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이른 아침, 슬비는 지수의 연락을 받았다.
[나 박진우 씨를 만나고 싶어.]그날 오후, 지수와 진우는 A시의 정막한 레스토랑 ‘가람’에서 마주 앉았다.
“반갑습니다. RV의 최대 주주 이지수라고 합니다.”
진우는 지수의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에 멈칫하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박진우라고 합니다. 주주님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저 또한 월가의 '미더스의 손'이자, M&A 업계의 ‘사신’이 이렇게 숨죽이며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지수의 서늘한 인사에 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주위를 경계하는 맹수의 눈빛. 그는 지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뭐, 숨길 것도 없지요. 슬비가 조사한 자료를 기억할 뿐이에요.”진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투자자로서
진우는 어떤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단지 돌아온 집이라 믿었던 곳에는 수진이 남긴 서늘한 배신감만이 감돌았다. 아이들의 흔적이 남은 거실 바닥에 앉은 진우는 수납장 깊숙한 곳, 이중 바닥을 들추어 먼지 쌓인 노트북 한 대를 꺼냈다. 7년 전, 가족이라는 평범한 행복을 위해 스스로 전원을 내렸던 진우의 ‘진짜 세계’였다.위잉—.노트북이 돌아가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화면 위로 복잡한 숫자들과 영어로 된 금융 지표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때 세계 경제의 거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월가의 사신, 박진우의 개인 서버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진우의 눈동자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차갑게 가라앉았다.“모래성 치고는 꽤 화려하게 지어놨군.”진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수가 말했던 ‘회수’의 의미를 이제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진이 이끄는 CB 그룹은 토탈 럭셔리 패션을 지향하며 급성장했지만, 그 화려함은 결국 지수의 자산과 인맥이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다.라이징 패션 그룹이라는 명성은 지수가 닦아놓은 유럽의 배타적인 유통망 위에서만 유효했고,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독창적인 예술성은 수진이 짓밟은 유진의 재능을 약탈해 세운 가짜 기념비였다. 도진은 지수가 깔아준 비단길 위에서, 유진의 피눈물로 빚은 가면을 쓴 채 제왕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뿐이다.진우는 주저 없이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을 넘기기 전,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심이 섰나요?”마치 진우가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한 물음이었다. 진우는 도진의 제국이 그려진 모니터를 응시하며 낮게 대답했다. “제 아이들까지 그 모래성 속에 가두겠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좋습니다. 그럼, 함께하시죠”지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요즘 지수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수 자신을 위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가장 먼저 변한 것은 몸이었다. 수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난임 치료용 호르몬제를 끊으면서 지독했던 몸의 부종이 썰물처럼 가라앉았다. 약 부작용으로 올라왔던 피부 트러블이 사라지자 본연의 맑은 안색이 돌아왔고, 체계적인 식단과 운동은 그녀에게 20대 시절의 탄탄하고 우아한 몸매를 빠르게 되돌려주었다. 거울 속의 지수는 더 이상 초라한 피해자가 아니었다.지수의 일상이 도진의 궤도에서 벗어나 제 자리를 찾아갈수록, 역설적으로 도진은 초조해졌다. 지수의 무관심이 짙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 하나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오늘 저녁 나가서 먹어. 당신이 좋아하는 일식당 ‘만월’ 예약했어.”도진의 연락에 지수는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그의 배려에 감동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비즈니스 미팅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지수는 도진이 그토록 원하는 입양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저녁 6시, 외출 준비를 끝내고 현관을 나서려던 지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진이 아닌 그의 비서였다.“사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갑작스러운 긴급 회의가 잡히시는 바람에…… 저녁 식사는 혼자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었다. 지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슬비를 불러 ‘만월’로 향했다. 예약된 자리를 버리기엔 그곳의 요리가 아까웠고, 혼자보다는 마음 맞는 친구와 나누는 술잔이 그리웠기 때문이다.그 시각, 도진은 ‘긴급 회의’가 아닌 응급실에 있었다. 이사 온 포스트 빌리지의 수영장 근처에서 놀던 수진의 아이, 현수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만월의 창가 자리, 지수는
새벽 어스름이 진우를 비추었다. 전날 집에 돌아온 이후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방, 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현수의 작은 양말 한 짝을 손에 쥔 모습 그대로였다. 밤새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의 정신을 깨운 것은 무심하게 울려 대는 아이들의 등원 시간 알람 소리였다.진우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수도 하지 못한 채 헝클어진 머리로 아이들이 다니는 ‘햇살 유치원’으로 달렸다. 지금 당장 아이들을 확인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현수 아버지, 어머나! 현수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갑자기 퇴소 처리가 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현수랑 현지 너무 보고 싶네요.”아이들이 있을 곳이라 믿었던 유치원에는 공허한 안부만이 남아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수진의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장모님, 저 박 서방입니다. 건강하시죠?” “박 서방, 웬일이야? 이번 주 주말에 수진이랑 애들 데리고 와. 우리 강아지들 보고 싶네.”장모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곳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진우의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세상 천지 그 어디에도 아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수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그 시각, 수진은 아이들을 연간 교육비만 수천만 원에 달하는 ‘로열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도진이 선물해 준 ‘포스트 빌리지’ 6동. 그곳은 수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 최고급 수입 가구로 채워진 거실, 그리고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욕실까지. 수진만을 위한 완벽한 안식처였다.쇼핑 중이던 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우였다. 차단하고 싶었지만, 이혼 서류를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수진은 짜증 섞인 문자를 남겼다.[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 네 목소리 듣는 것도 소름 끼쳐.] [만나자. 이혼 문제
이른 아침, 슬비는 지수의 연락을 받았다. [나 박진우 씨를 만나고 싶어.]그날 오후, 지수와 진우는 A시의 정막한 레스토랑 ‘가람’에서 마주 앉았다.“반갑습니다. RV의 최대 주주 이지수라고 합니다.”진우는 지수의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에 멈칫하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박진우라고 합니다. 주주님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저 또한 월가의 '미더스의 손'이자, M&A 업계의 ‘사신’이 이렇게 숨죽이며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지수의 서늘한 인사에 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주위를 경계하는 맹수의 눈빛. 그는 지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뭐, 숨길 것도 없지요. 슬비가 조사한 자료를 기억할 뿐이에요.”진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투자자로서의 명성은 몰라도, 기업 사냥꾼으로서의 과거는 그가 가장 지우고 싶은 낙인이었다. 숫자로만 보았던 데이터 뒤에 ‘사람의 삶’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자신의 판단으로 해고당한 직원의 분신자살 기사를 본 뒤였다.‘내가 하는 일이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인가.’그 자책 끝에 화려한 월가를 떠나 평범한 은행원으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저를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박진우씨가 다시 손에 피를 묻힐 각오가 되어 있는지 궁금해서요.”지수의 직설적인 질문에 진우는 말을 잃었다.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기야하나 고민은 했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요구는 예상치 못했다. 머뭇거리는 진우를 보며 지수가 다시 쐐기를 박았다.“진우 씨는 당신의 와이프를 얼마나 믿나요?”몇일 전 이혼을 이야기하던 수진의 모습이 떠올라 진우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는 제 아내를 믿습니다.
박진우가 무너져가는 가정을 붙잡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지수는 빼앗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Z의 복귀를 알릴 무대가 필요해요."비서가 숨을 들이마시며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수의 예전 활동명인 ‘Z’. 그 이름이 말하는 순간 지수의 눈빛에 서늘한 생기가 돌았다."여왕의 귀환이군요. 마침 한 달 뒤에 열리는 프라이빗 주얼리 쇼 'The Origin'에서 Z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이 있습니다. 업계 거물들만 모이는 자리라 복귀 무대로는 최적입니다.""한 달 뒤라… 딱 좋군요."지수는 책상 위에 놓인 노란 장미를 응시했다. 싱싱하다며 큰소리치던 도진의 호언장담과 달랐다. 시들어가는 꽃잎의 끝동은 이미 말라붙어 추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지수는 연필을 들어 거침없이 스케치북 위에 선을 그어나갔다.그녀가 선택한 메인 스톤은 5캐럿의 선명한 옐로 다이아몬드였다. 지수는 그 노란 보석을 중심에 두고, 마치 꽃잎이 비명을 지르며 벌어지는 듯한 기괴하고도 화려한 형상을 그려 넣었다. 통의 주얼리가 추구하는 대칭의 안정감 따위는 철저히 배제된, 파괴적인 비대칭의 미학이었다."여기에… 안개꽃을 더해야겠어."안개꽃은 수백 개의 멜리 다이아몬드(Melée Diamond)로 표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평범하지 않았다. 노란 장미를 감싸 안으며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 아니라, 마치 안개꽃이 장미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듯한 위태로운 구도였다.세밀한 마이크로 파베 세팅 기법을 사용하여 금속의 질감은 지우고, 오직 다이아몬드의 파편 같은 광채만이 장미를 짓누르게 설계했다. 특히 장미의 줄기는 블랙 로듐(Black Rhodium)으로 도금하여, 화려한 꽃잎과 대비되는 서늘하고 어두운 상처를 형상화했다. 작품의 이름은 ‘이별’. 그것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
조립을 마친 진우는 현수가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수진과의 대면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만, 여전히 그는 이 집의 그림자가 되어서라도 가정을 지탱하려 애썼다. 자신이 깎아 먹은 자존심의 조각들이 이 집의 평화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더 낮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집으로 돌아온 수진은 거실 한복판에 완벽하게 조립된 전동차를 보고 흠칫 놀랐다. 진우가 다녀간 것이 분명했다. 수진은 조립된 나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진우의 지독한 성실함이 오히려 징그럽게 느껴졌다.“이렇게까지 해서 붙잡고 싶나? 구질구질하게.”수진은 이 집에 자신의 흔적 하나 남겨두지 않기 위해 평소에는 열어보지 않았던 낡은 수납장을 열었다. 미련을 도려내는 작업은 빠를수록 좋았다. 수납장 구석,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가죽 사진첩 하나가 손에 잡혔다.사진첩을 펼치자 앞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들의 사진이었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고 있는 진우를 보며 찰나의 그리움이 스쳤지만, 수진은 이내 독하게 사진들을 한 장씩 찢어버리기 시작했다.찌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과거의 파편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중간을 넘기자, 전혀 다른 세계의 풍경이 펼쳐졌다. 사진 속 배경은 세계 금융의 중심, 뉴욕 월스트리트였다.수진의 눈이 커졌다. 사진 속 남자는 지금의 구질구질한 박진우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테일러링 된 슈트를 입고, 세계적인 투자 은행의 로고가 박힌 빌딩 앞에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진우였다.“……이게 뭐야? 왜 박진우가 뉴욕에 있어?”사진첩에서 사진을 꺼내는 순간, 메일 주소만 적힌 순백의 명함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명함을 집어 든 수진은 뒷면에 적힌 메모에 시선이 멈췄다.[The king returns to his throne. (왕이 왕좌로 돌아간다.)]수진의 머릿속이 어지러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