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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는 남자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41 - チャプター 50

83 チャプター

40화

눈을 떴을 때, 유람선의 미세한 진동이 머릿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해인은 몽롱한 정신으로 제 몸을 살폈다.다리 사이가 묵직하고 나른한 게, 지독하게 질척한 꿈이라도 꾼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 얼굴이 도윤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뀌어 눈앞을 덮쳤던 기억이 파편처럼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얼굴은 다시금 강서우의 얼굴로 바뀌기 시작했다.‘……서우였나? 아니면 오빠였나.’공포와 쾌락이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여전히 하반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걷어내고 거울 앞에 섰다. 하지만 기대 혹은 걱정과 달리, 몸 어디에도 타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없었다.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도윤이 들어왔다.“깼어?”도윤은 지나칠 정도로 갖춰 입은 수트 차림이었다. 어젯밤의 소동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 그는 평소처럼 무심하고도 다정한 얼굴로 해인을 바라봤다.“내 옷…… 왜 이래? 왜 오빠 셔츠를 입고 있어?”해인이 제 몸에 걸쳐진 헐렁한 셔츠를 움켜쥐며 물었다. 기억나지 않는 공백이 무서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도윤은 침대맡에 숙취 해소 음료를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너 어제 술 취해서 토했어. 옷이 엉망이라 어쩔 수 없었어.”“……토했다고? 내가?”“기억 안 나? 사람 진 빼놓더니 잘도 자더라.”도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그 담백한 태도는 해인을 안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되려 비참하게 만들었다.어젯밤 제 몸을 헤집던 그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정말 술기운이 만들어낸 추잡한 망상에 불과했던 걸까.그저 술에 취해 구토나 하는 동생을 수습하느라 고생했을 도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윤의 눈을 피하려 했다.“미안해. 많이 힘들었겠네…….”“됐어. 씻고 나와. 아침 먹어야지.”도윤이 몸을 돌려 나가려던 찰나였다. 그의 빳빳하게 세워진 와이셔츠 깃 너머로, 가려지지 못한 붉은 울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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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602호. 안 와도 상관 없어. 사람들은 늘 이런식으로 날 대하니까.]뚝.전화가 끊겼다. 해인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귓가에는 서우의 낮고 절박한, 그래서 더 잔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쟁쟁하게 맴돌았다.[먹고 버리기에 제격인 거지?]그 말이 낙인이 되어 해인의 전신을 지져댔다. 자신의 기억 속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서우의 일그러진 얼굴. 모든 정황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해인은 미친 듯이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에는 이른 아침의 정적만이 감돌았다.타닥, 타닥.도윤의 커다란 와이셔츠 자락이 복도의 찬 공기에 펄럭였다.마침내 도착한 602호 앞.해인은 숨을 들이마시며 문고리를 잡았다.달칵.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텁텁한 담배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였다.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이 쳐진 침대 머리맡에, 서우가 상체를 드러낸 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엉망이 된 안면과 어깨의 붉은 멍 자국들. 해인은 그 참혹한 상처들을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왔어?”서우가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도윤의 커다란 셔츠만 걸친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해인을 보자, 서우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눈동자에 희미한 자조가 번졌다.“와…… 그 꼴을 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나 확인하려고?”“강서우…… 너, 왜 이래.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해인의 목소리가 젖은 종이처럼 찢어지며 갈라졌다. 서우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비틀어 느릿하게 웃었다.“누구긴. 네 그 잘난 오빠지.”“……뭐?”“내가 그랬거든.”서우가 탁자 위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툭, 진실을 던졌다.“네 잔에 약 탔거든, 내가. 이채영이랑 짰어. 형한테서 널 뺏어보려고.”해인의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을 강타하는 끔찍한 진실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어 올라야 마땅한데, 시야에 박히는 서우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해 화조차 나지 않았다.“왜…… 대체 왜.”“뺏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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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유람선 최상층의 프라이빗 다이닝 룸.최상급 얼그레이의 은은한 향이 감도는 고요한 공간이었지만,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이 회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그의 덜덜 떨리는 손에 들린 태블릿 피씨 화면에는, 새벽 6시를 기점으로 포털 사이트를 도배한 기사들이 쉴 새 없이 갱신되고 있었다.[단독] Y물산 외동딸 이채영, 은밀한 사생활 논란… 다수의 남성과 부적절한 만남?[속보] 재벌가 약혼 앞둔 이채영, 파티 전후로 만난 남자들 실체 충격.평소 파티를 즐기며 가볍게 어울리던 남자들과의 실제 사진에, 언론의 자극적인 추측과 소문을 교묘하게 덧칠한 결과물이었다. 채영이 스스로 뿌리고 다녔던 불씨였기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팩트였고, 권도윤은 그저 그것들이 가장 치명적인 불길로 번지도록 완벽한 타이밍을 맞춰 판을 깐 것뿐이었다.딸의 난잡한 스캔들에 뒷목을 잡고 있는 이 회장은, 자신의 딸이 간밤에 무슨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눈앞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권도윤이 이 사태에 불쾌해할까 봐 두려워할 뿐, 그가 진짜로 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도, 도윤아. 이건 명백한 오해다! 채영이가 파티를 좋아하긴 해도 이렇게 막장으로 놀 애는 절대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잖니! 이건 누군가 악의적으로…….”“회장님.”도윤이 찻잔을 받침에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그럼, 제 동생 강서우와 호텔 방에서 뒹굴었던 것도 그저 악의적으로 부풀려진 소문입니까?”“……뭐, 뭣이?”이 회장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찻잔을 쥐고 있던 그의 앙상한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도윤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운 얼굴로, 너무나도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제가 언제 진실을 묻기라도 했습니까. 하지만 정 파혼의 책임을 묻는 게 억울하시다면…….”도윤이 테이블 위로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밀어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제 동생이라도 내어드릴까요? 원하신다면 Y물산 사위로 강서우를 기꺼이 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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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덜컥.해인은 쫓기듯 602호의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너져 내리듯 숨을 몰아쉬었다.귓가에 맴돌던 서우의 자백을 다시 되씹었다.‘그래, 아무것도 아닌거야.’서우의 말대로 어젯밤의 생생한 감각들은 그저 약물이 만들어낸 지독한 환각일 뿐이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제 몸을 감싸고 있는 도윤의 셔츠를 꽉 틀어쥔 채, 해인은 도망치듯 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객실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그 차림으로 어딜 다녀와.”복도 끝에서 들려온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해인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도윤이 헐렁한 셔츠 차림으로 복도를 서성이는 해인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평소라면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변명부터 늘어놓았을 해인이었지만,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온몸이 박살 난 채 애정을 구걸하던 서우의 처참한 얼굴이었다.“서우, 오빠가 그렇게 때렸어?”해인이 입술을 깨물며 되물었다.“……왜?”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왜 그렇게 팼냐고?어젯밤 지하 창고의 상황을 떠올렸다.서우의 상처는 자신과 무관했지만, 차마 그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진실을 말하는 순간, 해인은 자신이 지하 창고에서 어떤 취급을 당할 뻔했는지, 어떤 추잡한 카메라 앞에 세워졌었는지 전부 알아야만 하니까.해인의 세상에 얼룩을 만드느니, 차라리 자신이 무자비한 사람으로 남는 쪽을 택하는 게 나았다.“…….”도윤의 묵직한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해인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서우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건 맞지만, 결론은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런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때릴 이유가 있었어?”해인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도윤의 심장에 박혔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네가 기억조차 못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널 그 지옥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 안다면, 감히 그런 말이 나올까.“서우도 오빠 동생이잖아. 왜 걔한테는 그렇게 곁을 안 줘? 왜 걔한테는 그렇게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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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거대한 샹들리에가 내뿜는 차가운 빛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눈을 찔렀다. 유람선의 소란스러운 파티장보다, 청운재의 이 정적 흐르는 다이닝 룸이 해인에게는 훨씬 더 숨 막히고 가혹했다.식탁의 상좌에는 권 회장이, 그 옆에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의 세 번째 부인, 한 여사가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그 맞은편에 죄인처럼 나란히 섰다.“앉거라. 시장할 게다.”권 회장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떨어지고서야 해인은 조심스럽게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서우는 피딱지가 앉은 얼굴로 삐딱하게 다리를 꼬았고, 도윤은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는 듯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파혼 소식은 들었다. 도윤이 네가 워낙 단호하게 밀어붙였다니, 내가 더 보탤 말은 없구나.”한 여사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이 도윤을 지나, 커다란 남자 셔츠를 걸친 채 잔뜩 움츠러든 해인에게 닿았다.날카로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한 여사의 속내는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지난번, 서우가 흠씬 두들겨 맞은 얼굴로 비웃듯 흘렸던 말이 사실이었다.피도 눈물도 없는 완벽한 후계자 권도윤의 유일한 역린.그게 바로 저 보잘것없는 계집애, 윤해인이었다.눈치 빠른 한 여사가 이번 Y물산과의 파혼이 누구 때문인지 모를 리 없었다.사실 권 회장에게 ‘기왕 이렇게 된 거, 해인이도 밖으로 돌리지 말고 본가로 들이자’고 은근슬쩍 부추긴 것도 한 여사였다. 가문의 체면을 챙기며 아이를 위하는 척했지만, 진짜 속셈은 달랐다.도윤이 저 여자애한테 완전히 미쳐서 이성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면?그 틈을 파고들어, 아직 권씨 성조차 얻지 못하고 ‘강서우’라는 이름표를 달고 구르는 핏줄을 기어이 ‘권서우’로, 아니 이 청운재의 진짜 주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여사에게 있어 해인은 도윤의 목을 조를 가장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밧줄이었다.“그래도 밖에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할 뻔했길래, 서우 몰골은 저렇고 해인이 넌 옷차림이 그 모양이니. 이제 본가에 들어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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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한 여사는 멍투성이가 된 서우의 얼굴을 서늘한 손끝으로 감싸 쥐었다. 어머니의 애정이라기보다, 흠집 난 제 소유물을 감정하는 듯한 기괴한 손길이었다.“영특한 것.”한 여사의 붉은 입술이 서우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그런데, 누가 내 아들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권도윤은 아닐 테고.”“왜 형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우가 삐딱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한 여사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냉소했다.“뭐, 직접 주먹을 댈 위인도 아니지만. 그랬다 한들 걔는 남들 눈에 띄는 곳엔 절대 상처 안 남기지. 속내가 뱀 같은 놈이니까.”권도윤의 교활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정확히 꿰뚫어 본 대답이었다. 한 여사는 흠집 난 서우의 뺨에서 느릿하게 손을 거두며, 흥미롭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그래. 하지만 그 잘난 권도윤도 이번엔 단단히 감겼어.”한 여사의 붉은 입술이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수많은 남자의 밑바닥 같은 욕망을 딛고 이 청운재의 안주인 자리까지 꿰찬 그녀였다. 사내들이 무언가에 미쳐 이성을 잃기 직전의 얼굴을, 한 여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까 식탁에서 회장님이 그 계집애를 별채로 쫓아내며 처신 운운할 때, 넌 못 봤니? 도윤이 그놈 눈빛 말이야.”“…….”“평온한 척 대답은 꼬박꼬박 잘도 하더라마는, 시선은 시종일관 그 애한테 진득하게 처박혀 있었어. 제 품에서 벗어날까 봐 안달이 나서, 턱 끝에 핏대가 선 줄도 모르고 말이야. 이채영을 단숨에 내친 걸 보면, 그 계집애한테 단단히 미친 게지.”한 여사의 눈동자에 독사가 똬리를 튼 듯한 독기가 스쳤다. 서우는 제 뺨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내며 속으로 짓씹었다.‘이걸 어쩌나...... 엄마 아들도 감겼어. 그것도 X같이…….’서우는 건조하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한 여사를 마주 보았다.“엄마. 그러니까 걔한테 투자 좀 해.”“……뭐? 내가 왜?”한 여사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서우는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앉으며 툭, 미끼를 던졌다.“고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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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우가 등을 돌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굳게 닫힌 문에 가만히 이마를 기댔다.‘……강서우 말이 맞아.’언제까지 도윤의 그늘에 숨어 잔뜩 겁먹은 채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더 이상 그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며, 오빠에게 민폐만 끼치는 짐덩이로 남는 것은 끔찍하게 싫었다.해인의 시선이 방 한구석, 어젯밤 꺼내어 둔 낡은 스케치북에 가닿았다.‘도윤 오빠 옆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적어도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괜찮은…… 동생이 되고 싶어.’누군가 내쳐도 기꺼이 제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해인은 스케치북의 거친 표지를 가만히 쓸어내리던 손을 거두어, 괜스레 제 뺨을 꾹 문질러 보았다. 마른 손바닥과 마찰한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문득 엉망으로 터진 얼굴을 하고 도윤의 집앞에 나타났던 강서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우리 어머니 작품이지.]친아들의 뺨도 주저 없이 후려쳐 핏발을 세우게 만드는 여자.두려움에 목 안쪽이 바짝 말라갔지만, 해인은 문지르던 뺨에서 손을 떼어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뺨 한 대쯤은, 기꺼이 맞아주지 뭐.’해인은 느리지만 단호한 손길로 옷장 문을 열고 외출복을 꺼내 들었다....별채를 나서자 서늘한 아침 공기가 훅 끼쳐왔다.잘 가꾸어진 청운재의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해인은 속으로 실없는 헛웃음을 삼켰다.‘괜히 긴장되네. 아까 서우가 내밀었던 그 커피라도 눈 딱 감고 마셔둘 걸 그랬나.’그의 타액이 묻었다는 불쾌감보다, 당장 목을 축일 씁쓸한 카페인 한 모금이 아쉬워질 만큼 속이 빳빳하게 조여들고 있었다.어느새 본채의 현관을 지나, 1층 안쪽에 자리한 응접실의 문턱이 해인의 눈앞에 서늘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해인은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응접실의 문고리를 당겼다.달칵.무거운 흑단목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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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운전석에 올라탄 서우는 시동을 거는 대신, 핸들을 잡은 채 가만히 앞만 응시했다. 차 안의 공기는 응접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압박감으로 해인을 옥죄어 왔다.해인은 제 무릎 위에 놓인 블랙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우를 바라보았다.핸들을 쥔 서우의 옆얼굴.여전히 가시지 않은 뺨의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응접실에서 피부로 느꼈던 한 여사의 서늘하고도 폭력적인 우월감.친아들의 뺨을 주저 없이 내리치고, 타인을 물건 취급하며 조롱하던 그 붉은 입술.저런 여자 밑에서, 이 숨 막히는 청운재에서 평생을 살아왔을 강서우.왜 그가 늘 벼랑 끝에 선 짐승처럼 비틀려 있었는지, 왜 그토록 오만함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는지. 해인은 그 기저에 깔린 지독한 결핍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과 다르지 않은, 아니 어쩌면 더 깊고 어두운 바닥을 헤매었을 거라는 서늘한 동질감.“……너, 힘들었겠다.”적막을 깨고 흘러나온 해인의 작은 읊조림에, 서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그동안 계속…… 저 안에서.”서우의 눈동자가 일순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가장 끔찍한 모멸감을 겪고 독사과를 삼킨 주제에. 제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으면서 도리어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저 맑고 처연한 시선.서우는 명치끝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그 알량하고 따뜻한 동질감이 미치도록 달았으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그는 애써 흔들림을 지워내며, 서둘러 굳은 목소리를 짜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온, 한층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서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핏대가 서도록 힘을 주며, 해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어머니가 뱉은 그 ‘재투성이’ 같은 단어에 꽂혀있지 말라고.”“……무슨 뜻이야.”“내가 널 신데렐라라고 부를 땐, 다른 뜻이니까.”“…….”“그 동화, 결국엔 그 재투성이 소녀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진짜 공주님이 되는 걸로 끝나잖아.”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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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서우가 청담동 명품거리 쪽으로 익숙하게 핸들을 꺾으려던 찰나였다.“……저기.”내내 창밖만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해인이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쪽 말고, 인사동으로 가줄래?”“인사동? 거기서 옷을 사겠다고?”“아니. 화…방, 가려고.”서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한 여사의 그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그러고 나면 보통은 옷부터 사러 가야하는 거 아냐?’그런데 고작 물감 쪼가리라니.하지만 서우는 더 묻지 않고 묵묵히 차선을 변경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으르렁거리던 스포츠카가 인사동의 좁고 고즈넉한 뒷골목에 멈춰 섰다.서우의 차와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풍경이었다.서우가 창밖의 대형 화방 간판을 힐끗거리며 미심쩍은 듯 물었다.“여기 맞아? 난 이런 데는 와본 적이 없어서.”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해인의 입술이 일순간 스르르 풀리며,“응, 맞아!”거짓말처럼 환한 대답이 터져 나왔다.달칵.차 문을 밀고 내린 해인의 걸음이 낡은 화방의 유리문 앞에서 우뚝 멈췄다.조심스럽게 문을 밀자, 화방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짙은 테레빈유.먼지 섞인 종이 향. 거친 캔버스의 체취.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이상하게……숨이 트이는 느낌이야.’해인의 메말랐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물감이 빼곡하게 쌓인 진열대.손끝을 스치는 차가운 금속 튜브들.전문가용 붓의 빳빳한 탄력.손끝에 닿는 모든 감각이 살아났다.돈을 위해서 일했던 지루함, 빚에 허덕였던 모멸감, 숨죽이던 그 모든 시간들이 일순간 하얗게 증발했다.“…….”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서우의 시선이 오롯이 해인에게 꽂혔다.‘……웃네.’서우의 턱관절이 꾹 맞물렸다.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어머니의 적선 앞에서는 파리하게 질려 떨던 주제에.형의 그 숨 막히는 새장 속에서는 시체처럼 웅크리고 있던 주제에.고작 이 낡은 화방 구석에서, 수백 개의 물감 통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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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별채로 돌아온 해인은 화방 봉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외출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흐트러진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었다.‘오빠도 왔으니, 저녁 준비하겠네.’가만히 앉아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건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한 여사의 눈치도 눈치였지만, 얹혀사는 식객으로서 뭐라도 밥값을 해야 마음이 편했다.해인은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어스름이 깔린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향하자, 주방 쪽에서 정갈한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해인이 주방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식사 준비, 제가 거들게요.”순간, 분주하던 도우미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정 집사를 비롯한 모두의 당황한 시선이 일제히 해인에게 쏠렸다.그 어색한 정적 사이로, 해인의 눈에 조리대 위 선홍빛 명란젓이 들어왔다.‘아, 저거 오빠가 좋아하는 거다!’해인은 자신있게 명란이 놓여진 조리대 앞으로 갔다.“이거 제가 손질 할게요.”해인은 찬장에서 작은 종지를 꺼내, 잘 익은 명란 두 쪽을 올렸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고춧가루 통을 집어 들었다.“어머, 아가씨! 그건 안 돼요!”주방을 총괄하는 도우미, 정 집사가 기겁하며 해인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고춧가루라뇨. 무조건 청주에 씻어서 들기름만 아주 살짝, 하얗게 내야 한다니까요.”“……오빠, 원래 이렇게 먹는 거 좋아했어요. 파 다진 거랑 고춧가루 넣어서.”“그게 언제적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세요. 제가 모신 지 10여년 동안 한번도 이렇게 드신 적 없어요. 바깥 일로 위도 예민하신데, 이렇게 올렸다가 저희만 혼나요. 이리 주세요.”정 집사가 종지를 뺏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해인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집스럽게 고춧가루 통을 털어 명란 위에 붉은 꽃을 피워냈다.“제가 더 잘 알아요.”해인의 단호한 목소리에 정 집사는 당황한 듯 입을 벌렸지만, 해인은 이미 쟁반을 들고 다이닝 룸으로 향하고 있었다....오직 이문과 계산만이 오가는 차가운 대화.바로 그 순간, 다이닝 룸 입구 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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