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CB 그룹 회장실 옆에 마련된 화상 회의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실내 속에서 대형 프로젝터 화면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접속한 세 명의 외국인 얼굴이 분할되어 떠올라 있었다.
맞춤 수트를 매끄럽게 차려입고 입가에 자본주의적 미소를 띤 남미 현지 로비스트 로드리게스,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어두운 표정으로 두꺼운 지질 보고서를 뒤적이고 있는 A국의 세계적 지질학 전문가 앤더슨 박사, 그리고 거친 가죽 자켓을 걸치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로 담배 피울 궁리만 하고 있는 현지 채굴 현장 총괄 감독 고메즈.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정적을 깨고 판을 주도한 것은 단연 로비스트 로드리게스였다. 그는 특유의 과장된 손짓과 흥분된
제이아우라 대표실. '더 문' 2층의 폭발적인 열기와 길게 늘어선 줄을 내려다보던 진우의 비릿한 웃음에 지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강도진을 옥죄어 오는 300억 투자 연장 압박과 200억 RV은행 대출 만기. 그러나 도진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하지만 그에게는 파멸의 결정타가 될 무기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지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가를 부드럽게 올려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강도진이 잊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영원한 사랑' 디자인의 재계약 기간이 다가온다는 걸요."지수의 상큼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진우의 눈매가 유쾌하게 호선을 그렸다."또 한차례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군요.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올릴 거죠?"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제이아우라의 향수를 사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매장 속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그녀는 덤덤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젠 제가 만들 여력이 있는데, 아까운 내 새끼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없죠. 거기다 강도진은 에메랄드 광산까지 욕심을 내고 있으니…… 핑크 다이아몬드는 이제 그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겠어요?"도진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분신이자 최고 히트작, '영원한 사랑'을 이번 기회에 CB로부터 완전히 회수하겠다는 지수의 냉정한 결심이었다. 핑크 다이아몬드 신화에 가려진 채 남미 광산이라는 허황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도진의 앞날에, 지수는 이미 완벽한 퇴로 차단선까지 구축하고 있었다.늦은 저녁, 서초구의 한 조용한 빌라촌.유진의 집 안은 거실 가득 감도는 구수한 차돌된장찌개 냄새와 따스한 주황빛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착한 동생 유현이 저녁을 먹으러 온다는 연락에, 유진은 일찍 퇴근해 유현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정성껏 차려두고 기다리던 참이었다."어 왔어? 어서
CB 그룹 본사 대회의실. 홀리데이 컬렉션 intermediate(중간) 기획 발표회가 열리는 회의실 내부에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상석에 앉은 강도진 대표는 최근 RV의 박진우 대표에게 핵심 물류센터 3곳을 빼앗긴 상처와 300억 원 상환 유예라는 압박감 때문에 눈밑이 거무튀튀하게 패여 있었다. 남미 에메랄드 광산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쥐었지만, 당장 눈앞에서 이사진과 투자자들에게 보여줄 확실한 신제품 실적이 절실했다."그럼, 이번 홀리데이 컬렉션 전체 라인을 총괄 지휘한 찰스 총괄 디자이너의 발표가 있겠습니다."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화려한 스카프를 두른 찰스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찰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CB 그룹 디자인실의 수장이자 최고 실세였다. 비록 아랫사람의 아이디어를 은근슬쩍 탐내고 감각 있는 신입들을 견제하는 시기심 많은 성격이었지만, 수년간 업계 최정상에서 구르며 얻은 시장 감각과 트렌드를 읽는 눈썰미, 그리고 조직을 주무르는 수완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화면에 찰스가 준비한 홀리데이 컬렉션의 메인 및 서브 라인업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사진의 탄성이 흘러나왔고, 도진의 굳어 있던 표정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객석 뒤편에 앉아 있던 유현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어?'찰스가 컬렉션의 서브 라인업으로 소개한 드레스 슈즈 때문이었다. 클래식한 가죽 바탕 위에 과감하면서도 정교하게 흘러가는 서브 스티치 디테일. 그것은 유현이 며칠 전 디자인을 고민하다가 '라인이 너무 튄다'는 이유로 폐기하고 노트 구석에 치워두었던 미완성 스티치 도안이었다.그러나 찰스는 그것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유현의 서브 스티치 라인을 기초로 삼되, 디자인 총괄로서의 짬밥과 자신의 장기인 화려한 징 장식, 강렬한 색감 배치를 더해 완전히 '찰스 스타일'의 화려한
CB 그룹 회장실 옆에 마련된 화상 회의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실내 속에서 대형 프로젝터 화면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화면 너머로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접속한 세 명의 외국인 얼굴이 분할되어 떠올라 있었다.맞춤 수트를 매끄럽게 차려입고 입가에 자본주의적 미소를 띤 남미 현지 로비스트 로드리게스,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어두운 표정으로 두꺼운 지질 보고서를 뒤적이고 있는 A국의 세계적 지질학 전문가 앤더슨 박사, 그리고 거친 가죽 자켓을 걸치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로 담배 피울 궁리만 하고 있는 현지 채굴 현장 총괄 감독 고메즈.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정적을 깨고 판을 주도한 것은 단연 로비스트 로드리게스였다. 그는 특유의 과장된 손짓과 흥분된 어조로 화면 중앙에 남미 안데스 산맥 일대의 광산 지도를 펼쳐 보였다."강 대표님! 이건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상위 0.1%의 노다지 프로젝트입니다. 이번 입찰에서 낙찰만 받아낸다면 CB 그룹의 자원 및 보석 사업 부문은 단숨에 남미를 넘어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겁니다. 수치만 보십시오! 매장량의 무려 80% 이상이 최상급 에메랄드에, 일부 구간에서는 최고 등급의 다이아몬드와 루비까지 대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설적인 보석 광산입니다. 남미 전체를 털어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신이 내린 노다지입니다. 정부 핵심 관계자들과의 밑작업은 이미 제가 완벽하게 마쳐놓았으니, 강 대표님께서는 낙찰 도장만 찍으시면 됩니다. 그 뒤는 그야말로 주워담기만 하면 되는 돈방석입니다!"로드리게스의 눈부신 호언장담에 강도진은 턱을 괴고 앉아 차분
CB 그룹 패션 디자인실의 중간 검토 회의를 앞두고, 디자인실 전체는 전에 없던 기묘한 열기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총괄 디렉터인 찰스가 이번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컬렉션에서 서브 디자인 자리를 하급 및 신입 디자이너들에게 대거 개방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찰스의 그늘에 가려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을 연차 낮은 디자이너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기회였다."수석님, 이번에 제가 제출한 서브 스케치입니다. 연인 간의 클래식한 감성을 살려봤습니다.""수석님! 저는 '나를 위한 선물' 라인에 맞춰 특수 자수 장식을 접목해 봤는데 한번 봐주십시오!"신입들과 2~3년 차 디자이너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짠 참신한 아이디어 스케치들을 들고 찰스의 디자이너실로 향했다. 찰스는 상석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아이들이 가져온 스케치들을 쓱쓱 훑어보며 가끔 짐짓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호오…… 3팀 김 디자이너, 이 소매 부분의 비대칭 주름 디테일, 꽤 신선한데?""이 디자이너, 버클 장치에 앤티크한 금속 레이스를 덮는 방식은 제법 감각이 있어."찰스는 친절한 선배의 얼굴을 하고 신입들의 스케치 구석구석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는 칭찬 몇 마디를 건네며 스케치북을 거둬 갔다.신입들은 마침내 자신들에게도 빛이 비추는가 싶어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렸다.하지만 며칠 뒤, 1차 기획 회의 판넬이 디자인실 중앙에 공개된 순간, 신입 디자이너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어?"스케치 판넬을 확인하던 신입 김 디자이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메인 컨셉 판넬 중심에 걸려 있는 찰스의 메인 라인 착장 스케치 때문이었다. 소매 끝에 잡아놓은 비대칭 주름 패턴과 독특한 드레이핑…… 그것은 분명 며칠 전 자신이 찰스에게 검토받으러 가져
남미 광산 개발권을 집어삼키기 위한 도진의 움직임은 갈수록 집요하고 과감해졌다.현지 고위 공무원이 세팅해 준 로비스트 라인을 가동하기는 했지만, 뼛속까지 의심이 많은 도진은 현지인들로만 팀을 구성하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비밀리에 자원 개발, 지질학, 현지 투자가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며 남미 광산에 대한 비공식 정보와 자문을 끌어모으고 다녔다.그러나 도진이 나름대로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한 행적들은, 정재계 및 자원 개발 쪽에 촘촘한 인맥을 가진 아스테리아의 지현을 거쳐 지수의 귀에까지 그대로 흘러들어갔다."오빠, 아스테리아에서 예전에 그 남미 광산 현장 평가한 보고서 있지? 그것 좀 볼 수 있을까?"지수의 연락을 받은 지현은 흔쾌히 아스테리아 내부 보안 문서로 분류되어 있던 현장 평가서를 전달해 주었다.지수는 모니터에 떠오른 문서의 내용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갔다. 평가서에는 광산의 매장량과 원석의 품질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광산 구역의 80% 이상은 하이엔드급 에메랄드가 매장되어 있으며, 일부 다이아몬드 및 루비 매장 추정. 매장량 규모는 중형 광산 수준.’표면적인 조건만 놓고 본다면 패션 및 주얼리 대기업인 CB 그룹으로서는 눈이 뒤집힐 만한 노다지였다. 원석의 질이 하이엔드급이라는 대목만으로도 도진이 왜 사재와 사운을 쏟아부으려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하지만 의문이 남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조건의 광산이라면 왜 자본력과 정보력이 뛰어난 아스테리아가 진작에 손을 떼고 철수했는가 하는 점이었다.지수는 지현에게 전화를 걸어 직구로 물었다."오빠, 평가서 봤어. 원석 질도 하이엔드급이고 매장량도 중형 광산 정도면 대박인데…… 아스테리아는 왜 이걸 중간에 포기한 거야?"수화기 너머로 지현의
며칠 간의 짧은 병가를 마치고 돌아온 CB 그룹 디자인실의 아침은 여전히 차갑고 분주했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디자인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유현의 눈빛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늘 어깨를 짓누르던 특유의 무기력함과 불안감은 온데간데없었고, 그 자리에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평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유현은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정돈된 서랍을 열었다. 병가 동안 유진이 건네준 조언들과 현실적인 가이드라인이 머릿속을 맑게 비워준 덕분이었다. 감정에 휘둘리며 스스로를 자학하던 유현은 이제 없었다.그러나 유현의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찰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만한 걸음걸이로 유현의 책상에 다가와 쾅 소리가 나게 서류 더미를 내던졌다."이야, 우리 귀하신 톱디자이너께서 드디어 출근을 하셨네? 몸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홀리데이 시즌 앞두고 병가나 내고 말이야. 프로 의식이 없어, 프로 의식이."찰스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디자인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팀원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이전 같았으면 찰스의 공격적인 태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숙이거나 죄송하다며 안절부절못했을 유현이었다.하지만 유현은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찰스를 바라보며, 차분하고 건조하게 목소리를 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석님. 업무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말끝에는 약간의 체념마저 묻어났다. 더 이상 찰스의 가스라이팅과 비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지극히 거리를 둔 태도였다.찰스는 순간 흠칫했다. 예상했던 눈물이나 당황하는 기색 대신,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한 무덤덤한 반응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찰스는 혀를 쯧 차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 드디어 제 뼘을 알고 기가 완전히 꺾였군. 조만간 제 발로 사표 내고 나가겠어.’유현의 '체념한 듯한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지수는 사무실 문 앞에서도 도진과 수진의 적나라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지수를 반히 쳐다봤다. 도진은 그런 수진을 보며 한 번 씩 웃고는, 손으로 수진의 허리를 쓸며 차갑게 지수를 쳐다봤다" 왜 왔어? 여기가 니가 오고 싶으면 오는 놀이터야?"지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이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지수는 도진의 물음에 대답대신 들고 온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차갑게 돌아서려했다. 그런 지수
A국에 도착한 슬비는 K국과 다른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박진우씨 맞으신가요? 저는 GS그룹의 박슬비라고 합니다. 제안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런데 만날수 있을까요?"갑작스러운 전화에 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GS? 내가 아는 그 GS 맞아? 그 큰 회사에서 나를 왜?'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피싱 아닌가요? 요즘도 이런 사기에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며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슬비는 황당한 표정으로 끊어진 전화를 한참 보다가 진우에게 메세지와 자신의 명함을 전송
이지현은 비서 슬비가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다거 결국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류 봉토 안에는 동생 지수의 처절한 결혼 생활과 강도진의 외도 증거들이 빠곡히 담겨 있었다. "하, 이지수,, 이딴 남자 때문에 그렇게 속상해하고 있었던 거야?" 지현은 화가나고 속상한듯 서류를 구기며 슬비를 봤다."박비서님은 지수의 친구이기도 하니 당분간 A국에서 가서 지수 옆에 있어 주실수 있다요? 이건 상사로서 명령이라기 보다는 지수 오빠로서의 부탁입니다. 아 그리고 지수가 부탁한 사람은 이 이사람이 좋겠군요""네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