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전하, 이번엔 제가 버리겠습니다: Kapitel 21 – Kapitel 30

36 Kapitel

21화. 내수사의 장부

귓가에 닿았던 숨결이 물러갔다.정화는 서의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마마의 언니 되시는 분은, 무엇을 그리 잘난 척하셨사옵니까.""다."정화가 웃었다."다 아는 척했지. 글씨도, 약도, 사람 속도. 그런데 정작 제 발밑이 꺼지는 건 몰랐어."부채가 펼쳐지고 매화 향이 멀어지는 동안, 서의는 김 상궁의 시신 곁에 무릎을 꿇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발밑이 꺼지는 것을 몰랐던 언니는, 지금 그 발밑에서 살아 돌아와 있었다.밤이 깊어서야 서의가 직방 우물가에서 손을 씻었지만, 손톱 밑에 낀 피는 몇 번을 문질러도 다 빠지지 않았다.허진이 말없이 내민 젖은 무명 수건으로 손톱 밑을 꼼꼼히 닦아 낸 뒤에야, 서의는 고개를 들었다."도사 나리,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말해 보시오.""2년 전 폐서인 정씨를 내칠 때, 의금부가 몰수한 물건의 목록을 볼 수 있겠사옵니까. 내수사 입고 장부와 함께."허진의 눈썹이 올라갔다."폐비 마마 일은 궐에서 금기라던데. 그건 어찌하여?""맞춰 볼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더 묻지 않는 대신, 허진은 피에 물든 수건을 도로 받아 들고 우물물을 한 두레박 더 길어 그녀 곁에 놓아 주었다."동트기 전까지 가져다주리다. 대신 다 맞춰 보거든, 나에게도 알려 주시오."이튿날은 초하루, 중궁전 뜰에서 내명부 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상궁과 나인들이 품계대로 줄지어 서고, 중전이 대청에 앉아 한 달의 법도를 일렀다."스승님, 의녀가 내명부 조회에 왜 불려 가요?"연이가 의녀 줄 맨 끝에서 서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중전마마께서 부르셨다.""그러니까 더 이상하단 말이에요. 어제 그 일이 있었는데…….""전하 납시오-!"뜰이 술렁였다."전하께서 조회에?""즉위하시고 처음 아니야?""중전마마께서 기뻐하시겠네."대청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는 정화의 붉게 달아오른 뺨 위로, 웃음이 번졌다.이현은 대청 곁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뜰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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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죽은 이름

"오늘 조회는 이만 파한다."정화의 목소리는 놀라우리만치 고르게 나왔다.움켜쥔 노리개를 소매 속에 밀어 넣는 손길에도 떨림 하나 없었다.이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정화는 그 등에 대고 단정하게 허리를 숙였다.용포 자락이 뜰을 빠져나가는 동안, 정화는 끝내 대청 아래를 보지 않았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중궁전 경대 위로 내동댕이쳐진 노리개의 산호 가지가, 거울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태워 버려라."새로 든 윤 상궁이 허리를 굽히고 노리개를 집어 들고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정화의 목소리가 그 등을 붙잡았다."……아니, 두거라."정화가 도로 빼앗은 노리개를 경대 서랍 깊숙이 밀어 넣자,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남궁 의관이 문안 진맥을 들었사옵니다.""들라 해라."남궁도는 맥을 짚는 둥 마는 둥 손을 거두고, 열쇠 꾸러미를 무릎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마마, 기색이 몹시 상하셨사옵니다.""그 의녀를 궐에서 치울 방도를 말해 보거라. 직방 마당에서도, 내명부 뜰에서도 내 낯을 깎은 것이다.""죽이는 것이야 쉽사옵니다만, 전하의 눈이 그 의녀에게 붙어 있사옵니다. 상궁 하나로 끝난 일이 또 벌어지면, 이번엔 꼬리가 아니라 몸통을 찾으실 것이옵니다."남궁도가 빙그레 웃었다."그보다는 제 발로 궐을 나가게 하는 편이 깔끔하지요. 그 의녀, 해령 고을 최 의원 밑에서 배웠다 하였사옵니다.""그래서?""소주방 뒤뜰에서 그 이름을 들은 날, 해령에 사람을 보내 두었사옵니다. 산골 의녀 하나의 명적이야, 관아 호적과 한 번 맞대 보면 그만이니까요."정화가 고개를 갸웃했다."명적이 거짓이기라도 하다는 게냐?""명적이란 묘한 것이라, 이따금 산 사람이 죽은 이름을 빌려 쓰기도 하옵니다.""죽은 이름이라."정화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남궁도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맥 짚던 손끝을 소매에 문질러 닦았다.그 이름 아래 누가 숨어 있을지는, 한마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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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스승

"죽었다라."정화가 부채를 접었다.탁-"그럼 너는 누구냐? 죽은 의녀의 이름을 쓰고 궐에 숨어든 너는."뜰이 끓어올랐다."죽은 사람 명적이래.""어쩐지 시체를 그리 잘 알더라니.""귀신 아니야?"서의는 무릎 위의 손을 폈다.명적이 죽었다는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지금 따질 것은 그 종이에 찍힌 관인이었다."수의녀님. 소인이 처음 궐에 들 적에, 해령 관아에서 올려 보낸 상송 문서가 의녀청 궤에 있을 것이옵니다."수의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있지. 해령 현감의 관인도 찍혀 있었고.""3달 전 해령 관아는 의녀 서의를 궐로 올려 보냈고, 오늘 해령 관아는 의녀 서의가 2년 전에 죽었다 하옵니다. 같은 관인이 찍힌 종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는 틀린 것이옵니다."남궁도가 서찰을 접으며 웃었다."그렇지. 그리고 틀린 쪽은 자네가 들고 온 쪽이겠지. 죽은 이의 명적이야 돈 몇 푼이면 사고파는 세상이니.""그만하면 됐다."정화가 몸을 일으켰다."이 계집을 의금부로-"- "틀린 것은 해령 관아의 옛 명적이옵니다, 마마."뜰 입구에서 쉰 목소리가 울렸다.박 의관이 앞장서 들어오고, 그 뒤로 백발의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따라 들어섰다.먼 길을 온 듯 도포 자락에 누런 흙먼지가 말라붙어 있었다.흙먼지를 털 새도 없이, 노인이 내의원 제조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해령에서 의원 노릇을 하는 최가이옵니다. 박 의관과는 혜민서에서 함께 침을 배운 사이이옵니다.""제조 영감께 소신이 출입을 청하였사옵니다."박 의관이 굳은 얼굴로 노인 곁에 엎드렸다.꿇어앉은 채 눈을 떼지 못하는 서의 앞에서, 노인의 볼은 3달 사이에 한결 꺼져 있었다.노인은 뜰에 들어선 뒤로 한 번도 그녀 쪽을 보지 않았다.눈길이 닿는 순간 무언가 들킬 사람처럼, 품에서 손때 묻은 장부 한 권을 꺼내 펼치는 데만 골몰했다."2년 전 해령 역병 때 병막에 든 이들을 적은 장부이옵니다. 의녀 서의, 동짓달 3일 병막에 듦. 20일 열이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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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소나무 팽이

"……남궁도가, 그 밤 중궁전에 있었다는 말씀이옵니까.""문 안이었는지 밖이었는지까지는 모르옵니다. 다만 의관이 약상자도 들지 않고 그 길을 걸을 시각은 아니었사옵니다."최 의원이 등잔 심지를 돋우었다."그때는 이 늙은이를 알아보는 눈치가 없었사옵니다. 허나 오늘 뜰에서 보니, 그자는 그 밤을 잊지 않았더이다."다시 떠올린 그 밤의 중궁전, 원자가 쓰러지고 나서 달려온 어의들 틈에 열쇠 꾸러미를 찬 의관은 없었다.그 밤 내내 그 이름을 부르는 이는 없었다.불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각 그자가 어디 있었는지 아무도 적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그리고 산사의 아이 말이옵니다."서의가 고개를 들었다.연이에게 들은 소문을 노인에게 털어놓은 것은 한 식경 전이었다."이 늙은이가 아는 것은 없사옵니다. 다만 아직은 귀에만 담아 두소서. 가슴에 들이면 걸음이 흐트러지옵니다."한 달이 그렇게 흘렀다.연이는 매일 아침 어선 다과를 받아 들고 의녀청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처음 며칠은 기미라도 보듯 약과 귀퉁이를 조금씩 떼어 먹더니, 10일이 지나자 받자마자 반을 비웠다.그러고는 남은 반을 꼭 서의의 소반에 덜어 놓았다."스승님, 오늘은 전하께서 편전에서 스승님을 5번 보셨어요. 검안서 올릴 때 2번, 물러날 때 3번이요.""검안서를 읽으셨겠지.""검안서는 글자가 거꾸로 보이는 자리에 있었는걸요."다과를 들고 온 복내관이 그 말을 듣더니 품에서 일지를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연이가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보려 하자, 복내관이 일지를 탁 덮었다."어린 것이 어른 일지를 넘보면 못쓰네.""5번 맞지요? 맞지요?""……6번일세."그 한 달 동안 이현은 그녀에게 사사로운 말을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검안서를 받으면 읽었고, 읽고 나면 물러가라 했다.그 무심한 얼굴 앞에서, 서의는 오히려 등을 곧게 펴고 엎드릴 수 있었다.남궁도는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회랑에서도, 약재고 앞에서도, 짤랑이는 열쇠 소리를 앞세우고 다가와 안부를 묻듯 고개를 까딱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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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짐을 속일 수 있다 생각했느냐

서의는 돌아보지 않았다.나무토막을 쥔 손가락 마디가 저렸다.침향 냄새가 등 뒤에 머물러 있었다.돌아보면, 이 밤이 무엇이 되어 버릴지 알 수 없었다.서의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무릎을 돌려 엎드렸다."……전하께서 어찌 이 누추한 뒤뜰에 납시었사옵니까.""누구의 상이냐.""해령에 묻고 온 어린 동생의 생일이옵니다. 궐의 법도를 어긴 죄는 달게 받겠사옵니다."그녀를 지나쳐 소반 앞에 멈춘 발소리의 주인이, 몸을 굽혀 종지를 내려다보았다."감초 한 푼.""…….""해령의 동생도 쓴 약을 못 먹었느냐.""아이들은 다 그렇사옵니다."흙 위에 쓰러진 나무토막을 집어 든 이현의 손바닥 위에서, 비뚜름한 토막이 등잔불을 받아 길게 그림자를 늘였다."대추나무는 결이 단단하고 무겁다. 이리 깎으면 돌지 않는다."그의 엄지가 뭉툭한 머리를 쓸었다."그 아이 팽이는 소나무였다. 짐이 깎았으니 안다."어느 겨울날 동궁전 뜰 소나무 아래, 세자의 무릎에 앉은 아이가 대팻밥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깔깔거렸다.조심하시라고, 손 베신다고 잔소리하던 사람이 그녀였다.그날 깎은 소나무 팽이는 하루 종일 비틀거리지 않고 잘도 돌았다.뜨겁게 막혀 오는 목 안쪽을 누르며, 서의는 이를 맞물고 몸을 일으켰다."밤이 깊었사옵니다. 소인은 이만-"그를 비켜 지나치려는 순간, 왼 손목이 붙들렸다.손을 빼내려 뒷걸음질 쳐도 손목은 빠지지 않았고, 그녀가 물러선 걸음만큼 그가 따라 들어왔다.두어 걸음 만에 등이 처소 담장에 닿았다.툭-이현의 다른 손이 그녀의 귀 옆 담벼락을 짚었다.흙담 부스러기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그녀가 빠져나갈 틈은, 그의 소매 하나만큼도 남지 않았다.등잔불을 등진 얼굴이 가까이 내려왔다."짐을 속일 수 있다 생각했느냐."낮은 목소리가 이마에 닿았다."중전."폐위된 그 밤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불린 호칭이었다.품속에 넣어 둔 은비녀가 가슴뼈를 지그시 눌렀다.서의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손바닥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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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거래의 조건

밤바람이 맞닿았던 손등 사이로 스며들었다.이현은 그녀를 내려다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좌상이냐.""아직은 이름을 아뢸 때가 못 되옵니다. 시신이 다 말하기 전에 붓을 대면, 그것은 짐작일 뿐이옵니다."이현의 입가가 조금 풀렸다.웃음이라기엔 너무 짧고, 한숨이라기엔 너무 가벼웠다."여전하구나. 그 고집도."그가 그녀의 손에 들린 패를 내려다보았다."동생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면, 그 끝에 짐의 이름이 적힐 수도 있겠구나.""……시신이 가리킨다면."서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이현도 피하지 않았다.밤바람에 등잔불이 한 번 크게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서의는 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받겠사옵니다."이현의 어깨에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그가 한 걸음 물러섰고, 등 뒤 담벼락이 그제야 차갑게 느껴졌다."다만 소인에게도 조건이 있사옵니다.""말하라.""첫째, 소인의 검안에 손대지 마십시오. 죽은 이가 말한 것을, 산 사람 형편에 맞춰 고쳐 적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 끝에 전하께 이로운 이름이 나오든, 해로운 이름이 나오든.""그러마."너무 빠른 대답에, 서의는 눈을 가늘게 떴다."전하께 해로운 이름이 나와도 말이옵니까.""짐은 판을 깔 뿐이다. 판정은 네 붓이 한다. 내의원 시신실에서도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판정은 의녀의 검안을 따른다.그날 남궁도 앞에서 등을 돌리며 던진 한마디를, 이 사람은 그때 이미 그녀에게 한 약조로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둘째, 연이는 이 일에서 빼 주십시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거래는 그날로 끝이옵니다.""그 아이에게 매일 다과를 내리는 것이 누구라 생각하느냐.""다과로 목숨을 지킬 수는 없사옵니다."이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알았다. 그 대신 너도 위험한 곳에 혼자 가지 마라. 누가 따라붙거든 그 길로 짐에게 알리고. 이건 어명이다.""그런 어명이 어디 있사옵니까.""방금 생겼다.""의금부 도사가 따라붙어도 아뢰어야 하옵니까. 화살 일로 의녀청을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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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미시의 찻상

"……차, 말이옵니까."서의는 제 귀를 의심했다.혼자 다니지 말라는 어명보다도 더 엉뚱한 조건이었다."기미상궁이 있사옵니다.""기미상궁의 차는 쓰다.""찻잎을 오래 우리지 말라 이르시면 될 일이옵니다.""이르면 그날만 덜 쓰고, 이튿날 또 쓰다."이현이 태연하게 소매를 털었다."매일 미시, 편전으로 차를 들이라. 증거든 검안서든, 그 찻상에 얹어 오면 된다. 의녀가 날마다 편전을 드나들 핑계로 그만한 것이 없지."듣고 보니 그럴듯했다.그럴듯해서, 더 얄미웠다."……둘째 조건은 무엇이옵니까.""차 맛을 보고 정하마."이튿날 미시, 다반을 받쳐 들고 편전에 드는 서의의 뒤를 연이가 화로와 탕관을 끌어안고 바짝 따랐다."제가 들어 드릴게요! 탕관이 얼마나 무거운데요!""편전 안에는 못 든다.""문간까지만요! 문간에서 얌전히 있을게요!"정말로 문간에 얌전히 무릎을 꿇은 연이는, 서의가 찻잎을 덜기도 전에 벌써 손가락 하나를 접고 있었다.첫날, 이현은 찻잔을 입술에 대자마자 내려놓았다."싱겁구나."이튿날은 한 모금을 넘기고 미간을 좁혔다."쓰다."서의는 다반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세자빈 시절에도 이 사람은 꼭 이랬다.새 찻잎을 들이면 하루는 싱겁다, 하루는 쓰다 트집을 잡다가, 3일째에야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우고 빈 잔을 그녀 쪽으로 밀어 놓곤 했다.그때도 그녀는 그 트집이 찻잎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동궁전 다방에서 차를 내오는 나인을 두고, 굳이 빈궁을 불러 앉히려는 핑계였다.3일째 되는 날, 이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밀었다.또 비우고, 또 밀었다.곁에 선 복내관이 품에서 꺼낸 일지 위를, 붓끝이 사각사각 긁었다.'전하, 차 3잔 비우심. 쓰다는 말씀 없음. 평소엔 반 잔.'"복내관.""……예, 전하.""무얼 적느냐.""날씨이옵니다. 오늘 볕이 참 좋사옵니다."창밖에는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이현은 대꾸하지 않고 빈 잔을 또 한 번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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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다시 검게

먼저 움직인 것은 서의였다.다반 위의 손을 거두어 무릎에 내려놓고, 문지방까지 들리도록 고개를 숙였다."……의녀는 누구의 잔이든 먼저 살피옵니다. 전하께서 2년 전 일을 떠올리실 만큼 흔한 버릇이옵니다.""그러하냐.""은비녀가 희다고 다 깨끗한 것도 아니옵니다."서의는 왕 앞의 잔을 도로 끌어와, 새끼손가락 끝을 적셔 혀에 댔다.마른 국화와 대추, 꿀 조금.혀끝이 저리지도, 목이 조이지도 않았다."독은 없사옵니다.""그래도 물리라."윤 상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다관을 거두었다.허리를 펴는 사이, 그 눈이 서의의 품께에 한 번 머물렀다.비녀를 넣은 바로 그 자리였다.윤 상궁이 물러가자, 이현이 복내관에게 눈짓했다.복내관이 소리 없이 그 뒤를 밟아 나갔다가, 한 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소주방에도 다방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중궁전 안채로 들었사옵니다. 다관은 그대로 손에 든 채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날 미시의 찻상은, 빈 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끝까지 조용했다.그날 밤 서의는 처소 문고리에 머리카락을 끼우며, 처음으로 손끝이 떨렸다.흔한 버릇이라는 말이 윤 상궁의 귀에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버릇은 여전하구나'는, 훨씬 오래 남았을 터였다.이튿날 동이 트기 전이었다."스승님! 스승님!"다급하게 처소 문을 두드리던 연이가, 문이 열리자 숨이 턱에 닿은 얼굴로 서쪽을 가리켰다."서쪽 협문 앞에 침방 언니가 쓰러져 있대요! 그 언니요, 순덕 언니 대신 약재 심부름 다니던!"서의는 신을 꿰며 품을 더듬었다.은비녀와, 상아 패.수문장과 군사 몇이 둘러선 서쪽 협문 앞, 그 가운데 나인 하나가 모로 누워 있었다.등에 멘 보따리 끈이 어깨를 파고든 채였다."물러서라. 내의원에 기별을 넣었으니-"앞을 막아서는 수문장에게, 서의는 소매에서 패를 꺼내 내밀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수문장의 눈이 상아 패의 어압에 닿자마자 허리가 접혔다.연이가 서의의 등 뒤에서 입을 떡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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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원자는 죽었다

"스승님, 뭐라고 쓰여 있어요?"고개를 들이미는 연이 앞에서, 서의는 팽이를 손바닥 안에 접어 쥐었다."……아무것도. 흠집이다."팽이를 무명에 다시 싸 소매 깊숙이 넣었다.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주었다.'아직이야.'꺾이려는 무릎을 버티며, 서의는 금란의 굳은 손을 붙잡았다.죽은 이의 손이, 산 사람의 손보다 단단했다.'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시신을 의녀청 검시실로 옮기거라. 표주박과 보따리도 함께. 내 눈앞에서 하나도 흘리지 말고."군사들이 들것을 펴는 동안, 서의는 협문 앞 흙바닥을 살폈다.금란이 쓰러진 자리에서 협문까지는 이슬 젖은 흙바닥 위로 10걸음 남짓이었다.몇 걸음만 더 갔으면, 금란은 궐 밖 길 위에서 쓰러졌을 것이다.궐 밖에서 죽은 나인은 궐의 검험을 거치지 않는다.길에서 객사한 나인으로 적히고, 보따리는 길바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터였다.독을 탄 손이 셈한 것보다, 비상이 조금 빨리 돌았다."연이야.""네, 스승님.""오늘 본 팽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금란이 조카에게 주려던 것이다. 그리 알거라."눈을 끔뻑이는 연이의 얼굴에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 어렸지만, 서의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들것이 검시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낯익은 짤랑거림이 회랑 끝에서 다가왔다."비상 중독이라지. 약재고 비상이 빈 일과 엮인 시신이니, 내의원이 거두어 가겠네."남궁도가 하리 2명을 앞세우고 웃으며 섰다.서의는 들것 앞으로 나서서, 소매에서 상아 패를 꺼내 들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 나리. 이 시신의 검안이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옵니다."남궁도의 눈이 패 뒷면의 어압에 닿았다.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열쇠 꾸러미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솟았다."……전하께서 귀한 것을 내리셨구먼."하리들에게 턱짓하고 돌아서기 직전, 남궁도의 눈이 들것 끝에 얹힌 금란의 보따리에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검시실에서 서의는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침방 나인 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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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감초 한 푼

찻물이 식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서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그 밤 "네가 했느냐"고 묻던 목소리보다도 차분하게,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그러하옵니까."서의는 다관을 들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새 차를 따랐다.손이 떨리지 않았다.떨리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제가 이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팽이는 증좌이옵니다. 검시실로 도로 가져가겠사옵니다.""이것은 짐이 둔다.""전하께서 판정에 손대지 않으시겠다 하셨사옵니다.""판정에는 손대지 않는다. 팽이에 손대는 것이다."서안 위 손을 거두지 않는 이현에게 더 청하지 않고, 서의는 다반을 거두어 일어섰다.문턱을 넘어 돌아서 문을 닫는 사이, 문틈으로 그가 보였다.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그제야 조금 들려 있었다.엎어진 팽이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등이 한껏 굽어 있었다.문이 닫혔다.밤이 깊어서도 의녀청 검시실에는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연이는 구석 짚방석 위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먼저 가라고 3번을 일렀는데, 시신 곁에 스승님 혼자 두고는 못 간다며 기어이 버틴 끝이었다."의녀."문간에 선 허진은 의금부 복색 소매에 먹물이 튄 채, 옆구리에 두툼한 장부 한 권을 끼고 있었다."약재고 출납부를 빌려 왔소. 비상 1냥이 나간 줄, 출납 서명 칸이 또 칼로 긁혀 있더이다."장부를 받아 등잔 아래 펼치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손톱으로 눌러 보아도 보풀은 눕지 않았다.눈을 감자, 승정원 문서고에서 달빛 아래 펼쳐 두었던 출납부가 되살아났다.폐위 교지 초안을 올린 자의 이름 칸에서 손가락에 걸리던 보풀이, 그 결 그대로 떠올랐다."칼끝이 왼편에서 들어가, 획 끝에서 위로 들리며 빠졌사옵니다. 그래서 오른편 끝에만 종이가 뜯겨 말려 올라가 있사옵니다."허진이 등잔 곁으로 몸을 숙였다."……정말 그렇군. 그런데 그걸 어찌 그리 단번에 보오?""전에 같은 결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어디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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