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 회의가 끝나고, 레녹은 서류를 정리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황궁은 아직 차갑고 고요했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들리는 하녀들의 분주한 속삭임만이 이른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그는 늘 그렇듯 나른하게 벽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이 하찮은 소음 속엔 언제나 금이 될 만한 정보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들었어? 뒷방 아니, 그 백작님 말이야….”“어젯밤에 황제 폐하의 침실에서… 쫓겨났대.”“진짜? 작위까지 받았는데 무슨 일이지?”“아무튼, 아침도 밝기 전에 시녀 둘이 데리고 나가는 걸 봤다더라. 폐하께서 엄청나게 화를 내셨나 봐.”‘쫓겨났다?’레녹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서늘한 눈동자가 느리게 가라앉았다.웃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그저 완벽해야 할 수학 공식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한 학자처럼 미묘한 표정일 뿐이었다.“하루 만에?”그가 긴 손가락으로 은테 안경을 천천히 밀어 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백작위 서임, 북부의 노른자위 로트 영지 하사.전례 없는 파격으로 권력을 쥐여주고는, 다음 날 새벽에 안지도 않고 내쫓았다?논리가 맞지 않았다.그가 아는 황제 카시안은 감정에 휘둘리거나 변덕을 부리는 인간이 아니다. 전리품을 취하는 데 거칠 것이 없는 짐승이다.입력값은 최고의 대우인데, 결과값은 축출이다.이 방정식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단순한 변심이 아니야.’레녹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그의 비상한 머릿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황제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물어뜯지 않은 이유.과거, 카시안의 이성이 흔들렸던 유일한 예외는 딱 한 번 있었다.지금은 국경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의 첫사랑.“……그 폭군이, 스스로 이성을 쥐어짜 내서 참았다는 소리군.”레녹의 얇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소문처럼 블랑이 황제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황제가 제 욕정조차 통제하지 못할까 봐 스스로를 격리한 것이다.“과연.”레녹은 창밖, 블랑이 머물고 있을 서쪽
[서연합 국경 외곽, 전쟁 노예를 실은 수송 수레]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육중한 쇠사슬이 부딪쳤다.축축한 천막 틈새로 스며드는 한겨울의 냉기와 썩어가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수레 안에 짐짝처럼 구겨진 노예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목숨값보다 사슬값이 더 비싼 고기방패들.그중 구석에 처박힌 한 남자, 레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썩이는 흉통만큼은 짐승처럼 기괴하고 묵직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조금만 기다려.’죽어 있던 그의 심장이, 오직 한 여자의 흔적을 쫓아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아르센.그의 모든 것이자, 모든 걸 잃은 곳. 그리고 잃어버린 아내가 있는 곳.천막 바깥에서 병사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노예들은 아르센 국경에 넘기면 된다지?”“그래. 서연합이 고용한 전선 보조라고… 뭐, 그냥 죽이기엔 아깝다나?”“아깝다고? 이런 고깃덩어리들이?”비웃음 섞인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그 순간, 레온의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찢어지며 비틀렸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인 맹수의 환희였다.아르센 국경. 드디어 도착했다.이 냄새나는 수송 수레에 얌전히 짐짝처럼 타준 것은, 오직 이곳에 빠르고 조용하게 도달하기 위함이었을 뿐.[쩌적- 투둑!]돌조각으로 갉아낼 필요조차 없었다.레온이 전완근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을 주자, 그를 구속하던 두꺼운 강철 사슬이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뜯겨 나갔다.“어이, 쥐새끼들. 조용히들 하…….”순찰을 돌던 경비병이 인원 점검을 위해 천막을 걷어 올린 순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어둠 속에서 세로로 찢어진 금안(金眼)이 섬뜩하게 번뜩였고, 레온의 거대한 손아귀가 병사의 안면을 통째로 짓눌렀다.[우드득-!]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병사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즉사였다.두 번째 병사가 기겁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투기장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괴물을
[서연합 국경 외곽, 전쟁 노예를 실은 수송 수레]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육중한 쇠사슬이 부딪쳤다.축축한 천막 틈새로 스며드는 한겨울의 냉기와 썩어가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수레 안에 짐짝처럼 구겨진 노예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목숨값보다 사슬값이 더 비싼 고기방패들.그중 구석에 처박힌 한 남자, 레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썩이는 흉통만큼은 짐승처럼 기괴하고 묵직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조금만 기다려.’죽어 있던 그의 심장이, 오직 한 여자의 흔적을 쫓아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아르센.그의 모든 것이자, 모든 걸 잃은 곳. 그리고 잃어버린 아내가 있는 곳.천막 바깥에서 병사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노예들은 아르센 국경에 넘기면 된다지?”“그래. 서연합이 고용한 전선 보조라고… 뭐, 그냥 죽이기엔 아깝다나?”“아깝다고? 이런 고깃덩어리들이?”비웃음 섞인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그 순간, 레온의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찢어지며 비틀렸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인 맹수의 환희였다.아르센 국경. 드디어 도착했다.이 냄새나는 수송 수레에 얌전히 짐짝처럼 타준 것은, 오직 이곳에 빠르고 조용하게 도달하기 위함이었을 뿐.[쩌적- 투둑!]돌조각으로 갉아낼 필요조차 없었다.레온이 전완근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을 주자, 그를 구속하던 두꺼운 강철 사슬이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뜯겨 나갔다.“어이, 쥐새끼들. 조용히들 하…….”순찰을 돌던 경비병이 인원 점검을 위해 천막을 걷어 올린 순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어둠 속에서 세로로 찢어진 금안(金眼)이 섬뜩하게 번뜩였고, 레온의 거대한 손아귀가 병사의 안면을 통째로 짓눌렀다.[우드득-!]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병사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즉사였다.두 번째 병사가 기겁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투기장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괴물을
명령은 짧았고, 공기는 무거웠다.블랑은 잠시 굳어 있었지만,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 드레스의 매듭에 손을 올렸다. ‘수치심 따위는 개나 줘버려.’여기서 울먹이거나 망설이면, 방금 전 연회장에서 보여준 당당한 파트너의 가면이 깨진다.그녀는 턱을 꼿꼿이 치켜들고, 카시안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매듭을 풀었다.[스르륵.]값비싼 실크 드레스가 허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곧이어 얇은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이 드러났다.한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신을 핥아 내리는 듯한 남자의 시선 때문인지 하얀 피부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카시안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그 모습을 감상했다. 블랑의 나신이 드러나자 그의 눈빛이 먹물을 푼 듯 짙게 가라앉았다.“생각보다 망설임이 없군.”손끝으로 확인했던 몸, 그러나 아직 온전히 파헤치지 못한 금단의 성역.볼 때마다 타오르는 지독한 갈증을 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폐하께서 살려준 몸이니까요. 마음대로 쥐고 흔드시는 것도 폐하의 권리죠.”블랑은 짐짓 요염하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그때, 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다가왔다.“항상 말은 잘해.”그는 다가온 블랑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얇은 몸이 그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속절없이 갇혔다.“그런데 표정은 왜 그 모양이지?”그 질문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온전히 제 것이라 여긴 먹잇감에게서 다른 사내의 흔적을 발견한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좁혀졌다.블랑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든 이 압도적인 공기를 환기해야 했다. “그런데 폐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오늘 연회에서 본 사람들 중에… 레녹 후작가에 대해서…….”말을 꺼내자마자 공기가 얼어붙었다. 순식간이었다.“…그래? 그 안경잡이 새끼에게 발정이라도 났나?”낮게 깔린 목소리에 담긴 흉폭한 질투는 명백했다.블랑이 변명할 틈도 없이, 그의 크고 거친 손이 그녀의 뒷목을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을 뒤로하고, 황제의 사적인 구역으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진짜 전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안내하는 시종장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블랑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했다.‘나는 블랑이다. 기억을 잃은 여자, 블랑.’그녀는 자신의 처소를 지나쳐, 황제의 본실로 곧장 이어지는 안쪽 문 앞에 섰다.카시안은 빈틈이 없는 남자다. 그는 블랑을 탐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시험할 것이다.오늘 밤, 그와의 동침은 피할 수 없다. 작위를 받았고, 판을 벌였으니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다.‘한 번은 거쳐야 해.’블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남편이었던 자가 아닌 다른 사내를 받아들이는 것.하지만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야 했으니까.“도착했습니다, 백작님.”시종장이 거대한 양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커다란 문에는 드라켄 황실의 상징인 포효하는 검은 늑대가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괴물 같았다.[끼이익.]문이 열리고, 블랑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발을 내디뎠다.작은 무도회장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 넓었고, 어두웠다. 은은한 조명만이 거대한 침대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그녀는 당연히 가운 차림의 카시안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와인잔을 들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하지만.“……아.”블랑의 발이 바닥에 못 박힌 듯 멈췄다.침대 곁에는 카시안 대신, 조그마한 체구의 시녀 한 명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익숙한 갈색 머리, 주근깨가 흩뿌려진 앳된 얼굴.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눈동자.에다.엘런의 계략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아이.로제가 몰래 손을 써서 이곳 드라켄으로 빼돌렸던, 바로 그 아이였다.‘네가 왜 여기에…….’블랑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그 찰나의 동요를 놓칠 리
카시안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밤새 내 침대 위에서 흐느끼며 온갖 짓거리를 버텨내던 몸뚱이가, 춤 한 곡쯤 못 맞출까.”“……폐하.”블랑이 작게 이를 갈며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서 숨죽인 기침 소리가 터졌다.‘하지도 않은 짓을 참 뻔뻔하게도 떠드는군.’살점만 뜯어놓고 도망치듯 나간 쪽은 자신이었으면서, 남들 앞에서는 아주 밤새 저를 취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하지만 은밀한 침실의 농담은, 황제의 입에서 연회장 한가운데로 쏟아진 순간 그것은 모든 사내들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소유권 선언이 되어버렸다.블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좋아. 그 정도로 날 갖고 놀고 싶다면, 끝까지 맞춰 주지.’ 카시안이 그녀를 이끌어 중앙으로 나서자, 다른 귀족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무대를 비웠다.블랑은 숨을 고르고, 그가 이끄는 대로 한 발, 한 발 스텝을 밟았다.“생각보다 제법인데.”“기억을 잃기 전에, 저도 춤 정도는 췄던 모양이네요.”“이런 황궁 연회에서?”블랑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지만, 이내 요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글쎄요. 그랬다면 지금쯤 저기 하인들 틈에서 접시나 닦고 있었겠죠.”카시안은 제 입맛대로 다루듯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고 세밀하게 스텝을 조정했다.[스윽.]얇은 실크 드레스 너머로 카시안의 단단한 허벅지가 블랑의 허벅지 사이를 노골적으로 파고들며 아슬아슬하게 교차했다. “내 이름을 아주 잘 갖다 쓰더니, 내 품에서 딴 주머니 찰 생각부터 하나?”카시안이 블랑의 귓불을 지그시 깨물며 낮게 속삭였다. 레녹과 눈을 마주친 것에 대한 추궁이었다.“나중에 의회 늙은이들을 장악하려면, 저런 남자도 하나쯤 필요하거든요.”“하. 발칙한 핑계는.”그가 블랑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더 바짝 밀착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전쟁은 국경에서만 나는 게 아니다.”카시안이 그녀의 시선을 집어삼킬 듯 옭아매며 중얼거렸다.“이 연회장도 훌륭한 전장이지. 돈줄과 입김, 숨겨진 세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