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Kapitel 101 – Kapitel 110

118 Kapitel

101화

“이제 시작이네?”혜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애피타이저를 흘깃 보았다. 그러고는 재혁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합석해도 되지?”이미 재혁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손놀림이었다.“물론이지. 유건이도 앉아.”“유건?”혜원의 단호한 부름에 유건은 그제야 아빠를 바라봤다. 혜원이 재혁에게 말을 걸기 전부터 유건은 빈자리의 핸드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하의 침실, 화장대 옆 옷걸이에 걸려 있던 가방이었다. 검은 가죽에 금장 장식 하나가 전부인, 군더더기 없이 반듯한 가방. 서하가 조금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들고 가던 것이었다. 청바지에 가볍게 걸쳐도, 단정한 비즈니스 정장에 들어도 잘 어울렸다. 서하를 꼭 닮은 가방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가방이 지금 아빠의 맞은편에 놓여 있었다.유건은 마치 서하를 직접 마주한 거처럼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인사해.”재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하 역시 테이블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 있었다. 재혁은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전처랑 아들이야. 여긴 내가 결혼할 사람.”서하의 귀에서 레스토랑을 채우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사라졌다.대신 심장 뛰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하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서혜원이에요.”서하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혜원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처음 뵙겠습니다, 진서하라고 합니다.”재혁이 유건에게 눈짓을 한다. “박유건이라고 합니다.”“……네,”서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조금만 더 웃고 있으면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대각선에 앉은 혜원의 눈빛은 서늘하다 못해 살벌했다. 서하는 자꾸만 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겁게 타들어 갔다.대체 무슨 상황인지.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닥친 탓인지, 오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서로 뒤엉킨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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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재혁이 와인을 잔 가득 따랐다. 혜원은 잠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분명 올 때만 해도 맑았는데, 어느새 한강 위로 먹구름이 가득했다. 하늘과 강물이 똑같은 잿빛이었다.곧 비가 오겠지. 언제 파란 하늘이었느냐는 듯이.“언제부터 만난 거야?”“얼마 안 됐어.”“아직 이혼 서류에 잉크도 안 말랐어.”재혁이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이미 그전부터 우린 끝났잖아.”“사람들은 모르잖아. 이혼한 지 일 년도 안 돼서 새 여자친구가 생긴 서혜원의 전남편이라고 떠들겠지.”재혁은 다시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그게 중요한 거야, 지금?”아니,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혜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두 번째는 봐주기 힘들다고, 나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삼켜졌다.“근데 당신, 원래 연하가 취향이었어?”재혁이 잔을 내려놓았다.“뭐?”“서른둘이라며. 나보다도 한참 어리잖아.”“그래서?”“아니, 의외라서.”혜원이 웃었다.“당신은 나이 어린 여자들 귀찮아하는 줄 알았거든.”“혜원아.”“왜? 물어보지도 못해?”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혜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애피타이저를 포크로 건드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던 음식이었다.“그렇게 오래전에 끝났으면.”혜원이 포크를 내려놓았다.“왜 계속 나랑 살았어?”재혁이 그녀를 바라봤다.“뭐?”“마음 떠난 지 오래됐다며. 그런데 왜 계속 같이 살았냐고.”“유건이 때문에.”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혜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헛웃음을 흘렸다.“참 편리하다.”“뭐가.”재혁의 손이 멈췄다. 혜원은 그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애 때문에 참고 살았다고 하면 당신은 좋은 아빠가 되고, 나는 끝난 결혼에 매달린 여자가 되는 거잖아.”“그런 뜻 아니야.”“그럼 무슨 뜻인데?”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건이 때문이었다. 정말 진심이었다.만일 유건이 자신의 친아들이었다면 그렇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내 아들이 아니니까, 버틸 수 있었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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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거리는 한산했다. 서하는 우산을 쓴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차라리 이대로 흠뻑 젖고 싶었다. 비가 더러운 몸과 마음까지 씻어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누나!”뒤에서 달려온 유건이 서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서하가 돌아섰다. 눈가에 맺힌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유건아…….”유건도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그는 서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어디 가려고.”“…….”유건은 화를 내지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조금 전 식당에서 그를 보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는데, 너는 왜 다르지. 아버지가 자신을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했을 때도, 자신과 어머니가 악수했을 때도 그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너…….”서하가 유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혹시 알고 있었어?”유건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귓가를 가득 채우던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알고 있었구나.”“…….”“언제부터?”“확실히 안 건 아까야.”“그럼 그전부터 의심은 했다는 거네.”유건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서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그래서?”“…….”“그래서 알고 있었으면서도…….”목소리가 떨렸다.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물었다.“어제도 나랑 그랬어?”유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누나.”“어제 나랑 밥 먹고, 같이 자고……. 그러면서도 내가 네 아버지랑 만나는 여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야?”“확실한 건 아니었으니까.”“그게 무슨 상관인데!”서하가 소리쳤다.지나가던 사람이 잠깐 두 사람을 돌아봤다. 유건은 입을 다문 채 서하를 바라보았다.“나한테 물어봤어야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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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업무 보고서를 읽고 있었지만 활자는 눈앞에서 떠다닐 뿐이었다.—멕시코로 간다고?담당자가 바뀌었다기에 연유를 알아봤더니, 서하가 멕시코 지사 파견을 자청했다는 것이었다. 재혁은 끝내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의자를 홱 돌렸다. 통유리 너머로 믿기지 않을 만큼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저렇게까지 파랄 수 있나 싶어, 가슴 한구석이 시릴 지경이었다.—왜?결혼이 싫다면 거절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재혁은 한 번의 거절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서하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신과의 인연을 끊어버리려는 걸까.서하의 몸을 속속들이 알아갈수록, 정작 그녀의 마음은 단단히 봉인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더 세게 움켜쥐려 했다. 그녀의 말랑한 가슴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도.그러나 움켜쥘수록 그녀는 형체를 잃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사이에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이 오간 적 없었다. 재혁은 의자 팔걸이에 얹은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은 결혼하자는 말까지 했으면서, 정작 서하가 자신을 좋아하는지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다.내가 너무 앞서갔던가.아니, 어쩌면 그녀가 오지 않을 길에 미리 서서 이리 오라고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재혁은 눈이 시릴 때까지 파란 하늘을 응시했다.———“박유건 훈련병!”“예!”“어딜 보고 있어!”“죄송합니다!”유건은 서둘러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교관이 지나가자 옆에 서 있던 동기가 입술을 움직였다.“야, 너 뭔 생각 하냐?”“아무것도.”“맨날 아무것도래.”입소한 지 열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뜀걸음과 제식훈련이 이어졌고, 오후에는 사격 자세를 배우느라 몇 시간씩 엎드려 있어야 했다. 어깨와 허벅지가 뻐근했다. 군복 안쪽으로 땀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틈도 없었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도저히 지치지가 않는다. ——-멕시코에 온 지 넉 달째였다. 새로운 생활을 꾸리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덕분에 낮에는 서울을 떠올릴 틈도 거의 없었다. 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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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 유건은 본일의 재단 산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혜원은 응급실 앞을 몇 번이나 서성였다. 본일은 그런 혜원을 말없이 지켜보다 자판기에서 생수를 뽑아 건넸다.“좀 앉아.”“괜찮아.”“안 괜찮아 보여.”“유건이 나오면.”혜원은 물을 받지도 않았다. 그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박유건 환자 보호자분.”혜원이 거의 뛰듯 다가갔다.“네. 저예요.”“담당 교수님께서 설명드릴 게 있습니다.”본일도 뒤따라 일어났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작은 상담실에 마주 앉았다. 의사가 모니터에 띄운 검사 결과를 넘겼다.“우선 걱정하셨던 급성 충수염이나 장 천공 같은 외과적 응급질환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아 보입니다.”혜원의 굳어 있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그럼 왜 그렇게 아파한 거예요?”“복부 CT에서 장벽 부종과 복수가 관찰됩니다. 장 자체에 염증이 생겼다기보다 혈관 밖으로 체액이 빠져나가면서 장벽이 부은 것으로 보입니다.”본일의 시선이 모니터에 고정됐다. 의사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군 병원에서 보내온 기록을 보니까 환자가 이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을 여러 차례 겪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어릴 때부터 가끔 그랬어요.”혜원이 바로 말했다.“토하고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응급실도 몇 번 갔는데,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졌어요.”“얼굴이나 손발이 갑자기 부은 적은 없었습니까?”혜원이 본일을 힐끗 보았다.“……있어요.”“두드러기도 같이 났나요?”“아니요. 그건 없었던 것 같아요.”의사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저희가 의심하는 질환이 하나 있습니다.”“유전성 혈관부종입니다.”혜원이 입술을 달싹였다.“유전성…….”“영어로 HAE라고 합니다. 드문 질환인데, 피부나 장기 점막에 갑작스럽게 부종이 생길 수 있습니다. 손이나 발, 얼굴이 붓기도 하고 박유건 씨처럼 장관에 부종이 생기면 심한 복통이나 구토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위험한 병이에요?”“부종이 어디에 생기느냐가 중요합니다.”의사의 표정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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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병원을 나온 것은 새벽 네 시가 가까워서였다. 유건은 약이 들어간 뒤 통증이 많이 가라앉아 잠들었다. 당장 기도 쪽 부종도 없고 상태가 안정적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혜원은 병실을 나왔다.본일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차는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동이 걸린 채 계기판 불빛만 어둑한 차 안을 밝혔다.“건이, 재혁이 아들 맞아?”혜원의 눈빛이 흔들렸다.“맞아.”본일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확실해?”“박재혁 아들이야.”“내 질문은 그게 아니야.”“…….”“확실하냐고.”그녀의 침묵에, 본일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미쳤네.”“본일아.”“너 알고 있었어?”“아니야.”“그럼 왜 대답을 못 해?”“나도 몰라!”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나도 몰랐어. 정말이야..“혜원이 무릎 위에서 맞잡은 두 손끝이 희게 질려 있었다.“재혁이 애라고 생각했어.”“생각했다?”본일이 핸들에 잡은 손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오래 묻어둔 기억이지만 본일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혜원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재혁과 헤어졌다고 울던 날. 혜원의 입술이 유난히 달았고, 더 위태롭게 자신에게 매달리던 몸은 떠올릴 때마다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본일이 헛웃음을 흘렸다.“나한테 말했어야지.”“뭘?”혜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네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결혼할 남자 앞에 두고?”“적어도 확인은 했어야지.”“무서웠어.”혜원은 눈가를 닦지도 않았다.“확인해서 네 아들이면 어떡해.”“…….”“재혁이 아들이 아니면 어떡하냐고.”혜원이 힘없이 웃었다.“그래서 그냥 믿었어. 재혁이 애라고.”“이십 년을?”“살다 보니까 정말 그렇게 됐어.”혜원이 눈을 내리깔았다.“유건이가 재혁이를 아빠라고 부르고, 재혁이가 걔를 자기 아들로 안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의심 안 했어.”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안 하려고 했어.”“혜원아.”본일의 목소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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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한참을 서 있던 재혁이 입을 열었다.“그래서?”서하의 눈이 커졌다.“그게 중요해?”서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긴 탄식을 흘리며 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길게 끌며 두 사람 앞을 스쳐 지나갔다.“그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재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사람 같았다.“진서하한테 그게 중요해?”서하의 시선이 돌아왔다. 재혁은 제 허벅지를 건반이라도 두드리듯 툭, 툭 두드렸다.“그런 거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사람처럼 보였는데.”“…….”“누구랑 자든, 누굴 만나든.”손가락이 멎었다.“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그런 것조차 관심 없는 사람 아니었나.”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서하는 명치 끝을 정확히 찔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유건을 사랑한 적도, 재혁을 좋아한 적도 없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한 적은 더더욱. 그저 지루했고, 마침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자꾸만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재혁은 미래를, 유건은 마음을 요구했다. “그런데 왜 이번엔 도망쳤어?”재혁이 물었다.“당신하고 부자지간이라는 걸 알고 나니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어요.”적절한 타이밍에 다가온 근사한 핑계였다. 서하는 어느 쪽에게도, 무엇도 주고 싶지 않았다. “진서하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그냥…“재혁의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멎었다.“…귀찮아진 거잖아. 우리가 자꾸 네 인생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순간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움직이고, 맞은편 보도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재혁이 그런 서하를 가만히 바라봤다.“내가 틀렸어?”“…….”7년간의 첫 연애는 상처받아도 놓지 못하는 맹목이었다. 상대에게 맞춰주고, 참고, 희생하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그렇게 제 몸을 녹여가며 타오르고 나서야 알았다. 상대의 마음이 식으면 자신도 결국 굳어버리는 양초에 불과했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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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서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몇 걸음쯤 혼자 걷고 나서야 뒤에서 구두 소리가 따라붙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멕시코시티의 밤은 아직 끝날 기미가 없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도로에는 차가 끊이지 않았고, 건너편 식당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구운 옥수수 냄새가 났다가 금세 매캐한 배기가스 냄새에 섞였다.신호등 앞에서 걸음을 멈추니, 말끔한 셔츠 소매가 시야 한구석에 들어왔다. 신호가 바뀌자 둘은 나란히 길을 건넜다. 서하는 가방을 고쳐 메었다.재혁은 손목을 잡지도, 허리에 손을 얹지도 않았다. 재혁과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 오래 아무런 접촉도 없었던 적이 있었나.언제나 손이 먼저였다. 눈이 마주치면 입술이 닿았고, 둘만 남으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었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소음이 조금씩 멀어졌다. 오래된 건물의 창마다 노란 불빛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가로등 하나를 지날 때마다 겹쳤다가,다시 떨어졌다. 입구에 다다라서야 서하는 멈춰 섰다.재혁을 돌아보니 여전히 그 얼굴이었다. 반듯하고, 태연하고, 좀처럼 속을 내보이지 않는 얼굴. 그런데 귓가에는 이런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너까지 가면 진짜 아무도 없잖아.“들어갈래요?”한참 뒤 그가 짧게 말했다.“그래.”현관문이 닫혔다.바깥의 소음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서하는 가방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재혁은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현관 가까이에 서 있었다. 들어오라고 한 사람도, 따라 들어온 사람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물 마실래요?”“응.”서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컵 두 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물을 따르는 동안 재혁은 거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곳에서 서하가 몇 달을 살았다는 흔적들이 그의 시선을 따라 하나씩 드러났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쳐둔 얇은 카디건, 식탁 한쪽에 쌓인 서류, 반쯤 읽다 만 책. 재혁이 모르는 서하의 시간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재혁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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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본일이 이사했다는 집은 혼자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컸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혜원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거실까지 이어지는 긴 복도와 높은 천장, 통창 너머로 펼쳐진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혼자 살 거면서 뭐가 이렇게 커.”구두를 벗으며 중얼거리자 앞서 걷던 본일이 돌아봤다.“큰 게 좋잖아.”이혼하면서 살던 집은 아내에게 주고 나왔다. 가구부터 벽에 걸린 그림, 식탁 위의 작은 화병까지 아내의 취향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본일에게 그 집은 함께 꾸린 집이라기보다, 오래 머물렀던 타인의 취향에 가까웠다. 그래서 미련도 없었다.혜원은 천천히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림색 소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모서리가 둥글고 등받이가 낮은 형태였다. 소파 아래에는 털이 짧은 아이보리색 러그가 깔려 있었고, 통창 곁에는 잎이 넓은 식물들이 햇빛을 받아 느슨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혜원은 걸음을 늦췄다.소파의 색도, 러그의 질감도, 지나치게 반듯하지 않은 가구의 선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유리 화병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꽃은 없었다. 혜원이 늘 좋아하던 식이었다. 무언가를 빼곡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여백이 많은 것을 좋아했다.“인테리어 잘했네.”무심코 내뱉고 나서 혜원은 다시 거실을 둘러봤다. 잘한 걸 떠나서, 유독 제 마음에 들었다.혜원은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았다. 품에 꼭 맞는 게 이물감이 없었다. “홍차 마셔.”본일이 얇은 청색 테두리가 둘러진 찻잔을 조심히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거…….”“왜?”“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찻잔이네.”본일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알아.”혜원은 찻잔을 든 채 그를 바라봤다.“네가 직접 산거야?”“응, 차 마시려고.”“너 차 안 마시잖아.”생수병 뚜껑을 돌리던 손이 잠깐 멈췄다.“손님 오면 마시겠지.”“무슨 손님.”본일은 옅은 미소를 띠며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혜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오래전에 스쳐가듯이 했던, 자신조차 잊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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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혜원은 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던 사람인데, 시선이 한 번 맞닿고 나니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일순간에 공기가 달라진 거 같았다. 혜원은 문득 열일곱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해변가에서 본일의 젖은 몸을 보고 괜히 심장이 빨라졌던 날. 방에 돌아가서도 그 짧은 순간을 몇 번이나 되감았던 밤. 그때와 똑같이 가슴이 뛰었다. 우스워서 혜원이 먼저 웃었다.“왜 그렇게 봐.”“그냥.”“뭘 그냥이야.”본일이 대답하지 않고 조금 가까워졌다. 그 순간 혜원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와서도 잠시 그대로 있었다. 혜원이 먼저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그제야 입술이 아주 가볍게 닿았다. 본일의 손이 조심스럽게 뺨을 감싸자 잊고 있던 감각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처음 서로의 손을 잡았던 날, 처음 입을 맞추기 직전, 누가 먼저 다가갈지 몰라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던 순간, 처음 서로의 몸을 탐하던 날의 숨 막히는 설렘까지.그 날 그때의 감각이 먼저 떠올랐다.괜히 말을 많이 했다. 긴장하지 않은 척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본일도 평소보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손끝이 닿았고, 그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떨렸다. 본일이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었던 것도 기억났다. 결국 혜원은 짜증을 냈다.그만 좀 물어.그리고 본일이 웃었다. 지금도 그 웃음이 기억났다.온통 처음투성이네.오래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현재 위로 포개졌다. 그 때의 설렘이 시간을 건너와 혜원의 얼굴 위로 번지는 것만 같아 열이 올랐다.“본일아.”“응.”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혜원도 따라 웃었다. 본일이 혜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혜원도 목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붙었다. 서로의 체온이 닿자 오래전에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때의 자신들은 알지 못했다. 얼마나 멀리 돌아가게 될지, 얼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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