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도진 대표가 오션블루의 만기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싱가포르행 야간 비행기에 몸을 실은 다음 날 아침. CB 본사 디자인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장의 부재가 주는 막연한 불안감도 존재했지만, 디자인실 내부를 지배하는 진짜 중압감은 수석 디자이너 찰스가 내뿜는 서늘한 기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찰스는 자신의 오피스 통유리창 너머로, 시선도 제대로 두지 못한 채 파리하게 질려 있는 한유현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날이 갈수록 감각을 피워내며 치고 올라오는 유현의 성장은, 찰스에게 순수한 감탄이 아닌 서늘하고도 끔찍한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현이 내놓는 스케치 한 장, 라인 하나에는 찰스가 수년간 잊고 살았던 순수한 직관과 천재적인 미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결정적인 실체를 부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강도진이었다.
불과 얼마 전, 클로이 벤넷과의 독점 계약 체결을 축하하는
도진이 A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CB 사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그 소식을 들은 유현은 거의 뛰어갈 듯이 대표실로 향했다. 찰스에게 매번 "쓰레기"라는 비하와 폭언을 들으며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도진의 따뜻한 시선과 자신을 안심시켜 줄 다정한 확인뿐이었다. 자신의 작업물이 정말 쓰레기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줄 단 한 마디가 절실했던 것이다.하지만 대표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유현 씨,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외부 연락도 전부 차단하시고 중요한 재무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계십니다."지상이 대표실 앞을 가로막아서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아주 잠시라도... 잠시만 얼굴만 보고 가면 안 될까요?""죄송합니다. 지금 대표님께는 1분 1초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투자금 유지와 관련된 건이라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유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도진에게 유현의 불안이나 감정적 결핍 따위를 받아줄 여유는 단 1그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우가 요구한 수치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마당에, 당장의 투자금 유지가 도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사활이 걸린 명제였기 때문이다.결국 유현은 도진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도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도진과의 연결고리가 차단된 채 시간만 흐르는 동안, CB 내부의 분위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뒤숭숭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분명한 흉흉한 소문들이 사내에 찌라시처럼 퍼져나갔다.‘강도진 대표의 판단 실수로 CB 물류 라인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직전이라는데?’‘뉴스에만 안 나왔지, 실상 CB가 속으로 다 망해가고 있대. 당장 다음 달 자금 돌리기도
A국으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도진은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창밖으로 짙은 밤하늘이 지나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진우가 던진 단어 하나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난 숫자를 믿지, 사람은 믿지 않거든. 내가 만족할 만한 수치를 가지고 와.’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사업가로서 자격을 증명하라는 진우의 서늘한 시험대였다.A국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은 휴식조차 마다하고 CB 본사 대표실로 직행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에 기획실에서 올라왔던 '검은 태양' 관련 보고서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이었다. 포장만 화려하고 추상적인 장밋빛 전망으로 점철된 서류 따위는 진우라는 거인의 눈을 단 1초도 속이지 못한다."대표님, 밤을 새우신 상태입니다. 일단은 조금이라도...""됐어, 지상아."도진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매섭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처음부터 다시 짠다. 검은 태양 프로젝트의 초기 투자금 집행 내역부터 지금까지의 실질 수익률, 그리고 향후 5년간의 리스크 관리 및 수익 전망치까지 전부.""전부... 말씀이십니까?""그래. 단 1원 단위의 오차도 없어야 해. 숫자로 진우를 설득한다. 그 남자가 납득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기간 연장 따위는 없다."도진은 직접 펜을 들고 재무제표와 시장 분석 자료를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오만과 자존심을 털어낸 도진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남이 작성해 준 보고서에 도장만 찍던 예전의 도진이 아니었다. 완벽한 숫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밤샘 작업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도진이 '검은 태양'의 수치를 재정립하는 데 몰두하고 있던 며칠 뒤, 지상이 굳은 표정으로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보안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대표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 응접실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은한 앰버 빛 조명이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공간이 품은 온도는 극도로 차가웠다. 통창 밖으로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나, 방 안의 누구도 그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지 못했다.질문조차 되지 못한 도진의 피맺힌 음성이 허공에 산산이 부서졌다.진우는 도진의 질문에 단 한 마디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비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도진을 무심하게 지나쳐, 스위트룸 상석 소파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을 뿐이었다.진우가 느릿하게 턱을 괴며 낮게 읊조렸다.“내가 했다라…… 글쎄?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강요한 적 없는데.”“……!”낮게 깔린 진우의 목소리가 도진의 귓가를 울리는 순간, 도진은 뇌리가 쿵 하고 깨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그의 말이 맞았다.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공개 입찰을 따내기 위해 오션블루에, 그리고 RV은행에 손을 벌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모든 것은 지수에게 지기 싫다는 오기, 그리고 이 정도 재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에 과시하고 싶었던 자신의 오만한 욕망이 스스로 벌인 일이었다.‘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당하는 완벽한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도진은 짓눌리는 중압감을 뚫고 이를 악물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꼿꼿한 태도로 진우의 맞은편 소파에 정갈하게 앉았다. 일단은 이 300억, 아니 어쩌면 500억으로 불어나 버린 처절한 협상
A국 CB그룹 본사 대회의실. 대형 스크린 너머 싱가포르에 있는 강도진 대표와의 긴급 화상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화면 속 도진의 얼굴은 몰라보게 파리해져 있었지만, 이사들의 거친 고성은 도진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회의의 안건은 매년 공개 입찰을 거치는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원석 확보 및 내년도 사업 방향이었다.“강도진 대표! 당신 장담과는 완전히 딴판 아닙니까! 올해 '검은 태양' 프로젝트로 거둬들인 수익률이 당초 목표치의 반토막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아스테리아 입찰에 또 거액을 쏟아붓는 게 말이 됩니까?”도진의 대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최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스크린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성을 질렀다. 그 옆에서 자신의 총괄 입지만 유지하면 그만인 찰스 라인의 이사가 적당히 거들었다.“말은 바로 하시오! 비록 수익률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제이아우라와의 협업을 통해 바닥을 치던 CB의 브랜드 신뢰도와 상징성은 완벽하게 회복하지 않았습니까!”“신뢰도가 밥 먹여 줍니까? 회사는 이윤을 남겨야 하는 조직입니다!”“그렇다고 이미 강 대표가 매년 새로운 '검은 태양'을 시장에 발표하겠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약속을 저버리자는 거요? 약속을 어기는 순간 CB의 주가는 고꾸라질 겁니다!”이사회 내부가 찬반으로 갈려 시끄럽게 대립하는 동안, 화면 너머 도진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경멸과 피로가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자금을 구하러 싱가포르에서 핏똥을 싸며 구르는 동안, 회삿돈 한 푼 보태주지 않은 이사진들이 한가하게 입찰 따위로 밥그릇 싸움을 하는 꼬라지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마침내 도진의 이성이 툭 하고 끊어졌다.“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도진이
싱가포르의 밤을 수놓은 마리나 베이 샌즈의 야경이 통유리창 전체에 눈부시게 펼쳐진 펜트하우스 파티장.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 4중주의 클래식 연주 소리와 묵직한 고급 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며 나는 청아한 타악음, 그리고 세계적 명사들의 기품 있는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파티장은 그야말로 화려함과 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잔에 부어지는 샴페인의 미세한 기포마저 황금빛 조명 아래 보석처럼 반짝였고, 차려입은 하객들의 턱시도와 실크 드레스는 억 단위의 장신구들과 어우러져 공간 전체를 압도적인 럭셔리함으로 채우고 있었다.그러나 그 찬란한 빛의 대홍수 한가운데,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서늘하고 묵직한 정적이 흐르는 구역이 있었다.버건디색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강도진이 파티장의 장엄한 장식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였다. 훤칠한 키와 각 잡힌 어깨, 날카롭게 날이 선 턱선과 타협을 모르는 눈빛.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화려한 열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서서히 식어 내렸다. 도진의 곁을 바짝 따르는 정지상 실장의 표정 역시 비장함과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대표님, 1시 방향입니다.”정 실장의 낮게 깔린 음성에 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통유리창 너머 야경을 배경으로, 샴페인 잔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숏컷 헤어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보는 이를 자연스럽게 압도하는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 Investment firm '오션블루'의 대표이사이자, 현재 벼랑 끝에 선 CB그룹의 숨통을 쥐고 있는 인물, 사라였다.도진은 망설임 없이 구두굽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진이 풍기는 거대한 중압감에 사라를 둘러싸고 있던 사교계 인사들이 흠칫하며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섰다.“호텔 스위트룸 대신 이런 파티장에서 뵙게 될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알리는 사내 안내 방송이 조용히 꺼졌지만, 유현은 사위가 가라앉은 디자인실 한구석에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하루 내내 찰스의 서늘한 멸시와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낸 끝이었다. 스케치북을 감싸 안았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오도독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유현은 도망치듯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꺼진 모니터에 얼핏 비친 낯선 잔상이 발걸음을 턱 막아서게 했다.짙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앉고, 며칠 새 체중이 줄어 귀신처럼 볼이 홀쭉하게 패인 형태. 한때 디자이너로서의 열정과 자부심으로 맑게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텅 빈 절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유현은 그 기괴하고 피폐해진 자신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꺼진 모니터에 비친 참담한 몰골을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 기괴한 잔상을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유현은 홀린 듯 CB 본사 빌딩을 나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번화가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온사인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활기찬 음악 소리가 밀물처럼 밀려드는 거리에 서면 이 끔찍한 소외감이 조금은 씻겨 나갈 것 같았다.하지만 화려한 도심의 불빛은 유현의 어둠을 밝혀주지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유현의 발걸음에는 최소한의 생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드리워진 어둠은, 밤거리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보다 훨씬 더 짙고 차가웠다.“……어? 유현이 아니야?”번화가 한복판, 인근 술집 테라스에서 대학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입사 동기 민우가 눈을 두드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뒷모습과 파리한 옆태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민우는 반가운 마음
지수는 도전에게 연락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119를 불렀다. 하지만 출산이 임막한 임산부처럼 부푼 배때문에 혼자서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였다. 지수는 필사적으로 옆방에 잠든 가정부를 불렀다."아줌마 아줌마...! 하아, 남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문트에 타고 넘고오는 가정부의 코고는 소리뿐이었다. 이것이 이 집에서 지수의 위치였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 고용인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철저한 그림자 같은 아내.지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K국에 있는 부모님이나 오빠에
평번한 여대생이었던 '이지수'의 세상은 '강도진'은 만나고 완전히 변했다.언제나 부모님과 오빠의 과잉보호 속에 기사님이 태워 주시는 차와 가정부의 가사 관리 속에만있던 지수에서 생애 처음으로 모든일은 스스로 하는 생활은 힘들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큰차가 아닌 작은차에 적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친구도 만날겸 지수가 타고다니는 경차 동호회에 가입하였다. 그곳에서 지수는 스물둘의 강도진을 만났다. 도진은 185의 훤칠한 키에 다부진 어깨, 오똑한 콧날에 강아지처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