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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3년차 주임
내 이름은 김기리. 오늘도 출근한다. 그리고 나는— 대기업 SG그룹에 다니는 13년 차 직장인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꽤 괜찮은 인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대기업. 13년 근속. 나름대로 안정적인 직장. 그런데 하나만 더 붙여보자. 13년 차 주임. ……. 그래. 주임이다. “13년인데 아직도 주임이냐고?” 나도 안다. 그러니까 제발 묻지 마라.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하니까. 오전 7시 18분.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아침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하…….” 자동으로 한숨이 나온다. 정말. 1진짜. 정말로. 출근하기 싫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자취방과 회사가 가깝다는 것. 차를 탈 필요도 없다. 걸어서 10분. 물론 출근하기 싫은 사람에게 회사가 가깝다는 게 정말 장점인지는 모르겠다. 멀면 핑계라도 댈 텐데.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회사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저 멀리 SG그룹 건물이 보였다. 13년 전 처음 저 건물을 봤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운 좋게 들어온 대기업.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친구들도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열심히 해야지.’ ‘여기서 인정받고 올라가야지.’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집에 가고 싶다.’ 출근도 안 했는데 벌써 퇴근하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2“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장성호 팀장이 안경 너머로 나를 힐끗 바라봤다. “어, 김주임.” 그리고 출근한 지 정확히 3분 만에 내 하루가 시작됐다. “어제 그 업무 규정하고 관련 자료 다 들고 와봐.” “네?” “그리고 어제 보고한 개선안 말이야.” 장 팀장이 서류를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해결방안이 이것밖에 안 돼?” “아, 그 부분은 관련 부서하고 협의해서—” “협의?” 장 팀장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 왔다. “협의해서 언제 할 건데?” “오늘 오전 중으로 다시—” “홍파트장!”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옆자리에서 일하던 홍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팀장님.” “같이 와봐.” “네.” 나는 자료를 들고 팀장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내 뒤로 홍민수가 따라왔다. 홍민수. 3내 맞후임. 나보다 회사에 정확히 1년 늦게 들어왔다. 지금 직급은? 파트장. 나는? 주임. 물론 홍민수가 나보다 나이는 세 살 많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내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녀석은 내 후임이었다. “김 선배님, 이것 좀 여쭤봐도 됩니까?” 하면서 따라다니던 놈이었다. 지금은 내가 녀석 앞에서 팀장에게 깨지고 있었다. “홍파트장, 자네가 보기에는 이게 보고가 된 것 같아?” 홍민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보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장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봐봐. 파트장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 “김주임.” “네.” “13년 했으면 이제 시키는 것만 하지 말고 생각을 해야지. 생각을.” 또 시작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4“오늘 안에 다시 해와.” “네.” “나가봐.” 자리로 돌아오는 길. 홍민수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제가 자료 좀 같이 봐드릴까요?” “아냐.” “그래도—” “괜찮아.” 나는 웃었다. “내가 13년 차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웃기지는 않았다. 꼬이고. 또 꼬였다. 내 회사생활은 딱 그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회사에서 승진을 못하면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도 완벽한 직원은 아니다. 성격이 유순하지도 않았고,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편이었다. 말도 가끔 직선적으로 했다. 그런데 말이다. 밤 12시까지 일한 날이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5주말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 출근한 적도 수없이 많았다. 문제가 터지면 현장으로 뛰어갔고. 담당자가 없으면 내가 대신 처리했다. 후배들 사고 친 것도 뒤에서 수습했다. 그렇게 버틴 세월이 13년이었다. 그런데. 동기들은 하나둘 대리를 달았다. 몇 명은 과장이 됐다. 후배들도 나를 추월했다. 나는 계속 누락됐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도 그만뒀다. 이제 사람들은 내 앞에서 진급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게 더 비참하다. “수이 씨.” “네, 주임님.” “이거 전표처리 좀 부탁해요.” 나는 서류를 내밀었다. “네. 확인하고 처리할게요.” “감사합니다.” “주임님, 커피 드시러 가세요?” “네. 안 마시면 죽을 것 같아서.” 6수이가 웃었다. “아침부터 팀장님한테 또 불려가시던데요.” “봤어요?” “사무실 전체가 들었는데요?” “……역시 우리 팀장님 발성이 좋아.” “풉.” 나도 피식 웃었다. 이런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커피를 뽑아 휴게실로 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재훈 주임. 나와 친하게 지내는 후배다. 그리고 올해 진급에서 한 번 누락된 인간. 나는 녀석 앞에 앉았다. “이주임.” “네, 선배님.” “오늘 한잔 고?” 재훈이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요?” “누락 모임.” “아, 선배.” 재훈이 질색했다. “뭔 누락 모임입니까.” “왜. 회원 자격 있잖아.” “저는 한 번이고 선배님은…….” 녀석이 말을 멈췄다. 7“왜?” “아닙니다.” “끝까지 말해봐.” “목숨은 하나입니다.” “이 새끼가.”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래. 이런 게 그나마 회사생활의 낙이었다. 재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선배님 내년에는 되실 겁니다.” “대리?” “그럼요.” “야.”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나 이제 대리 달아도 마흔이야.” “마흔 전에 달면 되죠.” “그게 위로냐?” “오늘 제가 술 사겠습니다.” “오?” “삼겹살 어떻습니까?” “역시 네가 내 후배 중 최고다.” “대신 1차만요.” “콜.” 그때였다. 지잉— 8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홍민수 파트장이었다. “응, 홍파트장.” 아, 선배님. “응.” 오늘 저녁에 팀장님하고 파트원들 회식하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시죠? “오늘?” 나는 재훈을 쳐다봤다. 녀석이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선약이 있긴 한데.” 잠시 침묵. 그러자 홍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그래도 이런 때 팀장님한테 점수 좀 따셔야죠. “…….” 내년 진급도 있으시고. 참. 맞는 말이다. 기분 나쁘게 맞는 말. “그래.” 나는 한숨을 삼켰다. “참석할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장소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재훈이 나를 보며 웃었다. “삼겹살 취소입니까?” “파트 회식이래.” • • • • • 9“팀장님도?” “온단다.” 재훈이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선배님, 오늘 점수 좀 제대로 따십쇼.” “뭘 따.” “관리팀 파트장 얼른 되셔야죠.” 나는 웃었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파트장이냐.” “왜 못 합니까?” “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먹자.” “넵. 살아서 돌아오십쇼.” “그래.” 오늘은 정말. 점수 좀 따볼까. “팀장님, 제가 굽겠습니다.” 저녁 7시. 회사 근처 삼겹살집. 나는 집게를 들었다. 치이익—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갔다. “어, 그래.” 장 팀장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10“김주임 고생 많네.” 고생 많네. 회사에서 13년 동안 들었던 말 중 가장 허무한 말이다. 고생은 많이 했는데 남은 건 없었으니까. 그래도 웃었다. “아닙니다, 팀장님.” 오늘은 참자. 점수 따는 날이다. ‘웃어라, 김기리.’ ‘오늘 하루만 인간 김기리를 내려놓자.’ 장 팀장이 홍민수를 바라봤다. “홍파트장.” “네, 팀장님.” “요즘 파트원들 애로사항 없나?” “인력이 조금 부족합니다.” 홍민수가 대답했다. “최근 업무량도 늘었고 휴가자 생기면 대응이 빠듯합니다.” “그래?” “네. 인력 한 명 정도 보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업무하고 인원 현황 정리해서 보고 한번 해봐.” “알겠습니다.” 장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 “그래도 다들 고생 많습니다.” “팀장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한잔합시다.” 11짠— 잔이 부딪혔다. 한 잔. 두 잔. 세 잔. 분위기는 조금씩 풀렸다. 술이 들어가자 장 팀장도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김주임.” “네.” “자네는 결혼 안 하나?” ……왔다. 대한민국 미혼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 “아직입니다.” “나이가 이제 몇이지?” “서른아홉입니다.” “서른아홉?” 장 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빨리 해야겠네.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집은 샀고?” “아직…….” “주식 같은 건 하지 말고 돈 모아서 집부터 사야지.” ……. 나는 삼겹살을 뒤집었다. 12‘제발.’ ‘그런 것 좀 묻지 마라.’ 공교롭게도 나는 주식도 했다. 그리고 아주 제대로 물려 있었다. 내가 산 뒤 귀신같이 떨어진 종목. 처음엔 금방 반등할 줄 알았다. 조금 떨어지면 물을 탔다. 또 떨어지면 또 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자산 대부분이 들어가 있었다. 주식은 물리고. 집은 없고. 결혼도 못 했고. 회사에서는 13년 차 주임. 갑자기 삼겹살이 목에 걸릴 것 같았다. 그때 홍민수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응?” “우리 김주임님 내년에는 대리 진급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순간. 내 손이 멈췄다. ‘야.’ ‘굳이 그걸 여기서.’ 장 팀장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13가볍게 웃었다. “일 잘하고 하면 알아서 되지 않겠나.” “…….” “여태까지 좀 부족한 게 있었으니까 잘 안 된 거겠지.”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앞으로 잘 노력해봐.” 노력. 노오력. 13년. 그 한마디에 내 13년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응?” “제가…….” 참자. 오늘은 점수 따러 왔다. 참아야 한다. 그런데 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13년 동안 참아온 것 때문이었을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제가 못한 게 뭡니까?” 주변이 조용해졌다. 홍민수가 나를 바라봤다. 장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뭐?” 14“아니.” 나는 애써 웃었다. “팀장님 말씀처럼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하셔서요.” “…….” “제가 뭘 그렇게 못했는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장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허.” 그가 몸을 뒤로 젖혔다. “이 자식 또 버릇 나오네.” “팀장님.” “또 버럭하는 거야?” “제가 버럭하는 게 아니라—” “또 덤벼보자는 거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런 말씀이 아니잖습니까.” “그럼 뭔데?” “저도…….” 목소리가 떨렸다.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13년 동안 삼켰던 말이었다. “밤이고 주말이고 일했습니다.” “그래서?” “문제 터지면 제가 다 갔고, 다른 사람 일까지 받아서 했습니다.” 장 팀장이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그거만 해서 문제 아니야?” 15“……예?” “시키는 일 오래 한다고 일을 잘하는 거야?”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말씀입니까?” “봐.” 장 팀장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지금도 그렇잖아.” “뭐가 말입니까?” “자네는 항상 남 탓이야.” “…….” “왜 진급이 안 됐는지 본인부터 돌아봐.”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김주임.” 홍민수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젠장. 오늘은 점수를 따려고 했다. 삼겹살도 굽고. 술도 따라주고. 싫어도 웃으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또 이 꼴이다. 16나는 혼자 다른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 하나 주세요.” 한 병. 또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 언제부터였을까.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게. 장성호. 그 인간과의 악연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내가 막 회사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그와 크게 부딪힌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 일이 직접적인 이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증거도 없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이상하게 내 진급은 계속 꼬였다. 평가. 부서 이동. 보직. 진급. 어디선가 계속 한 발씩 밀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13년 차 주임이 되어 있었다. “씨발…….” 술잔을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17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받지 않았다. 조금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어머니.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뒤집어 놓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명절도 싫었다. 가족 모임도 싫었다. “회사 잘 다니지?” “이번엔 승진하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집은?” “주식은 좀 올랐고?” 그들이 나쁜 뜻으로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싫었다. 대답할 게 없으니까. 나는 소주잔을 비웠다. 한 병. 두 병. 세 병. 네 병.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18비틀. 밤거리. 집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택시를 타야 했지만 이상하게 걷고 싶었다. 가로등이 두 개로 보였다. “김기리.”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너 인생 참…….” 웃음이 나왔다. “잘 살았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 나는 정말 내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다. 남들보다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대리. 과장. 파트장. 그리고 언젠가는 팀장도 될 줄 알았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서른아홉. 내게 남은 건. 13년 차 주임이라는 명함. 물린 주식. 19월세 자취방. 그리고 내일도 보기 싫은 상사. “하…….”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바뀌었다. 터벅. 터벅. 길을 건넜다. 그 순간이었다. “어?” 발끝이 보도블록에 걸렸다. 술에 취한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쿵!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빠아아아앙—! 거대한 경적소리.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있었다. ‘아.’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려졌다. 도망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황당할 정도로 단순했다. ‘내일 출근 안 해도 되겠네.’ 20콰아앙—! 세상이 뒤집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끄으…….” 시끄럽다. 알람 소리.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아…… 머리야.” 숙취가 죽여준다. 어제 몇 병이나 마신 거지? 네 병? 다섯 병? ‘그런데 나…….’ 뭔가 이상했다. 분명 트럭이. 눈을 떴다. 천장. 낯설면서 익숙했다. “뭐야.” 몸을 일으켰다. 방을 둘러봤다. 작은 원룸. 21낡은 책상. 싸구려 행거. 벽에 붙어 있는 달력.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야?” 내 자취방이 아니다. 정확히는.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방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곳.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살던 원룸. “말도 안 돼.” 침대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요즘 쓰는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이게 왜…….” 오래된 휴대전화. 액정에 날짜가 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2013년 1월 16일. “…….” 침묵. “뭐야.” 다시 봤다. 2013년. 22“핸드폰 고장 났나?” 벽에 붙은 달력을 봤다. 2013. 책상 위 서류를 봤다. 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 숨이 멎었다. “잠깐만.”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 거울 속에는 서른아홉 살 김기리가 없었다. 풋풋한 얼굴. 주름도 없고. 피곤에 절어 축 처진 눈도 없다. 머리숱도……. “많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2013년 1월 16일. SG그룹 입사 첫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잠깐.” 머릿속으로 숫자를 계산했다. 2013. 232026. “……13년.” 목소리가 떨렸다. “13년?” 그리고 몇 초 뒤. 좁은 원룸 안에서 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나는 휴대전화와 달력을 번갈아 바라봤다. “13년 전이라고?!” 그 순간. 잊고 있었던 얼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장성호. 내 회사생활을 지옥으로 만든 인간. 그리고 오늘. 정확히 13년 전 오늘은— 그 인간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나는 거울 속 스물여섯 살의 나를 바라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꿈인가? 죽기 직전 보는 환상인가? 아니면 정말로. 내가 돌아온 건가?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미친.” 13년 동안. 24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었던 선택. 전부 다시 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똑같이 살 이유가 있을까? 없다. 절대로. “장성호.”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다시 만나겠네.” 13년 차 만년 주임 김기리. SG그룹 신입사원으로 다시 출근합니다. 1화 끝월요일.주말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보고는 무사히 끝났다.다행히 임원 보고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박정태 팀장은 아침 회의를 마치며 말했다.“주말에 다들 고생했어. 특히 김사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고생 많았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쏠렸다.“아닙니다, 팀장님.”별것 아닌 한마디.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이런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다.박정태.이 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그 사람이 공개적으로 신입사원을 칭찬했다.13년 전의 나는 몰랐다.그저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다.천만의 말씀.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내가 일을 잘한다고 알고 있느냐도 중요하다.‘시작은 좋네.’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돈.***통장 잔액을 확인한 나는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다.“……하.”적다.너무 적다.사회초년생.월급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귀엽다.자취방 월세, 관리비, 통신비, 식비, 보험, 각종 생활비.다 빼면 얼마 남지 않는다.그리고 이 시절의 나는 돈을 받으면 받는 대로 썼다.친구 만나면 내가 사고, 술 먹으면 내가 계산했다.대기업 들어갔다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야, 내가 살게.’그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나보다 집안 좋은 녀석도 있었고 부모님 집에서 살며 월세도 안 내는 친구도 있었는데, 자취하던 내가 밥을 샀다.왜?대기업 다니니까.“가스라이팅 제대로 당했네.”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다.내가 스스로 했다.이번에는 안 한다.친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하지만 내 미래를 깎아가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13년을 살아보니 안다.밥을 백 번 산다고 남는 친구가 있고, 한 번도 사지 않아도 끝까지 남는 친구가 있다.반대로 내가 계속 베풀 때만 옆에 있는 사람도 있다.이번에는 구분한다.쓸 곳에는 쓰고, 모을 돈은 모은다.“일단 종잣돈부터.”큰 투자 기회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나는 메모장을 열었다.월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박정태 팀장.나는 잠깐 미연의 메시지를 바라봤다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팀장님. 김기리입니다.”“김사원, 지금 어디야?”“강릉에 와 있습니다.”“강릉?”“친구와 여행을 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박팀장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제품 결함이 하나 발생했어. 월요일 아침에 바로 보고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현황하고 원인 추정, 재고 상황, 대응계획까지 정리해야 돼.”예전의 김기리였다면 머리가 하얘졌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13년 동안 불량, 고객 클레임, 협력사 문제, 재고 격리, 원인 분석, 대책서, 임원 보고를 수도 없이 겪었다.‘고작 이거?’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팀장님. 현재 확보된 자료부터 먼저 확인해서 보고 양식을 만들어놓겠습니다. 현황하고 발생수량, 재고, 원인추정, 임시조치, 향후계획까지 틀을 잡아놓고 내려가서 현물만 확인하면 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게 해놓겠습니다.”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할 수 있겠어?”“해보겠습니다. 일요일 오전까지는 자료 공유드리겠습니다.”“그래. 내려올 때 안전운전하고.”“네, 팀장님.”전화를 끊었다.지금까지는 회식, 인사, 눈치로 점수를 땄다면 이번에는 진짜 업무다.그런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13년 뒤라면 AI로 만들 텐데.”하지만 지금은 2013년.그런 건 없다.‘AI는 없어도 나는 있잖아.’13년 동안 이런 보고서를 수백 번은 만든 내가.어떤 문구를 박팀장이 좋아하는지, 어떤 순서로 자료를 배치해야 질문이 덜 나오는지,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미래기술보다 지금 더 쓸모 있는 건 13년짜리 경험이었다.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미연을 만나러 나갔다.***겨울 바닷가.미연은 해변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기리 씨.”“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잠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강릉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차창 밖으로 겨울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조수석에 앉은 동팔이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이 없었다.휴대전화를 보고, 잠깐 자고, 창밖을 보고, 또 휴대전화를 본다.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슬쩍 녀석을 쳐다봤다.‘그래. 이때는 진짜 이랬지.’서른 중후반이 되어서는 같이 해외여행도 다녔다.호텔에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의 동팔이는 달랐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 하나를 세워놓고 사는 것 같았다.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야, 동팔아.”“왜?”“너 나 친구로 생각은 하냐?”동팔이가 나를 쳐다봤다.“뭐…… 그렇지?”“뭐 그렇지는 뭐 그렇지야.”“그럼 뭐라고 해.”“근데 넌 친구한테 왜 이렇게 벽을 치냐?”동팔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내가 뭘.”“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하고, 그냥 전화했다고 하면 끊는다고 하고.”“할 말 없잖아.”“친구끼리는 할 말 없어도 전화하는 거야.”“왜?”“…….”나는 할 말을 잃었다.“야. 친구끼리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동팔이가 잠시 침묵했다.그러더니 툭 내뱉었다.“너도 예전에 장난쳤잖아.”“뭐?”“여자 소개.”순간 기억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아.그 사건.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동팔이에게 여자 한 명을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정확히는 지인의 지인.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문제는 나중에 알게 됐다.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심지어 동팔이에게 돈까지 빌려달라고 했었다.나는 황당해서 동팔이에게 말했다.‘야, 나도 몰랐어.’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그런데 동팔이는 몇 년 동안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를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설마 너 아직도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 소개해준 거라고 생각하냐?”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야.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그때 네가 웃었잖아.”“웃었
“여보세요?”김동팔.고등학교 친구.그리고 지금은 아직 간호학과 학생이다.“야, 동팔아.”“왜 전화했어?”……그래.이 말투였다.“어. 그냥 해봤지.”“그럼 끊는다.”“야!”“왜?”“왜 바로 끊어?”“할 말 없잖아.”맞다.이게 김동팔이었다.“야, 뭐 하냐?”“그냥.”“오늘 뭐 할 건데?”“몰라.”“밥은?”“먹겠지.”대화가 안 된다.‘몰라.’‘피곤해.’‘바빠.’‘내가 알아서 뭐 하게.’‘너랑 상관없어.’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인간.지금 생각하면 그게 단순히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동팔이는 학창 시절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사람을 믿었다가 상처받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적이 되는 경험을 반복했다.가까워지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그때의 나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그저 답답하다고만 생각했다.“야. 오늘 시간 되냐?”“왜?”“한번 보자.”“귀찮아.”“밥 사줄게.”“다음에 보자.”김동팔의 ‘다음에 보자’는 약속이 아니다.번역하면 ‘당분간 볼 생각 없음’이다.나는 바로 승부수를 던졌다.“뷔페 사준다.”잠깐 조용해졌다.“……무슨 뷔페?”‘걸렸다.’“고기뷔페.”“어디?”나는 웃었다.“너 진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뭐가.”“아니다.”잠시 고민하던 동팔이가 말했다.“그럼…… 갈게.”역시 사람을 움직이려면 정확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특히 김동팔은.***저녁.고기뷔페.내 앞의 스물여섯 살 김동팔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조금 통통했다.아니, 많이 통통했다.나는 녀석의 배를 슬쩍 봤다.“야. 너 살 좀 빼라.”“내가 왜?”“건강해야지.”“건강한데.”“여자친구는 안 만들 거야?”“귀찮아.”“결혼은?”“몰라.”“돈은?”“없어.”“주식은?”“관심 없어.”“부동산은?”“그걸 내가 왜 알아야 돼?”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 인생에 관심이 있긴 하냐?”동팔이는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살아지겠지.
금요일 저녁.SG그룹 인근의 한 삼겹살집.문을 열자 긴 테이블 두 개와 스무 명 가까운 팀원들이 보였다.“기리야! 여기 앉아!”이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네, 과장님!”나는 막내 자리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13년 전의 나는 이 자리에서 엄청나게 긴장했다.누가 술잔을 주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줄 알았고, 삼겹살을 구우라고 하면 새까맣게 태웠고, 소주도 맥주도 주는 대로 마셨다.그 결과.화장실.변기.기절.그리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첫 회식에서 뻗은 놈’이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나는 집게를 들었다.삼겹살을 올리고 핏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린 뒤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었다.마늘은 가장자리, 김치는 기름 흐르는 방향, 버섯은 타지 않게 옆쪽.이 과장이 감탄했다.“야, 기리야. 너 고기 좀 구워봤냐?”“아버지 따라 고깃집을 좀 다녔습니다.”거짓말이다.회사 따라 다녔다.13년 동안.“이야. 신입이 센스가 있네.”‘1점.’회사생활은 일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었다.특히 이 시절에는 회식, 인사, 눈치, 술자리, 리액션이 생각보다 컸다.잠시 후 박정태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자. 오늘 신입도 들어왔고, 새해도 시작됐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네, 팀장님!”“올해도 우리 팀 사고 없이 잘해봅시다.”그러다 갑자기 내 쪽을 바라봤다.“기리.”“네!”“신입 들어왔으니까 건배사 한번 해봐.”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13년 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하여!’라고 끝냈다.하지만 이번에는 수많은 회식과 인터넷에서 쌓인 건배사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회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좋은 회사는 건물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2화. 두 번째 첫 출근2013년 1월 16일.SG그룹 입사 첫날.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만 바라봤다.2013년 1월 16일.화면을 껐다.다시 켰다.여전히 2013년이었다.“……말도 안 되는데.”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달력을 확인했다.2013년 1월.책상 위에는 낯익은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몰라 볼을 세게 꼬집었다.“아악!”아프다.확실히 아팠다.꿈에서 느끼는 어설픈 통증이 아니었다.“꿈은 아닌 것 같고…….”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그대로 굳었다.“미친.”거울 속 남자는 서른아홉 살의 내가 아니었다.1눈 밑에 달라붙어 있던 피로가 사라졌다.잔주름도 없다.술과 야근에 찌든 얼굴도 아니었다.스물여섯.처음 SG그룹에 입사했을 때의 김기리였다.나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손가락 사이로 빽빽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와…….”감탄이 절로 나왔다.“이때는 머리도 많았네.”잠깐 감동했다.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다.“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나는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가장 먼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뚜르르르.몇 번의 신호음 뒤,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소리가 젊었다.기억 속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엄마?”“왜? 출근 준비 안 하고 뭐 하니?”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였다.2정말로.13년 전의 엄마.“엄마.”“왜 그래?”“그냥…….”목이 이상하게 잠겼다.사고가 나기 전날 밤.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나는 받지 않았다.진급도 못 했다.결혼도 못 했다.주식은 몇 년째 처박혀 있었다.괜히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가족들 전화조차 피했다.그런데 지금.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그냥 전화해봤어.”엄마가 웃었다.“얘가 오늘 이상하네. 첫 출근이라 긴장돼?”“응.”나도 웃었다.“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