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귀한 대군의 후회: Chapter 271 - Chapter 280

406 Chapters

[268화] 지안의 제단(1)

 “다녀오겠습니다, 부인.”아침 햇살이 마당을 비출 무렵.이헌은 평소처럼 서연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궐로 향했다.수십 명의 흑위대와 호위 무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대군저의 정문을 빠져나갔다.“예. 무사히 다녀오십시오.”서연은 대문이 굳게 닫힐 때까지, 완벽하고 유순한 아내의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하지만 육중한 나무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히고 이헌의 기척이 사라진 순간.“…….”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다정한 미소가, 마치 거짓말처럼 서늘하게 얼어붙어 바스러졌다.온기가 완벽하게 소거된 텅 빈 눈동자.서연은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서늘한 눈빛으로 대군저의 깊은 후원 쪽을 응시했다.그곳에는 이헌이 철저하게 자물쇠를 채워두고, 그 누구의 출입도 엄격하게 금지한 은밀한 별채가 하나 있었다.『저곳은 낡고 무너질 위험이 있으니, 부인께서는 절대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과거, 그녀가 무심코 후원을 산책하다 그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이헌은 사색이 되어 달려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었다.그때는 그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과잉보호라 여겨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었다.‘아니. 무너질 위험 따위가 아니었지.’서연의 파란 입술 사이로 서늘한 헛숨이 새어 나왔다.그곳은 이헌이 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진실을 숨겨둔, 그 미치광이의 은밀한 무덤일 것이 분명했다.“무영 대장.”서연이 마당 한편을 지키고 서 있던 흑위대장 무영을 서늘하고 맑은 목소리로 불렀다.“예. 대군 부인 마마. 부르셨사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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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지안의 제단(2)

 문고리에는 무식할 정도로 커다랗고 무거운 철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철컥. 끼기긱.열쇠를 구멍에 맞춰 돌리자, 둔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자물쇠가 무겁게 풀려났다.서연은 잠시 숨을 고르며,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이 문을 여는 순간.저 사내가 자신을 껍데기 삼아 꽁꽁 숨겨두었던, 그 끔찍한 지옥의 진짜 실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끼이이익-.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던 무거운 나무문이, 낡고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열렸다.쾌한 먼지 냄새와, 짙은 묵향, 그리고 마른 종이 냄새가 훅 밀려왔다.서연은 떨리는 걸음으로 별채의 어두운 내부로 들어섰다.먼지 쌓인 창호지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어와, 방 안의 풍경을 아주 조금씩 잿빛으로 비추기 시작했다.“이것들은…….”방 안을 둘러본 서연의 입술 사이로 경악에 찬 탄식이 새어 나왔다.조선의 섭정이 머무는 은밀한 공간이라기엔, 내부의 풍경은 너무도 기괴하고 이질적이었다.사방에 널브러진 물건들은 단 한 번도 조선에서 본 적 없는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구리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수천 개의 톱니바퀴가 얽혀 있는 부서진 쇠시계.투명하고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괴상한 형태의 둥근 잔들.그리고 벽면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먹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정체불명의 풍경화들.서연은 홀린 듯 그 풍경화 앞으로 다가갔다.그림 속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아오른 뾰족한 철탑과 사각의 거대한 건물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말이 없는 네 바퀴 달린 수레가 거리를 메우고 있는,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괴이한 서역의 풍경.아니, 그것은 조선도,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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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화] 바스러진 영혼, 껍데기의 진실(1)

 지안. 지안. 지안.별채의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수십 장의 초상화들이, 일제히 서연을 내려다보며 기괴한 비웃음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하아…… 하아…….”서연은 차가운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이목구비를 가졌으나, 결코 자신이 지어본 적 없는 오만하고 당찬 눈빛을 한 이질적인 여인.그 소름 끼치는 제단 앞에서, 서연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이것은…….”초상화가 걸린 벽면 아래의 낡은 서안과 바닥에는.수십, 아니 수백 장에 달하는 낡은 한지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그것은 누군가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먹물이 번지고, 종이가 찢어질 듯 꾹꾹 눌러 쓴 필체.곳곳에 시커멓게 말라붙은 핏자국과, 눈물이 떨어져 글씨가 기괴하게 일그러진 흔적들.그것은 이헌의 필체였다.조선의 섭정인 그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이 은밀한 별채에 홀로 숨어들어 밤새워 써 내려갔을 그 광기 어린 참회록(懺悔錄).서연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하얀 손을 뻗어, 바닥에 흩어진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나 차태경은, 기어이 송지안을 죽이고 말았다.』종이의 가장 첫 줄에 적힌 문장을 읽는 순간.서연의 눈동자가 기악하며 찢어질 듯 커졌다.“차태경……? 송지안……?”차태경.그것은 이헌의 이름이 아니었다. 조선 왕실의 그 어떤 대군의 이름도 아니었다.그리고 송지안. 어젯밤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그 낯선 망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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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화] 바스러진 영혼, 껍데기의 진실(2)

 그것만이 살인마인 내가, 이 숨 막히는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길이었으니까.』종이를 쥔 서연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르게 변해갔다.종이 위로 후드득,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이헌의 먹물 글씨를 기괴하게 번지게 만들었다.과잉보호.자신이 걷는 길목의 돌멩이를 치우게 하고, 비단옷의 질감에 집착하며 수라간 상궁들의 목을 치려 들었던 그 병적인 애정.사랑이 아니었다.자신을 향한 헌신이 단 1푼도 아니었다.그것은 그저, 자신이 부수어버린 죽은 여자의 완벽한 대용품을 흠집 없이 보존하려는. 미치광이 수집가의 역겨운 강박증에 불과했다.서연은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가장 최근에 쓰인 듯한 참회록 한 장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그 종이에는 유독 많은 눈물 자국과, 손톱으로 긁어 파낸 듯한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그곳에는 이헌의 가장 추악하고, 가장 솔직한 내면의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그녀가 환하게 웃어줄 때마다.그녀가 나를 깊이 연모한다 속삭이며 그 얇은 팔로 나를 안아줄 때마다.나는 지안이가 나를 용서했다고 착각한다.』“……!!”『그녀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나는 과거의 지옥을 잊고 달콤한 안식을 누린다.나는 너무도 비겁하게도…… 이 완벽한 껍데기에 매달려, 죽은 지안에게 구원을 구걸하고 있다.』“아…… 아아…….”서연의 입술 사이로,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처절한 비탄이 터져 나왔다.『조선의 서연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음을 안다.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이 껍데기가 주는 달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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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화] 비겁한 침묵, 잔혹한 확답(1)

 조선의 심장, 궐의 대전.조정 대신들이 모인 어전 회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섭정 이헌의 귓가에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단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어젯밤, 독주에 취해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침에 본 서연의 미소는 평소처럼 다정했지만, 이헌의 본능은 계속해서 불길한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다.그때였다.대전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흑위대 병사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전하! 대, 대군 마마!”“무슨 소란이냐. 어전 회의 중인 것이 보이지 않느냐!”이헌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으나, 병사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덜덜 떨며 다급하게 외쳤다.“대군저에서…… 대군저에서 급보가 당도하였사옵니다!”“급보라니. 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이냐!”이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그, 그것이…… 부인 마마께서…… 무영 대장을 협박하여 열쇠를 빼앗으셨다 하옵니다.”“뭐라?”“부인 마마께서…… 후원의 금지된 별채 문을 여시고, 홀로 그 안으로 드셨사옵니다……!”“……!!”병사의 보고가 끝나는 순간.이헌의 귓가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완벽하게 소거되었다.시간이 멈춘 듯, 대전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별채.’그 두 글자가 뇌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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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화] 비겁한 침묵, 잔혹한 확답(2)

 “오, 오해입니다! 다 오해입니다!”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방바닥에 널브러진 참회록 종이들을 자신의 두 손으로 허겁지겁 긁어모으기 시작했다.마치 이 종이들을 치워버리면 진실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 믿는 바보처럼.“이것들은…… 이것들은 다 헛소리입니다! 제가, 제가 미쳐서 쓴 헛소리입니다!”“…….”서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저 무릎을 꿇고 짐승처럼 오열하며 종이를 주워 담는 사내의 정수리를, 텅 빈 눈으로 묵묵히 내려다볼 뿐이었다.“제가 잠시 악몽에 시달려…… 마음의 병이 깊어져 헛것을 보고 쓴 것입니다! 맹세합니다! 여기 적힌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진실이 아닙니다!”쾅!이헌이 바닥에 자신의 이마를 냅다 찧었다.쾅! 쾅! 쾅!“살려주십시오……! 제발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그는 자신의 이마가 찢어져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애원했다.“이건 다 가짜입니다! 내가 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은애합니다! 당신만을 은애합니다! 제발 이 찢어 죽일 놈의 헛소리를 믿지 마십시오……!”이헌은 서연의 발치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비비며 짐승의 통곡을 쏟아냈다.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섭정이, 한 여인의 발밑에서 제 이마를 깨부수며 처절하게 살려달라 구걸하고 있었다.하지만.그의 그 비참하고 끔찍한 발악을 지켜보던 서연의 입술이.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릿발처럼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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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화] 영원한 저주, 무너진 구원(1)

 별채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린 이헌의 짐승 같은 오열 소리만이, 죽은 듯이 고요한 방 안을 처참하게 울리고 있었다.“…….”서연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이헌의 핏덩이 같은 땀 젖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그녀의 맑았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일말의 온기도, 안쓰러운 연민도, 심지어 분노의 눈물조차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뼛속까지 시리도록 건조하고 텅 빈 경멸만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자신이 던진 마지막 확인의 질문.‘내가 지안입니까, 조선의 서연입니까.’그 질문에 이 오만한 사내는 끝내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오열하며 비겁한 침묵을 선택했다.그 비참한 침묵은, 서연의 영혼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남은 신뢰의 기둥마저 완벽하고 잔혹하게 부러뜨렸다.바스락.서연이 천천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걸음을 내디뎠다.바닥에 널브러진 수백 장의 참회록 종이들과,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초상화들이 그녀의 하얀 버선발에 밟혀 처참하게 구겨졌다.그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을 헐떡이며 오열하는 이헌의 앞까지 다가갔다.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굽혀, 얇은 두 손으로 그의 찢어진 관복 멱살을 짐승을 낚아채듯 거칠고 억세게 틀어쥐었다.“윽……! 부, 부인……!”서연의 가녀린 두 손에 멱살을 잡힌 채, 이헌의 무거운 상체가 맥없이 위로 끌려 올라왔다.방금 전 바닥에 이마를 찧어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이 서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검붉은 피가 엉망으로 뒤엉킨,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추악한 살인마의 몰골이었다.“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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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영원한 저주, 무너진 구원(2)

 아니라고.과거의 시작은 더럽고 추악한 기만이었을지라도, 지금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오직 서연 당신뿐이라고.목이 터져라 변명하고 싶었다. 그녀의 옥색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처절하게 매달리고 싶었다.“서, 서연아…… 나는, 지금의 널…… 온전히 사랑……!”이헌이 파르르 떨리는 찢어진 입술을 힘겹게 달싹이며, 쉰 목소리를 간절하게 쥐어짜 냈다.하지만.더 이상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의 성대가 차가운 쇳덩이를 삼킨 듯 콱 막혀버렸고, 그 어떤 변명의 음성도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그녀의 그 텅 빈, 모든 신뢰와 연민이 완벽하게 바스러져 버린 절망적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이헌은 자신이 지금 그 어떤 달콤한 말을 지껄여도, 이미 난도질당해 찢어진 그녀의 심장에는 단 한 글자도 가닿지 못할 것이라는 그 끔찍한 절망감을 뼈저리게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자신이 만든 끔찍한 지옥이었다.자신의 비겁한 침묵이, 자신의 이기적인 거짓말이 나를 유일하게 구원했던 그녀의 영혼을 산산조각 내버렸다.이제 와서 그녀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피를 토하며 맹세한들, 이 더러운 살인마의 뻔뻔한 고백을 그녀가 어찌 1푼이라도 믿어주겠는가.결국 이헌은 변명조차 끝맺지 못한 채, 서연의 가녀린 손에 멱살이 잡힌 채로 끅끅거리며 추악하고 비참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려댔다.“…….”그의 그 비겁하고 짐승 같은 오열을 내려다보며.서연의 입가에 맺혀 있던 서늘한 분노마저, 마치 불씨가 꺼진 한 줌의 재처럼 허망하고 차갑게 식어 내렸다.더 이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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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화] 차단된 교류, 혐오의 벽(1)

 은밀한 별채에서 이헌의 그 추악하고 끔찍한 살인과 대리 속죄의 진실이 완벽하게 폭로된 그날 이후.대군저의 안채는 마치 죽은 자들의 낡은 무덤처럼, 소름 끼치는 짙은 적막과 시린 냉기로 완벽하게 얼어붙어 버렸다.서연은 스스로 자신의 좁은 처소 문을 굳게 닫아걸고 무거운 빗장을 채웠다.그녀는 이헌과의 모든 물리적인 접촉과 교류는 물론이고, 단 한 마디의 말조차 섞지 않으며 털끝만 한 정서적인 교감마저 완벽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차단해 버렸다.하루 세 번, 끼니조차 지밀상궁이 문틈으로 간신히 밀어 넣어주는 묽은 미음 몇 숟갈로 겨우 목숨만 연명할 뿐.빛 한 줄기,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컴컴한 방 안에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금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선택한 단절이자, 그 사내를 향한 가장 차가운 형벌이었다.“……부인. 서연아.”깊은 밤.벌레 소리조차 숨죽인 안채의 서늘한 마당에는, 오늘 밤도 어김없이 이헌의 처절하고 짐승 같은 애원 소리가 구슬프고 기괴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제발…… 제발 빗장을 풀고 문 한 번만 열어다오. 네 얼굴이라도 한 번만 보게 해다오…… 제발 부탁이다.”이헌은 굳게 닫힌 서연의 처소 문밖에 짐승처럼 엎드려 있었다.조선의 무소불위 권력자이자 섭정인 그가, 매일 밤 흙먼지가 날리는 찬 바닥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닫힌 문지방에 이마를 피가 나도록 찧으며 피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내가 다 잘못했다. 처음 너를 안았을 때, 내 시작이 그토록 더럽고 비겁했다는 것, 내가 천 번 만 번 찢어 죽일 역겨운 죄다. 허나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결코 아니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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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차단된 교류, 혐오의 벽(2)

 서연이 문고리를 꽉 쥔 채, 문 너머 엎드린 이헌의 심장을 향해 가장 잔혹한 비수를 푹 꽂아 넣었다.“차라리 내 귀를 파내고 내 이름을 찢어발겨 시궁창에 버리고 싶은 끔찍한 심정이다. 이 역겨운 놈아.”“아닙니다! 부인, 서연아! 제발 아니야! 나는 지금 허상이 아니라 온전히 널…… 널 보고 있단 말이다!”“아직도 나를 이용하려 드느냐. 끝까지 나를 기만할 셈이냐.”서연의 텅 빈 목소리에 차갑고 시퍼런 살기가 감돌았다.“내가 멍청하게 네놈을 용서하고 이 문을 열어주어야, 네놈의 그 더러운 살인의 죗값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 같아서 이리 발악하는 것이 아니냐. 네 안위가 두려워서! 끝까지 나를 네 대리 속죄의 쓰레기통 도구로 써먹으려 이리 비참하고 천박하게 짖어대는 것이 아니냐!”“……!”이헌의 호흡이 컥, 하고 끊어졌다. 숨이 완벽하게 멎어버렸다.그녀의 뼈를 꿰뚫어 보는 듯한 잔혹하고 명징한 통찰 앞에, 이헌은 더 이상 그 어떤 변명도, 사랑의 고백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자신이 사랑한다고, 처음엔 아니었지만 지금은 온전한 서연 당신을 사랑한다고 피를 토하며 소리쳐도.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맹세와 눈물은, 그저 또다시 자신을 속죄의 인형으로 이용하려는 살인마의 이기적인 핑계와 발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그녀가 세운 그 거대하고 끔찍한 혐오와 경멸의 벽 앞에서는, 자신의 어떤 진심도 가장 더러운 오물처럼 튕겨 나와 짓밟혀버리고 말았다.“다시는 내 처소 앞에 얼씬도 하지 마라. 네 숨소리, 네가 뿜어내는 그 살인마의 역겨운 체취만 맡아도 끔찍한 구역질이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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