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76 Chapters

11화

로제의 스텝이 찰나 엉킬 뻔했다.“더듬다니요. 그건 그저….”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이내 다시 물었다.“정말 자연스러워 보였습니까?”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랬다면 다행이네요. 그걸 본 저의 폐하가 질투해 주기를 바랐거든요.”카시안의 미간이 좁혀지며, 로제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수컷에게 질투는 사랑이 아니라 살의를 불러일으키니까.”그녀는 지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아,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카시안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듯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그 말은 남편의 손에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그건….”로제가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카시안이 그녀를 높게 들어 올리며 턴을 돌았다.엘런의 춤이 기교 섞인 유희였다면, 카시안의 춤은 상대를 퇴로 없이 옭아매는 전술 같았다.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고, 숨 막히게 남성적이었다.다시 그의 품으로 끌려오는 순간, 카시안은 조용히 덧붙였다.“그럼, 제가 죽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농담이라기엔 지나치게 서늘하고, 진담이라기엔 묘하게 달콤한 제안.로제는 애써 태연하게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오해하셨어요. 전 레온 폐하께서 조금 더 강해지길 바라는 것뿐이에요.”카시안의 눈매가 굳어졌다가, 이내 기이한 흥미로 번뜩였다.“그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동맹국이 강해져야 드라켄도 편안할 테니까요.”건조한 핑계였지만, 로제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했네요. 그럼 이곳에 머무는 동안….”로제는 쥐고 있던 그의 손목을 슬쩍 당기며 은밀하게 속삭였다.“레온 폐하의 스승이 되어 주시겠어요?”카시안의 압도적인 무력.그것이라면 레온의 몸속에 잠든 드래곤의 마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완벽하게 폭주시킬 수 있을 것이다.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입술로, 마침내 은회색 눈동자로 옮겨갔다.“스승이라….”그가 로제의 허리를 숨 막힐 듯 옥죄며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카시안의 눈동자는 계산을 끝낸 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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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연회장 마지막 곡이 잦아들자, 시종들이 천천히 촛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황족과 귀족들이 하나둘씩 퇴장하는 소란 속에서, 벨라리스는 홀로 걸음을 멈췄다.‘하아, 다들 너무 평화로워.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비단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내쉰 숨에는 향수와 술 냄새 외에 싸늘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춤과 웃음은 이미 잔향처럼 희미해졌고, 연회장은 금빛 파편만 남긴 채 고요해지고 있었다.과일과 향신료가 뒤섞인 공기를 뚫고 나오자, 머릿속이 선명해졌다.‘좀 이르긴 하지만 역시, 드라켄쪽을 건드려보는 게 좋겠어. 지난 전쟁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아쉬울 테니까.’드라켄과 동북제국의 전쟁.바다를 사이에 둔 만큼 모두가 장기전이라고 확신했다.그리고 탄식 가운데 남몰래 미소짓는 이들이 있었다.전쟁은 곧 거래였고, 거래는 곧 이윤이었으니까.그리고 벨라리스 가도 그중 하나였다.군량, 무기, 말과 마차, 치료용 약초와 붕대, 부러진 칼을 대신할 새 칼까지.전쟁이 길어질수록 창고는 텅 비고, 금고는 차올라야 했다.하지만 그 전쟁은…‘카시안 폐하께서 너무 잘 싸우셨지.’그는 정면 해전을 피한 채, 동북제국 보급선을 단숨에 끊어 전쟁을 끝냈다.병사가 아닌 식량을 무너뜨려 승리를 가져오는 방식.전쟁이 아니라 정리에 가까웠다.결과적으로 길어야 했던 전쟁은, 손에 꼽을 정도의 회전 끝에 끝나버렸다.벨라리스의 창고에 남은 것은 처분 시기를 놓친 군량과 무기들, 그리고 조금 덜 뜨거운 금 몇 주머니뿐이었다.“전쟁은 군주의 욕망이 아니라…”벨라리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장사꾼의 계산으로 움직이는 법인데.”아무도 없는 복도에 그녀의 냉소적인 웃음이 흘렀다.벨라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전쟁은 언젠가 다시 온다!’그건 역사가 증명해온 사실이었다.중요한 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얼마 동안 이어지느냐다.“이번엔… 더 길어야 해.”황제와 황후가 각각 시종들에게 이끌려 복도의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벨라리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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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래서 지금 내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하려고 온 건가?”벨라리스는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저는 단지, 그 전쟁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폐하께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어서요. 어때요? 아직 무기는 충분하답니다.”“그건 당신의 계산이고.”카시안은 단호하게 잘랐다.“내게 전쟁은, 실패한 정치의 결과물일 뿐이야. 진정한 승리는 전쟁을 피하는 자지. 그럼 희생도 없고 질 일도 없으니까.”촛불이 사르륵 흔들렸다.벨라리스는 그를 향해 몸을 더 기울였다.그림자가 탁자 위로 길게 번졌다.“폐하, 전쟁은 언젠가 다시 옵니다. 그건 역사입니다. 다만, 더 오래 끄느냐 아니면 짧고 단단하게 끝나느냐의 차이만 존재하죠. 그러니 꼭 지금 쓰지 않더라도 항상 준비는 해놓으셔야 해요.”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카시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당신이 원하는 건 후자일 리 없고.”“후자는… 재미가 없죠.”달콤한 미소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게다가 폐하께서 전쟁을 스무 날 만에 끝내시는 바람에… 제가 떠안은 빚이 좀 많거든요.”카시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남의 빚 갚아주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이만 일어나지.”벨라리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제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할겁니다.”자리에서 일어난 벨라리스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벨라리스.”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울렸다.“네. 폐하?”“혹시 아르센의 황후 자리에 관심이 있나?”그녀는 문에 손을 얹은 채 부드럽게 웃었다.“제가 있다고 하면 폐하의 생각이 바뀌실건가요?”그녀의 음성에 맞춰 촛불이 흔들렸다.“그렇다면 대답을 고려해보죠.”그녀는 그 말만 남겨두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복도는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등불 하나하나가 긴 숨을 토하는 듯 미약하게 흔들렸고, 그 긴 그림자 사이로 벨라리스의 뒷모습이 조용히 미끄러졌다.막 문을 닫은 손끝에는 아직 차가운 열기가 남아 있었다.카시안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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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같은 시각, 서연합 왕자 엘런의 임시 거처.궁의 고요함과는 대조적으로, 굳게 닫힌 침실 안에서는 살갗이 거칠게 부딪히는 마찰음과 노골적인 교성이 질척하게 얽혀들고 있었다.[퍼억, 퍽-!]“하아, 아앗! 전하, 깊, 너무 깊…… 읏!”자비 없이 처올려지는 난폭한 허리짓에 벨라리스의 몸이 시트 위로 속절없이 밀려 올라갔다.정돈되지 않은 수컷의 체취와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침대 위.엘런은 제 아래서 파들거리는 벨라리스의 은발을 거칠게 휘어잡고 뒤로 바짝 당겼다.“누가 입 함부로 털라고 했지? 벌리라면 벌리고, 쑤셔 박아주면 헐떡거리기나 해.”엘런의 크고 단단한 손이 벨라리스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큭…… 하아, 전, 하…… 숨이…….”숨통이 조여오는 생리적인 공포와 강압적인 삽입이 주는 쾌감이 뒤섞여 벨라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엘런은 산소가 부족해 파닥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희열에 찬 가학적인 미소였다.“이렇게 짐승처럼 박히면서 질질 흘려대는 주제에. 밖에서는 고상한 귀족 영애 행세라니, 천박하기 짝이 없군.”“하앙, 아앗! 네, 저는 천박한…… 흣, 여자죠. 그래서 제 안이, 흐으…… 맘에 드시나요?”모욕적인 언사와 폭력적인 행위에도 벨라리스는 오히려 환희에 찬 고양이처럼 야릇하게 눈을 가늘게 접었다.그녀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제 목을 쥔 엘런의 손목을 핥아 올리며, 아래를 더 꽉 조여 물었다.순간 엘런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의 허리가 한층 더 흉포하게 박아 들어왔다.“씹, 하아… 좀 더 조여봐. 창부처럼 구는 건 좋은데…….”그가 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 벨라리스의 뺨을 툭툭 쳐내렸다.“넌 너무 쉬워. 아무리 짓밟고 쑤셔도 다 받아먹잖아. 내 밑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는 걸 보는 게 진짜 유희인데 말이야. 재미없게.”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벨라리스의 입술 사이로 뱀 같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그럼…… 하아, 이런 쉬운 창부 말고…… 저항조차 못 하고 무너지는 꼴이 궁금한, 진짜 고상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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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침은 궁의 그림자를 지우는 듯 고요하게 밝아왔다.해가 아직 높지 않은 시간, 식탁 위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고 은잔에 담긴 물은 미세하게 흔들렸다.로제는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옅은 향이 감도는 차를 앞에 두고, 아직 오지 않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잠시 후,먼저 식당으로 들어온 사람은 레온이었다.그는 밤을 설친, 특유의 얼굴을 하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붉게 젖은 눈초리, 조금 무거워진 발걸음.어딘가 신경이 곤두서 있는 기색이 옅게 드러났다.“로제, 어젯밤은 잘…….”그가 다급히 다가와 로제의 손을 잡으려던 찰나, 소만찬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단정한 흑철색 예복 차림의 드라켄 황제, 카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아침 햇빛 아래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태.그가 들어서자마자 식당의 공기가 무겁게 짓눌렸다.레온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고, 식탁 위에는 얇은 칼날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저자가 왜 이 자리에…….’무어라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경직 그 자체가 감정이었다.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젯밤 찢어졌던 손바닥의 흉터가 불로 지진 듯 쓰라려왔다.식탁으로 다가온 카시안은 로제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그 우아하고 매너 있는 동작이 레온의 속을 더 긁었다.“황후 폐하의 부름이라면 언제든 영광입니다만, 초대에 응하는 것이 외람되지 않았기를.”“초대?”레온이 로제를 꿰뚫어 볼 듯 노려보았다.“네. 저의 청으로 오신 거예요.”로제의 목소리는 솜처럼 부드러웠다.“이른 아침이라 제 초대가 폐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카시안의 눈끝이 아주 잠시 부드러워졌다.“이르긴요. 드라켄에 있었다면 아침 훈련을 이미 끝냈을 시간입니다.”그러나 레온의 시선은 칼날처럼 차갑게 흔들렸다.“카시안 황제와의 아침 식사를, 내게 상의도 없이 준비한 이유부터 설명해줬으면 합니다.”레온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담담한 척 예의를 갖추려 애썼지만, 그 담담함은 격렬한 속내를 감추는 얄팍한 가면이었다.로제는 찻잔을 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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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좁고 긴 복도에 아침빛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레온이 지나간 흔적처럼 공기에는 여전히 식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곧장 레온이 향했을 만한 쪽으로 발을 돌렸다.‘어딜 갔을까….’오래 찾을 필요는 없었다.돌아서자마자 정원으로 이어지는 후문 앞에서, 레온이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그는 로제를 등진 채 멈춰 서 있었다.손은 주먹을 움켜쥐고, 어깨는 굳어 있었다.로제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레온이 먼저 말했다.“왜…… 하필 그 사내요.”레온이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내가 얼마나 그를 증오하는지 알면서. 나를 쓰러뜨리고 아르센을 비웃는 그 오만한 눈동자를 알면서, 어떻게 나더러 그 앞에 고개를 숙이라 한단 말이오.”로제는 레온의 가슴팍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췄다.그리고 대답하는 대신, 까치발을 들어 레온의 굳게 다물린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숨결이 얽혀들자마자, 레온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이게 무슨!’다른 남자 앞에서 제 자존심을 시궁창에 처박은 여자였다.사내로서의 체면도, 황제로서의 권위도 그녀의 독설 앞에 낱낱이 찢겨나가지 않았던가.마땅히 이 어깨를 쳐내고 분노해야 했다.하지만 머리의 경고와 달리, 그의 두 팔은 속수무책으로 굳어버렸다.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마자, 밤새 온몸을 짓누르던 원인 모를 열기와 불쾌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지독하고 달콤한 안도감.첫날 밤에도 그랬지만, 그녀의 체온이 닿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환희하며 제멋대로 굴복하는 기분이었다.이 낯선 끌림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그래…… 어쨌든 로제가 지금 나에게 먼저 입을 맞추고 있잖아.’아까의 그 모진 말들은 그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채찍질이었을 뿐이다.이 뜨거운 입맞춤이야말로 그녀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결국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완벽한 증명이다.그 얄팍한 착각을 비웃듯, 로제는 망설임 없이 그의 입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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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소만찬실에는 주인을 잃은 은수저와, 식지 않은 차가 조용히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방금까지 그곳에 흘렀던 팽팽한 긴장감.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단 한 명의 여인.카시안은 텅 빈 의자를 바라보며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그의 긴 손가락이 식탁보 위를 느릿하게 두드렸다.“……하.”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헛웃음이었다.그것은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맞은 맹수의 기막힘에 가까웠다.[아르센은 이제 드라켄의 보호 아래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내용은 반란이었다.약소국의 황후가, 대륙의 패자인 자신에게 '보호'가 아닌 '동등한 거래'를 제안했다.그것도 제 남편을 죽일 듯이 굴리는 방법으로.카시안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입가를 가렸다.입꼬리가 제멋대로 비틀려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미쳤군.’첫 만남의 그녀는 그저 예쁘지만 생기 없는, 잘 세공된 유리인형 같았다.전리품으로 챙겨도 그만, 깨뜨려도 그만인 존재.하지만 방금 본 눈빛은 달랐다.자신이 쥔 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상대의 가학심과 정복욕을 정확히 찔러오는 완벽한 지배자의 눈.순간, 위험한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만약, 저 여자가 아르센이 아니라 내 옆에 서 있었다면.’상상은 순식간에 구체화 되었다.자신의 옆자리,철혈의 제국 드라켄의 옥좌.그곳에 나란히 앉아 서늘한 지략으로 대륙을 쥐고 흔드는 로제의 모습.소름이 끼칠 만큼 완벽했다.그녀의 냉철함은 카시안 자신의 검은 마력과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아깝군.”카시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저런 여자가, 고작 수치심에 짓눌려 도망친 찌질한 사내의 곁에 묶여 있다니.그는 시선을 돌려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로제는 망설임 없이 나갔다.자신이라는 거대한 무력을 앞에 두고도, 그녀의 신경은 온통 제 남편에게만 쏠려 있었다.[도망친 학생을 달래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던 그녀의 등.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카시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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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임시 집무실로 돌아온 카시안은 테이블 위를 훑었다.아르센 황실의 군사 보고서, 귀족 가문의 계보, 그리고 로셀린 황후의 개인 기록.그의 눈치를 보던 서기관이 조심스레 다가왔다.“폐하, 아르센 황후에 대한 심층 조사 명을 내리시겠습니까?”카시안은 한 손으로 문서의 모서리를 가볍게 넘겼다.그 안에는 어디를 봐도 ‘무능하고 수동적인 황후’라는 평가가 반복될 뿐이었다.하지만 방금 전에 마주한 여인은, 그 모든 기록을 단번에 뒤집는 완벽한 독부(毒婦)였다.“아니.”그는 손을 멈췄다.“더이상 종이 쪼가리 따위를 들추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서기관은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였다.카시안은 로제의 자료를 밀어두고, 대신 레온 황제의 동향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무능함. 나약함. 미숙함.보고서 전체가 그 세 단어로 요약되었다.“지금 당장, 아르센 황제에게 내 근위 기사를 보내라.”카시안은 펜을 집어 문서 상단에 단 세 글자를 적었다.지도 시작일(指導始作日).“일방적인 통보가 될 것이다.”서기관의 낮은 숨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아르센 황제의 지도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까?”카시안은 입꼬리를 올렸다.그의 눈빛은 발톱을 숨긴 사자처럼 나른하고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그래. 나의 훈련이, 껍데기뿐인 황제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짓밟아놓는지 확인해야지.”창밖을 보던 그의 시선이 황후전 근처에서 잠시 멈췄다.“그리고…… 그 처참한 밑바닥을, 황후가 어떤 표정으로 지켜보는지도.”**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레온의 시종장이 굳은 얼굴로 황제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폐하. 드라켄의 근위 기사가 카시안 황제 폐하의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갔습니다.”레온은 평소보다 무거운 시선으로 붉은 밀랍에 찍힌 늑대 문양을 바라보았다.시종장이 물러나고 방 안이 조용해지자, 레온은 봉인을 찢어발기듯 뜯었다.펼친 종이는 단 몇 줄 되지도 않았지만, 그 무게는 천 근 만 근이었다.그 안의 문장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눈을 찔러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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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카시안의 첫 군사 지도가 예고된 날의 아침.해가 아직 궁의 처마 아래 머무는 시간대, 엘런은 황후전으로 향하는 조용한 길을 느릿하게 걸었다.전날 밤 벨라리스와 뒹굴며 묻혀온 탁한 쾌락의 냄새와 짙은 와인 향이 아직도 몸에 눅눅하게 배어 있었다.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날카로운 손톱 자국이 만져졌다.‘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결국 쉬운 건 금세 질리는군.’그는 피식 웃었다.벨라리스는 영리했지만, 결국 너무 가벼웠다.벌리라면 벌리고, 달래면 순순히 엎드리는 여자는 밤을 보내기엔 좋았으나 정복욕을 자극하지는 못했다.하지만, 로제는 달랐다.궁 안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느껴졌던,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그녀가 숨을 고르는 방식, 상대를 내려다보는 고고한 시선.제멋대로 짓밟아서 그 도도한 얼굴이 쾌락과 굴욕으로 엉망이 되는 걸 보고 싶게 만드는, 지독한 자극.‘내가 원하는 건, 그 여자의…… 처참한 균열이다.’황후전으로 향하던 엘런은 측면으로 이어지는 좁은 회랑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시녀들이 오가는 길목.가장 은밀하고, 또 가장 방어력이 약한 곳.어떤 사냥감이든 정면으로 물면 발버둥 치기 마련이었다.주인이 까다로워 보일 때는, 언제나 그림자부터 밟아주는 것이 엘런의 오래된 사냥법이었다.그리고, 그의 시야에 에다가 걸렸다.새벽부터 움직였는지 손가락 끝은 붉게 얼어 있었고, 품에는 황후의 얇은 비단 겉옷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엘런의 눈이 가늘어졌다.맑은 눈동자. 다정한 손길 한 번이면 볼을 붉히고, 나직한 칭찬 한마디면 스스로 목줄을 내어주는…… 가장 다루기 쉬운 종류의 순수함.‘저런 것들이 제일 쉽지.’탐색 따위는 필요 없었다.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저런 눈을 가진 아이들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회랑의 기둥을 짚고 서며 에다의 퇴로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갑자기 드리워진 거대한 남자의 그림자에 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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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탁, 탁, 탁.]회랑 끝에서부터 단호하고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은빛 실루엣이 이른 아침의 그림자를 가르며 나타났다.로제였다.‘주인이 드디어 나오셨군.’엘런은 여유롭게 몸을 틀었다.마치 기다렸다는 듯이.로제의 걸음은 급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다가올수록 주변 공기가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에다.”낮고 맑은 목소리.그 안에는 남의 개가 자신의 사람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날 선 경고가 숨겨져 있었다.에다는 흠칫 놀라며 엘런에게서 황급히 떨어졌다.그녀는 황후의 비단 겉옷을 생명줄처럼 끌어안고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폐, 폐하…….”로제의 시선이 에다의 붉어진 얼굴과 흔들리는 동공을 스쳤다.‘이미 늦은 건가?’순진한 에다의 눈동자에 엘런의 지독한 독이 방금 막 스며들었음을, 로제는 단번에 직감했다.그녀는 곧바로 엘런에게 고개를 돌렸다.은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전하께서는, 남의 궁 회랑에서 제 시녀를 붙잡고 무슨 ‘놀이’를 하고 계십니까.”정중함을 가장한, 경멸에 가까운 질문이었다.엘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아, 불편하셨습니까?”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완벽한 예법으로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눈빛은 끈적하게 로제를 훑었다.“저는 단지…… 황후를 모시는 아이의 손이 너무 차갑길래, 잠시 녹여주고 있었습니다.”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에다를 만졌던, 사향 냄새가 밴 그 손이었다.명백한 성희롱이자, 로제를 향한 도발이었다.로제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제 아이의 손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전하께서 함부로 탐하실 영역이 아닙니다.”엘런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탐하다니요. 저는 그저…….”그는 한 걸음, 위협적으로 거리를 좁혔다.“주인을 닮아 떨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을 뿐입니다. 황후께서도 지금…… 속으로 떨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외로움인지 두려움인지, 혹은 분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에다는 숨을 멈췄고, 로제는 물러서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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