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의 모든 챕터: 챕터 41 - 챕터 50

80 챕터

41화. 막장

두식은 광 앞에 앉아 막장을 비비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였지만 팔꿈치에는 이미 장이 묻어 있었다. 새미가 옆에 놓인 항아리를 살폈다.“아부지, 메주가 한쪽에 몰렸어.”“그려? 내가 골고루 눌렀는디.”“손으로 눌렀다고 골고루 되는 건 아니당께.”새미가 나무주걱으로 막장을 천천히 섞었다. 메주가 된장 사이에서 풀리고, 고춧가루와 소금이 함께 섞였다. 두식은 주걱을 받아 들려다 손바닥에 묻은 장을 보고 멈췄다.“이게 궁에 들어가면 값이 꽤 나가겄지?”“품평에서 뽑혀야지.”“뽑히기만 하면 3년이여. 3년 동안 궁에서 우리 장을 사 간다잖여. 그럼 빚도 갚고, 장독도 더 놓고, 나도 갓을 하나 새로 맞추고.”두식은 삐뚤어진 갓을 손끝으로 바로잡았다. 갓은 잠깐 모양을 갖추었다가 이내 다시 기울었다.새미가 막장을 한 번 더 저었다.“궁에 장을 대기도 전에 갓부터 맞출 거야?”“장사하는 사람은 미리 준비해야 혀. 장이 궁에 들어가는데 아부지 갓이 이렇게 비뚤면, 다들 물안장 주인이 허술한 줄 알 거 아녀.”“갓이 장맛을 보진 않어.”“그래도 주인은 보지.”끝분이 장부를 덮고 두식을 쳐다봤다.“니가 그 갓 쓰고 궁에 갈 일은 아직 없당께.”“어머니, 딸이 품평에 나간다는데 아부지가 단정해야지유.”“그려. 단정은 해라. 새 갓은 장값 벌고 나서 써.”두식은 갓을 벗어 무릎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챙을 쓸어 내리던 손이 슬그머니 장 항아리 쪽으로 갔다.“그럼 품평에 붙으면 바로 사도 되겄슈?”“붙고 나서 물어봐.”새미는 막장을 항아리에 담았다. 아부지는 아직 빚도 갚지 않았는데 궁 장고에 들어갈 장부터 팔고 있었다. 그래도 손은 막장을 꼼꼼히 눌러 담았다. 새미가 가장자리에 묻은 장을 닦자 두식도 천 조각을 집어 항아리 입구를 닦았다.“이건 우리 집 장이니께.”“알면 갓은 그대로 둬.”두식은 갓을 머리에 썼다. 이번에는 손으로 눌러도 비뚤어졌다.“아부지, 갓부터 고치지 말고 막장이나 봐.”“갓이 비뚤어도 장은 잘됐어.”“아직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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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콩물

새미는 아부지의 비뚤어진 갓을 떠올리며 물안장 보자기를 고쳐 멨다. 갓은 궁에 들어가기 전에 새로 맞추겠다고 했지만, 먼저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52냥. 그 돈을 마련하려면 장을 팔아야 했다.도성 장터의 국밥집은 점심 손님을 치우느라 바빴다. 가마솥에서 김이 올랐고, 주인은 국자를 들고 솥 가장자리를 훑었다. 새미가 문 앞에 서서 보자기를 내려놓자 주인이 고개만 돌렸다.“국밥 드시려면 아직 솥에 남았소.”“밥을 먹으러 온 건 아닙니다. 장을 좀 봐 주십시오.”“장?”주인의 눈이 보자기로 내려갔다. 새미는 매듭을 풀고 작은 단지를 꺼냈다. 장을 팔러 다니는 사람은 많았다. 값싸고 짜기만 한 장도 적지 않았다. 주인이 먼저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물안골 물안장입니다. 간장하고 된장, 고추장을 조금씩 가져왔습니다.”“얼마요?”“오늘은 맛만 봐 주십시오. 가을에 장을 넘기고, 돈은 먼저 받으려고 합니다.”주인이 국자를 솥에 걸쳤다.“장도 안 받았는데 돈부터 내놓으란 소리요?”“먼저 드리는 돈은 가을 장값에서 빼시면 됩니다. 맛이 다르면 안 받으셔도 되고요.”“말은 야무지네. 그런데 간장 맛이 어떻다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아오?”새미는 작은 나무 맛숟가락을 꺼냈다. 숟가락 끝으로 간장을 조금 떠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은 바로 입에 넣지 않고 먼저 코를 가까이 댔다.“냄새부터 맡으시네요.”“국밥 파는 사람이 장을 덥석 먹으면 쓰나. 안 맞는 장이면 손님상에 내놓고 욕먹지.”“맞습니다. 냄새가 먼저 이상하면 드시지 마십시오.”주인은 새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혀끝에 간장을 조금 묻힌 뒤, 입을 다물고 천천히 맛을 보았다. 새미는 주인의 손을 살폈다. 숟가락을 쥔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짜진 않소.”“소금은 많이 넣지 않았습니다. 짠맛보다 뒤에 남는 맛이 있습니다.”“그 뒤에 남는 맛 때문에 국밥이 맛있어지나?”“국밥에 넣으실 만큼만 풀어 보시면 압니다.”주인은 옆에 놓인 국밥 그릇을 들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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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천일염

새미는 뚜껑을 덮지 않은 간장 단지를 주인 쪽으로 조금 밀었다.“소금을 못 판다는 말씀이십니까?”“안 판다는 말이오. 염씨장전에서 우리 가게에 장을 대 주고 있소. 그쪽에서 소금을 구해 주기도 하고.”주인은 단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맛을 보지 않은 채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새미는 단지를 거두지 않았다.“염씨장전 장만 쓰기로 하셨습니까?”“그런 약속까지 한 건 아니오. 다만 외상으로 소금을 가져다 쓰고 있소. 장을 바꾸면 그쪽에서 소금을 끊겠다는 거지.”“그럼 물안장 장맛이 나빠서가 아니라, 소금이 걱정이시군요.”“맞소. 소금이 없으면 장을 만들 수 없지 않소. 좋은 장을 사 놓고도 솥을 못 걸면 무슨 소용이오.”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염씨장전의 장을 택한 까닭을 짐작했다. 한 곳에서 장과 소금을 함께 얻으면 편했다. 편한 거래를 바꾸게 하려면, 새미 쪽에서도 그만큼 믿을 만한 조건을 내야 했다.“소금은 제가 구해 보겠습니다.”주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어디서?”“서쪽 나루에 큰 소금배가 들어옵니다.”“언제 들어오는지 알고 있소?”“7월 중순입니다.”그 말은 가볍게 나왔다. 지난 생에는 궁 장고의 소금이 떨어질 때마다 나루에서 소금이 들어오는 날을 보고받았다. 배가 며칠 늦어지면 장고의 소금 항아리부터 다시 세었다. 궁에 살던 새미에게는 그날이 장부 위의 숫자였지만, 지금은 장독 87개를 지킬 일이었다.“배가 들어오면 다 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오.”“압니다. 먼저 값을 알아보고, 살 수 있는 만큼만 사겠습니다.”“소금값이 얼마인지는 아시오?”“한 섬에 2냥이었습니다.”주인은 새미를 쳐다봤다.“그건 언제 값이오?”“올봄에 들은 값입니다. 지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그럼 단정하진 않는 게 좋겠소. 염씨장전이 많이 사면 값도 오를 테니.”주인은 장사를 하는 사람답게 바로 셈을 했다. 새미도 그 계산을 알고 있었다. 소금을 사면 국밥집에 소금을 함께 대 줄 수 있었다. 대신 장을 담글 돈이 줄어들었다.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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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짠지

새미는 소금배 주인의 장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어제 다 샀다고 하셨습니까?”“그렇소. 염씨장전에서 배가 닿기 전에 값을 치렀소. 자루도 이미 옮겼고.”“한 자루도 남지 않았습니까?”“팔려 나간 것까지 다 계산했소. 남은 건 없소.”새미는 나루에 놓인 자루들을 다시 보았다. 젖은 자루와 다른 배에서 내린 소금은 있었지만, 장에 넣을 만큼 제대로 간수를 뺀 소금은 보이지 않았다. 소금배 주인은 장부를 덮고 다음 손님에게 몸을 돌렸다.“그럼 이 배에서 살 수 있는 건 없겠네요.”새미가 말했다.선비 차림의 세자는 지게를 내려놓았다. 아까 얹었던 자루가 판자에 닿으며 둔한 소리를 냈다.“그렇소. 이 배의 소금은 염씨장전으로 갔소.”“저희 집 장독에 넣을 소금도 없고, 국밥집에 대 줄 소금도 없습니다.”새미는 나무 맛숟가락을 허리춤에 넣었다. 빈 지게를 지고 돌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빈 지게를 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어려웠다.“다른 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겠소?”“제가 알기로는 큰 소금배는 이 배가 마지막입니다.”새미는 말을 뱉고 나서 입술을 다물었다. 꿈에서 본 일이라고 덧붙일 수도 없었다. 세자에게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에게도 회귀를 밝힐 수는 없었다.세자는 새미를 잠깐 바라보았다.“그대가 아는 만큼만 말한 것이오?”“예. 제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입니다.”세자는 더 묻지 않았다. 숨겨야 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미가 말하지 않는 이유를 다그치지 않았다.“그럼 나루에서 더 기다릴 필요는 없겠구려.”“예.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지게는 내가 지겠소.”“비어 있어도 제가 지겠습니다.”“아까는 소금 자루를 두 개나 올렸소.”“그때는 살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요.”세자는 잠시 빈 지게를 보았다. 그러고는 끈을 새미 쪽으로 내밀었다.“그럼 함께 들고 가겠소.”새미는 지게 끈을 받아 한쪽을 걸쳤다. 세자가 다른 쪽을 들었다. 두 사람의 걸음이 나루 판자 위에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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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묵은 소금

끝분은 열쇠를 자물쇠에 넣었다. 손목에 힘을 주자 녹슨 자물쇠가 한 번 걸렸다가 돌아갔다.“할매, 아부지가 뭘 했는데?”“문부터 열자.”끝분이 문고리를 당겼다. 문이 흙벽에 걸려 조금 움직이다 멈췄다. 새미는 문 아래에 낀 흙을 손으로 긁어냈다.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갔다. 끝분이 다시 당기자 문이 낮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묵은 냄새가 먼저 나왔다. 먼지와 마른 흙 냄새 사이에 소금 냄새가 섞여 있었다.새미는 문턱에 멈춰 안쪽을 살폈다. 흙광 안에는 소금 자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루 겉은 누렇게 바랬지만 찢어진 곳은 없었다. 바닥은 말라 있었고, 벽에는 물자국도 보이지 않았다.“다 있네.”끝분은 대답 대신 안으로 들어갔다. 새미는 뒤따라 들어가 벽과 바닥을 살폈다. 소금 자루들은 한쪽 벽에 모여 있었다. 끝분이 자루 하나의 매듭을 풀었다. 마른 소금이 자루 안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간수는 괜찮을까?”“손으로 봐야제.”끝분이 소금을 한 줌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작은 알갱이가 흘렀다. 끝분은 손바닥의 소금을 입에 조금 댔다. 입술을 오므리고 천천히 맛을 보았다.“5년이믄 쓴맛이 다 빠졌다.”새미는 끝분의 손을 바라봤다.“5년이나 묵혔어?”“그만큼 묵혔응께 쓴맛이 빠졌제.”끝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새미는 소금을 집어 혀끝에 댔다. 짠맛이 바로 올라왔지만 거칠게 찌르지는 않았다. 끝맛이 맑았다. 혀 옆에 남는 떫은 기운도 없었다.“간수는 빠졌어. 장에 쓸 수 있어.”“그렇제.”“이 정도면 선매한 장도 담글 수 있겠다.”끝분은 자루 매듭을 다시 묶었다. 손등에 묻은 소금을 털지 않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아껴 써야 한다. 이 소금이 있다고 마구 퍼 쓸 수는 없어.”“알아. 독마다 필요한 만큼 재서 쓸게.”“장독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도 생각혀.”“사람도 소금 먹고 살아야 하니까?”“사람은 장독보다 먼저 밥을 먹어야제.”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안을 다시 보았다. 자루가 겹쳐 놓인 곳 아래쪽에 나무판이 보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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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잣죽

새미는 쪽지를 품에 넣은 채 물안골을 나섰다.도성으로 가는 길에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금방 오겠다고 썼지만, 그 말이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 새미는 알고 있었다. 갓을 비뚤게 쓰고 지게를 진 아버지는 장터며 주막이며, 사람 하나 붙잡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를 수 있었다.첫 주막의 주인은 새미가 내민 아버지의 생김새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그런 분은 못 봤소.”“갓이 늘 삐뚤어요. 배가 조금 나오고요.”“그런 양반이 이 근처엔 꽤 있소.”“장 지게를 지고 다니는 장사꾼이에요.”“그런 양반도 꽤 있소.”새미는 더 묻지 않았다. 주막 안쪽을 훑고, 빈 그릇을 치우는 사람에게도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새미는 주막을 나와 길 건너의 다른 곳으로 향했다.2번째 주막에서는 술상 앞에 앉은 손님이 갓을 벗어 두고 있었다. 새미는 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아버지는 아니었다. 손님은 새미가 오래 바라보자 술잔을 내려놓았다.“누굴 찾소?”“아버지를 찾습니다.”“그럼 여기엔 없소.”손님은 제 갓을 다시 썼다. 새미는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주막을 나왔다.도성 장터에는 여러 소리가 엉켰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 사람을 부르는 소리, 국과 밥을 내오는 소리가 겹쳤다. 새미는 문턱마다 서서 안을 확인했다. 주인에게 물었고, 손님에게 물었고, 빈 상을 닦는 사람에게도 물었다. 아버지가 왔다 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장터 안쪽으로 들어서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새미는 손바닥으로 배를 눌렀다. 아침부터 물만 마셨다. 그래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한 주막에서 주인이 새미의 말을 듣고 부엌 쪽을 돌아봤다.“잣죽을 먹고 있는 양반이 있긴 하오. 갓이 삐뚤어졌던가.”“어디 있습니까?”“저 안쪽이오. 그래도 얼굴부터 확인하시오. 엉뚱한 사람한테 다짜고짜 아버지라 부르면 민망하니.”“그럴게요.”새미는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 상 위에 잣죽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을 움직였다. 갓의 한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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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식혜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바로 씌워 주었다.두식은 갓끈을 만져 보더니 새미를 내려다봤다.“고맙다.”“이제 삐뚤어지면 아부지가 바로잡아.”“그려. 내가 해 볼게.”“해 보는 게 아니라 해야지.”가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손뼉을 쳤다.“좋아. 다들 한 가지씩 약속했네. 새미는 장부를 찾고, 아버님은 도망가지 않고, 도강은 귀를 안 붉히고.”“그건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마당 뒤쪽에서 도강이 답했다. 가희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왜요?”“제가 노력한다고 바로 낫는 일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그럼 노력은 하겠다는 거죠?”“예.”가희는 새미를 보고 웃었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끈을 한 번 더 살펴봤다. 두식은 갓을 손으로 눌러 썼다.“이제 안 삐뚤어졌슈?”“응.”“그럼 됐네유.”“아부지, 갓만 똑바로 쓰면 되는 게 아니야.”“그건 나도 알아.”“알면 됐어.”두식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새미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삼키는지 묻지 않았다. 할매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는 데 새미가 대신해 줄 말은 없었다.가희는 손님들이 기다리는 안마당 쪽을 살폈다. 마당에는 작은 상들이 놓여 있었다. 상마다 그릇과 잔이 가지런히 놓였고, 안쪽에는 혼례를 치를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잔치 준비를 돕는 사람들이 그릇을 옮기며 오갔다.“이제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셔.”도강이 가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희는 그 손을 잠깐 바라보고는 제 치맛자락을 정리했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그렇습니까.”“그렇지만 오늘은 같이 가야지.”도강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가희가 손을 얹자 도강은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고 받쳤다. 귀가 다시 붉어졌다. 가희는 이번에는 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마당으로 들어갔다.새미는 두식과 그 뒤를 따랐다. 두식은 문턱을 지날 때 갓이 걸릴까 고개를 숙였다. 갓은 이번에도 똑바로 남아 있었다.―마당에 모인 손님들은 가희와 도강이 자리를 잡자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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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팥

새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번에 장맛을 본 작은 나무 숟가락이었다. 허리춤에서 꺼내 손바닥에 올리자, 손등의 얕은 흉터 두 개가 옹기 표면에 비쳤다.7월 26일 아침이었다. 밤새 내린 이슬이 독 뚜껑에 맺혀 있었다. 끝분은 마른 행주로 뚜껑을 닦고 새미가 고른 독 세 개를 차례로 열었다.“이쪽이 1년 묵은 장, 가운데가 2년, 저쪽이 3년이제?”“예. 장부에 적힌 담근 날도 맞아요.”“그럼 됐다. 적힌 것만 믿을 일은 아니지만, 적힌 것부터 틀리면 맛볼 것도 없당께.”새미는 장부를 독 옆에 펼쳤다. 끝분이 쓴 글씨는 굵고 또렷했다. 담근 날과 메주를 띄운 때, 소금을 넣은 양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손끝에 먹물이 묻었다.끝분은 깨끗한 그릇 세 개에 장을 조금씩 덜었다. 새미는 맛숟가락을 물에 씻어 닦았다. 장맛을 볼 때마다 숟가락을 씻지 않으면 앞맛이 다음 장에 묻었다.“할매, 세 장을 한꺼번에 맛보면 순서를 바꿔도 알 수 있을까요?”“알아도 헷갈리겄지. 혀가 먼저 맛본 걸 기억하니께.”“그럼 순서를 바꿔 볼까요?”“그것도 해 봐야제. 네가 맞히는 것보다 장이 품평에 나갈 수 있냐가 더 중요하잖여.”새미는 첫 그릇을 당겨 왔다. 장을 숟가락 끝에 조금 묻혀 혀에 댔다. 짠맛이 먼저 닿았고, 뒤이어 메주 냄새가 났다. 아직 맛이 가벼웠다. 새미는 숟가락을 씻고 다음 그릇을 들었다.이번에는 입안에 단맛이 조금 오래 남았다. 짠맛은 첫 장보다 둥글었고, 콩의 고소한 냄새가 뒤에 붙었다. 새미는 눈을 감고 한 번 더 맛봤다.“2년 장입니다.”“왜 그리 생각했냐?”“첫 장보다 짠맛이 덜 날카롭고, 메주 냄새가 조금 가라앉았어요. 아직 뒷맛이 길지는 않습니다.”끝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새미는 마지막 그릇을 들었다. 장이 혀에 닿자 먼저 짠맛이 퍼졌다. 그 뒤에 단맛이 천천히 따라왔다. 짠맛이 사라진 자리에는 콩 냄새와 볕에 말린 독의 냄새가 남았다.새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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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녹두전

7월 29일, 염씨장전 뒷골목에서 밤톨이는 담장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앞니가 빠진 자리에 혀끝이 자꾸 닿았다. 밤톨이는 입을 다물고 염씨장전 뒤뜰을 살폈다.“문 열렸다.”옆에 있던 아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사람 없을 때 들어가기로 했잖아.”“지금 사람 없잖아.”“안에 사람이 있으면?”“그럼 나오면 되지.”밤톨이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했다.“그게 작전이야?”“작전은 작전이지.”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봤다. 누구도 작전의 뒷부분을 준비해 오지는 않았다. 밤톨이는 한숨을 쉬고 담장 너머를 다시 살폈다. 염씨장전의 뒤뜰에는 큰 독들이 놓여 있었다. 독은 많았고, 뚜껑은 모두 닫혀 있었다. 물안장의 독처럼 이름표를 단 독은 보이지 않았다.“그냥 보는 거야. 손대면 안 돼.”밤톨이가 말했다.“우리도 알아.”“남의 장을 맛보면 안 돼. 독 뚜껑도 열면 안 돼.”“그럼 뭘 보러 왔는데?”“독에 이름이 있는지.”아이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독 이름을 왜 봐?”“우리 할매는 독마다 이름을 붙여. 어느 독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도 다 알아. 여기는 독이 많잖아. 이름이 없으면 어느 독인지 어떻게 알아?”“독이 다르게 생겼을 수도 있지.”“다르게 생겨도 맛이 같으면 헷갈려.”“맛보면 되잖아.”밤톨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기도 했고, 염씨장전에서 장을 몰래 맛보면 큰일 날 것 같기도 했다.“그러니까 눈으로만 봐.”밤톨이는 몸을 낮춰 열린 문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누구도 독에 손대지 않았다. 밤톨이는 가까이 다가가 독 앞을 훑었다. 뚜껑이며 몸통이며 살폈지만, 이름이 적힌 곳은 없었다.“여긴 없네.”밤톨이가 낮게 말했다.“저쪽은?”“가까이 가지 마.”“안 만지면 되잖아.”“그래도 안 돼.”밤톨이는 아이의 소매를 잡아 뒤로 물렸다. 그때 뒤뜰 문이 열렸다.“거기서 뭘 하는 게요?”염대길의 목소리가 들렸다.아이들은 한꺼번에 굳었다. 밤톨이는 동생들을 뒤로 보내고 문 쪽을 돌아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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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엿

염대길은 밤톨이가 가리킨 뒤뜰을 돌아봤다. 독은 줄을 맞춰 놓여 있었고, 뚜껑도 모두 닫혀 있었다. 이름표는 보이지 않았다.“독에 이름이 없으면 어떻다는 거요?”“어느 독에서 무슨 장이 나오는지 헷갈리잖아요.”밤톨이가 녹두전을 든 채 대답했다. 입가에 녹두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염대길은 은가락지를 엄지로 밀었다.“독마다 맛이 다를 거라고 누가 정했소?”“저희 할매요.”“그 집 장독은 이름을 붙여서 부르지. 큰애기, 고집쟁이, 울보. 이름이 있어야 할매가 어디에 무슨 장을 넣었는지 안 잊어버려.”새미가 아이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줬다. 밤톨이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그 집 독에 이름이 없다는 게 곧 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야.”“알아. 그냥 이름이 없다고 말한 거야.”“그래. 본 것만 말하면 돼.”염대길의 입가가 굳었다. 어제까지라면 아이가 제 가게 뒤뜰에 들어온 일을 따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녹두전을 다 먹고 기름 묻은 종이를 접었다. 새미는 종이를 모아 한데 쥐었다.“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데리고 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오.”“그럼 이만 가겠습니다.”“단 낭자.”새미가 돌아보자 염대길이 손바닥을 내밀었다.“빚은 오늘 갚는 날이오. 잊은 건 아니겠지?”“잊지 않았습니다.”“그럼 돈을 가져왔소?”새미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 손을 댔다. 염대길의 눈이 그 손을 따라갔다. 하지만 새미는 돈을 꺼내지 않았다. 아직 셀 때가 아니었다. 받을 돈도, 내놓을 돈도 한자리에서 확인해야 했다.“오늘 안에 갚겠습니다.”“오늘이 그믐이오. 해가 지기 전에 돈을 내야 하오.”“알고 있습니다.”“이자 붙은 52냥이오. 40냥만 가져오면 받지 않겠소.”“52냥을 가져왔습니다.”새미의 말이 끝나자 염대길의 눈썹이 올라갔다. 뒤에 있던 두식이 갓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삐뚤어진 갓끈을 매만지던 손이 멈췄다.“정말이오?”“네.”“그런 돈이 어디서 났소?”“제가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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