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31 - Chapter 40

76 Chapters

31화

황실 훈련장의 피비린내 나는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늦은 오후.아르센 황궁의 북문이 육중한 파열음을 내며 열렸다.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길게 핏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문을 넘어오는 사내의 기세는 그 그림자마저 집어삼킬 듯 서늘하고 묵직했다. 마치 먼 곳에서부터 거대한 먹구름이 소리 없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선두에 선 남자가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궁정의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서연합의 제1왕자, 벨모어 드 펠릭스.엘런과 같은 핏줄이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화려한 금발이 아닌, 싸늘하게 식은 재(Ash)를 연상케 하는 백금발. 허리춤에 검은 없었으나, 그의 단정하고 극도로 절제된 걸음걸이는 그 어떤 칼날보다 예리했다. ‘저자가….’ 회랑에서 지켜보던 아르센 귀족들 사이로 불안한 속삭임이 번졌다.[서연합의 진짜 두뇌.][엘런 전하와는 비교도 안 된다지.][드라켄과 아르센 사이의 사슬을 끊으러 온 게 분명해.]벨모어의 얼굴은 가면처럼 흔들림 없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회색 눈동자는 궁정 전체를 차갑게 훑으며, 이곳에 서 있는 자들의 가치를 매기고, 분류하고, 폐기 여부를 계산하고 있었다.그 정제된 시선이, 마침내 황후전의 높은 난간에 닿았다.로제는 대리석 난간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붉은 노을을 등지고 걸어오는 저 냉혹한 사내.‘드디어 왔군.’엘런의 체포는 아주 가벼운 시작에 불과했다. 어설픈 광대가 쫓겨난 무대 위에, 진짜 맹수 조련사가 피 묻은 채찍을 들고 입장한 것이다.벨모어는 광장 한가운데 멈춰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먼 거리였지만, 시선이 얽히는 순간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는 입가에 미소 한 점 띠지 않은 채,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까딱였다. 겉보기엔 예의를 갖춘 우아한 인사였으나, 로제에게는 명백한 선전포고로 읽혔다.로제는 턱을 치켜들고 피하지 않은 채 그 시선을 오롯이 받아냈다. 지금 기가 눌려 시선을 피한다면, 뼛속까지 잡아먹히는 것은 자신일 거라는 본능적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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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대접견실을 밝히는 수십 개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황금 장식들이 그 불빛을 받아 번뜩였지만, 실내의 공기는 달빛조차 스며들지 못할 만큼 한겨울의 빙판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이곳에 모인 네 사람.서연합의 1왕자 벨모어, 드라켄의 황제 카시안, 아르센의 황제 레온과 황후 로제.대륙의 운명을 쥔 자들이 한 방에 모였으나, 그들 사이에 놓인 것은 평화가 아닌 날 선 적의였다.벨모어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먼저 침묵을 깼다.나긋나긋한 목소리였으나, 내용은 명백한 문책이었다. “유감이군요, 아르센 폐하. 굳건한 동맹국의 왕자가 귀국의 황궁에서 목숨을 위협받다니.” 레온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벨모어는 그 반응을 음미하듯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게다가 보호는커녕, 아예 드라켄의 손에 그를 넘기셨더군요.”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르센을 야만적인 가해자로 몰아갔다.“단순한 오해를 핑계로 형제국의 왕자를 사지로 몰아넣다니. 이것이 아르센이 동맹을 대하는 방식입니까?”언뜻 들으면 서운함의 토로였으나, 실상은 ‘너희 따위가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려?’라는 섬뜩한 경고였다.그때,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카시안이 코웃음을 쳤다.“보호라.”그의 붉은 눈동자가 벨모어를 향해 비릿하게 휘어졌다.“그런 억지스러운 요구를 하려면, 우선 그 잘난 동생분께서 남의 집 길이라도 제대로 찾아다녔어야 하지 않겠나.”벨모어의 시선이 카시안에게 꽂혔다.그러나 카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른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귀족 부인들의 침실을 거쳐, 황후전의 담장을 넘고, 마침내 내 임시 주둔지인 군사 기밀 구역까지 기어들어 왔더군.”대접견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그게 ‘길을 잃은 것’이라면.”카시안의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서연합의 왕자들은 쥐새끼처럼 남의 구멍을 찾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가 보군.”벨모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하지만 그는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영리하게 표적을 바꾸었다.이 공간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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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대접견실에서 로제가 숨 막히는 서류들로 벨모어를 압박하고 있을 무렵.황후전 부속 건물,시녀들의 대기실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에다는 창가에 웅크려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어젯밤부터 소식이 끊긴 엘런 생각뿐이었다.‘그 아름다웠던 미소….’불안함 속에서도 에다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자신 같은 일개 시녀에게 허리를 숙이며 손등에 선뜻 입을 맞추던 엘런.위험할 만큼 짙은 퇴폐미를 풍기던 그 요염한 눈빛과, 코끝을 어지럽히던 달콤한 사향 냄새가 아직도 피부에 맴도는 것 같았다.늘 완벽하기만 한 황후의 곁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짜릿하고 위험한 온기였다. 하지만 그 달콤한 회상은 이내 끔찍한 죄책감으로 돌변해 에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오늘 아침 궁정에 파다하게 퍼진 ‘위조문서’와 ‘첩자’ 소문을, 에다는 자신만의 비극적인 로맨스로 완벽하게 치환하고 있었다.‘나 때문이야… 나를 만나시려다 무리수를 두신 게 분명해.’에다는 두 손을 모아 쥐며 파르르 떨었다.‘나를 은밀히 만나려고 황후 폐하의 편지까지 위조하는 위험을 무릅쓰신 거야. 분명 그때, 내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에다에게 엘런의 가벼운 수작은 이미 목숨을 건 구원(救援)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황후 폐하께선 그걸 눈치채고 진노하신 거야. 황후전의 시녀가 감히 타국의 왕자와 눈이 맞았다는 그 불경함을 용납하실 리 없으니까. 그래서… 핑곗거리를 찾아, 나한테 친절을 베풀어주신 엘런 전하를 억울한 첩자로 몰아 치워버리신 거야.’황후의 차가운 통제욕이 빚어낸 비극.어리석은 죄책감과 엘런을 향한 맹목적인 열병이 그녀의 이성을 완벽하게 갉아먹고 있었다.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어머, 에다. 너 여기 있었니?”에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벨라리스였다.평소라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시녀들을 하대했을 공녀가, 지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베… 벨라리스 공녀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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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지하 감옥의 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 차갑고 습했다.어둠 속에서 타들어 가는 촛불 하나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기괴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철그럭.]벨라리스가 준 열쇠가 녹슨 자물쇠의 아가리를 열었다. 에다는 떨리는 손으로 무거운 철문을 밀고 들어섰다. “……전하?”감옥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엘런은 차가운 돌바닥 구석에 처박히듯 앉아 있었다.흐트러진 금발, 거칠게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하얀 가슴팍, 그리고 핏기가 가신 채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 처연한 몰골은 역설적이게도 그 특유의 나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그는 인기척에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초점 없던 회색 눈동자가 에다를 발견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물기를 머금으며 처량하게 번뜩였다.“……에다. 정말, 정말 와준 거니?”그 목소리는 젖어 있었고, 비겁할 정도로 애달팠다.“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이 더러운 곳에 혼자 두지 않았어.”엘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에다에게 다가왔다.철창도, 장애물도 없는 공간.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에다를 와락 끌어안았다.“보고 싶었어. 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오직 네 온기만 생각하며 버텼어.” 사내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감옥의 냉기와 대비되는 엘런의 열기와 코끝을 마비시키는 짙은 사향 냄새가 에다의 이성을 순식간에 휘저어 놓았다.“전하, 전 다 알아요. 황후 폐하께서… 그분이 전하를 미끼로 쓰신 거라고 들었어요.” 에다가 울먹이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자, 엘런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동정심도 사라진 채 서늘한 유희가 감돌았다.그는 에다의 입술 위에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갖다 대어 말을 막았다.“쉿.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에다.”엘런은 에다의 허리를 감아 더 깊숙이 자신의 단단한 하반신 쪽으로 당겼다.얇은 시녀복 너머로 사내의 노골적인 존재감이 에다의 허벅지에 닿았다. 일생의 대부분을 황후 밑에서 자란 처녀에게는 겪어본 적 없는 압도적인 자극이었다.“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서로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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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팽팽했던 긴장의 줄이 툭 끊어졌다.레온은 긴 회랑을 걸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손바닥이 축축했다. 벨모어라는 거대한 산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는 아르센의 황제로서 할 말을 다 했다.‘해냈어.’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장 먼저 이 벅찬 성취감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로제?”레온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텅 빈 복도.그를 뒤따르는 시종들은 있었지만, 은빛 머리카락의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황후는… 아직 나오지 않았느냐?”시종장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예, 폐하. 대접견실에서 뒷정리를 하실 게 남으셨다며 잠시 더 머무르겠다고….”“뒷정리?”레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회담은 끝났다. 남은 건 시종들이 치우면 될 찻잔뿐인데, 고귀한 황후가 직접 해야 할 뒷정리가 무엇이란 말인가.그때,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폐하.”나긋나긋한 목소리. 벨라리스였다.그녀는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레온을 우러러보고 있었다.“오늘 폐하의 위엄은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그 오만한 벨모어 전하께서도 꼼짝 못 하시더군요.”레온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평소라면 칭찬에 우쭐했겠지만, 지금은 다른 여자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고맙군.”레온이 짧게 대답하고 돌아서려 하자, 벨라리스가 한 걸음 더 따라붙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그런데 폐하…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뭐가 말이냐.”벨라리스는 주위를 살피듯 목소리를 낮추었다.“벨모어 전하의 도착 시점 말입니다.”레온의 걸음이 멈칫했다.“서연합의 수도에서 이곳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꼬박 닷새가 걸립니다. 전서구가 오가는 시간만 해도 사흘은 족히 걸리지요.”벨라리스의 눈빛이 독사처럼 예리하게 빛났다.“그런데 벨모어 전하께서는 엘런 전하가 체포되자마자, 마치 문밖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당도하셨습니다.”“……!”“이건… 엘런 전하가 사고를 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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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저물어가는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황궁의 정원을 서늘한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바람이 스칠 때마다 덩굴장미의 잎사귀들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불길한 속삭임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화려했던 대접견실의 열기가 식어가는 시각.로제는 후원의 낡은 벤치 옆에 서서,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치맛자락 속에 애써 감추고 있었다. “……겁먹었습니까.”낮게 깔린 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카시안이었다.그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등진 채, 삐딱하게 서서 로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로제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그녀의 눈동자에는 벨모어의 서늘했던 회색 눈빛이 섬뜩한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예상보다… 더 위험한 자더군요.”그녀의 목소리는 얇은 유리 조각처럼 위태로웠다.“엘런 같은 망나니를 생각하고 판을 짰는데, 벨모어는….”“그놈은 독사지.” 카시안이 나른하게 말을 툭 잘랐다.그는 로제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로제의 발끝을 완벽하게 덮어 삼켰다. "서연합의 왕자들이 죄다 엘런 같은 멍청이일 줄 알았습니까? 황후의 정보력도 꽤나 순진하군요.”조롱 섞인 비난이었지만, 로제는 반박할 수 없었다.자신의 오만이었다.벨모어는 엘런처럼 스캔들 몇 개로 무너질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아르센의 법과 명분을 이용해, 오히려 로제의 목을 서서히 조여올 것이다.“이제 어쩌시렵니까?”카시안의 입매가 휘어졌다.“당신이 그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쥐고 있는 그 알량한 법으로는 벨모어를 막지 못해. 그는 법 위에서 노는 놈이니까.”“방법을… 찾아야죠.”“방법이라.”카시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그 순간, 그의 예리한 시선이 로제 너머, 어두운 덩굴나무 쪽을 아주 찰나의 순간 스치듯 향했다가 돌아왔다. 마치 그곳에 숨죽이고 있는 누군가의 기척을 완벽하게 읽어낸 지배자의 눈빛이었다.카시안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그의 거친 손가락이 로제의 하얀 뺨을 스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끝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귀 뒤로 넘겨주었다.로제는 흠칫하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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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접견실의 무거운 문이 다시 열렸다.안으로 들어선 로제의 숨이 턱 막힐 만큼, 대접견실에는 어제보다 짙고 끈적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벨모어는 여유롭게 중앙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포박된 엘런이, 그리고 바닥에는… 에다가 꿇어앉아 있었다.“폐하, 이 아이가 스스로 자백했습니다.”벨모어가 얼음 조각 같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어젯밤 제 동생이 소지했던 위조 편지. 그것을 쓴 장본인이 바로 황후 폐하의 이 측근 시녀라고 하더군요.”모두의 시선이 에다에게 쏠렸다.로제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에다는 로제의 눈을 꾹 피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사실이냐?”레온이 옥좌에서 위압적으로 물었다.에다는 핏기가 가신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썼습니다. 제가… 엘런 전하를 연모하여… 감히 황후 마마의 필체를 흉내 내어… 전하를 뵙고 싶어서….”그것은 엘런이 머릿속에 심어준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거짓말이었다. 사랑의 도피를 꿈꾸는 에다는, 자신이 이 끔찍한 죄를 덮어쓰면 기꺼이 엘런과 함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하!”레온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비틀린 분노의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바로 옆에 앉은 아내, 로제에게로.“들었소, 황후?”레온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로제를 노려보았다. 수많은 아르센의 귀족들과 서연합의 사절단이 지켜보는, 지극히 공개적인 장소에서였다.“황후의 최측근이라는 수족이, 감히 주인의 이름을 팔아 적국의 사내와 밀통을 했다는군. 대체 아랫사람 관리를 어찌 하시길래 이런 추잡한 일이 벌어지는 거요?”로제의 은회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레온의 질책은 시녀의 죄를 묻는 게 아니었다. 오직 아내를 향한, 억눌렀던 치졸한 질투와 의심의 표출일 뿐이었다.“폐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에다가….”“중요하지 않다니! 황실의 기강이 바닥에 처박혔는데!”레온이 윽박지르듯 소리쳤다.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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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좋소. 기꺼이 그리합시다.”로제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주먹을 꽉 쥐었다.엘런은 죗값이라는 명분하에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고, 멍청하게 이용당한 에다는 죽게 생겼다. 심지어 남편은 자신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욕했고, 벼랑 끝에서 자신을 구해준 건 또다시 드라켄의 황제였다.‘엉망진창이야.’벨모어는 포박된 엘런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나가며, 로제에게 소름 끼치도록 우아한 미소를 남겼다. 판을 뒤집지는 못했지만, 황후의 수족을 잘라냈다는 완벽한 승자의 여유였다.사절단과 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대접견실에는 목을 조르는 듯한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레온은 옥좌에서 일어나, 바닥에 주저앉아 넋이 나간 에다를 싸늘하게 일별했다.“저 더러운 죄인을 당장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가두라. 국법에 따라 조만간 엄벌에 처할 것이다.”근위병들이 다가와 에다의 양팔을 거칠게 낚아채어 일으켜 세웠다. 그 폭력적인 모습에 로제는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다급히 다가갔다.“폐하! 잠시만요!”로제는 체면도 잊은 채 레온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그녀의 하얀 손끝이 절박하게 떨리고 있었다.“에다는… 철저하게 이용당한 겁니다. 엘런 전하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가는 거짓 자백을 한 거라고요!”로제의 호소는 간절했다. 하지만 레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소매를 잡은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는 자비나 이해심 따위는 없었다. 그저 시커먼 질투와 비틀린 의심만이 독버섯처럼 피어나 있었다.“이용당했다? 증거는 있고?”[탁!]레온이 매몰차게 로제의 손을 뿌리쳤다. 허공을 맴도는 로제의 손이 비참하게 떨렸다.“하긴. 이용당할 만도 하지. 진짜 주인인 당신이 다른 사내와 은밀하게 입을 맞추고 판을 짜는 동안, 방치된 시녀는 서연합 왕자에게 놀아났을지도.”“폐하…!”“그 가증스러운 변명은 이제 지겹소.”레온은 로제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날 선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오늘 이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나를, 아니 당신을 구한 건 남편인 내가 아니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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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드라켄 사절단의 숙소는 아르센 황궁 안에서도 이질적인 공간이었다.공기부터가 달랐다.아르센의 부드러운 향수 냄새 대신, 차가운 쇠 냄새와 묵직한 긴장감이 흐르는 곳.그 복도 끝, 가장 깊은 방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카시안.”로제였다.황후가 시종의 안내도 없이 타국 황제의 침실 문을 벌컥 연 것이다.방 안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카시안은 창가에 기대어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친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그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마치 그녀가 이 밤에 찾아올 줄 완벽하게 계산했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남편에게 밤새 매달려 울다 지쳐 잠들 줄 알았는데.”명백한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로제는 동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스스로 등 뒤의 문을 닫았다.[철커덕.]무거운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거래를 하러 왔습니다.”로제의 목소리는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했다. 마치 감정을 거세한 인형 같았다.“제 시녀, 에다를 살려주세요.”카시안이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왔다.“살려달라? 아르센의 국법으로 처단하겠다고 모두의 앞에서 선언한 건 당신의 남편입니다. 나보고 남의 나라 법을 어기며 시녀 따위를 구하라는 겁니까?”“이곳의 국법 따위, 폐하껜 구겨진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로제는 턱을 치켜들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전생에 아르센을 무참히 짓밟고 유린하던 그의 압도적인 무력이 피비린내와 함께 스치고 지나갔다. 카시안의 군화 앞에서는 수백 년을 이어온 아르센의 긍지 높은 법과 명분조차, 그저 아무런 힘도 없는 마른 종이와 잉크 자국에 불과했었다.로제는 그 잔혹한 힘의 격차를 다시금 뼈저리게 실감하며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벨모어는 엘런만 챙기면 그만입니다. 에다가 죽든 살든 관심 없어요. 하지만 레온은 아니죠. 에다를… 드라켄으로 데려가 주세요.”로제의 눈빛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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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어느새 그녀의 은밀한 입구에서는 뜨겁고 투명한 애액이 왈칵 배어 나와, 카시안의 단단한 손마디를 질척하게 적시고 있었다. “말은 고고하게 하시더니, 몸은 이렇게 창부처럼 쉽게 젖어드는군.”그는 만족스럽게 조롱하며, 예고 없이 로제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숨이 막힐 듯 거칠고 지배적인 키스였다.동시에 흠뻑 젖어 든 아래를 단숨에 꿰뚫고 들어온 두 마디의 손가락이, 속절없이 부드럽게 풀려버린 뜨거운 내벽을 긁어내리며 잔혹할 만큼 농밀한 쾌락을 주입했다. “아…! 카시, 안… 하아… 읏….”머리로는 거부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일생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자극에 로제의 몸은 거짓말처럼 뜨겁게 녹아내렸다. 타국의 황제에게 유린당하며 쾌락을 느낀다는 수치심에 눈물이 핑 돌았다.카시안의 손가락은 자비가 없었다. 흠뻑 젖어 든 내벽 안으로 중지와 약지를 한꺼번에 밀어 넣은 그가, 손마디를 구부려 연한 점막을 거칠게 긁어내렸다. [질척, 찌걱.] 물기 어린 끈적한 마찰음이 고요한 어둠을 가르고 외설스럽게 울려 퍼졌다. “흐앙…! 거, 거긴… 아, 아흐!” 로제의 허리가 튕기듯 솟구쳐 올랐다. 가장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깊은 곳을 그의 굳은살 박힌 손끝이 정확하게 짓이기고 지나간 탓이었다. 그는 숨넘어갈 듯 헐떡이는 로제의 반응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손가락을 끝까지 처박은 채 안을 짐짓 난폭하게 휘저었다. 넘쳐흐르는 애액으로 질척이는 좁은 구멍이 그의 두꺼운 손가락을 삼키고 뱉어낼 때마다 찌걱거리는 파열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제발, 아, 그만… 하으윽!”“벌써부터 숨넘어갈 듯 울면 곤란하지. 아직 반도 안 보여줬는데.” 카시안은 조소하며 손목의 스냅을 돌렸다. 그리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찌거걱, 퍽, 찌걱!]마치 거대한 남성을 받아내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빠르고 폭력적인 손가락질이 로제의 좁은 틈새를 쉴 새 없이 짓찧었다.하복부를 뚫고 들어올 듯 찔러오는 쾌락에 로제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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