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51화. 위로의 밤도어록이 해제되는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을 밀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의외의 온기였다.바다는 현관 매트 위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거실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하늘이 혼자 집을 지킬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동생에게 거실은 너무 넓고 노출된 공간이었기에, 그녀는 늘 제 방이라는 작은 섬 안에 자신을 고립시키곤 했다.거실 소파에는 시은이 있었다.무릎 위에 휴대전화를 올려둔 채 멍하니 벽을 보고 있던 그녀가 바다와 눈이 마주치자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하늘이 방금 잠들었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이 집 안에서는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 곧 죄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은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언제 왔어?”“두 시간쯤 됐나. 상태가 좀 불안해 보이길래 같이 있었어.”바다는 외투를 벗어 걸며 습관적으로 하늘의 방문 쪽을 살폈다.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가느다란 불빛마저 꺼져 있었다.암전된 그 틈을 확인하고서야 바다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정말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오늘 된장찌개 먹고 싶다고 문자 왔었거든. 그래서 장 봐왔는데.”바다가 마트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그 안에는 애호박과 두부, 그리고 작은 된장 한 통이 담겨 있었다.시은은 그 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재료는 냉장고에 넣어둬. 내일 아침에 네가 출근하기 전에 끓여놓고 가면 되겠네.”“……고맙다.”“됐어.”인사를 가로막는 시은의 태도는 여느 때처럼 명료했다.그녀는 타인의 고마움을 길게 붙들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니었다.바다는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정리하고 찬물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물통을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은 시은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봤다.“넌 좀 괜찮냐?”시은이 고개를 돌려 바다를 응시했다.무표정한 안색 너머로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났다.“난 괜찮아.”“서툰 거짓말은 하지 마. 네 눈 밑이 벌써 퀭해.”시
49화. 자책일상은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현관문에는 이중 잠금장치가 새로 달렸고, 창문마다 방범 센서가 덧대어졌다.물리적인 세계에서 이재현은 완전히 지워졌으나, 하늘의 집 안에는 여전히 그가 머물다 간 듯한 서늘한 기운이 박제되어 있었다.하늘은 밤마다 불을 끄지 못했다.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눈꺼풀을 찔러야만 겨우 얕은 잠에 들 수 있었다.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층간소음으로 들려오는 둔탁한 진동에도 하늘은 발작하듯 깨어나 현관으로 시선을 던졌다.디지털 도어락의 '띠릭'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때면, 그녀는 숨을 멈추고 문틈 아래의 그림자를 살폈다.당장이라도 문손잡이가 돌아가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재현이 성큼 걸어 들어올 것만 같은 공포.그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이었다.재현이 남긴 '푸른 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랗게 변하다가 이내 살색 밑으로 숨어버렸다.거울 속의 피부는 말끔해졌지만, 정작 통증은 피부 아래에 똬리를 틀었다.밤이 깊어지면 재현이 거칠게 잡아챘던 팔목이 타는 듯이 뜨거웠고, 차가운 바닥에 짓눌렸던 등줄기에서는 감각 없는 통증이 되살아났다.꿈속에서의 별장은 매일 조금씩 구조를 바꾸며 하늘을 가두었다.어떤 날은 창문이 아예 없는 방이었고, 어떤 날은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실 계단이었다.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거친 호흡은 좁은 방 안을 공허하게 메웠다.하늘은 침대 모서리에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가해자는 철창 뒤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보이지 않는 창살은 여전히 하늘의 밤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다.사그라지는 멍 자국과는 대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곪아 터진 기억의 흉터는 밤마다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이제 하늘에게 필요한 것은 가해자의 처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방 안에서조차 이방인처럼 서성이는 이 지독한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결국 바다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하늘의 손을 이끌었다.현
48화. 선고일주일 뒤의 법정은 지난번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방청석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고, 취재진의 카메라도 눈에 띄게 줄었다.선고 공판에는 치열한 공방이 없다.오직 차가운 결과만이 선언될 뿐이다.이 지루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견딜 수 있는 이들, 혹은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 이들만이 그 자리를 지켰다.피고인석에 들어선 재현은 지난번과는 딴판이었다.구슬 같던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었고, 고가의 슈트 대신 입은 수의는 그의 오만함을 깎아내린 듯 수척한 실루엣을 만들었다.하지만 하늘이 방청석에 앉는 순간, 죽어있던 그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그 시선은 끈질기게 하늘의 얼굴을 핥았다.바다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하늘의 시야를 가로막았다.동생에게 닿으려는 그 불결한 집착을 물리적으로라도 끊어내겠다는 다짐이었다.재판장이 판결문을 펼쳤다.종이가 넘겨지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법정 안을 무겁게 울렸다.낭독은 느렸고, 그만큼 잔인했다.“피해자의 의사를 무시한 반복적 접근, 계획적 납치와 감금, 거주지 보안 시설 무력화, 외부와 차단된 공간의 개조….”재판장의 목소리는 메마른 무채색이었다.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았기에, 그가 읊는 문장들은 오히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재현의 죄질을 낱낱이 도려냈다.문장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재현의 어깨가 조금씩 아래로 꺾였다.그것은 반성이 아니라, 자신의 치밀한 ‘사랑’이 법이라는 건조한 논리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굴욕처럼 보였다.“피고인은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사랑이라 강변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외상과 신체적 고통을 안겨주었다.”재판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안경 너머로 피고인을 응시했다.법정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피고인 이재현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다.”순간, 바다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고함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곁에 있던 동혁의 손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47화. 재판바다는 현관에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로, 잠시 그냥 서 있었다.어둠 속에서 집이 낯설었다.같은 벽, 같은 가구인데 공기가 달랐다.뭔가가 배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성으로는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쉽게 떼지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조명을 켰다.빛이 거실을 채웠다.바다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하늘의 가방을 찾아 침실로 향하면서, 지나치는 것들을 눈으로 훑었다.현관 도어락. 손잡이. 창문 잠금장치.눈에 보이는 이상은 없었다.그게 오히려 더 찜찜했다.아무 흔적도 없이 드나들었다는 뜻이니까.세면도구를 챙기며 욕실을 한 번 봤다.칫솔, 스킨, 수건. 별것 아닌 것들인데 손이 잠깐 멈췄다.동생이 이걸 다시 쓰러 돌아와야 한다.그 생각 하나가 바다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가방에 물건을 넣으면서 그는 집 안 조명을 전부 켰다.이유는 없었다.그냥 켰다.환해야 할 것 같았다.하늘이 돌아왔을 때,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야 할 것 같았다.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취조실은 좁았다.누런 형광등 아래 재현은 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수갑을 찬 손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으로 쇠를 가볍게 두드렸다.긴장한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조찬수가 서류를 펼쳤다.도어락 입력 시도 기록. 날짜와 시각이 찍힌 로그가 열두 줄이 넘었다.틀린 번호를 하나씩 눌러가며 맞는 것을 찾아낸 흔적이었다.그 옆에는 수십 개의 발신 번호 목록. 재현이 번호를 바꿔가며 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록이었다.마지막 날짜에는 하늘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는 통신 기록이 붙어 있었다.그다음 재현이 한 일은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서류 맨 아래에는 하늘의 몸에서 확인된 멍 사진, 그리고 납치 당일 현장에서 확보된 녹음 파일 재생 기록이 있었다.조찬수는 한 장씩 재현 앞에 밀었다.재현은 내려다봤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전 누나를 지키려고 했던 것뿐이에요."목소리가 낮고 차분했다.억울
46화. 새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새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동혁의 말대로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감각이 기억하는 공포는 예고 없이 몸을 짓눌렀다."팀장님, 저는…, 저는 제가 그 문을 열어준 줄 알았어요.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서 다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줄 알고….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하늘의 목소리가 젖은 종이처럼 찢겨 나왔다.재현이 도어락을 누르던 그 경쾌한 기계음은 그녀에게 있어 자신을 향한 불신이자 낙인이었다.동혁은 그런 하늘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침대 난간 너머로 시선을 낮췄다."하늘 씨 잘못 아닙니다. 이재현이 비정상적이었던 거예요. 지문을 읽든, 소리를 듣든… 놈은 처음부터 하늘 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동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하늘 씨가 연 문은 없어요. 그러니 자신을 가두지 마세요."그 말에 참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오빠 앞에서도, 형사 앞에서도 보이지 못했던 가장 깊은 곳의 자책이었다.동혁은 손을 뻗어 하늘의 떨리는 손등 근처에 살포시 얹었다.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어주는 적당한 거리의 온기가 오히려 하늘을 숨 쉬게 했다.한참을 울던 하늘이 진정될 때쯤, 병실 밖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바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돌아온 조찬수 형사였다.그는 문틈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확인하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깨어났군요. 몸은 좀 어때요?"조찬수의 물음에 하늘은 젖은 눈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조찬수는 침대 발치에 서서 수첩을 꺼내려다,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지금은 취조보다 안정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이상현 씨는 돌아갔습니다. 법대로 하겠다고 못 박아 뒀으니 다시는 병실 근처에 얼씬도 못 할 겁니다. 그리고…."조찬수는 잠시 동혁을 힐끗 본 뒤 말을 이었다."유하늘 씨, 이재현은 이제 못 나옵니다."단호한 목소리가 병실의 정적을 갈랐다.하
45화. 드디어 열린 새장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밴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바다는 침대 옆 보조 의자에 몸을 구부린 채, 창백하게 질린 하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힘없이 늘어진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만이 동생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바다는 흐릿해진 시야를 닦아낼 생각도 못 한 채, 하늘의 손등 위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병실 구석에서 묵묵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조찬수 형사가 나직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이재현의 구속은 피하지 못할 겁니다.”조찬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위로보다는 형사로서 내리는 판결에 가까운 확신이었다.“현장 체포에 증인들도 확실하고, 확보한 음성 파일이랑 아파트 CCTV 동선까지 일치합니다. 변호사 군단을 데려와도 이번엔 못 빠져나갑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그때, 정적을 깨고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고가의 코트를 걸친 중년의 남자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이닥쳤다.이재현의 아버지, 이상현이었다.그는 병실 안의 공기를 살피기도 전에 바다의 앞으로 달려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둔탁한 소리가 타일 바닥을 울렸다.“제가 자식놈을 잘못 키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이상현은 바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 손을 내밀었지만, 바다는 혐오감이 서린 눈으로 그 손을 피해 의자를 뒤로 물렸다.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 비굴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바다는 입술을 짓씹었다.아들은 제 죄를 정당화하며 비웃고, 아비는 그 죄를 돈과 권력으로 덮으려 무릎을 꿇는다.부자(父子)가 보여주는 이 기만적인 연극의 형태는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바다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차갑게 식어 있었다.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리는 바다를 대신해 조찬수가 앞을 막아섰다.“이미 모든 증거와 증인이 확보된 사건입니다. 아드님을 정말로 생각하신다면, 이제라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