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지안. 지안. 지안.
별채의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수십 장의 초상화들이, 일제히 서연을 내려다보며 기괴한 비웃음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하아…… 하아…….”
서연은 차가운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이목구비를 가졌으나, 결코 자신이 지어본 적 없는 오만하고 당찬 눈빛을 한 이질적인 여인.그 소름 끼치는 제단 앞에서, 서연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이것은…….”
초상화가 걸린 벽면 아래의 낡은 서안과 바닥에는.
수십, 아니 수백 장에 달하는 낡은 한지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그것은 누군가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
먹물이 번지고, 종덜컹! 우당탕!불타는 협곡을 빠져나온 거대한 참나무 마차가, 눈 덮인 산길을 미친 듯이 질주하여 후방의 본영에 처박히듯 도착했다.말들의 입에서는 하얀 거품이 터져 나왔고, 마차의 바퀴는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정지! 정지하라!”마차를 몰던 흑위대장 무영이 피투성이가 된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말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치켜들었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무슨 일이냐! 대장!”“적의 기습이냐! 전방의 본대는 어찌 되었는가!”본영에 남아있던 후방 부대의 장수들과 흑위대 병사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그들의 눈에 비친 무영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온몸이 적의 피로 시뻘겋게 떡이 되어 있었고, 어깨와 팔뚝에는 화살이 꽂힌 채 부러져 있었다.“본대가…… 전방의 협곡에서 여진족 대부대의 완벽한 매복에 걸렸다!”무영이 짐승처럼 헐떡이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적의 수가 너무 많아 진형이 반으로 갈라졌다! 전하께서 홀로 적진 한가운데서 미끼가 되시어, 간신히 부인 마마의 마차만을 빼내 온 것이다!”“뭐, 뭐라? 전하께서 사지에 홀로 남으셨단 말이냐!”“어찌 대군 마마를 버려두고 온 것이냐!”장수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무영은 그들의 멱살을 틀어쥐고 피 토하듯 호통을 쳤다.“닥쳐라! 내 목숨이 열 개라도 전하를 사지에 두고 오고 싶었겠느냐! 부인 마마를 살려 후방으로 빼내라는 것이, 전하의 지엄하신 마지막 어명이셨다!”무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차의 문을 쾅, 하고 열어젖혔다.
이헌은 쏟아지는 불화살을 검으로 쳐내며, 덜덜 떨며 막아서는 무영의 멱살을 피투성이 손으로 거칠게 틀어쥐었다.“똑똑히 들어라, 무영.”이헌의 쉰 목소리에는, 조선의 권력자로서의 오만함이나 위엄 따위는 전혀 없었다.오직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사내의 가장 처절하고 핏빛 어린 각오만이 서늘하게 서려 있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내 남은 목숨을 갈기갈기 찢어 바쳐서라도. 적들의 모든 시선과 불화살을 내가 이 앞으로 몽땅 끌어당길 것이다. 네놈들은 그 찰나의 틈을 타서 부인을 무조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조건 살려서 후방으로 빼내라!”“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하께서 이리 뛰쳐나가시면 적들에게 포위되어 죽사옵니다!”“내 부인을 무사히 살려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본영으로 모시지 못하면!”이헌의 핏발 선 시뻘건 눈동자에서, 뜨거운 피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려 눈밭을 적셨다.“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네놈의 목을 단칼에 쳐버릴 것이다! 알겠느냐!”그것은 지엄한 어명이나 명령이 결코 아니었다.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세상의 유일한 빛인 여인을 제발 살려달라는. 한 사내의 피 끓는 유언이자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애원이었다.“전하아아악!”무영이 피눈물을 쏟으며 무릎 꿇고 절규했지만, 이헌은 매몰차게 마차를 등지고 몸을 홱 돌렸다.그는 바닥에 떨어져 타오르던 적군의 거대한 횃불 하나를 거칠게 집어 들고, 자신의 머리 위로 미친 듯이 빙빙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이 오랑캐 버러지 새끼들아! 내 목을 원하느냐! 내가 바로 조선의 섭정이자 도
“서연아! 고개 숙여라! 제발 눈 감아! 제발 내 품에서 살아만 다오!”시뻘건 불길이 미친 듯이 치솟아 오르는 좁은 참나무 마차 안.이헌의 피 토하는 핏빛 절규가, 폭음처럼 서연의 굳게 닫힌 귓가에 쾅쾅 무자비하게 울려 퍼졌다.그의 거대한 몸집이 서연의 가녀리고 파랗게 질린 체구를 완벽하게 덮어 외부로부터 완전히 보호하고 있었기에. 마차 밖에서 맹우(猛雨)처럼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여진족의 시뻘건 불화살들은, 얇은 적삼 하나만 걸친 이헌의 넓은 어깨와 등짝에 쉴 새 없이, 무자비하게 푹푹 박히고 있었다.푹-! 퍼억! 서걱!“으윽……! 커헉!”또다시 날카로운 화살촉이 살을 뚫고 뼈에 끔찍하게 박히는 파공음이 들릴 때마다. 이헌의 찢어진 입에서는 뜨거운 검붉은 핏물이 왈칵왈칵 짐승처럼 쏟아져 나와, 서연의 하얀 옥색 치맛자락을 시뻘겋고 처참하게 적시고 있었다.“이헌…… 너…… 대체…….”기절 직전의 서연의 눈동자가, 극도의 혼란으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자신을 그저 살인마의 더러운 속죄 껍데기로 삼았던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내.그가 대체 왜 지금, 자신의 목숨을 한낱 짚신짝처럼 던져가며 이 끔찍한 지옥 불 속에서 나를 살리려 이토록 발악하는가.‘지안’이라는 자신이 죽인 망령의 이름이 결코 아니었다.이헌은 화살을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서연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목숨을 걸고 절규하고 있었다.단단하게, 영원히 굳게 닫혀있다고 믿었던. 완벽히 잿더미로 얼어붙었다고 믿었던 서연의 심장 벽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 듯한 뜨겁고 맹렬한 균열이 빠지직, 하고 가기 시작했다.&ldqu
가장얇은 하얀 적삼 하나만 걸친 그의 넓은 어깨와 팔뚝,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예리한 화살들이 살점을 푹푹 찢고 붉은 피를 사방으로 튀겼지만, 그에게는 육신의 고통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오직, 이 끔찍한 지옥 불 속에서 또다시 나를 구원해 준 유일한 그녀를 눈앞에서 잃을 수 없다는.송지안을 잃은 뒤 서연마저 잃을 수 없다는 뼈저린 공포와 살인마의 끔찍한 트라우마만이 그의 육신을 기괴한 괴력으로 짐승처럼 움직이고 있었다.“서연아! 서연아!”이헌은 이미 시뻘건 불기둥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마차의 굳게 닫힌 문을. 은장도에 썰려 뼈가 흉측하게 드러난 피투성이가 된 맨손으로 무자비하게 우악스럽게 뜯어내고, 짐승처럼 그 불타는 마차 안으로 자신의 거대한 몸을 훅, 던져 넣었다.그 시각, 맹렬하게 불타는 마차 안.서연은 며칠 동안 곡기를 완전히 끊은 탓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으로, 덜컹거리는 마차 바닥 구석에 짐승처럼 웅크려 있었다.갑작스럽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끔찍한 파공음과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 그리고 마차 외벽에 불화살이 수십 개가 박히며 뿜어져 나오는 매캐하고 시뻘건 연기에, 숨통이 조여와 질식할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이렇게…… 나의 모든 것이 끝나는구나.’서연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매캐한 핏빛 연기 속에서도, 살기 위해 밖으로 도망치려거나 발버둥 치려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차라리 이 뜨거운 전쟁터의 지옥 불길 속에서 이름 없는 시체가 되어 뼈도 남지 않고 재가 되어버린다면. 죽은 지안의 역겨운 대용품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 이 수치스럽고 끔찍한 껍데기의 삶도 완벽하게 끝이 날 터였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될 터였다.그녀가 지독한 허무와 뼛속까지 시린 체념 속에서 아주
행군 보름째.이헌이 이끄는 수만 명의 토벌군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정면으로 온몸에 맞으며, 함경도의 가장 험준하고 가파른 산맥 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시계(視界)를 완벽하게 가리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린 좁고 위험한 협곡의 산길을, 꽁꽁 얼어붙은 발을 질질 끌며 힘겹게, 그리고 위태롭게 나아가고 있었다.“전하…… 횃불을 더 밝혀야 하옵니다. 산세가 너무도 험하고 눈보라가 심하여, 선두의 병사들이 자꾸만 낭떠러지로 발을 헛디디고 있사옵니다. 이대로면 전투도 하기 전에 낙사하는 자가 부지기수일 것이옵니다.”눈보라에 수염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흑위대장 무영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을 몰아 이헌의 곁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보고했다.이헌은 가장 얇고 차가운 하얀 적삼 단 한 벌만 걸친 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몸으로 거대한 검은 흑마 위에서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서연을 위해 모든 방한구를 마차에 던져넣은 탓에 그의 입술은 이미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하지만 그의 퀭하게 파이고 시뻘겋게 핏발 선 두 눈동자가, 시커먼 어둠이 짙게 내린 협곡의 양옆 능선을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예리하고 불길하게 훑어보았다. 무언가 직감한 짐승의 본능이었다.“아니. 당장 전군의 횃불을 모두 꺼라.”이헌의 서늘하고 낮은, 살기 어린 목소리가 매서운 칼바람을 날카롭게 갈랐다.“전하?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횃불마저 꺼버리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행군이 완벽하게 불가능하옵니다…….”“매복이다.”이헌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맹독을 가득 품은 독사처럼 무섭게 번뜩였다.“산짐승의 작은 숨소리나 발자국 소리조차 단 하나도 들리
이헌은 갑자기 자신의 두꺼운 가죽 갑옷의 끈을 신경질적으로 풀어 헤치고, 눈밭 위로 거칠게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저, 전하! 지금 이 눈보라 속에서 무얼 하시는 것이옵니까!”곁을 따르던 무영과 병사들이 경악하며 말렸다.하지만 이헌은 가죽 갑옷에 이어, 매서운 추위를 막아주던 두꺼운 호랑이 털옷과 명주 비단 겉옷마저 미친 듯이 벗어 내던졌다.펄럭.그의 몸에는 오직, 피투성이가 된 얇은 하얀 적삼 단 한 벌만이 남았다.살이 터지고 뼈가 시린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겉옷을 모두 벗어 던진다는 것은 스스로 얼어 죽기를 자처하는 미친 짓이었다.“전하! 그리하시면 반나절도 못 가 옥체가 얼어붙어 붕어하시옵니다! 제발 옷을 입으시옵소서!”무영이 피눈물을 흘리며 말의 고삐를 잡고 엎드렸지만, 이헌은 발길질로 그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닥쳐라! 내 목숨보다 귀한 부인이 얼음장 같은 마차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데, 나 혼자 짐승처럼 따뜻한 털옷을 입고 살아서 대체 무엇하겠느냐!”이헌은 덜덜 떨리는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이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그 두꺼운 호랑이 털옷과 겉옷들을 뭉쳐 꽉 안았다.그리고는 굳게 닫힌 마차의 작은 문틈을 아주 살짝, 부서질까 두렵다는 듯 정말 조심스럽게 열었다.“서연아…….”이헌이 덜덜 떨리는 몸으로 마차 문틈 사이를 향해 처절하게 웅얼거렸다.“이거라도 덮으십시오…… 내 체온이 남아있으니 따뜻할 것입니다…… 제발, 제발 내 눈앞에서 얼어 죽지만 마십시오…….”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자신의 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