술 위로 딱딱하게 굳은 피딱지는 입을 벙긋거리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우는 그 통증을 굳이 털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이 선명해질수록, 해인이 자신을 보며 지어 보일 가련함의 눈빛이 더 확실해질 터였다.서우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앉은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갈 곳 잃은 버려진 짐승이었다.드르륵, 드르륵—.그때, 정적을 깨고 거친 바퀴 소리가 땅를 울렸다. 서우의 귀가 예민하게 움찔거렸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했다.오전의 찬란한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일렁이는 원피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결국, 입었네.’터진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렀다. 어제 보였던 그 고고함은 어디 갔을까.결국 저 여자도 형이 하라는 대로, 형이 입으라는 옷을 입고 그 품으로 기어 들어오는 꼴이라니.눈앞에 한 여사의 잔상이 겹쳐졌다.‘여자들의 허영심이란 다 똑같지.’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향해 냉소적인 비난을 던졌다. 하지만 드레스 자락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서우의 미소는 기묘하게 굳어갔다.드르륵, 드르륵.그 화려한 옷차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쾌한 소음. 해인의 손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낡고 때 묻은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나비처럼 우아해 보이던 실루엣이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질수록 짓밟혀 시들어버린 꽃과 같은 흔적들을 드러냈다.구겨진 원피스 밑단,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구두. 그리고 무엇보다 서우의 시선을 잡아챈 건 그녀의 얼굴이었다.“…….”빨갛게 짓물러 있는 눈가와 초점이 흐린 눈동자.그건 평생을 결핍이라는 지옥에서 허우적거린 이들만이 공유하는 특유의 공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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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약 바르게 얼른 세수부터 해.”거실에 발을 들이자 마자, 해인이 그의 팔을 잡아끌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해인이 서우의 팔을 잡아끌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서우는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싫어.”“왜?”“가만히 있어도 아픈데, 물 닿으면 더 아프잖아.”“그게 무슨…, 네가 어린애야? 빨리 가서 씻어.”서우가 부어오른 눈으로 해인을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나 손 떨려서 못 해. 길바닥에서 밤 세우고, 아까 경비 무서워서 힘 다 빠졌단 말이야.”“하아.”기가 막힌다는 듯 해인이 한숨을 내뱉었다가, 뭔가 결심한 듯 다시 서우를 이끌었다.“내가 씻겨줄게?”“어?”예상치 못한 전개에 서우의 부어있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시, 싫어!”하지만 해인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의 팔을 잡아 기어이 욕실 안으로 들여놓았다.“잠깐 있어 봐.”수납장을 연 그녀가 꺼낸 것은 커다란 집게 핀이었다.“그걸로 뭐하려고.”“뭐하긴, 그 앞머리부터 어떻게 치워야 할 거 아냐.”익숙한 손놀림으로 서우의 앞머리를 잡아서 집게핀으로 고정하더니, 하얀 수건을 그의 목에 꼼꼼히 둘러주었다.“이게…… 뭐야.”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서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뭐긴 뭐야, 다 큰 녀석이 세수도 못 해서 해주고 있잖아.”해인이 수도꼭지를 틀어 온도를 맞췄다. 마치 어린아이를 씻기려는 엄마 같은 손길이었다.“따가워도 참아. 안 씻어내면 덧나니까.”쏴아아, 좁은 욕실 안을 가득 채우는 물소리가 묘한 폐쇄감을 만들어냈다. 해인의 손바닥에 고인 미지근한 물이 서우의 얼굴에 닿았다.“……!”서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물이 닿은 상처가 따가워서가 아니었다. 얼굴에 닿는 해인의 손길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매끄러웠기 때문이다.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해인의 손을 응시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손가락 끝은 물기가 닿아 빨갛게 갈라진 흔적들이 선명했다.분명 험하게 굴려진, 고생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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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해인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서우는 그녀가 뺨이라도 때릴 줄 알았지만, 해인의 손은 너무도 부드럽게 서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해인이 서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짐승의 털을 골라주듯 조심스럽고도 단호한 손길이었다. 서우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굳어버렸다.“불쌍하게 안 봐. 내 주제에 누굴 불쌍하게 보겠어.”해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서우의 귓가에 닿았다.“그런데 어떻게 안 아파. 백 번을 맞아도, 천 번을 맞아도 아픈 건 그냥 아픈 거야. 익숙해진다고 해서 상처가 살이 되진 않아. 그냥 곪을 뿐이지.”해인은 서우의 부어오른 눈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에는 동정이 아닌, 같은 지옥을 걸어온 동류만이 보낼 수 있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돼.”서우의 심장 뒷벽이 거세게 흔들렸다. 머리칼을 스치는 해인의 손길이, 어머니의 매질보다 더 아프게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삐딱하게 세워두었던 가시들이 해인의 다정함 앞에서 힘없이 꺾여 나갔다.“안 아프다고…….”하지만 그는 해인의 손길을 쳐내지 못한 채, 오히려 그 따스한 온기에 머리를 더 깊게 묻었다.**집무실의 드넓은 통유리창 너머로 정오의 한강이 번뜩였다.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풍경이었으나, 도윤의 눈동자는 그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데려올 테니, 일단 거기 두렴. 다시는 그쪽으로 못 가게 할 테니, 걱정마.]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한 여사의 목소리는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조금 전 보안팀에서 보고 받은 서우의 멍투성이 얼굴보다 더 잔혹했다.결국 데려 가라는 말도, 그냥 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한 여사와의 통화를 끝내고 말았다.도윤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알고 있었다. 서우가 저렇게 망가진 채 제 집 담벼락에 웅크리고 있는 이유를. 한 여사는 도윤이 완벽해질수록, 그 열등감을 서우의 살점을 뜯어내는 것으로 해소했다.한때는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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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조용히 있을 게, 피우지 마.”담배를 뺏는 과정에서 해인의 손가락 끝이 도윤의 아랫입술에 살짝 스쳤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도윤은 마치 불에 덴 듯 멈춰 섰다.“……윤해인.”낮게 가라앉은 도윤의 목소리가 경고처럼 울렸다. 해인은 뺏은 담배를 등 뒤로 감추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몸에도 안 좋은 거, 그냥 끊어.”해인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다가, 도윤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웃음이 멎었다. 도윤은 나가지도, 다시 앉지도 않은 채 해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도윤이 한 걸음 다가오자 해인은 책상 모서리에 가로막혀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도윤은 해인의 손에서 담배를 뺏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책상 위로 눌러 내렸다.딸깍.해인이 가져온 지포 라이터가 책상 위에 놓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도윤은 해인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네가 뭔데?”낮은 목소리가 해인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오빠?”“내 약혼녀도 안 하는 참견을 네가 왜 해.”도윤은 일부러 더 차가운 단어를 골라 뱉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껏 외면해왔던 감정이 해일처럼 몰아칠 것 같았다.“동생 노릇만 해.”“…….”“강서우한테도 마찬가지야. 누나 노릇만 해.”“무슨 뜻이야?”거리가 좁혀지자, 해인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은은한 비누 향이 도윤의 코끝을 다시 자극했다. 지독하게 매혹적이고, 그래서 더 참을 수 없는 향기.“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낮은 목소리로 짓씹듯 뱉으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해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무구한 표정을 지워버리려는 강압적인 손길에 가까웠다.해인의 보드라운 살결과 가쁜 숨결이 도윤의 손바닥을 간질였다.“……오빠?”해인의 시야가 도윤의 손바닥에 가려졌다. 암흑 속에서 오직 도윤의 체취와 제 뺨을 짓누르는 그의 온기만이 선명해졌다.“너나, 서우나. 둘다 쬐끄만 것들이, 적당히 좀 해.”“뭐, 뭘?”“가장한테 기어오르지 말라고.”“가장?”해인이 그의 손바닥을 치우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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