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80 챕터

31화. 덧장

“아무 말도요.”새미의 대답이 끝나자 세자는 잔을 내려놓았다. 잔 밑이 상에 닿으며 작은 소리가 났다.“그랬소.”“예.”“그대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구려.”새미는 잔 가장자리에 손을 댔다가 뗐다. 오미자차는 이미 식었다. 입안에는 신맛이 조금 남아 있었다.“꿈속에서는요.”“그렇소. 꿈속에서.”세자는 더 묻지 않았다. 새미도 말을 잇지 않았다. 보옥은 보자기 매듭을 단단히 묶었고, 가희는 빈 잔을 상 한쪽에 모았다. 방금까지 오미자청 한 숟가락을 두고 다투던 두 사람은 새미가 꿈 이야기를 꺼낸 뒤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가희가 먼저 잔을 들었다.“이제 들어가야겠네. 너무 늦으면 옥상궁이 찾을 거야.”“옥상궁은 장고 안까지 찾으러 오지는 않을 겁니다.”보옥이 매듭을 살피며 말했다.“그럼 더 늦게까지 있어도 되겠네.”“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왜? 안 찾으러 온다며.”“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말과 늦게까지 있어도 된다는 말은 다릅니다.”“보옥아, 너는 말을 둘로 나누는 재주가 있어.”“가희 아씨가 한 말을 제가 바르게 나누었을 뿐입니다.”새미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잔을 들었다. 바닥에 남은 차를 삼켰다. 목으로 넘어간 차는 시큼했다. 그 맛이 장고의 냄새와 섞여 남았다.“저는 조금 더 있어야겠습니다.”보옥이 보자기를 내려놓았다.“장고를 더 살펴보시게요?”“예. 시어진 독이 여섯 개 있습니다. 내일 단오가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가희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걷혔다.“아까 말한 독들?”“예. 맛이 더 변하기 전에 덧장을 해야 합니다.”“그럼 우리도 돕고 갈까?”“보옥 아씨와 가희 아씨는 별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괜히 함께 남으셨다가 꾸중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새미야, 너는 지금도 꾸중을 듣는 중이잖아.”“저는 장고를 살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그 허락에 밤새 있어도 된다는 말은 없었을 텐데.”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전마마가 내린 허락은 장고를 살피라는 말이었다. 어디까지 살피고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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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쑥

새미는 깨진 단지 앞에서 손을 멈췄다. 검은 장이 바닥 틈으로 번져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먼저 조각부터 치워야 했다.“누가 이랬어.”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새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손가락을 접었다.“하나, 둘, 셋…….”일곱까지 세고 손을 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틈도 없었다.새미는 문가에 놓인 천을 가져왔다. 단지 조각을 하나씩 집어 천 위에 올렸다. 손끝이 베이지 않도록 천으로 감싸 잡았다. 바닥에 번진 장은 깨끗한 천으로 눌러 닦았다. 한 종지 가운데 건질 수 있는 것은 없었다.“씨간장은 못 쓰겠네.”새미는 빈 단지 조각을 내려다봤다. 할머니가 몇 번이나 뚜껑을 확인하던 손이 떠올랐다. 새미는 조각을 더 단단히 감싸 쥐었다.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새미야?”가희의 목소리였다. 새미는 손에 든 천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들어오셔도 됩니다.”문이 열렸다. 가희는 방 안을 살피다 바닥에 놓인 조각을 보았다. 고름을 쥔 손이 멈췄다.“단지가 깨졌어?”“예. 씨간장이 전부 쏟아졌습니다.”가희는 한 걸음 들어오다가 멈췄다. 치맛자락이 장에 닿을 뻔했다.“다친 데는 없어?”“없습니다.”“새미야.”“울지는 않을 겁니다.”새미가 먼저 말했다. 가희는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천을 접어 조각을 감쌌다. 그 뒤 바닥을 다시 살폈다. 장이 남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여기까지 번졌습니다. 단지 안에 남은 건 없습니다.”“누가 깨뜨렸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돼.”“예. 지금은 장을 살리는 게 먼저입니다.”“뭘 하면 돼?”“물안골에 가서 씨간장을 받아 와야 합니다.”“그럼 가자.”“후보는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내가 가겠다는 뜻은 아니야. 사람을 보내면 되잖아.”새미는 가희를 바라봤다. 가희는 고름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전보다 차분했다.“물안골까지 걸어서 1시간 반입니다. 지금 출발해도 수라가 올라가기 전까지 다녀오기는 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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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수리취떡

새미는 궁 문 앞에 멈춰 섰다. 문 아래로 보이던 그림자가 단지를 끌어안고 있었다.“밤톨아.”“누나!”밤톨이는 단지를 품에 더 바짝 붙였다. 단지 입구에는 깨끗한 천이 덮여 있었고, 천 위로 새끼줄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옆에 선 강내관이 아이와 단지를 번갈아 살폈다.“단새미 낭자, 이 아이가 씨간장을 가져왔사옵니다. 소인이 먼저 확인하였으나, 봉한 줄은 풀지 않았사옵니다.”“잘하셨습니다. 밤톨아, 단지는 어디서 받았어?”“할매가 줬어. 깨지면 엉덩이 맞는댔어.”“할매가 그런 말도 하셨어?”“응. 그러니까 조심해서 들고 왔어.”밤톨이는 단지를 내놓지 않았다. 작은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새미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누나가 받을게. 안 깨뜨릴게.”“꼭?”“꼭.”밤톨이가 새미에게 단지를 넘겼다. 새미는 밑바닥을 먼저 받쳤다. 단지는 무겁지 않았다. 안에 든 양을 짐작하려고 흔들면 안 됐다. 새미는 손을 고정하고 천의 매듭을 살폈다. 물기나 장이 묻은 자국은 없었다.“할매가 단지 입구를 닦았지?”“응. 나보고 만지지 말랬어.”“잘했네.”새미는 강내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저하께서 장고에 계십니까?”“예. 낭자께서 부르신 뒤로 장고를 지키고 계시옵니다. 다만 이제 소매에 장이 묻어도 놀라지 않으실 것 같사옵니다.”“저하께서 장을 나르셨습니까?”“예. 소인이 말려도 듣지 않으셨사옵니다.”강내관은 잠깐 말끝을 삼켰다. 세자의 소매는 걷혀 있고, 장고 바닥에는 옮겨 둔 독이 남아 있었다. 강내관은 허리도 아팠다. 그 가운데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장독이 아니라 세자의 옷이었다.“새미야, 장고에 가야 해?”밤톨이가 물었다.“그래. 이 장이 있어야 독들을 살릴 수 있어.”“그럼 나도 갈래.”“밤톨이는 궁 안에 들어올 수 없어.”“문 안쪽까지만 가면 안 돼?”“안 돼. 여기서 기다려야 해.”밤톨이는 입술을 내밀었다. 새미가 단지를 강내관에게 건넸다.“이 단지는 제가 들겠습니다. 밤톨이가 가져온 단지라는 걸 할매께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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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보리밥

별궁 마당을 쓸던 나인이 빗자루를 멈췄다.“단 낭자가 빈궁감이라던데요.”새미는 장부에 적던 손을 멈췄다. 먹물이 붓끝에 맺혔다.“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궁에서 들었다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단오 수라에 오른 장도 낭자께서 고르셨고, 장고 독도 살리셨다면서요.”“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했습니다.”“그래도 낭자께서 장맛을 보셨잖아요.”나인은 빗자루를 다시 쥐었다. 새미는 장부를 덮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별궁 마당에는 말린 보리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선가 물을 긷는 소리가 났다.문 안에서 가희가 고개를 내밀었다.“무슨 소리야?”“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닌데 손이 멈췄어?”가희가 새미의 장부를 들여다봤다. 숫자와 독 이름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가희는 장부보다 새미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또 장고 이야기야?”“단 낭자가 빈궁감이라는 말이 돌고 있답니다.”나인은 빗자루를 세워 두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벌써?”“가희야.”새미가 낮게 불렀다. 가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눈길은 새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내가 뭘 했다고 빈궁감입니까. 장을 골랐고, 독을 살폈고, 수라에 탈이 없었을 뿐입니다.”“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그런 말이 돌아다니면 윤 아씨는 불편하실 겁니다.”“그렇겠네.”가희는 새미 옆에 앉았다. 고름을 만지려다 손을 거두었다. 가희가 멈춘 손끝을 새미는 보았다. 가희는 자기 일이라면 입술부터 깨물곤 했다. 남의 일에는 먼저 끼어들면서도, 자기 이름이 나오면 말이 빨라졌다.“윤 아씨는 예법 시험마다 1등이었어. 그런 분이 빈궁감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리 없어.”“보옥 아씨가 세자빈 자리를 원하시는 건 맞습니다.”“그럼 더 그렇지. 남들이 너를 먼저 빈궁감이라고 부르면.”새미는 붓을 내려놓았다. 소문을 막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못 들은 척하기도 어려웠다.문밖에서 보옥의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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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옹기 뚜껑

사옹원 장부를 넘기던 새미의 손이 멈췄다.“이 뚜껑은 장고에 있던 물건이 아닙니다.”옆에 놓인 유약 바른 뚜껑은 햇빛을 받아 반질거렸다. 새미는 손끝으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들어 올리자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같은 크기의 옹기 뚜껑보다 묵직했다.사옹원 관리가 입술을 다물었다.“장고에 쓰는 물건이 모두 사옹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그렇다면 이 뚜껑도 사옹원 물건인지 확인하면 되겠네요.”새미는 장부를 펼쳐 그 앞으로 밀었다. 장고 독을 옮긴 날의 기록과, 뚜껑을 살핀 기록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옥은 새미가 펼쳐 둔 장부 옆에 다른 장부를 놓았다.“이쪽은 창고 출납 장부입니다. 장고에 보낸 물건의 수와 날짜를 대조했습니다.”보옥은 붓끝으로 장부 한쪽을 짚었다.“뚜껑은 기록에 없습니다.”관리는 장부를 내려다봤다.“그것만으로 사옹원 물건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록을 빠뜨렸을 수도 있지요.”“그럴 수 있습니다.”새미가 뚜껑을 다시 내려놓았다. 나무 탁자에 닿으며 둔한 소리가 났다.“그래서 다른 것도 확인했습니다.”“무엇을 말입니까?”“무게와 굽입니다.”새미는 뚜껑을 뒤집었다. 바닥의 굽에 작고 네모난 표식이 찍혀 있었다. 장터 옹기전에서 물건을 구울 때 쓰는 표시였다. 새미는 장터에서 옹기를 받아 팔았고, 독 바닥에 찍힌 표시를 여러 번 보았다.“이 표시는 옹기전에서 쓰는 겁니다.”“그 표시만으로는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맞습니다. 그래도 사옹원에서 만든 물건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보옥이 장부를 넘겼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가락에 걸렸다.“뚜껑 수는 맞습니다. 다만 뚜껑을 들인 기록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장고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 독에 붙어 있었는지도 적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그것까지 제가 다 기억해야 합니까?”“관리께서 맡으신 장부라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보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관리는 보옥을 보고는 시선을 새미에게 돌렸다.“단 낭자가 장고 일을 잘 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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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수박

옥상궁 쪽으로 향했던 새미의 시선이 돌아왔다. 회랑에는 더 볼 것이 없었다. 새미는 장부를 품에 안고 별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날부터 새미는 옥상궁의 소매를 볼 때마다 염씨장전의 장 냄새를 떠올렸다. 냄새만으로는 아무것도 따질 수 없었다. 새미는 입을 다물고 손가락을 셌다.하나, 둘. 아직은 더 볼 때였다.―6월 1일, 별궁 마당에는 볕이 들었다. 새미는 장독을 닦아 둔 천을 빨아 널고 있었다. 별궁에는 물안장 독이 없었지만, 새미는 남은 된장 단지를 살피고 뚜껑을 닦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천에서 된장 냄새가 났다. 새미는 손끝에 묻은 것을 혀에 조금 댔다. 짠맛이 먼저 났고, 뒤에 콩의 단맛이 붙었다. 너무 마르기 전에 물을 조금 더 얹어야 했다.“단 낭자.”별궁 나인이 마당 입구에 서 있었다. 손에는 접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새미는 손을 닦고 다가갔다.“무슨 일입니까?”“중전마마의 말씀이 내려왔습니다. 삼간택은 6월 20일에 치른다고 합니다.”새미는 천을 다시 쥐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알겠습니다. 말씀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나인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새미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젖은 천을 바라보았다. 6월 20일. 날을 세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간택이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가희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방금 무슨 말이었어?”“삼간택 날짜가 정해졌대. 6월 20일이야.”가희는 문턱에 걸터앉았다. 손이 저절로 고름으로 갔다.“생각보다 빨라.”“날짜가 정해졌을 뿐이야.”“그게 더 무서워. 날짜가 있으면 그날이 꼭 오잖아.”가희의 손이 고름을 만지작거렸다. 새미는 천을 빨랫줄에 걸었다. 바람이 불어 천 끝이 새미의 손등을 쳤다.“가희야, 네가 원하지 않는 자리라면 네가 할 말은 네가 하면 돼.”“그 말은 네가 할 말 같기도 한데.”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보옥이 마당으로 나왔다. 손에는 예법 책이 들려 있었다. 새미와 가희를 번갈아 보고는 책을 덮었다.“날짜를 들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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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냉국

새미는 수박 껍질을 내려놓았다. 손에 남은 붉은 물이 손가락 끝에 묻었다.세자는 수박을 든 채 말을 멈췄다. 강내관도 씨를 세던 손을 멈췄다. 가희와 보옥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수박씨가 쟁반 위에서 한 번 굴렀다.“그 꿈에서 나는 어디 있었소?”세자가 물었다.“궁에 있었습니다.”“그대 곁에 있었소?”새미는 대답을 고르느라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같은 궁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곁에는 없었습니다.”세자는 수박 조각을 그릇에 내려놓았다.“그대가 외로웠다는 말은 들었소.”새미는 세자의 얼굴을 살폈다. 세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억지로 달래지도 않았다. 그저 새미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저하께서 잘못하셨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그렇소?”“그 꿈 속의 저하는 제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강내관의 손가락이 씨 하나 위에서 멈췄다. 가희는 들고 있던 수박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보옥은 펼쳐 둔 손수건의 모서리를 맞췄다.세자는 잠깐 눈을 내렸다.“그렇다면 변명할 말은 없소.”“저는 약속을 듣고 싶어서 말한 게 아니에요.”“알겠소.”“그냥… 저하께서 아셨으면 했어요. 제가 왜 자꾸 먼저 떨어지려고 하는지.”새미는 손에 묻은 수박물을 천으로 닦았다. 천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지난 삶의 궁은 넓었고, 새미가 혼자 밥을 먹는 날도 많았다. 기억을 다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세자는 한참 새미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들었소.”더는 묻지 않았다. 새미도 더 말하지 않았다.강내관이 쟁반을 앞으로 당겼다.“이제 세기를 이어도 되겠사옵니까?”가희가 헛기침을 했다.“그걸 꼭 이어야 해?”“62개까지 세었사옵니다.”“지금은 62개가 아닌 것 같은데.”강내관이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수박씨 몇 개가 서로 겹쳐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가 손끝으로 씨를 하나씩 떼어 놓았다.“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세겠사옵니다.”세자가 물었다.“왜 다시 세오?”“몇 개인지 궁금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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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감자

새미의 말에 가희는 입을 다물었다. 보옥도 예법 책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새미는 장부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표지를 한 번 누르고는 마루 끝에 놓인 장독 기록용 천을 집었다. 천을 개켜 놓으면 할 일이 생겼다. 장부를 다시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오늘은 늦을 수도 있지.” 가희가 말했다.“응.”“저하께서 바쁘실 수도 있고.”“그럴 수 있어.”“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신경 안 써.”새미는 천을 반듯하게 접었다. 한쪽 모서리가 맞지 않았다. 다시 펴서 모서리를 맞췄다.가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보옥은 책장을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마루에 짧게 났다.‘지난 생에도 이랬나.’새미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 그때도 쪽지가 오지 않는 날이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으면 궁의 방과 수라상, 정해진 예절만 떠올랐다. 세자와 나눈 말은 손에 꼽았다. 쪽지가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새미는 손가락을 천에서 뗐다. 확인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금의 새미는 물어볼 수 있었다.별궁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마루 앞을 지나던 나인이 걸음을 멈추고 안을 향해 말했다.“단 낭자께 온 보따리가 있습니다.”새미가 일어났다.“누가 보냈습니까?”“물안골에서 왔다고 합니다.”새미는 치맛자락을 추슬러 마루 끝으로 갔다. 보따리는 천으로 단단히 싸여 있었다. 매듭을 풀자 따뜻한 김이 빠져나왔다. 감자 냄새가 났다. 보자기 안에는 찐 감자가 몇 개 들어 있었고, 작은 종이 쪽지가 그 밑에 깔려 있었다.새미는 쪽지를 폈다.『아가, 별궁서 굶지 말고 이거 묵어라. 감자 껍질은 뜨거울 때 벗겨야 잘 벗겨진당께. 손 데지 말고. 할매가.』새미의 입가가 조금 풀렸다.“할머니께서 감자를 보내셨네.”가희가 마루 끝까지 다가왔다. 보옥도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감자가 따뜻해요?” 보옥이 물었다.“보자기 안쪽이 아직 따뜻해.”“그럼 바로 드시는 편이 좋겠습니다.”가희가 감자 하나에 손을 뻗었다가 곧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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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콩국수

새미는 쪽지를 받아 들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바닥에 닿았다.『오늘은 감자가 따뜻하오. 천천히 먹으시오.』새미는 글을 한 번 더 읽었다. 세자는 붓을 내려놓고 그녀가 쪽지를 접을 때까지 기다렸다. 강내관은 비어 있는 감자 그릇을 들고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읽었소?”“네.”“그럼 되었소.”새미는 쪽지를 소매에 넣지 않았다. 손에 든 채로 세자를 올려다보았다.“저하께서는 매일 쪽지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두겠소.”“싫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그렇다면 계속 보내겠소.”새미는 종이를 곧게 접었다. 저하의 쪽지들이 들어 있는 자리는 장부 안에 있었다. 할머니의 감자 쪽지는 소매에 넣어 두었다. 어느 쪽지도 버릴 생각은 없었다.“다만 매일 기다리지는 않겠습니다.”세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새미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이 쪽지를 받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오?”“아닙니다. 오면 읽겠습니다.”“알겠소.”새미는 쪽지를 품에 넣었다. 세자는 더 묻지 않았다. 새미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쪽지 한 장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던 자리를 접힌 종이가 대신했다.강내관이 감자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낭자, 껍질은 소인이 치우겠사옵니다.”“그릇은 제가 씻어 놓겠습니다.”“이미 소인이 들었사옵니다.”“그럼 제가 그릇을 닦고, 내관님이 껍질을 버리세요.”“그렇게 나누어 맡기시니 소인이 거절하기 어렵사옵니다.”“나누면 쉬워요.”강내관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새미가 물을 가져와 그릇에 부었다. 강내관은 감자 껍질을 담은 그릇을 들었다. 세자는 손수건에 묻은 감자 속살을 떼어 내며 두 사람을 보았다.“다들 할 일이 많구려.”“감자 한 그릇에도 할 일이 생기옵니다.” 강내관이 말했다.“그러니 감자가 따뜻할 때 먹어야지.” 새미가 대꾸했다.세자의 왼쪽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새미는 그 얼굴을 보고 웃었다. 세자는 감자 자국이 남은 손수건을 접어 강내관에게 건네지 않고 자기 소매에 넣었다.“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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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매실

“나 내일 도망간다.”가희의 말이 어둠 속에 남았다. 새미는 장부 위에 얹은 손을 멈췄다. 보옥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희는 이불 끝을 손가락으로 잡고 있었다.“어디로?”“그건 아직 안 정했어.”“궁 밖으로 나가겠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로 갈지도 안 정하고?”“그래. 정하면 더 무서워질 것 같아.”새미는 장부를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쪽지 묶음이 안쪽에서 눌리지 않도록 표지를 살짝 열어 확인했다. 종이들은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도망가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적어도 내 발로 나가잖아.”“내일은 네가 도망가고 싶은 날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할지 말하는 날일 수도 있어.”가희가 이불을 놓았다.“너는 꼭 그렇게 말하더라.”“뭐라고?”“도망가지 말라고는 안 하고, 내가 정하라고.”“내가 네 대신 정할 수는 없으니까.”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에서 보옥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졌다. 새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궁에 가서도 도망치고 싶으면, 그때 말해. 네가 혼자 빠져나가게 두지는 않을게.”“같이 도망가 주겠다는 말이야?”“궁 안에서 도망가는 건 장터에서 길 잃는 것보다 어렵겠지. 먼저 길부터 찾아볼게.”가희가 이불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는 건지 울음을 참는 건지 어둠 속에서는 알 수 없었다.“새미야.”“응.”“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할래.”“그럼 내일 해.”“내일도 못 할 수 있어.”“그럼 그다음에.”가희는 고름을 쥐지 않은 손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새미는 장부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혼자 깨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아침이 되자 별궁 안이 일찍부터 부산해졌다. 삼간택에 나갈 옷을 챙기는 손이 바빴다. 보옥은 머리 장식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거울 앞에서 살폈다. 가희는 고름을 매었다가 풀었다.“매듭이 너무 단단해.” 새미가 말했다.“풀면 또 묶어야 하잖아.”“지금도 다시 묶고 있잖아.”가희는 고름을 내려다봤다. 새미가 손을 내밀자 가희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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