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
“회색 아저씨!”
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
“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
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
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
“바구니 밑이요.”
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
“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
카일이 종이를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
「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
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
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
돈은 없어요. 미안해요.」
맨 아래에 작게 한 줄 더.
「촛불 봤어요?」
카일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에마가 카일 얼굴을 올려다봤다.
“답장 써 주세요. 제가 가져갈게요. 바구니 밑에.”
“…펜이 없다.”
“제가 있어요.”
에마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몽당 연필을 꺼냈다. 신전 서고에서 훔친 것 같은 짧은. 카일이 받았다. 쪽지 뒷면에 썼다. 빵집 벽에 대고.
「쑥. 버드나무. 오늘 잿골에 갑니다. 페터 영감 다리도 보겠습니다.」
연필을 멈췄다. 그리고 한 줄 더.
「봤습니다. 매일.」
에마가 쪽지를 받아 감자 밑에 다시 넣었다. 천으로 덮었다. 바구니를 팔에 걸었다. 카일을 올려다봤다.
“아저씨. 성녀님이 요즘 저녁 기도 빼먹고 6층 올라가서 촛불 켜고 다시 내려와요. 매일요. 212칸 두 번이에요. 저 다리 아파요. 같이 가야 해서.”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등불 두 번 깜빡인 날요. 성녀님이 창가에서 촛불 손으로 가렸다 뗐다 하셨어요. 손 데셨어요. 촛불 너무 가까이 대서. 제가 쑥 발라 드렸어요. 뒤뜰 쑥 뽑히기 전이라 다행이었어요.”
카일이 에마를 봤다.
“…많이 데었나.”
“손바닥 조금요. 괜찮아요. 성녀님이 웃으셨어요. 데고서 웃는 사람 처음 봤어요.”
에마가 돌아섰다. 바구니를 흔들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흰 두건이 몇 번 보였다 안 보였다.
†
셋째 골목 노란 문.
약초 가게는 작았다. 천장에 마른 풀 다발이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쑥 냄새, 박하 냄새, 처음 맡는 냄새. 할머니 하나가 등 굽은 채로 풀을 다듬고 있었다.
“쑥 주십시오. 버드나무 껍질도.”
할머니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위아래로.
“얼마나?”
“있는 만큼.”
할머니가 다듬던 풀을 내려놓았다.
“기사 양반이 쑥을 있는 만큼?”
카일은 자기가 기사인 걸 할머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몰랐다. 사복인데. 할머니가 카일 손목을 턱으로 가리켰다. 회색 실. 기사단 망토 색. 그리고 카일 서 있는 자세. 차렷.
“어디 아파?”
“잿골입니다.”
할머니 눈이 조금 커졌다.
“잿골에 쑥 들고 가는 사람이 요즘 또 있구먼. 봄엔 웬 아가씨가 오더니.”
카일이 할머니를 봤다.
“…맨발이었습니까.”
할머니가 웃었다. 이가 몇 개 없는.
“신은 신었더라. 근데 발가락이 들썩들썩해. 신이 불편한 사람처럼.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한 걸 달라더군. 들꽃골이 어딘지도 나는 모르는데. 손끝을 대 보더니 이거다 하더라. 돈은 동전 몇 닢.”
카일은 말이 없었다. 봄. 강림식 전이었다. 성녀가 왕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신전 몰래 시장에 나와 쑥을 샀다. 동전 몇 닢으로.
할머니가 쑥 다발을 내렸다. 다섯 다발. 버드나무 껍질 세 다발. 끈으로 묶었다.
“은화 둘.”
카일이 셋을 내밀었다.
“하나는 그 아가씨가 봄에 덜 낸 거.”
할머니가 은화를 봤다. 카일을 봤다. 받지 않았다.
“그 아가씨가 덜 낸 거 없어. 그날 내가 덜 받은 거지.”
할머니가 은화 하나를 카일 손에 도로 쥐여 줬다. 그리고 선반에서 작은 종이 봉지를 하나 꺼내 쑥 다발 사이에 끼웠다. 「꿀 섞은 박하 사탕. 그 아가씨가 봄에 보고 한참 서 있더라. 안 사고 갔지.」 카일은 봉지를 봤다. 그리고 망토 안주머니에 넣었다. 에마 바구니로 보낼 수 있을지는 몰랐다.
†
오후 두 시. 잿골.
카일은 정문으로 잿골에 들어갔다. 언덕 큰길로. 쑥과 버드나무를 등에 지고. 혼자.
대장간 앞. 한나가 화로 앞에 서 있었다. 쇠를 두드리던 남편 옆에서 풀무질을 하다가 카일을 봤다.
한나가 풀무를 놓았다. 카일 앞으로 걸어왔다. 카일 등에 진 쑥 다발을 봤다. 그리고 카일 얼굴. 그리고 카일 뒤. 아무도 없는.
“회색 기사 양반 혼자?”
“…예.”
한나가 카일 뒤를 한 번 더 봤다. 골목 끝까지. 아무도 없었다. 한나 어깨가 내려갔다.
“아가씨 못 나온다며. 네모 턱 때문에.”
“예.”
“그래서 당신이 왔어?”
“쪽지가 왔습니다. 쑥이 떨어졌다고.”
한나가 카일 등에서 쑥 다발을 받아 들었다. 냄새를 맡았다. 오래. 그리고 웃었다. 눈이 빨개지면서.
“이거 들꽃골 냄새 나네. 아가씨 냄새.”
†
페터 영감 집.
영감은 짚 요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앞으로 뻗고. 정강이. 석 달 전 쇳조각을 뺀 자리. 흉이 져 있었다. 그 둘레가 다시 빨갛게 부어 있었다.
카일이 영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대신이오?”
“…예.”
“그 손으로?”
영감이 카일 손을 봤다. 칼 잡는 손. 굳은살.
카일은 대답 대신 소금을 꺼냈다. 약초 가게 할머니가 덤으로 준. 한나에게 물을 끓여 달라고 했다. 소금을 풀었다. 식혔다.
그리고 성녀가 하던 순서를 떠올렸다. 손등으로 상처 둘레를 대 봤다. 뜨거웠다. 그런데 가운데가 물렁하지 않았다. 고름은 없었다. 성녀 쪽지 그대로.
카일이 소금물로 씻었다. 천천히. 바깥에서 안으로. 쑥을 찧었다. 한나네 돌절구로. 콩콩콩. 성녀 방에서 나던 소리. 찧은 쑥을 상처에 얹었다. 천으로 감았다.
이번엔 비뚤게 감기지 않았다.
영감이 그걸 내려다봤다. 다리에 감긴 천. 반듯한.
“…늘었네. 기사 양반.”
“배웠습니다.”
“누구한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감이 웃었다. 무릎을 탁 쳤다. 다친 다리 말고 성한 쪽 무릎을. 그리고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성한 무릎도 일흔 넘은 무릎이었다. 한나가 문가에서 웃었다.
“묻나 마나지.”
†
바울 집.
바울은 기침을 했다. 열은 없었다. 성녀 쪽지 그대로. 한나가 꿀물을 먹이고 있었다.
카일이 들어가자 바울이 카일 다리에 매달렸다.
“기사 아저씨! 리아 누나는?”
“…못 온다.”
“왜?”
카일은 아홉 살에게 할 대답을 찾지 못했다.
“누나가 아저씨 보낸 거야?”
“…그래.”
바울이 카일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마에 대 보라는 듯이. 바울은 성녀가 오면 늘 이마부터 짚는 걸 알았다.
카일이 쪼그려 앉았다. 손을 바울 이마에 댔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성녀가 하던 대로.
미지근했다. 열 없었다.
“…괜찮다.”
“누나도 그렇게 말해.”
바울이 웃었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콜록. 카일이 등을 두드렸다. 천천히. 박자를 맞춰서. 어머니 박자. 들꽃골 노래 박자.
한나가 문가에서 그걸 봤다. 팔짱을 끼고. 아무 말 없이.
†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카일은 잿골에서 돌아가는 길에 하수 돌계단을 올랐다. 낮에. 꼭대기 신전 경비병이 카일을 내려다봤다. 사복. 경비병이 창을 고쳐 잡았다. 카일은 꼭대기까지 가지 않았다. 계단 꺾이는 자리에서 멈췄다. 뒷담 아래. 개구멍 자리.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손가락 굵기. 다섯 개. 그 사이로 뒤뜰이 보였다.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리고 창살 바로 안쪽에 지팡이 하나가 땅에 꽂혀 있었다.
“기사 양반이오?”
창살 너머에서 목소리가 났다. 오렌이었다. 담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화분. 보라색 꽃.
“여기서 매일 오후에 앉아 있소.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라고 했지. 네모 턱이 뭐라 안 하오. 늙은이는 담을 못 넘으니까.”
카일이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오렌과 눈높이가 맞았다.
“아가씨는.”
“잘 있소. 밥 반 남기고, 잠 조금 자고, 저녁마다 계단 두 번 오르고.”
오렌이 화분을 들어 창살 쪽으로 내밀었다. 보라색 꽃 다섯 송이.
“이게 뭔지 알아냈소. 브루노 일지가 서고 구석에 있더군. 쉰 해 묵은. 이건 열을 내리는 풀이오. 버드나무보다 세다고 적혀 있소. 남쪽 산에서만 자란다고.”
“…들꽃골.”
“아마도.”
오렌이 화분을 다시 무릎에 놓았다.
“그리고 서고에서 하나 더 봤소. 장부 사본. 매달 들꽃골 줄이 없는 걸 확인했지. 근데 사본 맨 뒷장에 원본 금고 열쇠를 누가 갖고 있는지 적혀 있었소. 대주교, 그리고 비서 사제. 둘.”
오렌이 창살 사이로 카일을 봤다.
“비서 사제는 밤에 술을 마시오. 일주일에 한 번. 쉰 해 동안 그 방 앞을 지나다닌 늙은이가 아는 거요.”
카일은 오렌을 오래 봤다.
“…위험합니다.”
“일흔둘이오. 담도 넘었소.”
오렌이 웃었다. 이 빠진. 그리고 지팡이를 뽑아 일어났다.
“아가씨한테 전하겠소. 기사 양반이 페터 영감 다리 감았다고. 반듯하게.”
†
저녁 일곱 시. 서쪽 성벽 망루.
카일은 교대가 아니었다. 비번이었다. 그래도 망루에 올라왔다. 등불을 내려 난간에 올렸다.
해가 졌다. 6층 촛불이 켜졌다.
카일이 덮개를 닫았다 열었다. 세 번.
오늘은 세 번이었다. 잿골에 다녀왔다는 뜻으로. 성녀가 그걸 알 리 없었다. 둘이 정한 신호는 없었다. 그래도 세 번 했다.
6층 촛불이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세 번.
카일은 등불을 쥔 채로 웃었다. 아무도 없는 망루에서. 소리 없이. 입가만.
손등을 봤다. 바울 이마에 댔던 손등.
『감시 보고서 — 8월 10일
대상: 쪽지 한 장. 쑥과 버드나무 요청.
특이 사항: 잿골에 전달함. 페터 영감 천은 반듯하게 감김.』
(22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