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시야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심건모는 단추를 풀려던 송서윤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입가에 번져 나오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송서윤이 이렇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니 기뻤다. 만약 그녀가 마음까지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아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심건모는 송서윤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은은한 먹향이 그녀를 감싸안았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송서윤이 보답하듯 입을 맞추려 하자 심건모는 얼굴을 붙잡은 채 허락하지 않았다.“너무 늦었어. 일찍 쉬어야지.”“말 들어. 나 할 일이 좀 있어서.”송서윤은 못내 아쉬운 듯 손을 거두었고 그대로 심건모의 품에 안겨 침대 위로 옮겨졌다. 심건모는 이불을 덮어주더니 평소처럼 침대맡에 앉아 송서윤의 등을 토닥이며 잠을 청하게 했다. 하지만 송서윤은 오늘 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자는 척해 보았지만 단 1분도 버티기 힘들었다.송서윤은 심건모의 손을 밀쳐내고 홱 돌아서서 그를 등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건모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대체 왜 화가 난 걸까?' 화장을 했는데 예쁘다고 칭찬해 주지 않아서일까? 사실 아까 입을 맞출 때 번들거리는 화장품의 감촉이 느껴져 그녀가 립스틱을 발랐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심건모는 송서윤의 뺨을 만져보았다. 아까는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뽀얀 분칠이 한 겹 덮여 있었다.송서윤은 곁에 있던 온기가 멀어지는 것에 이어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 화장을 지워버렸다. 다시 커다란 침대로 돌아와 눕는 찰나 옆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실수로 사람을 친 것이었다.당황하기도 잠시, 송서윤은 따뜻한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고 입술을 빼앗겼다. 은은한 먹향과 살짝 섞인 바디워시 향기. 그제야 마음이 놓였지만 송서윤은 심건모를 밀어냈다. 정치가인 심건모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능숙했고 단순한 송서윤은 그의 눈에 빤히 들여다보였다. 다만 무엇이 발단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국장님의 아내가 되어야 했던 사람은 원래 저였어요!”“송서윤이 도대체 뭔데!”심건모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물범벅이 된 하은의 얼굴을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 시체 더미 속에서 살아 돌아온 그에게 이런 잔인한 눈빛이 없을 리 없었다.심건모는 무심하게 물었다. “나를 좋아해?”하은은 당황하며 심건모를 올려다보다가 마치 희망이라도 발견한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나를 좋아해서 내 아내를 죽이려 했어?”담담했던 심건모의 목소리가 점차 차갑게 얼어붙었다. “네까짓 게 어떻게 살아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하찮게 여기는 네까짓 게!”심건모는 문득 고영훈이 했던 위기라는 말을 떠올렸다. 심건모가 성큼성큼 앞서 나가자 하은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국장님! 제가 증인이 될게요! 동봉우가 동건우를 살해했다는 걸 증언할게요!”희망은 사라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없었다. 심건모는 송서윤을 위해서라면 앞날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토록 송서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은 또한 그걸 모를 리 없었고 그저 그놈의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화를 부른 것이었다.심건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쾅 닫힌 문만이 그가 남긴 분노를 대변할 뿐이었다. 하은은 직무 유기와 살인 공모 혐의로 제훈에 의해 검찰로 넘겨졌고 남은 생은 철창 안에서 보내게 될 터였다.심건모는 정부 청사를 단숨에 빠져나와 기사에게 차 키를 받아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폭풍처럼 질주해 집으로 돌아왔다. 복도의 조명 아래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슴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송서윤은 컴퓨터 앞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광 빛이 보호막처럼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주변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 영락없는 해커의 모습이었다.심건모는 송서윤의
심건모는 고하준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일찍 쉬어.”심건모는 고하준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고하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고마워요.”심건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하준의 방문을 닫아주었다.3층, 송서윤은 샤워를 마친 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지뢰 제거 프로그램이 가동되었고 동건우와 이혜정이 함께 찍은 사진은 끊임없이 분석되고 있었다....심건모는 향가옥을 나와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타 정부 청사로 향했다.발표회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있었지만 회의실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심건모가 회의실 문을 열자 하은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상석에 앉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심 국장님, 정말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하은이 심건모의 발치에 엎드렸다.조민도 옆에서 거들며 용서를 구했다. “심 국장님, 하은 씨는 국장님을 5, 6년이나 모셨습니다. 국장님을 배신할 리가 없어요. 아마 예전 특수경찰 중 누군가일 것입니다.”하은은 심건모의 손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충혈된 두 눈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심 국장님, 전 국장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위기에서 저를 구해주신 분인데 제가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겠습니까.”심건모는 무심한 눈길로 제훈을 바라보았다. 제훈이 다가와 하은을 떼어놓고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내 사무실은 하은 씨와 조민 씨만 들어올 수 있어. 파쇄기 안의 서류는 내가 직접 갈아버린 뒤 직접 처리해. 그런데 이혼 합의서 한 부가 사라졌던 날, 내 사무실에 들어온 건 하은 씨뿐이었어.”“어떻게 확신하죠! 사무실엔 CCTV도 없잖아요!” 하은이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제훈 씨가 실수를 해서 이혼 합의서가 유출됐고 그래서 파문이 일어난 걸 지금 저한테 덮어씌우려는 거 아닌가요?”제훈은 하은이 이토록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 정말 몰랐다. “복도에 CCTV
심건모는 송서윤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송서윤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불쾌하게 했어.”마치 아이가 고자질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송서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냥 말을 건 거잖아요. 연락처를 알고 싶었을 뿐이지 불쾌하게 하려던 건 아닐 거예요.”“너를 기분 나쁘게 했잖아.”심건모는 걸치고 있던 슈트 상의를 벗어 곁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지난번 수영과 몇 마디 나누었다는 이유로 송서윤이 단번에 그를 밀어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아니에요. 아마 아내가 있다는 걸 몰랐겠죠.”송서윤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슈트를 힐끗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그런 행동이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달구는 기분이었다. “사람 좀 놔주세요.”심건모가 특수경찰을 슬쩍 쳐다보자 그제야 경찰은 손을 풀고 여자에게 사과까지 건넸다.“반지를 끼고 다녀야겠어.”심건모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자 송서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말 거는 사람?”“너한테도 말 걸면서 연락처 달라는 사람 많아?” 심건모는 송서윤을 품에 안고 걸으며 귓가에 속삭였다.간지러웠다. 그녀는 귀 옆의 잔머리를 만지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많지는 않아요.”“대시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고?”심건모는 추궁하듯 물었다. 그가 아는 사람은 소주원뿐이었다. 소주원 말고 또 누가 있을까.“없어요. 난 국장님 아내인데 누가 감히 대시를 하겠어요?”심건모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사진 속 송서윤의 얼굴은 흐릿했으니까. 송서윤이 잘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네?”심건모는 송서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내 아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만약 누가 너한테 대시하면 무조건 거절해야 해.”송서윤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심건모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하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고집불통!”송서윤은 나직이 투덜대면서 속으로
고영훈은 심건모를 밀쳐내고 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 고영훈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고 검은 눈동자에는 피비린내 나는 냉기가 소용돌이쳤다.“해봐요. 어디 한번 해보라고요.”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테니까!”심건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고영훈이 뒤쫓으려 했으나 조민이 앞을 가로막았다. 고영훈은 심건모를 향해 말했다.“이혼 합의서는 국장님 곁에 있는 사람만이 유출할 수 있는 겁니다.”“제로가 계속 말썽을 피우는 건 최종 목표가 케이시가 아니라 바로 국장님이기 때문이죠.”“천우진이 상대하려는 사람도 바로 심 국장님입니다.”“국장님이 서윤에게 가져다주는 건 언제나 위기뿐이에요.”“오직 나만이 서윤이를 안전하고 걱정 없이 살게 할 수 있어요.”심건모는 문고리를 잡은 채 고영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눈빛 속에 남모를 슬픔 한 자락이 스쳤으나 이내 차갑게 변했다.“고 대표님은 한때 서윤이의 세상 전부였죠.”“하지만 고 대표님의 배신이 서윤의 세상을 망가뜨렸어요.”“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서 서윤이를 걱정 없이 살게 하겠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겁니까?”심건모는 유리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송서윤의 시선을 느끼고는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위의 종이 움직임에 딸랑거렸다.송서윤은 심건모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애들이 졸려 하길래 먼저 보냈어요.”“나 기다린 거야?”“네. 술 마셨잖아요.”“좀 걸을까요? 술기운 좀 가라앉게.”“뭐 사고 싶은 거 있어?”“생각 중이에요.”심건모는 시간을 사고 싶었다. 송서윤의 10년, 그다음 10년, 또 그다음 10년을......고영훈은 조민에게 밀려났다. 조민은 고하준의 피아노 모형을 챙겨 식당을 나선 뒤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고영훈은 유리창 너머로 송서윤과 심건모가 웃으며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송서윤의 눈매는 온화했고 미소는 고요했다. 고영훈과 함께였던 시절 아무 걱정 없던 그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선
어린이 식당.심건모가 송서윤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식당 문을 열어주었다. 그 순간 송서윤은 고하준과 이리안이 고영훈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영훈은 광대 옷을 입은 채 풍선으로 토끼를 만들어 이리안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리안은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달려와 송서윤을 꽉 안았다. “엄마, 한참 기다렸어요.”송서윤의 몸이 휘청이자 심건모는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이리안은 다시 심건모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빠, 아빠가 준비한 광대 아저씨 진짜 최고예요!”“저글링도 잘하고 농담도 재밌고 마술도 부릴 줄 알아요.”심건모는 허리를 숙여 이리안을 안아 올리고는 담담한 시선으로 고하준을 바라보았다. 고하준의 표정에는 슬픔과 약간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네가 좋다니 다행이구나.” 심건모가 나직하게 대답했다.이리안은 심건모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빠 대단해요. 엄마를 다시 데려오다니.”그러고는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심건모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준아, 동생 안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고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선물 상자에 머물렀다. 이미 뜯겨진 상자 안에는 피아노 모형이 들어 있었다. 심건모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다. “네 물건은 아저씨가 챙겨주마.”긴장했던 고하준의 얼굴이 그제야 풀렸다. 고하준은 심건모 곁으로 다가와 이리안을 건네받았다. 유 집사와 육아 도우미도 그들을 따라나섰다.“먼저 가 있어. 금방 나갈게.”심건모는 송서윤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송서윤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누그러졌고 그녀는 시선을 거둔 채 뒤돌아 나갔다. 식당 유리문이 흔들리며 위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유리창 너머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코너에 세워진 밴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심건모는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선은 고영훈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