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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버틴 힘보다 제대로 흘려보낸 힘이 남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연구실의 분위기는 전날과 조금 달랐다.어제까지는 임시 저장석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를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면, 오늘은 가주석 안에 남아 있는 역대 발테르 대공들의 마력을 하나씩 분류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에른은 새벽부터 보조 마법사 둘과 함께 가주석의 마력층을 세대별로 나누고 있었고, 긴 테이블 위에는 작은 수정판이 수십 장 늘어서 있었다.엘라는 문을 열자마자 그 광경을 보고 멈췄다.“……이걸 다 오늘 봅니까?”에른이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조금 어두웠다.“가능하면요.”엘라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몇 시부터 하셨습니까?”에른의 표정이 굳었다.옆에 앉아 있던 단테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왜 나한테 하던 걸 에른한테도 하지.”“무리하는 사람에게 하는 겁니다.”에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새벽 다섯 시쯤부터.”엘라는 시계를 봤다.그리고.에른을 다시 봤다.“지금이 아홉 시인데요.”“네.”“쉬셨습니까?”“중간에 차를.”“그건 쉬는 게 아닙니다.”단테가 아주 작게 웃었다.엘라가 바로 그를 봤다.“왜 웃으십니까?”“똑같아서.”“무엇이요?”“네가 나한테 하는 말.”엘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맞았다.정확히 같았다.그러자 단테가 이번에는 에른을 봤다.“십 분 쉬어.”에른의 눈이 커졌다.“전하?”“네가 쓰러지면 오늘 아무것도 못 하잖아.”“하지만 지금 마력층 분리 중이라—”“보조들이 계속하면 되지.”단테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직접 해야 하는 부분만 네가 하고.”엘라의 시선이 천천히 단테에게 돌아갔다.그가 바로 알아챘다.“왜.”“아무것도 아닙니다.”“그 얼굴.”엘라는 웃었다.“오늘 칭찬 아직 안 했습니다.”단테의 표정이 굳었다.“어제는 하루에 한 번이라는 규칙 없다고 했어.”“저도 규칙이라고 안 했습니다.”“그럼.”엘라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기회가 남았다는 뜻입니다.”단테가 고개를 저었다.“괜히 말했군.”그래도 에른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고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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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 있는 길도 바로 건너서는 안 됩니다

제3감시탑으로 향한 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밤새 눈은 더 내리지 않았고, 바람도 약했다. 멀리 산맥 능선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시야가 트여 있었지만, 엘라는 그게 오히려 조금 낯설었다. 북부에 온 뒤 이렇게까지 하늘이 맑은 날은 드물었다.단테는 대공성 앞에서 출발 준비를 마친 채 서 있었다. 오늘은 세리아가 먼저 고개를 끄덕여준 덕분에 별다른 실랑이는 없었다. 수면 다섯 시간 반, 두통 거의 없음, 마기 수치 안정. 외부 이동 가능.엘라는 그 말을 듣고도 마지막으로 물었다.“대공 전하.”단테가 고개를 돌렸다.“왜.”“지금은요?”단테는 이제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춥고.”“네.”“빛은 괜찮고.”“네.”“사람 소리도 괜찮아.”잠깐.“가슴 답답한 것도 없어.”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단테가 먼저 말했다.“끝?”“네.”“칭찬은.”엘라가 눈을 깜빡였다.단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아니.”“방금 기다리신 겁니까?”“아니다.”“대공 전하.”“출발하자.”단테는 바로 돌아섰다.엘라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뒤에서 휴고가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요즘 많이 달라지셨습니다.”단테의 고개가 돌아갔다.“들었어.”“들으시라고 했습니다.”“휴고.”엘라는 결국 웃었다.⸻제3감시탑까지는 전날보다 더 오래 걸렸다.첫 번째 감시탑을 지나고, 두 번째가 있는 협곡을 우회해 동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이 구역은 현재 방어선에서도 거의 벗어나 있어 사람 흔적이 적었다. 눈 위에 보이는 것은 작은 짐승 발자국과 오래된 돌기둥뿐이었다.엘라는 말을 몰면서 주변을 계속 살폈다.“눈이 녹는다고 했죠?”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시탑 반경 삼십 걸음 안쪽에서만요.”“계속?”“일정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해졌다가 다시 식고.”단테가 물었다.“주기.”“약 열두 분에서 열다섯 분.”엘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지맥 박동과 연결돼 있을 수도 있겠네요.”“가능성이 높습니다.”단테가 낮게 말했다.“살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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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길도 먼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형 탐사구가 준비된 것은 이틀 뒤였다.에른은 처음에는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제3감시탑 지하에 들어갈 장치라면 단순히 영상을 남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맥 반응, 마기 농도, 온도 변화, 고대 마법식의 활성 여부까지 동시에 기록해야 했고, 무엇보다 제어부 가까이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생겨도 스스로 멈출 수 있어야 했다.엘라는 완성된 탐사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은색 금속으로 만든 작은 구체.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고, 표면에는 아주 촘촘한 마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생각보다 귀엽습니다.”에른이 굳었다.“……귀엽습니까?”“네.”단테가 옆에서 탐사구를 봤다.“어디가.”“동그랗잖아요.”“그게 이유?”“충분하지 않습니까?”단테가 고개를 저었다.“너는 가끔 기준이 이상해.”“대공 전하께서 제 기준을 이해하려고 너무 노력하시는 겁니다.”“안 하는데.”“요즘 자주 물어보시잖아요.”단테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엘라는 탐사구를 에른에게 돌려주며 웃었다.“잘 부탁드립니다.”“네.”에른은 탐사구를 받으며 말했다.“다만 오늘은 입구에서 원격 조종만 합니다. 장치가 멈추면 사람을 보내서 찾지도 않을 겁니다.”엘라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단테가 그녀를 봤다.“이번에는 순순하네.”“장치 하나 잃는 게 사람 다치는 것보다 낫잖아요.”“예전에는 네가 직접 찾으러 갔을 것 같은데.”엘라가 잠깐 생각했다.그리고.“그럴 수도 있었겠네요.”“인정 빠르군.”“맞는 말이면요.”단테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그제야 세리아가 두 사람 사이를 끊었다.“오늘 일정 확인하겠습니다.”분위기가 바로 바뀌었다.제3감시탑.탐사구 1기.직접 지하 진입 없음.단테와 엘라는 입구에서 최소 다섯 걸음 이상 거리 유지.자연 활성 주기와 겹치면 탐사구를 즉시 멈춘다.엘라의 검은 점이 나타나면.첫 번째에 후퇴.단테의 마기 수치가 일정 기준 이상 오르면.즉시 철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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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록은 사람을 닮아 있습니다

황궁의 답은 이틀 뒤 도착했다. 이번에는 서신만 온 것이 아니었다. 황실 신성력 연구원의 비교 분석표와 에드먼드 교수가 따로 정리한 의견서, 그리고 오래된 북방 기록 복제본까지 함께 들어 있었다. 휴고가 자료 묶음을 연구실 중앙 테이블에 내려놓자 엘라는 자연스럽게 가장 위의 편지부터 집었다. “교수님 글씨입니다.” 단테가 맞은편에서 물었다. “그렇게 바로 알아?” “몇 년을 봤는데요.” “내 글씨도 알아보나.”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대공 전하 글씨요?” “그래.”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단테의 기록을 직접 훔쳐본 적은 없지만, 그가 서명한 보고서나 공식 문서는 여러 번 봤다. 반듯하고 각이 잡힌 글씨.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마지막 획이 유난히 짧았다. “압니다.” 단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어떻게.” “보고서 많이 쓰시잖아요.” “그것뿐?” “그리고.” 엘라는 조금 웃었다. “성격이랑 비슷합니다.” 단테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무슨 뜻이지.” “반듯하고.” “…….” “짧고.” “…….” “쓸데없는 말 없고.” “그건 좋은 거 아닌가.” “가끔 너무 없어서 설명이 부족합니다.” 휴고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단테가 그를 봤다. “왜 웃지.” “웃지 않았습니다.” “둘이 점점.” 엘라가 먼저 편지를 펼쳤다. “교수님 의견부터 보죠.” “말 돌리는군.” “중요한 자료입니다.” 단테는 한숨을 쉬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 에드먼드 교수의 첫 문장은 예상대로였다. 확정된 사실과 추정을 나누십시오. 엘라가 읽자마자 웃었다. 단테가 물었다. “왜.” “교수님답습니다.” 다음. 그리고 오래된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진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기록은 사실을 남기기도 하지만, 기록한 사람의 판단과 두려움과 목적도 함께 남깁니다. 엘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단테도 자연스럽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따라서 ‘무엇이 적혀 있는가’만 보지 말고, ‘무엇이 사라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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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규칙을 지키는 것만이 책임은 아닙니다

황실에 재협의 요청서를 보낸 다음 날, 엘라는 오랜만에 대공성 동관 강의실로 돌아갔다.정확히 말하면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지하 문과 선대의 기록, 우회로와 가주석만 들여다본 탓인지 강의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공간이 이상할 만큼 반가웠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북부 방어 지도와 긴 테이블, 제각기 다른 필체로 작성된 훈련 기록. 무엇보다 엘라가 들어오자 일제히 등을 펴는 어린 기사들과 실무 교육생들의 얼굴까지.“앉으세요.”그 말이 떨어져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맨 앞에는 로웬이 있었다.엘라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조금 웃었다.“과제는 했습니까?”로웬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했습니다.”“확신이 있습니까?”“……전보다는요.”“좋습니다.”엘라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제9방어선에서 오염 마력석이 발견되기 전, 로웬에게 마지막으로 내준 과제가 있었다. 위험도가 가장 높은 제3초소에 모든 병력을 몰아넣었던 방어안을 다시 짜오는 것.당시 로웬은 말했다.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많은 병력을 두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엘라는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그러면 다른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건가.그 질문만 남겨뒀다.“보죠.”로웬이 지도 한 장을 펼쳤다.엘라는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전과 달랐다.제3초소에 몰려 있던 병력이 줄어 있었다. 대신 두 번째 방어선 뒤편에 작은 부대 하나가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엘라가 물었다.“이 병력은 어디를 지킵니까?”“정해진 곳이 없습니다.”뒤쪽 교육생 몇 명이 힐끗 로웬을 봤다.정해진 곳이 없는 병력.처음 듣기에는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엘라는 다시 물었다.“왜 배치하지 않았습니까?”로웬이 한 번 숨을 고른 뒤 말했다.“아직 어디에 필요할지 모르니까요.”엘라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로웬은 계속했다.“지난번에는 제3초소의 위험도가 가장 높으니까 거기에 전부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곳에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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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든 것은 마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중앙 회수 감축 시험은 사흘 뒤로 정해졌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제3감시탑의 외부 방출로에 보조 마력식을 추가해야 했고, 외곽 방어선에는 예비 마력석을 나눠 보내야 했다. 로웬이 초안을 만들었던 기동 예비대 역시 실제 기사단 운용에 맞춰 다시 편성됐다. 무엇보다 중앙 회수량을 10퍼센트만 줄인다고 해도 어느 방어선에서 얼마나 부담이 늘어나는지 먼저 계산해야 했다. 엘라는 시험 당일 아침부터 상황실에 있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북부 전역의 방어선이 표시된 마법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벽면에는 각 방어선에서 실시간으로 보내오는 오염 수치와 마력석 상태가 떠 있었다. 평소라면 지휘관과 마법사 몇 명만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기사단, 마법부, 치료부, 보급 담당자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가장 안쪽 자리. 단테가 앉아 있었다. 엘라는 상황실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단테는 이제 그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수면 다섯 시간 반.” 엘라가 걸음을 멈췄다. “제가 아직 묻지 않았는데요.” “물어볼 거잖아.” “그건 맞습니다.” “두통 없음. 감각도 평소보다 괜찮고.” 그는 잠시 자신의 손등을 봤다. “마기는 조금 움직이는데 안정적.” 엘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단테가 먼저 손을 들었다. “오늘 칭찬 아직 안 받는다.” “왜요?” “시험 전이잖아.” 엘라가 눈을 깜빡였다. “이제 칭찬 받을 시점까지 직접 정하십니까?” “효과 확인하고.” “대공 전하.” “왜.” 엘라는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단테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다.” 뒤에서 휴고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휴고.” “시험 준비하겠습니다.” 휴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엘라는 결국 웃었다.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이런 순간이 있어서.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었다. ⸻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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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지 못한 것은 다른 곳에 남아 있습니다

중앙 회수량을 10퍼센트 줄인 상태로 유지한 지 이틀째.북부는 무너지지 않았다.오히려.몇몇 방어선의 오염 마력석 교체 주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예상했던 급격한 불안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3감시탑의 외부 방출로도 계속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기동 예비대는 첫날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단테의 상태도.분명히 달라졌다.“오늘은요?”엘라는 아침 회의가 시작되기 전, 가장 먼저 그에게 물었다.단테는 이제 익숙하게 자기 상태를 확인했다.“수면 여섯 시간.”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여섯 시간이나요?”단테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왜 놀라.”“평소보다 길잖아요.”“그래도 여섯 시간인데.”“대공 전하 기준으로는 많이 잔 겁니다.”“기준이 이상해.”엘라는 웃었다.“두통은요?”“없어.”“감각.”“아침 식당에서 사람이 일곱 명 있었는데 괜찮았어.”엘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일곱 명.”“그래.”“소리는요?”“들리긴 했는데.”단테는 잠시 말을 골랐다.“전부 안 따라왔어.”“전부?”“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도.”“네.”“그 뒤에 옆 사람 숨소리까지 같이 끌려오지는 않았다는 뜻.”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전에는.작은 자극 하나가.그 뒤의 모든 감각을 같이 끌고 왔다.한 번 들리면.다 들렸다.한 번 느껴지면.계속 따라왔다.지금은.하나가.하나로 끝날 수 있다.그 차이가.단테에게 얼마나 큰지는.이제 엘라도 조금 알 것 같았다.“좋습니까?”이번에는.단테가 바로 말했다.“좋아.”엘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단테가 미리 말했다.“기록해도 돼.”엘라가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그렇게 눈에 보입니까?”“너는 다 보여.”말이 떨어지고.둘 다.아주 잠깐 멈췄다.엘라의 웃음이.조금 느려졌다.단테도.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챈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표정이 그렇다는 뜻이야.”엘라가 조금 웃었다.“네.”굳이.더 묻지 않았다.⸻사흘 유지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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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둔 힘은 다음 사람의 선택이 됩니다

중앙 회수량을 10퍼센트 줄인 상태로 유지한 사흘째 아침.대공성 상황실에는 첫날보다 사람이 적었다.처음에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기사단과 마법부, 치료부, 보급 담당자까지 거의 모든 관련 인력이 들어와 있었지만, 사흘 동안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각 부서에서 필요한 인원만 남겼다. 긴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북부 전역의 방어선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벽면의 측정판에는 밤사이 수치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엘라는 가장 먼저 단테 쪽을 봤다.그리고 입을 열기도 전에 단테가 말했다.“여섯 시간 반.”엘라가 걸음을 멈췄다.“제가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습니다.”“알아.”“그런데요?”“어차피 물어볼 거잖아.”단테는 보고서를 넘기며 담담하게 이어갔다.“중간에 한 번 깼고, 다시 잠들었어. 두통 없고, 손끝 저림도 없어. 아침 식당에는 아홉 명 있었고.”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아홉 명.”“그래.”“괜찮으셨습니까?”“전보다.”그는 잠깐 말을 골랐다.“신경 쓸 게 적었어.”“사람이 적게 느껴졌다는 겁니까?”“아니.”단테가 고개를 저었다.“사람은 아홉 명이었는데, 아홉 명을 전부 한꺼번에 견딜 필요는 없었다는 뜻.”엘라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걸렸다.예전의 단테에게 사람 많은 공간은 사람 수만큼 자극이 늘어나는 곳이었다. 누군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그 소리에 옆 사람의 숨결, 의자 끄는 소리, 문밖 발걸음, 마력의 흐름까지 한꺼번에 끌려왔다. 그러니 아홉 명이 있는 식당은 아홉 명이 아니라 수십 개의 자극이 뒤엉킨 장소였을 것이다.지금은.그 하나하나가.조금씩 분리되고 있었다.“좋으셨습니까?”엘라가 물었다.단테는 이제 그 질문에도 덜 머뭇거렸다.“좋았어.”엘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단테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기록해도 되고.”“그것까지 먼저 말씀하십니까?”“네 얼굴이.”엘라는 웃었다.“제가 정말 그렇게 다 보입니까?”그 순간.단테의 손이 잠깐 멈췄다.이틀 전.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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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일도 함께 맡을 수 있습니다

북부의 봄꽃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단테는 아침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한 가지를 결정했다.“지휘관 회의를 열어.”휴고가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정기 회의는 사흘 뒤입니다.”“오늘.”“안건은 무엇으로 올릴까요?”단테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중앙 회수량 10퍼센트 감축 시험 결과와 제6방어선까지 적용 범위를 넓히기 위한 계획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숫자만 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사흘 동안 방어선은 버텼고, 예비 마력석 운용도 개선됐다. 황실 역시 우회 방어 체계 복구를 공동 사안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적용 범위를 넓히려면 더 많은 현장 지휘관이 기존 중앙 회수 방식에서 벗어난 판단을 해야 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알려주지 않은 정보가 있었다.단테가 손끝으로 계획서 마지막 줄을 눌렀다.“중앙 회수식이 어디로 연결되는지.”휴고의 표정이 굳었다.“전하.”“말해야겠어.”회의실 한쪽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엘라도 고개를 들었다. 에른은 손에 들고 있던 측정판을 내려놓았고, 세리아 역시 아무 말 없이 단테를 바라봤다.휴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디까지 공개하실 생각이십니까?”“지휘관들이 자기 판단이 무엇에 영향을 주는지는 알아야지.”단테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중앙으로 보내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 정도는.”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단테의 얼굴을 오래 살폈다. 마기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아침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몸이 아니라 그가 하려는 선택 자체였다.단테가 그 시선을 느꼈다.“왜.”“생각 중입니다.”“반대?”“아닙니다.”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대공 전하가 정말 괜찮으신지가 궁금했습니다.”단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몸은 괜찮아.”“몸 말고요.”짧은 침묵이 생겼다.엘라는 말을 골랐다.“지금까지 대공 전하께서는 상태를 숨기는 게 북부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잖아요. 오늘 말씀하시려는 건 그 반대니까요.”휴고와 에른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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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혼자 오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단테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식당에 내려왔다.이제 식당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만 세는 습관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여전히 문을 열기 전 안쪽의 인기척을 먼저 확인했고, 시끄러운 날이면 가장 끝자리를 골랐지만, 적어도 누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식사를 방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오늘 식당에는 여덟 명이 있었다.휴고.세리아.야간 근무를 마치고 늦은 식사를 하는 기사 둘.주방에서 나온 사용인 셋.그리고 창가 자리에서 빵을 자르고 있는 엘라.단테가 들어서자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좋은 아침입니다.”“그래.”단테는 자연스럽게 그녀 맞은편으로 갔다.예전 같으면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를 골랐을 것이다. 지금도 완전히 가까운 건 아니었다. 넓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 그래도 이제는 그 거리를 굳이 재지 않았다.엘라가 그를 한 번 살폈다.단테가 먼저 말했다.“여섯 시간.”엘라가 눈을 깜빡였다.“오늘은 제가 정말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요.”단테가 의자를 당기던 손을 멈췄다.“왜.”“요즘 대공 전하께서 먼저 잘 말씀하시니까요.”“…….”“그래서 기다리려고 했습니다.”단테가 잠시 생각했다.“그럼 괜히 말했나.”“아닙니다.”엘라가 웃었다.“말씀하시는 게 더 좋습니다.”단테는 앉았다.“두통 없고, 손끝도 괜찮아. 아침에 복도에서 기사들이 교대 중이었는데 크게 거슬리지 않았고.”“네.”“끝.”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빵에 잼을 발랐다.단테는 잠시 그녀를 봤다.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깐.조금 더.결국 단테가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하지.”엘라가 빵을 베어 물다가 그를 봤다.“무슨 말을 기다리셨습니까?”“아니.”“혹시.”엘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칭찬?”단테의 표정이 굳었다.“아니다.”“그런데 왜 제가 조용하니까 먼저 물으십니까?”“평소랑 달라서.”“대공 전하.”“왜.”“이제 인정하셔도 됩니다.”“뭘.”“칭찬 좋아하시는 거요.”휴고가 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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