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보모가 되었더니 말 없는 대군의 딸이 나에게만 속삭인다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80 챕터

61화. 떠난 자리의 값

그 말 뒤로 건우는 문턱 밖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사직서를 상 위에 둔 채 붓을 씻었다. 종이에는 먹이 마르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소리에게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알겠소.”“그전에는 사직서를 받지 말아 주세요.”건우가 잠시 종이를 보았다. 손을 뻗지는 않았다.“그대가 아이에게 말할 때까지 받지 않겠소.”“제가 나가겠다고 해도요?”“그대가 직접 말한 뒤에 다시 묻겠소.”나는 붓을 씻은 물을 비웠다. 사직서를 접지 않고 상 위에 두었다. 소리가 잠든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룩이의 풀린 실밥은 꿰매 두었고, 아이의 팔은 인형을 감싸고 있었다.건우는 방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도 그를 붙잡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서 있다가, 그는 사랑채 쪽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 나는 작은 방에 둔 짐을 꾸렸다. 소매에 넣고 다니던 주판알 3개와 바느질 상자를 넣었다. 말 장부는 품에 안았다. 그동안 적어 온 날짜와 말 수가 빠짐없이 남아 있었다. 그날의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연화채 문 앞에서 건우를 만났다. 그는 서란의 붓을 손에 들고 있었다. 붓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나를 막아서지는 않았다.“짐이 많지 않소.”“제 물건은 이만큼입니다.”“허가 문서는 남겨 두었소. 곳간 장부는 성직이 확인할 때까지 따로 두겠소.”“제가 적은 장부도 함께 보관해 주세요. 제가 확인한 수와 확인하지 못한 수를 구분해 두었습니다.”“알겠소.”“제가 떠나도 소리의 말 장부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그대가 쓴 것이니 그대가 가져가시오.”나는 말 장부의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대군부의 기록과 내 기록은 서로 달랐다. 한쪽은 곳간을 드나든 쌀의 수였고, 한쪽은 소리가 하루에 낸 말의 수였다. 둘 다 적은 사람이 책임질 일이었다.건우는 내 짐을 들겠다고 하지 않았다. 나도 부탁하지 않았다. 그가 내 앞에 서서 길을 비켜 주었다. 나는 대문까지 걸었다. 마당을 지날 때 소리의 방에서 놋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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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0마디의 값

“오늘 말은 이미 한 마디 적었어.”나는 대문을 연 채 소리에게 말했다. 소리는 얼룩이를 안고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건우는 아이 뒤에 서 있었다. 소리의 방울이 한 번 울리고 잠잠해졌다.“내가 한 말도요?”“응. 네가 한 말은 빠뜨리지 않아.”“그럼 오늘은 1마디예요?”“지금까지는 그래.”소리는 내 손에 든 장부를 보았다. 나는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오늘 날짜 아래에 이미 한 줄을 적어 두었다.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말한 마디 수만 적었다.“내일도 적어요?”“내일 네가 하는 말도 적을 거야. 말하지 않는 날도.”소리는 얼룩이의 귀를 접었다가 폈다. 건우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게 대신 답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집에 가자, 소리야.”건우가 낮게 말했다.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한 번 더 보고는 아버지 쪽으로 돌아섰다. 건우는 아이가 먼저 걷도록 기다렸다. 마당 쪽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문밖에서 지켜보다가 나는 장부를 품에 넣었다.“아줌마.”소리가 다시 부를까 싶어 돌아보았지만, 아이는 건우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입술은 다물려 있었다. 건우가 아이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을 떼라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문을 벗어났다.나는 문을 닫았다.◓집 안에서는 어머니가 쌀을 씻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쌀을 천천히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내 발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마루가 조금 흔들리자 고개를 들었다.“다녀왔어요.”나는 어머니가 읽을 수 있게 입술을 크게 움직였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살피고 손짓했다. 소리가 왔느냐는 뜻이었다.“응. 건우 나리와 같이 돌아갔어요.”어머니가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다시 내 쪽을 가리켰다. 걱정하는지 묻는 손짓이었다.나는 어머니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괜찮아요.”어머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시 쌀을 씻었다. 물이 대야 가장자리에 부딪쳤다. 나는 장부를 방 안에 두고, 책상 앞에 앉은 하람을 보았다. 펼친 책 옆에 먹과 붓이 놓여 있었다.“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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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염치의 값

나는 그가 적은 『오늘 0마디』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획이 종이 위에서 조금 흔들렸다. 건우의 손은 붓을 놓은 뒤에도 상 위에 머물러 있었다.“그 말을 제가 들으면, 돌아가야 합니까?”건우가 손을 거두었다.“아니오. 그대가 정할 일이오.”“돌아가면 또 신분 문제를 만나겠죠.”“그렇소.”그는 그렇다고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달래는 말도, 아니라고 우기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장부를 덮었다. 건우가 적은 글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제가 청죽당에서 일하면 보모입니다. 대군부에서 지내면 사람들은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는지 묻겠죠.”“그 질문은 내가 받겠소.”“제가 그 질문을 받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대답할 수 없는 자리에 다시 서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건우는 마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집 마당에는 말린 빨랫감이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 끝이 담장에 닿았다. 그는 그쪽을 한동안 보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신분을 바꾸는 방법을 찾겠소.”“그 방법이 있습니까?”“아직은 모르오.”“모르는 일을 약속하지 마세요.”“방법을 찾겠다는 말은 약속이오.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한 건 아니오.”나는 장부를 가슴에 안았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 말에 기대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그 방법을 찾으시는 동안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그대가 원하는 일을 하시오.”“제가 원하는 일은 제가 제 힘으로 서는 겁니다.”“알겠소.”“나리의 힘으로 제 자리를 얻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그대가 해낸 일을 내가 빼앗지 않겠소.”“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건우는 대답 대신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었다. 대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길은 익숙했지만,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걷지 않았다.“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겠소. 그대가 서리 일을 원한다면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관청에 물어보겠소. 시험이 있다면 시험을 보게 하겠소. 하지만 그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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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입학식의 값

9월 3일, 학당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섰다. 소리는 얼룩이를 안고 건우 곁에 섰다. 목에 건 놋쇠 방울이 옷깃에 닿아 작게 울렸다.나는 소리보다 반걸음 뒤에 섰다. 보호자로 왔으니 아이가 먼저 설 자리를 고르게 두고 싶었다. 건우도 소리를 앞세우지 않았다. 소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하자, 그제야 나는 아이 옆으로 다가갔다.“여기서 기다리면 되겠습니까?”내가 묻자 건우가 대문 안쪽을 가리켰다.“훈장께서 마당으로 나오실 것이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를 나누면 되오.”“보모, 소리가 긴장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주시오.”“대군 나리께서 직접 말씀하셔도 됩니다.”“내 말은 들었소. 그대가 해 주는 말도 듣고 싶어 할 것이오.”나는 소리에게 몸을 돌렸다.“교실에 들어가도 말은 하지 않아도 돼. 손으로 인사해도 되고, 고개를 숙여도 돼. 네가 하고 싶은 쪽으로 하면 돼.”소리는 얼룩이의 귀를 만졌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그 뜻을 더 확인하지 않았다.마당 안쪽에 있던 훈장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훈장은 건우에게 예를 갖춘 뒤 소리 앞에 멈춰 섰다. 아이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무릎을 조금 굽혔다.“소리 아가씨, 오늘부터 이 학당에서 글과 셈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앉아도 괜찮겠습니까?”소리는 훈장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말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뜻을 제가 알아들었습니다.”훈장은 천천히 일어섰다. 소리는 얼룩이를 품에 안은 채 교실 쪽을 보았다. 문 안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얼룩이는 교실에 데려가도 되니?”내가 묻자 소리는 인형을 가슴에 붙였다가 다시 조금 내렸다. 훈장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인형을 옆에 두어도 됩니다. 다만 글을 쓸 때는 책상 위에 놓아 주십시오. 다른 아이가 보고 싶어 하면 소리 아가씨가 허락할 때만 보여 주고요.”소리는 훈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훈장은 그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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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서신의 값

9월 4일, 감찰원 안쪽 접수방에서 서신을 받아 들었다. 봉한 종이에는 감찰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손등의 먹물 점을 엄지로 문질렀다. 봉투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았다.“한 낭자, 이쪽으로 오시지요.”구명우 서리가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낮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문을 닫자 바깥에서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발걸음이 들렸다.나는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렸다.“제가 읽어도 되겠습니까?”“물론입니다. 다만 제가 먼저 말씀드릴 내용이 있습니다.”구 서리는 맞은편에 앉았다. 말이 느린 사람답게 문장 사이에 숨을 두었다.“감찰원에서 셈 도감 서리를 뽑으려 합니다. 곳간의 입고와 출고를 살피고, 셈이 맞는지 자문하는 자리입니다. 한 낭자에게 그 일을 맡아 주실 수 있는지 여쭈려고 합니다.”나는 서신 위에 손을 얹은 채 구 서리를 바라봤다.“저를요?”“예. 대군부 곳간에서 입고와 장부 사이의 차이를 밝혀내셨지요. 그 일에 관해 기록을 확인했습니다.”“대군부에서 제게 유리한 말을 보낸 겁니까?”“아닙니다. 감찰원에 들어온 기록을 보고 제안드리는 것입니다.”그는 서신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글은 짧았다. 셈 도감 서리 임용 제안. 월급 8냥. 임용 조건은 셈 시험 한 번. 합격하면 서리로 일한다는 내용이었다.나는 월급 숫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8냥이면 집에서 받는 보모 삯보다 많았다. 빚은 아직 62냥이 남아 있었다. 갚을 돈을 따로 세어 둔 장부가 집에 있었다. 담보 문서도 그대로였다. 하람의 서당 삯은 밀려 있었고, 아버지의 화물 값은 돌아오지 않았다.“시험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임용되지 않습니다. 시험은 한 번입니다. 다시 보게 해 드린다는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시험 날짜와 범위는요?”“날짜는 시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정하겠습니다. 범위는 셈 도감 서리가 맡을 기본 일입니다. 수를 맞추고, 기록을 읽고, 빠진 곳을 찾는 일입니다.”구 서리는 조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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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셈 시험의 값

9월 9일, 감찰원 시험장 앞에 응시자들이 줄을 섰다. 나는 소매 속 주판알 세 개를 손끝으로 밀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빠진 알은 없었다.“여기가 셈 도감 서리 시험장 맞습니까?”내가 묻자 문 앞의 관리가 시험지를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이름을 확인하십시오. 시험이 시작되면 자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시험장 안에는 긴 책상이 놓여 있었다. 먹과 붓, 답안 종이는 자리에 이미 준비돼 있었다. 나는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 앉았다. 손등의 먹물 점이 종이에 닿지 않도록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옆자리 응시자는 내 소매를 한 번 보고는 앞을 향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대군부에서 아이를 돌보던 사람이 셈 시험을 본다더군.”“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보모 삯만으로는 부족했겠지요.”“그 집 곳간 일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대군부 일이니 감찰원 셈과는 다르지 않겠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험관이 앞쪽 탁자에 시험지를 놓는 소리가 났다. 종이 모서리가 책상에 닿았다.“응시자는 자리에 앉으십시오. 시험은 시작 알림 뒤에 펼치십시오. 서로 말을 나누거나 다른 답안을 보는 일은 허락하지 않습니다.”응시자들이 등을 폈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책상 아래에서 주판알 하나가 손바닥을 굴렀다. 손가락으로 붙잡아 제자리에 놓았다.시험관이 시험지를 한 장씩 돌렸다. 내 앞에 종이가 놓였다. 나는 시험관이 시작을 알릴 때까지 손대지 않았다.“시작하십시오.”종이를 펼치자 첫 문제 위에 환산 기준이 적혀 있었다. 1섬은 10말, 1말은 10되, 1되에는 10홉이 들었다. 기준은 그 아래에도 한 번 더 쓰여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종이의 첫 줄을 짚었다.문제는 2섬 3말 4되 5홉을 되와 홉으로 나타내라는 것이었다.2섬은 200말이 아니라 20말이었다. 한 섬에 10말이 들었다. 20말은 200되였다. 3말은 30되. 거기에 4되를 더하면 234되였다. 5홉은 그대로 남았다.나는 답안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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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첫 월급의 값

9월 13일, 감찰원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관리 앞에 놓인 돈은 8냥이었다. 나는 돈을 세기 전에 임용 문서와 지급 기록부터 맞춰 보았다. 이름은 한하영. 셈 도감 서리. 월급은 8냥. 기록에 적힌 수는 내가 들은 것과 같았다.“확인했습니다.”관리가 돈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1냥씩 세어 여덟 닢을 나눠 놓았다. 마지막 닢까지 확인한 뒤 손바닥으로 덮었다. 동전 가장자리가 손금에 걸렸다.처음 받은 월급이었다. 소매 안에는 주판알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손을 넣어 알을 하나씩 밀었다. 다 확인하고도 다시 셌다.관리의 붓끝이 장부에서 떨어졌다.“이제 가져가셔도 됩니다.”“지급 날짜도 적혔습니까?”“여기 있습니다. 9월 13일입니다.”나는 장부의 날짜를 눈으로 따라갔다. 그 아래에는 내 이름과 월급 액수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임용 문서를 확인하던 날과 달리, 이번에는 돈이 손에 들어왔다.8냥을 다시 셌다. 6냥은 아버지 빚에 보태기로 했다. 남는 돈은 2냥이었다. 집에 필요한 것을 먼저 사고, 하람의 서당 삯도 나눠야 했다. 어디에 얼마를 쓸지는 집에 가서 다시 적기로 했다.돈을 작은 주머니에 넣고 끈을 묶었다. 손등의 먹물 점이 동전에 묻지 않게 손바닥을 닦았다.“첫 월급이라도 셈은 같아야지.”내가 중얼거리자 관리가 고개를 들었다.“무슨 말씀입니까?”“아닙니다. 지급 기록을 잘 봤다는 말입니다.”나는 주머니를 소매 안쪽에 넣었다. 얇은 천 너머로 동전이 손에 닿았다. 걸을 때마다 부딪히지 않도록 끈을 한 번 더 당겼다.감찰원 문을 나서기 전, 임용 문서를 꺼내 이름을 확인했다. 종이 위의 이름은 그대로였다. 나는 문서를 반듯하게 접어 품 안에 넣었다.◓9월 14일, 버들고개 집 마루에 소칠수가 앉아 있었다.아버지는 마루 끝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앉아 손가락을 무릎 위에 모았다. 하람은 서당에 간 뒤였다. 나는 소매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마루 가운데 놓았다.소칠수는 주머니를 먼저 보지 않았다.“월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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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나란한 길의 값

감찰원 문을 나설 때, 소매 안의 주판알이 손목에 닿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임용 문서가 든 주머니를 눌렀다. 문서는 접힌 자리에서 조금 들떠 있었지만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한하영. 셈 도감 서리.서리가 된 뒤에도 퇴근길에 청죽당으로 향하는 일은 그대로 남았다. 다만 문을 들어서는 발걸음은 전과 같지 않았다. 이제는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리의 하루를 맡은 보모도 아니었다.그렇다고 찾아가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감찰원 안에서 구명우 서리가 내 자리 앞을 지나가다 멈췄다. 그는 서류를 든 채 나를 보았다.“오늘도 청죽당에 들르십니까?”“소리를 보러 갈 생각입니다.”“일이 끝난 뒤라면 다녀오셔도 됩니다. 문서가 남으면 내일 이어서 보면 되니까요.”“오늘 맡은 것은 정리했습니다.”나는 책상 한쪽에 둔 문서 묶음을 살폈다. 날짜가 적힌 면이 위로 오도록 가지런히 맞췄다. 확인을 마친 뒤 붓을 씻고, 쓰던 먹을 뚜껑으로 덮었다. 서리 일을 맡은 뒤로 퇴근 전에 책상 위를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에 돌아왔을 때 어느 문서부터 손대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구 서리는 문서 묶음의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군요.”“내일 다시 볼 문서와 오늘 끝낸 문서를 나눴습니다.”“그렇게 해 두면 찾기 쉽지요.”그는 더 묻지 않고 옆 책상으로 갔다. 나는 주판알 세 개를 손끝으로 밀었다. 잘못 움직인 알은 없었다. 손등의 먹물 점도 그대로였다.감찰원 문을 나와 청죽당 쪽으로 걷는 동안, 나는 들를 곳을 하나씩 떠올렸다. 먼저 소리의 방. 그다음 부엌. 건우가 서재에 있으면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오래 차지하지 않은 채 돌아올 생각이었다.그 생각을 한 뒤에야 나는 걸음을 늦췄다.예전에는 소리가 저녁을 먹었는지, 방울을 만지작거리는지, 얼룩이를 어디에 눕혔는지부터 떠올렸다. 지금은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셌다. 소리의 하루에 내가 들어가는 시간과 빠지는 시간을 따로 두려 했다.청죽당 대문에 닿자 호위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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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서두름의 값

나는 종이의 모서리를 잡은 채 한동안 글자를 내려다봤다. 먹이 덜 마른 자리가 손끝에 묻었다. 건우가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을 때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끝을 잡았는데도, 작은 얼룩이 손등에 남았다.소리는 내 손등을 살폈다. 먹물 점 옆에 생긴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제 소매를 내밀었다. 닦아 주겠다는 뜻이었다.“괜찮아. 조금 묻은 것뿐이야.”나는 소매로 문지르지 않고 손등을 펼쳐 보였다. 소리는 잠시 보다가 제 손바닥을 내 손등 옆에 나란히 놓았다. 손을 포개지는 않았다. 서로 손바닥 크기를 재는 것처럼 두 손이 마루 위에 놓였다.건우는 우리 앞에 있던 찻잔을 옆으로 옮겼다. 찻잔 바닥이 나무에 닿으며 낮은 소리를 냈다.“그 종이는 가져가시오.”“제가 받아도 괜찮습니까?”“하영 씨에게 주려고 쓴 것이오.”나는 종이를 접지 않고 보자기 위에 올렸다. 글자가 구겨지면 먹이 번질 것 같았다. 소리는 종이를 보다가 얼룩이를 끌어당겼다. 인형은 소리의 무릎에 앉았다. 놋쇠 방울이 조금 울렸다.“소리야, 이 카드는 아줌마가 가져가도 되겠니?”소리는 얼룩이의 앞발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종이 위의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 기다림. 소리는 글자 아래를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글자 모양을 익히는 중이라 손가락이 획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소리가 읽어 줄까?”소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가락을 거두고 얼룩이의 목에 달린 방울을 받쳤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오 어멈이 마루 끝에서 우리를 불렀다.“저녁 그릇 가져왔어요. 한 서리님도 드시고 가요.”“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먹겠습니다.”“누룽지는 식으면 딱딱해져요.”오 어멈은 그릇을 내려놓고 다시 부엌 쪽으로 갔다. 따뜻한 누룽지 냄새가 마루까지 왔다. 나는 그릇을 들어 소리 앞에 놓았다. 소리는 숟가락을 잡고 누룽지를 천천히 저었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힐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아줌마는 내일도 와요?”“내일은 감찰원에 일이 있어. 일이 끝나면 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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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대왕대비전의 값

“셈 도감 서리 한하영은 대왕대비전에 들라.”전교 사자의 말이 끝났다. 나는 보자기를 왼팔에 걸고 문턱을 넘었다. 오른쪽 소매 안에는 얼룩이가 들어 있었다. 인형의 놋쇠 방울이 팔에 닿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받쳤다.대왕대비전 안에는 향 냄새가 약하게 났다. 향로에서 연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바닥은 깨끗했고, 접어 둔 방석이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안내를 맡은 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보자기는 앞에 내려놓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셈 도감 서리 한하영이 문안드립니다.”“고개를 들라.”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왕대비는 낮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펼친 장부가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은 종이들이 실로 묶여 있었다. 둥근 글씨가 줄마다 이어졌다. 나는 장부를 알아보았다. 서란이 적은 곳간 장부였다.대왕대비는 장부를 덮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이 장부를 알고 있느냐?”“예. 청죽당 곳간의 기록입니다.”“누가 썼는지도 아느냐?”“연서란 마님께서 직접 적으셨다고 들었습니다.”나는 장부에 손을 대지 않았다. 탁자 너머에 놓여 있는 글씨만 보았다. 소작미가 들어온 날과 되수가 적혀 있었다. 글씨 옆에는 작은 표시가 붙어 있었고, 아래쪽에는 수를 다시 더한 자국이 있었다. 먹이 옅어진 곳도 있었다. 서란의 손이 여러 번 닿았던 종이였다.대왕대비가 장부를 한 장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처음에는 종정부에 이 장부를 보였다. 적힌 수가 많다고들 했지. 하지만 많다는 말만으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예.”“너는 다르게 읽었다고 들었다.”“제가 읽은 것은 적힌 수와 실제로 들어온 수의 차이였습니다.”“그 차이를 네가 처음 찾았느냐?”“저는 곳간에 들어온 쌀을 다시 셌습니다. 다만 장부에 적힌 값과 맞지 않는다고 확인한 것은 그 뒤였습니다.”대왕대비는 장부의 한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여기에는 올해 들어온 소작미가 694섬이라 적혔다. 네가 확인한 수는 480섬이었지.”“예.”“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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