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진은 이 말에 안소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무런 꾸밈없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도권을 잡은 안소현은 태세 전환이 참 빨랐다. 사실 안소현이 원하는 것도 이런 것이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안소현은 김미진의 변화를 느끼고 이렇게 말했다.“엄마, 나랑 다혜 사이는 너무 신경 쓰지 마요.”“우리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물으셔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나는 게 없어요.”김미진은 안소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두 딸은 한 번도 김미진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두 딸이 어떤 성격인지 김미진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 소현이 말이 맞아. 두 사람에게 성장할 공간과 여지를 줘야지. 그러면 앞으로 더 수월해질 거야.’김미진이 알았다는 듯이 허종혁의 등을 토닥이자 후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어머님, 저는 오는 길에 많이 먹었어요. 이건 어머님 드리는 거예요.”김미진은 어쩔 수 없이 허종혁이 가져온 것들을 다 수락했다.이에 비해 안소현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허종혁이 집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래 김미진과 결혼을 주제로 잘 토론해 볼 생각이었는데 허종혁이 이렇게 나오니 말하고 싶은 욕망이 없어진 것이다.안소현이 주먹을 불끈 쥐고 옆에 서 있었다.‘아니, 어떻게 저렇게 파렴치할 수 있지? 내가 분명 엄마랑 얘기한다고 했는데 왜 집까지 쫓아온 거야?’김미진은 그런 안소현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허종혁과 얘기를 나눴다.“네가 고생이 많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고.”“고생은요. 부모님이 꼭 직접 가져다드리라고 당부하셨어요.”허종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아프다는 말에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달려온 거예요.”김미진은 이 말에 퍽 감동하며 말을 잘 듣는 딸과 사위를 둔 것에 뿌듯해했다. 이번 생은 정말 다른 사람보다 훨씬 앞서갔다는 생각에 더 만족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허종혁이
이 부름에 안소현의 억울함과 원망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돌린 안소현은 김미진의 눈에 맺힌 뜨거운 눈물을 보며 같이 울었다.“엄마...”“아이고. 내 새끼. 거기 서서 뭐 해? 이리 오지 않고.”김미진이 안소현에게 거기 서 있지 말고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애도 참. 봤으면 내려와서 인사를 해야지. 왜? 이제 나는 엄마도 아니야?”안소현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 엄마. 내가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엄마 딸인데.”“전에는 내가 어리석었어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안소현은 안다혜와 이렇게 된 게 김미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김미진만큼은 끔찍이 챙겼다. 김미진이 아파서 입원했을 때 안다혜보다 더 걱정했다. 아니면 김미진이 입원하자마자 바로 병원에 달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김미진 안소현의 말을 듣고 살짝 놀랐지만 이내 감동했다. 두 딸이 이렇게 잘 자랐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식 농사를 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의미가 깊었다.“그래.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다니 다행이야.”김미진이 살짝 멈칫했다. 그날 안다혜를 대하는 말투나 태도를 보고 살짝 놀랐기 때문이다. 김미진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두 자매가 아주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그날 안소현이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온 균형을 깨트리고 나서야 김미진은 그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안소현이 일부러 애교를 부리며 김미진을 바라봤다.“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은 미워할 수 있어도 엄마는 절대 아니죠.”“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요?”김미진은 안소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딸을 믿으니까 인정도 하고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는 거고.”“다만...”김미진이 잘 나가다가 갑자기 뜸을 들이자 안소현의 마음도 다시 조여오기 시작했다. 칭찬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방향을 튼 것이다.“소현아, 엄마는 바라는 거 별로 없어.”김미진이 안소현의
윤해준도 별로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서 회사로 나간 것 같았다.안다혜는 윤해준이 준비한 아침을 먹고 바로 회사로 향했다. 회사가 걱정되어 집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출발하기 전 안다혜는 김미진에게 퇴원했는지 문자를 보냈다. 김미진을 잘 알긴 했지만 언제 퇴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쉬고 있던 김미진은 이 문자를 받고 잠시 넋을 잃었다가 이렇게 답장했다.[나는 괜찮아. 이미 퇴원했어. 걱정하지 마.]안다혜는 차를 운전하느라 문자를 바로 확인하지 못하고 회사에 도착해서야 확인했다. 내용은 안다혜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나올 때부터 김미진이 무조건 퇴원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퇴원할 줄은 몰랐다.안다혜가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김미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엄마. 푹 쉬어요. 회사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있잖아요.]김미진은 안다혜의 문자를 보고 마음이 따듯해졌다.‘역시 아이가 크니까 좋네. 부모님을 걱정할 줄도 알고.’김미진은 그동안 공들여 키운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안다혜가 아직 어려서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에 안다혜가 혼자 바깥세상과 싸우는 걸 두려워했는데 그동안 시야가 너무 협소했던 것 같다. 아이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풀어줘야 하는 건데 말이다. 게다가 안다혜는 김미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이렇게 생각한 김미진은 진심을 담아 활짝 웃었다.위에서 내려오던 안소현은 마침 김미진의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얼마만이지... 엄마가 이렇게 웃은 거?’요즘 김미진이 아프면서 모녀는 말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엄마는 내가 있으나 마나 똑같네...’안소현은 김미진이 기뻐하는 걸 보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미소가 자기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슬퍼지기 시작했다.가끔은 안소현도 참 모순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미진은 안소현이 모순된 사람이라는 걸 알
안다혜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다 씻은 윤해준이 흥에 겨워 밖으로 나와보니 안다혜는 이미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 원래는 안다혜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내 들려오는 안다혜의 잔잔하면서도 규칙적인 숨소리에 정말 잠에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이에 윤해준은 넋을 잃고 고개를 숙여 뭔가를 확인하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잠이 든 안다혜를 바라봤다.‘그래. 이번은 네가 빚진 걸로 하자.’그러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잔잔한 물소리가 반 시간쯤 들리고 나서야 윤해준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안다혜를 안고 잠이 들었다.안다혜는 갑작스러운 속박에 처음에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익숙한 냄새와 따듯한 포옹에 편안한 자세를 찾아 윤해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윤해준은 그 어떤 사람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늘 이렇게 평온하게 한평생을 살아도 즐거울 것 같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이튿날.잠에서 깬 안다혜는 옆에 누운 윤해준을 보고 뭔가 생각 나 이마를 탁 쳤다. 이 소리에 눈을 뜬 윤해준은 손을 뻗어 안다혜를 다시 품에 꼭 끌어안았다.“조금 더 자자. 아직 이르잖아.”잠이 덜 깬 윤해준의 말투는 멍멍이처럼 나른했다. 거기에 잘생긴 얼굴까지 더해지니 안다혜는 마음이 요동쳤다.‘내 죄요. 내 죄.’안다혜가 윤해준의 가슴을 밀쳐내자 후자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끙끙댔다. 재밌는 걸 발견한 안다혜는 다시 한번 윤해준의 가슴 근육을 꾹 눌렀다.아랫배에 힘을 준 윤해준은 안다혜의 얌전하지 못한 손을 냉큼 잡았다.“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다정아.”안다혜는 윤해준과 닿은 곳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이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눈을 살며시 뜨고 안다혜를 관찰하던 윤해준은 살짝 아쉬웠다.‘평소에는 이렇게 얌전하지 않았는데.’이유가 없어진 윤해준은 안다혜를 안고 그냥 자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저녁부터 약속한 일을 결국 아직도 이행하지 못했다.안다혜가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깼을 때
만약 한유라가 좋아한 사람이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사람을 사랑했으니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불과했다.윤해준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안다혜는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잠깐 밖에서 기다리는데 안다혜가 타올을 걸치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샤워하러 들어갈 때 옷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아직 윤해준이 아직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아주 대범하게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가 거실에 앉은 사람을 본 순간 안다혜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얼른 가슴을 가렸다.“왜 갑자기 들어온 거예요? 아무 소리도 없이.”윤해준은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랐다.“그... 그게... 네가 샤워하는 거 알고 먼저 들어와서 옷 챙기려 했는데 네가 갑자기 나온 거야.”한유라를 대할 때는 차갑고 날카롭던 사람이 안다혜 앞에서는 단순하고 수줍기만 했다. 안다혜가 그저 타올을 걸치고 나왔을 뿐인데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는 걸 보면 말이다.“그래요. 옷 챙기고 들어가서 씻어요.”안다혜는 그런 윤해준을 보며 오히려 대범해졌다. 어차피 처음도 아닌데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다혜가 손을 떼자 아름다운 몸매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말라야 할 곳은 마르고 쪄야 할 곳은 찐 게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에 윤해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씻기도 전인데 윤해준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멍해서 뭐 해요? 얼른 가서 씻어요.”안다혜가 재촉해서야 윤해준은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안다혜를 지나치는데 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코끝을 가득 메웠다. 순간 윤해준은 정신이 살짝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안다혜의 머리칼에 손을 넣고 뒤통수를 잡은 윤해준은 안다혜가 반응하기도 전에 입술에 키스했다.윤해준은 그동안 안다혜를 만나면서 키스하는 솜씨가 꽤 늘었고 몇 번 만에 안다혜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안다혜는 윤해준의 목을 끌어안고 열심히 화답하며 뜨거운 키스를
윤해준은 앞에 선 한유라를 보며 점점 언짢아졌지만 한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오빠.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지?”“원하는 게 뭔데?”윤해준은 한유라의 손길에 소름이 돋아 눈살을 찌푸리며 밀쳐냈다.“얌전히 있어.”한유라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지만 아직은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로 방으로 가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해준 오빠, 거리감 느껴지게 왜 그래? 밥 한번 같이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윤해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밥 한번 먹어주면 되는 거야?”“그래.”한유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아니면 나랑 다른 거 해보고 싶어?”“오빠만 좋다면 나도 좋아.”윤해준은 앞에 선 한유라가 너무 낯설었다.‘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변한 거야? 귀엽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렇게 세속적으로 변한 거지?’윤해준은 욕망과 소유욕으로 가득 찬 한유라의 얼굴을 보고 혹시나 나쁜 의도를 품은 게 아닌지 의심되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이렇게 말했다.“그렇게 얘기할 거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그래. 새언니도 오빠의 진짜 신분이 뭔지 알고 싶을 거 아니야.”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감쪽같이 속았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요즘 나도 새언니의 성격을 관찰했는데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더라. 자존심이 센 것 같더라고.”주먹을 불끈 쥔 윤해준은 온몸으로 무서운 살기를 뿜어냈다.‘한문수, 참 대단한 동생을 두었네.’한유라는 윤해준의 눈빛에 놀랐지만 잘생긴 얼굴을 보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한 번뿐인 인생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헛되이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마음껏 즐기면서 살기로 한 것이다.한유라는 윤해준에게로 걸어가며 힘껏 다리를 꼬집었다.‘여기서 쫄면 안돼.’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렸다.“오빠, 약속할게. 밥 한번 먹어주면 새언니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겠다고.”“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