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3화. 동혁과 재현그날도 동혁은 퇴근길의 소란스러움을 털어내며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복도 끝,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익숙한 뒷모습이 스테이션을 지키고 있었다.동혁은 잠시 멈칫했다.손에 들린 커피와 케이크 봉지에 힘이 들어갔다.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표정으로 데스크에 다가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고생하시는데 이거 드세요.”커피를 받아 든 그녀의 얼굴에 번진 것은 형식적인 친절이 아닌, 아이처럼 맑고 진심 어린 감사였다.“어머, 정말요? 세상에,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그녀의 목소리는 병원의 가라앉은 공기를 가볍게 뒤흔들 만큼 생기가 넘쳤다.동혁은 찰나의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늘 차분하고 어딘가 사연 있는 눈을 하고 있던 평소의 하늘과는 전혀 다른 결의 에너지가 그에게 부딪혀 왔다.이유는 알 수 없었다.그저 해맑은 감사 인사가 가슴 한구석에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장을 꾹 눌러 찍는 기분이었다.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찰나의 표정, 투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의 농도만으로도 충분했다.동혁은 할머니의 병실로 걸음을 옮기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사실 동혁이 처음부터 하늘에게 케이크를 건넸던 것은 아니었다.몇 달 전, 병원 뒤편의 작은 간이 정원에서 동혁은 혼자 앉아 있는 하늘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환자들의 산책로로 쓰이는 그곳에서 하늘은 환자복을 입은 박순자 할머니의 굽은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고 있었다.할머니가 정신이 온전치 않아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하며 떼를 쓰는데도, 하늘은 단 한 번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오히려 하늘은 할머니의 마른 손등에 제 뺨을 갖다 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괜찮아요, 할머니. 저도 가끔은 여기가 어딘지 잊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냥 우리 같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요.“그건 간호사로서의 직업의식이라기보다, 스스로가 가진 거대한 슬픔을 타인의 고통에 포개어 위로하는 동병상련의 모습에 가까웠다.그
12화. 일상2주의 유예기간은 모래시계의 구멍이 넓어진 것처럼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연병장 앞, 삭막한 공기 속에서 재현은 낯선 짧은 머리를 어색하게 만지며 서 있었다.그 주변은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오열하는 부모들과 입술을 깨무는 연인들로 북적였지만, 재현의 곁은 기이할 정도로 한산했다.하늘은 재현의 까슬한 뒷머리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평소라면 당연히 자리를 지켜야 했을 그의 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재현아, 부모님은…… 안 오셨어?”하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짧아진 머리카락 탓에 그의 눈매는 평소보다 날카롭고 선명해 보였다.그는 입가에 미미한 호선을 그리며 하늘의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응,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오늘만큼은 누구한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거든.”재현의 손가락이 하늘의 귓바퀴를 느릿하게 훑었다.마치 이 감촉을 지문처럼 뇌리에 새기려는 듯한 집요한 움직임이었다.“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제 매일 못 보는데, 고작 몇 분이라도 누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내 눈길을 나눠주는 건 너무 아깝거든.”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소유욕은 여전히 무거웠다.재현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늘을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하늘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빳빳한 군복의 질감과 그 위로 배어 나오는 재현 특유의 체취가 코끝을 찔렀다.재현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가슴팍에 직접 닿는 것처럼 생생하게 울렸다.그가 떠난 뒤 찾아올 정적이 벌써 두려웠다.재현은 그런 그녀의 떨림을 즐기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뒷머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멀리서 입소를 알리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려왔다.사람들의 작별 인사가 비명처럼 섞이는 가운데, 재현은 마지막까지 하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것은 연인의 배웅이라기보다, 자신의 영토에 표식을 남기고 떠나는 맹수의 확신에 가까웠다.“갔다 올게. 내 생각만
11화. 열린 문에도 도망치지 않는 새멀리, 어제 보았던 그 고층 호텔의 서늘한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그곳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년 같은 재현이 서 있었다.택시가 호텔 입구에 멈춰 서기도 전에 하늘은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멀리 로비 기둥 옆, 수척해진 얼굴로 서 있던 재현이 하늘을 발견하고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재현은 하늘을 마주하자마자 마치 지탱하던 기둥이 뽑힌 건물처럼 그녀의 어깨 위로 무너지듯 안겨 왔다.“누나…….”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적셨다.재현의 커다란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늘 여유롭고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움만이 가득했다.하늘은 그런 재현을 놓칠세라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았다.“재현아,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응?”“나 군대 가기 싫어. 누나랑 떨어지기 싫어. 나 없으면 누나 또 혼자 울 거잖아. 오빠한테 시달리고, 나 없이 어떻게 견뎌…….”재현은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짓눌린 신음 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그의 손가락이 하늘의 코트 자락을 찢어질 듯 움켜쥐었다.그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손길이라기보다, 벼랑 끝에서 유일한 생명줄을 붙잡은 조난자의 발버둥에 가까웠다.“내가 없는 동안 오빠가 누나를 어디론가 치워버리면 어떡해? 나 다시는 누나 못 보게 하면 어쩌냐고.”“안 그래, 재현아. 내가 안 그럴게. 내가 너 기다릴게.”“아니, 누나 마음만으로는 안돼. 오빠는 누나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잖아.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누나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을 거야.”재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붉게 충혈된 눈동자 속에는 절망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집요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는 하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절박하게 속삭였다.“방법은 하나뿐이야. 누나랑 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자. 딱 2주 만이라도 오빠 없는 곳에서 우리끼리만 있자. 응? 누나, 나 버릴 거야?”하늘은 재현의 눈물 어린 눈을 피할
10화. 새장의 열쇠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서늘했다.재현은 코트를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두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책상 위, 단정하게 정리된 물건들 사이로 이질적인 종이 뭉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재현의 시선이 그곳에 멎었다.하얀 봉투 겉면에 찍힌 관인과 익숙한 서체의 이름.순간, 재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그는 낚아채듯 우편물을 집어 들어 봉투를 거칠게 찢어발겼다.내용을 확인하는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고, 이내 짐승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씨발…….”입영 통지서였다.입소 날짜가 적힌 숫자들이 재현의 눈앞에서 조롱하듯 일렁였다.고작 2주 뒤였다.겨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하늘, 그 완벽한 인형을 자신의 성에 가둬두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바다라는 거대한 벽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고심하던 찰나에 날아든 이 종이 쪼가리는, 재현이 설계한 완벽한 세계를 단번에 무너뜨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재현은 통지서를 구겨 쥐었다.하얗게 질린 마디마디에 핏줄이 돋아났다.“가족? 책임?”바다가 내뱉었던 말들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군대에 가 있는 동안 하늘이 다시 바다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자신이 없는 사이 하늘의 곁을 채울 누군가를 상상하자 속이 뒤틀렸다.재현은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잡동사니들 사이로, 하늘과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뒤집힌 채 떨어졌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화면 속, 여전히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늘의 프로필 사진을 노려보았다.이제 시간이 없었다.2주.그 안에 하늘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이 모든 게임은 패배로 끝날 터였다.재현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어렸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하늘에게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학원 강의실, 강사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배경음처럼 깔렸다.책상 위에 엎어둔 휴대전화가
9화. 첫 균열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신발을 벗기도 전, 거실 소파에 화석처럼 굳어 앉아 있는 바다와 눈이 마주쳤다.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 붉게 충혈된 눈이 하늘의 전신을 훑었다.“어디 갔다 와?”낮게 깔린 목소리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왔다. 하늘은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오빠, 그게…….”“제정신 박힌 놈이면 지 여자 친구 학원 빼먹게 안 해. 밤늦게 불러내서 외박시키는 짓거리는 더더욱 안 하고. 그놈이야? 네가 전에 말한, 호감 있다던 그 자식.”“……응.”기어들어 가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덮쳤다.“헤어져.”“오빠!”“그 새끼 하는 짓을 봐!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이 할 짓이라고 생각해? 너를 아끼는 게 아니라 망가뜨리고 있잖아, 지금!”“나를 사랑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야!”비명 섞인 외침이 거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바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그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하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유일한 사람? 그럼 나는! 고모랑 고모부, 주미는! 시은이는! 우리가 다 너한테 관심 없어서 이러는 것 같아? 순간의 달콤함에 눈 멀어서 진짜를 못 보지 말고 제발 정신 차려. 당장 끝내.”하늘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억울함과 서러움, 그리고 재현이 주었던 그 몽글몽글한 온기를 부정당하는 고통이 뒤섞였다.바다는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서늘한 목소리만이 공중에 흩어졌다.“그 자식이 너한테 한 행동들, 하나하나 뜯어서 다시 생각해 봐. 그게 정말 너를 위한 건지.”“진정한 사랑이 뭔데! 나를 위해 맛집 찾아주고, 나만 생각하면서 선물 고르고, 좋은 곳 데려가 주고……. 온종일 나만 바라봐 주는 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뭔데!”하늘은 악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재현의 품 안에서 느꼈던 그 압도적인 관심은 평생 결핍에 시달려온 하늘에게 구원과도 같았다.하지만 바다의 시선은
8화. 몰래 넘어버린 선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오로지 하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낯선 호텔 침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만큼 방 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누나 먼저 씻을래?”재현이 먼저 정적을 깼다.일상적인 제안이었지만 하늘은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응? 아, 아니. 나 집에서 이미 씻고 나왔어.”“아, 그래? 나도 씻고 오긴 했는데. 그럼, 우리 같이 누울까?”재현의 말에 하늘의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오빠 몰래 현관문을 나설 때만 해도 그저 재현이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앞섰다.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 밀폐된 공간이 주는 압박감은 하늘의 이성을 뒤늦게 깨우고 있었다.“누나, 너무 굳어 있는 거 아니야? 안 잡아먹어.”재현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가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하늘의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재현은 하늘의 경직된 안색을 살피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긴장 풀리게 술이라도 한잔할까?”“그, 그럴까?”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현은 로비로 전화를 걸어 익숙하게 룸서비스를 시켰다.와인 리스트를 읊는 목소리나 전화를 끊는 태도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그가 보여주는 모든 편안함이 하늘에게는 오히려 낯선 이질감으로 다가왔다.“저……. 재현아.”“응, 누나.”재현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하늘을 돌아보았다.“이런 데 자주 와? 네 행동이 너무 익숙해 보여서. 어딜 가도 자연스럽고……. 꼭 와봤던 사람처럼.”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는 잠시 하늘을 응시하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앉았다.“하하, 누나. 혹시 질투하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랑 이런 데 와봤을까 봐?”“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정말 그런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재현의 입에서 '다른 여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하늘의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만약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