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요즘 지수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수 자신을 위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몸이었다. 수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난임 치료용 호르몬제를 끊으면서 지독했던 몸의 부종이 썰물처럼 가라앉았다. 약 부작용으로 올라왔던 피부 트러블이 사라지자 본연의 맑은 안색이 돌아왔고, 체계적인 식단과 운동은 그녀에게 20대 시절의 탄탄하고 우아한 몸매를 빠르게 되돌려주었다.
거울 속의 지수는 더 이상 초라한 피해자가 아니었다.지수의 일상이 도진의 궤도에서 벗어나 제 자리를 찾아갈수록, 역설적으로 도진은 초조해졌다. 지수의 무관심이 짙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 하나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오늘 저녁 나가서 먹어. 당신이 좋아하는 일식당 ‘만월’ 예약했어.”
도진의 연락에 지수는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그의
CB 대회의실의 차가운 정적 속, 테이블 위에는 찰스 킴과 외부 디자이너 팀이 밤을 새워 수정해 온 메인 컬렉션 스케치 패널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다시 제출한 스케치들입니다, 대표님."상석에 앉은 도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그의 손가락 끝에 디자이너들의 침이 바짝 말라갔다.도진이 마침내 첫 번째 스케치 패널을 집어 들었다. 찰스 킴이 제안한 메인 아우터 라인이었다. 지난 회의 때의 과격한 비대칭 절개선은 대폭 수정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카라와 어깨선 라인에 찰스 특유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디테일이 남아있었다."찰스.""예, 대표님.""어제보다 훨씬 낫군."도진의 입에서 의외의 긍정이 나오자 찰스 킴의 어깨가 슬며시 올라갔다. 하지만 이어진 도진의 말은 어김없이 칼날 같았다."하지만 이 트위드 소재 매치는 빼. CB의 클래식 라펠에 거친 트위드를 얹으면 오버핏이 아니라 그냥 옷이 무거워 보여. 원단은 우리가 기존에 쓰던 160수 울 숄더로 가고, 대신 당신이 쓴 이 비대칭 카라 각도를 5도만 낮춰서 봉제선 안으로 숨겨. 그러면 걸을 때만 당신의 개성이 살짝 비칠 테니까."도진은 망설임 없이 붉은색 펜으로 스케치 위에 수정선을 쓱 그었다. 도진의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겉돌던 찰스의 개성이 CB라는 단단한 틀 안으로 절묘하게 이식되어 갔다."이 메인 아우터 피스는 승인(Pick)이다. 방금 고친 스펙대로 패턴실에 넘겨.""……알겠습니다."자존심 센 찰스조차 군말을 할 수 없었다. 도진의 피드백은 감정적인 꼬투리가 아니라, 옷의 구조와 상업성, 그리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압도적인 안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이어서 신입 및 경력 디자이너들이 가져온 스케치들의 검수가 숨 가쁘게 이어
같은 시각, 제이아우라 대회의실의 공기는 CB와는 또 다른 의미로 뜨겁게 과열되어 있었다.제이아우라가 브랜드의 명운을 걸고 처음으로 내놓는 ‘여성복 메인 라인’의 첫 기획 회의. 총괄 책임자인 지나 수석과 CB 등 대형 브랜드 출신의 이직 디자이너들, 그리고 중소 패션 업체 출신의 현장파 디자이너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신입 디자이너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지나 수석님, 오트쿠튀르 감성은 명품관 팝업 행사에서나 먹히는 겁니다! 저희가 현장에서 굴러라며 체득한 건 시장에서 당장 매출을 찍어내는 '입을 수 있는 옷(Wearable Look)'이에요. 첫 컬렉션부터 이렇게 웅장한 드레스 라인과 하이엔드 테일러링만 고집하시면 대중성은 어디서 찾습니까?"중소 브랜드 팀장 출신의 이직 디자이너가 시안을 탁자에 툭 던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프랑스 유명 패션하우스 출신이자 엘리제의 수제자인 지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했다."대중성이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스파(SPA) 브랜드 스타일을 베껴 오자는 말씀인가요? 유진 씨의 '호프' 라인이 이미 주얼리에서 대중적 매출을 든든하게 견인하고 있고, 남성복 역시 정갈한 클래식 수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여성복 메인 라인은 제이아우라라는 브랜드의 수준과 우아함을 증명하는 격조 높은 기둥이 되어줘야 해요. 시작부터 타협하면 브랜드 가치는 그대로 하향 평준화됩니다.""타협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고고한 프리미엄만 찾다가 재고 싸이고 브랜드 휘청이는 거 한순간이에요!""시장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핑계로 평범한 기성복을 내놓을 거라면, 바이어들이 왜 굳이 제이아우라의 여성복을 찾겠습니까?"실크와 트위드, 스트리트 감성과 드레스 라인이 한데 엉킨 무드보드 위로 날 선 언성들이 오갔다. 서로 다른 패션 현장에서 뼈가
CB 대회의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이번 컬렉션의 첫 단추인 '시즌 컨셉 및 주제 선정 회의'가 한창이었다.프로젝터 화면에는 유명 해외 브랜드에서 억대 연봉을 주고 스카우트해 온 신임 수석 디자이너 찰스 킴이 준비한 무드보드(Mood Board)와 대형 키워드들이 떠 있었다.[주제: Neo-Vanguard (새로운 전위)]화려하고 파격적인 실루엣, 과감한 비대칭 절개선, 그리고 거친 트위드가 매치된 무드보드를 보며 찰스 킴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갔다."이번 시즌의 주제는 '새로운 전위'입니다. 뉴욕 트렌드 쇼의 핵심 기류를 반영했죠. 아방가르드한 절개선과 거친 트위드 매치가 시청자들과 바이어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을 겁니다."회의실 안의 모든 디자이너가 찰스 킴의 명성에 눌려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석에 앉아 있던 도진의 미간은 갈수록 깊게 패어 들어갔다. 도진은 펜을 든 손가락으로 툭, 툭, 정적을 깨며 탁자를 두드렸다."찰스."도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좋아. 다 좋은데, 너무 유행을 따라가지 마. 난 이번 기회에 CB의 색에 당신들의 개성을 한 스푼 더하길 바라는 거지, 이렇게 주제부터 전부 뒤집고 싶은 게 아니야."도진이 무드보드를 가리키며 차분하지만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햇살이 투명하게 비쳐 드는 제이아우라의 대표실.서류를 검토하던 지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진우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어제부로 강도진이 목매달고 있던 유럽의 핵심 원자재 기업, 우리 쪽으로 인수 절차 완전히 끝났습니다."진우의 싱거운 듯 담담한 말에 지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럽 명품 브랜드들조차 원단을 확보하기 위해 줄을 서는 세계 최고의 직물 기업이었다. 진우는 탁자 위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가볍게 밀어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내 사인 하나면 당장 CB 쪽에 들어가는 다음 시즌 원단 납품을 무기한 지연시키거나 아예 취소해버릴 수 있어. 피를 말려 죽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이죠. 지수 씨 생각은 어때?"서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아뇨, 진우 씨. 납품은 계약대로 진행해 주세요.""역시 당신이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았어."진우는 다시 펠레로사의 서류를 챙겼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호기심 어린 빛이 감돌고 있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한 길을 갔으면 하는 내 욕심도 있었어."진우의 말에 지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강도진이 사람을 버리고 짓밟는 그 오만함과 이기심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하지만……."지수의 눈동자에 서늘하면서도 명확한 불꽃이 일었다."그 사람이 디자인을 보는 안목과 사업가로서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각만큼은 진짜예요. 그래서 제가 CB가 힘들 때 도와준 것이기도 하고요. 그 점만큼은 인정했었으니까요. 만약 원자재를 틀어막아서 이기면, 강도진은 평생 '내가 디자인에서 진 게 아니라 더러운 자본 싸움에서 밀린 것뿐'이라고 핑계를 댈 거예요."지수는 진우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진우의
지수의 시야에서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현수야! 현지야! 예인아!"밀려드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아이들의 작은 정수리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을 깨달은 순간, 지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어떡해…… 진우 씨, 어떡해요! 애들이…… 애들이 사라졌어요!"지수는 심장이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듯한 극심한 패닉에 빠져 비틀거렸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며 눈앞이 하얗게 노이즈처럼 일렁였다. 세상이 온통 무너져 내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지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렸다.그때, 진우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길이 지수의 떨리는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지수 씨, 정신 차려요. 괜찮습니다. 나 좀 봐요."진우의 낮고 서글서글하지만 굳건한 목소리가 지수의 귓가를 울렸다. 진우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빠르게 보안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이것 좀 봐요. 애들 폰에 미리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깔아뒀습니다. 화면 보세요. 멀지 않은 곳에 다 같이 모여 있어요."화면 속, 반짝이는 푸른 점들이 놀이공원 중앙 광장 벤치 쪽에 멈춰 서 있었다. 지수는 그제야 막혔던 숨을 터뜨리며 참았던 눈물을 훔쳐냈다.진우의 손을 꼭 잡고 달려간 벤치에는, 도망친 수진을 놓치고 길을 잃어 울먹거리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세 아이가 모여 있었다.지수는 주저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한꺼번에 품에 끌어안았다."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아이들의 작은 몸을 끌어안은 지수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진심 어린 온기와 떨림을 느낀 현수와 현지, 예인이도 지수의 목을 꼭 껴안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들어온 옛 아파트.그러나 텅 빈 거실 한복판에 홀로 선 수진을 맞이한 것은 환상 속의 따스함이 아닌, 가슴을 옥죄어 오는 서늘한 고독과 케케묵은 먼지 냄새뿐이었다.수진은 주저앉아 멍하니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과거의 일상을 찾기 시작했다.거실 한구석, 낡은 벽지 위에는 각기 다른 색펜으로 그어진 작은 선들과 그 옆에 삐뚤삐뚤 적힌 날짜들이 남아 있었다. 현수와 현지가 하루가 다르게 자랄 때마다 진우와 함께 웃으며 키를 재주던 흔적이었다.수진은 홀린 듯 아이들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마다 두 아이를 양옆에 누이고 잠들 때까지 읽어주던 동화책 한 권이 겉표지에 까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손때 묻은 페이지마다 아이들의 냄새가 묻어나는 듯했다.욕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거품 놀이를 위해 진우가 큰맘 먹고 설치해 주었던 커다란 욕조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답답하다'며 제 발로 차버린 추억들이 하나둘씩 가시가 되어 수진의 온몸을 찌르고 들어왔다.‘내가…… 도대체 뭘 버리고 간 거지?’이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지독한 허탈감과 절망이 수진의 이성을 짓눌렀다."아니야. 다시 찾을 수 있어. 진우는 날 버리지 않아. 그래, 우리에겐 아이들이 있잖아. 애들도 분명…… 내 온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스스로 만들어낸 정교한 망상이 눅눅한 절망을 빠르게 덮어버렸다. 수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진우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아 전화는 툭 하고 끊겨버렸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문자가 도착했다.[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 전화하지 마.]차가운 답장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전날 시어머니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지수는 K국에 있는 오빠 이지현에게 연락을 했다. " 오빠~ 잘 지내? 너무 오랫만에 연락했지? 실은 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 지금 K국은 아침 6시였다. 지현은 시차도 잊은 채 걸려온 동생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우리 공주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줘야지. 무슨 일인데. 말만해. 오빠가 다 처리해 줄께."여전히 자신을 아껴주는 오빠의 음성이 지수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 오빠 나 아이가 생기면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기
3일간 안정을 취한 지수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거울 앞에 선 지수의 차림새는 단조로웠다. 연한 하슬색 원피스에 검은색 C사의 핸드백이 전부였다. 초췌해진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ㅇ낳았고 푸석해진 머릿결과 여전희 볼록하게 남아있는 복부는 지수를 실제보다 훨씬 지쳐보이게 했다.누가 이모습을 보고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라 할까. K국의 공주님으로 불리던 지수는 이제 A국의 가정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뒤로 한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집을 나섰다.그녀의 차는 도진이 3년전 결혼 기념으로 사준
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도진과 전화를 마친 지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익숙한 번호가 아닌, 철저히 숨겨두었던 가른 번호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실장인 혹시 오늘 CB 그룹과 투자 회의가 잡혀 있나요? "라고 물었다. " 네 사장님. 오늘 오후에 미팅이예정되어 있습니다. 혹시 변동사랑이 있으신가요?지수의 입가에 서늘안 미소가 번졌다. 도진이 그토록 화를 내며 중요하도고 외쳤던 미팅은 역시나 지수의 RV인벤스먼트와의 미팅이었다. " 네 변동 사항이 있습니다. 미팅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대신 계약서에 싸인은 하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