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21 - Chapter 30

76 Chapters

21화

엘런이 의도적으로 흘리고 간 교묘한 말은 독가루처럼 즉시 아르센의 궁 안으로 퍼져나갔다.[“방금 들었어? 황후 폐하와 서연합의 왕자가 아침부터 후원 으슥한 곳에서 둘만…….”][“에다의 손가락을 만지는 걸 보고 황후께서 무섭게 화를 내셨다던데.”][“그럼 그게 질투하신 거란 말이야? 두 분이 대체 무슨 사이길래…….”]궁은 생각보다 좁았고, 하인들의 입은 생각보다 깃털처럼 가벼웠다.중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옆 병사에게, 그 병사가 다시 시종에게. 부엌의 아궁이 앞과 빨래터의 물방울 사이로, ‘황후’와 ‘타국의 왕자’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질척하게 얽혀 굴러다녔다.그리고 결국, 그 가장 더러운 흙탕물은 절대 닿지 말아야 할 곳으로 흘러들고 말았다.정오를 조금 앞둔 시각,연무장으로 향하기 위해 황제전 문을 나서려던 레온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래도 서연합 전하가 워낙 미남이시잖습니까. 게다가 황제 폐하와는 혼인 직후부터 사이가…… 아무리 고고한 황후 마마라도, 그렇게 다정하게 들이대면 눈길이 안 갈 수가 있겠냐는…….”[콰아득!]병사들의 속삭임이 끊긴 것은, 황제전의 두꺼운 문고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기 때문이었다.레온의 억센 악력, 아니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온 드래곤의 마력에 쇳덩이가 엿가락처럼 짓눌려 있었다.“지, 지금…… 폐, 폐하!”사색이 된 병사 둘이 비명을 삼키며 대리석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지금…… 내 앞에서, 무슨 더러운 주둥이를 놀렸지?”레온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지만, 주변의 공기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흉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병사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횡설수설 내뱉은 조각난 단어들.새벽. 후원. 좁은 회랑. 그리고, 붉어진 얼굴과 질투.순간, 레온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형형하게 타올랐다.아침에 엘런이 보냈던 얄팍한 서신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꽃에는 늘…… 탐욕스러운 벌과 나비가 모이는 법이지요.]레온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내가 우스워 보이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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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카시안의 칼끝은 닿지도 않았지만, 압도적인 살기가 레온의 피부를 찢어발길 듯 몰아쳤다.레온은 목검의 손잡이를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억세게 틀어쥐었다.‘지금 내 몸뚱이를 비웃는 저 자를 내 손으로 찢어발기지 못한다면…….’시야 한 켠에 서 있는 로제의 은빛 실루엣이 보였다.‘나의 로제를…… 영영 빼앗기고 말 것이다.’그 소름 끼치는 공포와 소유욕이 레온의 핏속에서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그는 짐승처럼 핏발 선 눈으로 카시안을 노려보았다.“시작하지.”레온이 발을 굴렀다.[휘익—!]공기를 가르는 거친 파공음.그러나 궤도는 서툴고 조잡했다.목검은 카시안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한 채 헛돌았다.카시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다시.”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베기 횟수가 늘어날수록 레온의 숨은 흉포하게 일그러졌고, 근육은 비명을 질렀다.‘이 처참한 꼴을 로제가 보고 있다.’그 수치심이 죽기보다 두려웠으나, 로제를 빼앗긴다는 공포가 그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레온은 몇 번이고 흙바닥에 처박혔다가, 피가 맺힌 입술을 깨물며 다시 일어났다.카시안은 검을 휘두르지도 않은 채, 그저 미세한 보법만으로 레온의 모든 공격을 조롱하듯 피하며 그의 진을 뺐다.회랑 위에서 로제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그래. 그렇게 다시 일어나서 덤비세요. 당신이 여기서 끝까지 짐승처럼 버텨준다면…… 나는 그 시간동안 나의 왕국을 설계해 볼 테니.’마침내, 레온이 한계에 다달아 비틀거리며 검을 내리쳤을 때였다.[퍽!]카시안이 손바닥으로 목검의 옆면을 가볍게 쳐냈다.그 반동만으로 레온은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팔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오늘은 여기까지.”카시안이 흑강 검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예상대로, 구역질이 날 만큼 형편없는 기초였습니다.”회랑이 숨죽인 채 술렁였다.“하지만…… 끝까지 바닥을 구르면서도 도망치지 않은 독기만은 인정해 드리죠. 진짜 나약한 군주라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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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촛불의 불빛이 밖으로 쏟아지자, 복도의 어둠을 뚫고 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들어섰다.“……로제.”레온이었다.그는 목욕을 이제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긴 채, 얇은 검은색 실크 가운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단정하게 갈아입은 옷차림이 무색할 만큼, 그의 상태는 지독하게 위태로워 보였다.낮 동안 카시안의 발밑에서 겪어야 했던 처참한 굴욕, 엘런이 남기고 간 더러운 소문이 준 분노.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오직 로제를 향한 기형적인 갈망.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원초적인 욕정이 그의 이성을 흉포하게 갉아먹고 있었다.“……안고 싶어.”목소리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가운 사이로 드러난 그의 가슴팍은 고통스러운 듯 격하게 들썩였고, 로제만을 맹목적으로 쫓았다.그는 로제의 침대 발치에 무너지듯 엎어지며,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평소의 고결한 황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처절하고 비굴한 매달림이었다.“안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레온이 얇은 실크 슈미즈 아래로 드러난 로제의 하얀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비누 향이 섞인 뜨거운 숨결이 살결에 닿자, 로제는 나른한 표정으로 제 발밑에 엎드린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나신 위로, 감출 수 없는 열기가 훅 끼쳐왔다.“많이 애가 타셨나 보군요, 폐하.”로제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레온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다정한 손길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달아오른 사내를 완벽하게 쥐고 흔드는 지배자의 여유가 가득했다.[확!]레온이 얇은 실크 슈미즈만을 걸친 로제를 침대 위로 거칠게 밀어붙였다.그의 거칠고 뜨거운 손이 그녀의 맨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그는 로제의 하얀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혀를 내밀어 그녀의 끈적한 체온을 탐닉하려 들었다.하지만,[탁!]로제가 레온의 두 손목을 단숨에 낚아채 고정했다.하루 종일 한계까지 훈련을 받느라 근육이 찢어질 듯 지쳐 있던 레온은, 로제의 가벼운 힘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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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궁정의 긴 복도를 걸으며, 카시안은 손끝에 남아 있는 묵직한 감각을 곱씹었다.오늘, 아르센의 황제는 끝까지 제 발밑에서 버텼다.그 꼴이 가소로우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뒷맛을 남겼다.‘부서지는 소리가 꽤 경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질기군.’그는 장갑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자신에게 있어 타국의 황제를 짓밟는 건 그저 가벼운 유희였다.그 유희의 끝에, 회랑에 선 황후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상상하는 것만이 기대한 낙이었다.‘부디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매일같이 나와서 지켜보시오.’그런데 유유히 걷던 카시안의 발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서 못이 박힌 듯 멈췄다.“로셀린 황후 폐하에 관한 소문 들었어?”모퉁이를 돌던 아르센 경비병 둘이 나누는, 지극히 낮고 은밀한 속삭임이 그의 예민한 청각을 긁었다.멈춰선 카시안은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기척을 지웠다.“오늘 아침에 서연합의 왕자와 후원에서 단둘이 밀회를 가졌다며?”“시녀를 사이에 두고 다퉜다던데…… 그런데 고작 시녀 하나에 폐하께서 질투를 하셨다나…….”[딱.]허공을 가르던 카시안의 손가락이 문설주를 튕겼다.아주 작은 파열음이었지만, 병사 둘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그곳엔, 붉은 눈동자를 파충류처럼 세로로 좁힌 포식자, 카시안이 서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지?”목소리는 나직했으나, 바닥을 기어오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폐, 폐하……! 저, 저희는 그냥 하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이야기했습니다!”“그러니까 그 소문의 내용이 정확하게 뭐지?”경비병들은 눈을 꼭 감은 채 파들파들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로셀린 황후 폐하와 엘런 전하께서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 엘런 전하가 시녀에게 관심을 가지자 황후 폐하께서 질투로 다투셨다는…….”카시안의 입매가 싸늘하게 비틀렸다.그의 머릿속에서 오늘 훈련장에서 보았던 풍경이 산산이 부서졌다.회랑 위, 은빛 실루엣.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굴욕을 지켜보며 오만하게 서 있던 로제의 그 고결한 시선.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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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다음 날 아침. 드라켄 황제의 임시 집무실.카시안은 나른한 얼굴로 서류를 넘기며,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은 제 그림자이자 황실 직속 암살자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래. 어젯밤, 아르센의 고고한 황후께서 서연합의 쥐새끼(엘런)를 몰래 만나러 가기라도 하던가.”“……그것이.”암살자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렸다.“황후께서는 밤새 침소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르센의 황제가 어젯밤 황후전에 들었고, 오늘 동이 틀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뭐?”“밤새 황후전 밖으로…… 두 분의 짙은 합궁의 기척이 새어 나왔다 하옵니다.”[파직.]카시안의 손에 들려 있던 값비싼 만년필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새까만 잉크가 피처럼 서류 위로 번져나갔다.‘합궁?’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간 파충류처럼 흉포하게 좁아졌다.합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국혼을 치른 지 고작 이틀째 되던 날 밤에,황후전을 찾았던 레온이 뺨을 맞고 쫓겨나다시피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미 카시안도 잘 알고 있었다.그토록 철저하게 어긋나 있던 부부였다.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밤이 새도록 짙은 정사를 나누었다고?사랑이라도 싹텄을 리는 만무했다.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설마.’카시안의 뇌리에 어제 연무장 회랑 위에서 레온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로제의 만족스런 눈빛이 스쳤다.‘끝까지 버텨낸 사냥개에게 내리는…… 황후의 달콤한 보상이라도 된단 말인가?’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속에서 끈적한 용암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자신이 어제 그 반쪽짜리 황제를 피투성이로 짓밟아 놓은 것이, 레온에게 절망과 수치심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두 사람의 육체를 이어주는 완벽한 명분이 되어버렸다.‘내가 그 하찮은 개새끼에게 목줄을 채운 게 아니라, 되려 제 아내를 맘껏 안을 수 있는 핑곗거리를 쥐여준 꼴이잖아.’자신이 타국의 부부 금실을 달아오르게 만든 치욕스러운 조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만당한 그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황후전의 깊숙한 서재는 한낮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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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로제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어제 내가 그놈을 진흙탕에 처박아 준 덕분에, 부부 금실이 아주 애틋해지셨나 봅니다.”카시안의 시선이 로제의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깃이 높은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가려지지 못한 붉은 잇자국 하나가 카시안의 시야에 박혀들었다.[우득.]카시안이 턱을 강하게 씹었다.“하지만 두 남자 중에 폐하께서 더 거슬려 하시는 건 서연합의 사내겠지요.”로제는 카시안의 노골적인 살기 앞에서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하지만 레온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덜미가 쭈뼛 서는 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폐하께선 제 주변을 맴도는 그 ‘저급한 사내’가 거슬리시고, 저는 제 사람을 건드리는 ‘비열한 사내’가 거슬립니다.”“그래서.”카시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나더러 그 쥐새끼를 치워달라?”“아니요. 치우는 건 제가 합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모른 척만 해 주시면 됩니다.”로제의 당돌한 제안.카시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날 국제적인 방패막이로 쓸테니 입닫고 있어라?’대담하고, 영리하고… 욕심이 날 만큼 매력적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치밀한 계산이 결국 그 나약한 남편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그의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만들었다.“그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게…… 고작 당신 몸에 그딴 더러운 자국이나 남기는 무능한 황제입니까?”카시안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비틀림이 섞여 나왔다.“네. 저는 아르센의 황제, 그분의 등을 지킬 것입니다.”[쿵.]카시안은 심장 어딘가가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저 단호함, 저 헌신.만약 저 여자가 내 등 뒤를 지키겠다고 말했다면.이것은 명백한 질투였다.레온이 가진 것을 자신은 갖지 못했다는 박탈감.카시안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로제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좋소.”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 제안 받아들이지. 엘런을 치우는 걸 기꺼이 묵인하겠소. 단.”카시안은 손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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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마침내, 편지에 적혀 있던 ‘이틀 뒤 자정’이 다가왔다.밤공기에는 축축한 습기가 배어 있었다.엘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다듬었다. 최고급 향수를 뿌린 손목에서는 달콤하고 어지러운 향기가 났다. ‘이틀이나 날 애태우며 기다리게 하다니.’그는 품 안에서 빳빳한 편지를 꺼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로제의 단정한 필체가 적힌, 인장 없는 편지. ‘비밀스러운 밀회를 위해 황후의 인장까지 생략하다니. 역시 영리해.’그는 그 결함이 곧 밀회의 증거라 굳게 믿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은밀한 관계일수록 꼬리가 밟힐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법이니까. “기다려요, 로제. 당신의 그 도도하고 서늘한 가면을 내가 어떻게 벗겨줄지….”..밤의 정적을 깨고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엘런은 드라켄 사절단이 머무는 북쪽 별관,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후정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주변은 삭막했다.로맨틱한 조명 대신, 드라켄 군 특유의 서늘한 경계등만이 듬성듬성 켜져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그 삭막한 분위기조차 자신의 승리로 해석했다.‘역시 대담해.’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아르센의 그 어떤 귀족도, 심지어 황제인 레온조차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카시안의 치외법권 구역. 로제가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 멍청한 남편에겐 더욱.’엘런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그 미친개 같은 카시안이 머무는 코앞에서, 그가 눈독 들이던 황후와 밀회를 즐긴다?이것만큼 수컷으로서 짜릿한 정복감은 없었다.“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로제.”엘런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검은 실루엣을 향해, 가장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많이 기다렸….”그러나 달빛이 구름을 벗어난 순간. 엘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그곳에 서 있는 것은 은발의 아름다운 황후가 아니었다.밤보다 더 어두운 흑색 제복을 입고, 서늘한 흑강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는 거대한 사내.드라켄의 황제, 카시안이었다.순간적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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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로제는 창가에 서서 서늘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 뒤의 묵직한 인기척에 그녀가 돌아보았지만, 얼굴에 놀란 기색은 없었다. “정리되었습니까, 폐하.”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마치 맡겨둔 사냥감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카시안은 그 뻔뻔함에 오히려 헛웃음이 났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로제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황후께서 그려놓은 그림대로. 쥐새끼는 아주 완벽하게 내 우리 안에 가뒀습니다.”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로제를 덮쳤다. 로제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하셨습니다. 서연합의 사절단은 곧 미친 듯이 항의하러 오겠지요.”“항의라.”“그들은 ‘황자 억류’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내부의 후계 균열이 심하니, 오히려 엘런 전하를 버리는 패로 쓸 명분이 생긴 셈이지요.”로제는 담담하게 다음 수를 읊었다. 카시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탁자 위에 놓인 로제의 하얀 손등을 굳은살 박인 검지로 톡, 건드렸다.“그래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나를 쥐덫의 미끼로 쓴 소감이 어떻습니까?” 로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미끼라니요. 폐하께서는 증명이셨습니다.”“증명?”“아르센의 황후가 허위 문서를 보낼 리 없다는 절대적인 증명. 그걸 보증해 줄 유일한 권위이자, 감히 제 구역을 넘본 엘런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 날카로운 검이셨으니까요.”로제의 대답에 카시안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자신을 검으로 비유하며 입맛대로 치켜세우는 솜씨라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늘 밤 절실히 느낀 건 딱 하나입니다.” 카시안이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끈적하게 속삭였다.“로셀린 황후를 동맹으로 두어도 만만치 않고…… 적국으로 두면 미치도록 골치 아프겠다는 것.” 뜨거운 숨결이 귓불을 스쳤다.로제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등 뒤의 탁자에 가로막혀 도망칠 곳이 없었다.“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로제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서로가 서로에게…… 꽤 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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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의 새벽은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성문이 열리자마자 서연합의 깃발을 단 마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하지만 마차의 행선지는 황궁이 아니었다.화려한 의전과 환영 인파가 기다리는 대로를 지나쳐, 마차는 귀족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 뒤편의 은밀한 골목으로 향했다.목적지는 벨라리스 공작가의 비밀 별채.겉으로는 평범한 상단 건물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서연합과 아르센을 오가는 검은돈과 정보가 집결하는 곳이었다.마차가 멈추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가 내렸다.서연합 제1왕자, 벨모어 드 펠릭스였다.“전하, 황궁에서 사절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만….”수행원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기다리게 둬.”벨모어는 장갑을 고쳐 끼며 차갑게 일축했다.“손님을 맞을 준비도 안 된 집에 들어가서 웃음 흘릴 생각 없다. 집안의 오물부터 치우는 게 순서지.”그의 눈빛은 이미 ‘오물’인 동생, 엘런을 향한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망설임 없이 별채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갔다.별채의 접견실은 서늘했다.벨모어는 도착하자마자 탁자 위에 놓인 비밀 문서부터 집어 들었다.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하지만 내용은 적나라했다.엘런이 귀족 부인들에게 보낸 음탕한 편지들, 군자금 횡령 내역, 그리고 사적인 추문들.아르센의 황후가 보낸, 친절하고도 잔인한 선물이었다.벨모어는 장갑 낀 손으로 종이를 넘기며 잠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어지간히도 자기 관리를 못 하는군.”경멸조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톤이었다.그에게 엘런의 타락은 가족의 수치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국가적 비효율에 지나지 않았다.그가 종이 끝을 탁, 하고 정리하는 순간. 정해진 박자의 노크가 들렸다.“들어오라.”문이 열리고 벨라리스가 들어왔다.엘런 앞에서의 여유만만한 포식자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짙은 남색 드레스에 단정히 올린 머리.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는 모습은 마치 오롯이 이 남자에게 복종하기 위해 준비된 존재 같았다.“전하… 오셨군요.”벨라리스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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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벨라리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요동쳤다.그 떨림 속에는 야망과 공포, 그리고 이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그녀는 정성스럽게 마지막까지 그의 욕망을 삼켜내고는, 입가에 번진 타액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의 허벅지에 뺨을 기대었다. 애원하듯 올려다보는 눈빛이었다.“…명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하의 것이었으니까요.”벨모어는 비로소 만족한 듯,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좋아.”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바지 버클을 단정하게 채웠다. 방금까지 뜨거운 쾌락을 배설한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태도였다.그는 창밖, 멀리 보이는 아르센 황궁의 첨탑을 서늘하게 응시했다.“황후가 내게 그럴듯한 선물을 보냈으니… 나도 답례는 해야겠지.”기대와 경계가 섞인 벨라리스의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봤다.“답례라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무력을 쓰실 겁니까?”“아니.”벨모어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황후의 마음을 지지하는 기반. 그곳부터 무너뜨린다.”그는 나직하게 덧붙였다.“무력이나 피는 하수들이나 쓰는 거지. 고귀한 여자의 세계는… 믿었던 관계가 부서질 때 가장 치명적으로 흔들리는 법이니까.”벨라리스는 숨을 삼켰다.그 말은 곧 자신의 새로운 임무였다.“황후의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라. 시녀, 호위, 그리고 그 남편인 황제까지.”벨모어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충성, 비밀, 약점… 모조리 파헤쳐 와. 그들이 서로를 철저하게 의심하게 만들어라.”벨라리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이것은 생존이자, 벨모어에게 완벽하게 인정받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었다.“받들겠습니다, 전하.”벨모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그럼 시작해라. 그 대단한 아르센의 황후가 어떤 여자인지… 이제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갈 테니.”그가 방을 나가자, 접견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다음 날 아침.정오에 가까워진 황실 훈련장의 바닥은 자비 없는 태양열로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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