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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담을 넘음

Auteur: Jino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1-01 17:00:00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

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

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

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

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

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

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

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

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

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

잠겨 있지 않았다.

†

탑 안. 1층. 계단.

카일은 셌다. 하나, 둘, 셋.

212칸. 두 달 만이었다. 7월 17일 새벽에 내려간 이후로. 그때는 위에서 아래로 셌다. 지금은 아래에서 위로.

탑 안은 어두웠다. 열 칸마다 벽에 숫자. 옛날 석공들이 새긴. 에마가 그걸 보고 셌던. 카일은 손끝으로 숫자를 더듬으며 올라갔다.

삼십. 사십.

4층. 오렌 사제 방 앞. 문 아래 틈으로 촛불 빛. 오렌이 깨어 있었다. 카일은 지나갔다. 소리 없이.

문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콜록. 그리고 아주 작게 목소리.

“…조심하시오.”

카일이 멈췄다. 문을 봤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기침 소리만 다시. 콜록.

카일은 다시 올라갔다.

5층. 백구십. 이백.

6층 계단참 직전에서 카일은 멈췄다. 벽에 등을 붙였다. 고개만 내밀었다.

6층 복도. 짧은. 문 하나. 문 앞 의자. 의자에 보르크가 앉아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고개가 가슴으로 떨어져 있었다. 팔짱을 끼고. 칼은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숨소리가 컸다. 코를 고는.

카일은 보르크를 봤다. 오래.

복도 끝 창. 열려 있었다. 9월 밤바람이 들어왔다. 창은 성녀 방 문에서 열 걸음. 보르크 의자에서 아홉 걸음.

문 앞을 지나야 했다. 보르크 무릎 앞을.

카일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계단참에서 한 걸음 나섰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쿵.

물동이 엎어지는 소리. 그리고 물이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소리. 콸콸. 그리고 비명.

“아아아! 미끄러워! 아이고 물! 물 다 쏟았어!”

에마 목소리였다. 5층 계단참쯤에서.

보르크가 벌떡 깼다. 칼을 쥐었다. 일어났다. 계단 쪽을 봤다. 카일이 있는 계단참. 카일은 벽에 붙었다. 그림자 속으로.

“누구냐!”

“저예요, 에마요! 성녀님 밤에 목마르시대서 물 떠 오다가요! 다 쏟았어요! 계단이 강이에요! 경비대장님, 저 발목 삔 것 같아요! 아야야야!”

보르크가 혀를 찼다. 칼을 의자 옆에 다시 세웠다. 계단으로 왔다. 카일 바로 옆을 지나쳐. 카일이 숨을 멈췄다. 보르크 망토 자락이 카일 소매를 스쳤다.

보르크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갔다. 쿵쿵쿵.

“수련 수녀가 밤에 물을 왜 떠! 아침에 떠!”

“성녀님이 목마르시대서요! 아야야야! 대장님 저 좀 업어 주세요, 저 못 걸어요!”

“업긴 뭘 업어!”

목소리가 5층, 4층으로 멀어졌다.

카일은 벽에서 등을 뗐다. 6층 복도. 문. 빈 의자.

†

카일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 안쪽에서.

성녀가 서 있었다.

갈색 잠옷. 머리를 풀어 어깨에. 맨발.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촛불은 방 안 창가 탁자 위에.

두 달.

성녀가 카일을 봤다. 아래에서 위로. 첫날 밤처럼. 가죽 신, 검은 외투, 얼굴.

카일은 성녀를 봤다. 말랐다. 두 달 동안 강 건너 바늘 끝만 한 촛불로만 본 사람. 그 촛불이 이 사람이었다. 망루 계단에서 기다리던 매일 저녁이 지금 문 앞에 서 있었다. 맨발로. 발등이 하얬다. 두 달 동안 해를 못 본. 발가락이 바닥을 꼭 쥐고 있었다. 볼이 더 홀쭉했다. 눈 밑이 파랬다. 손목이 더 가늘었다. 왼쪽 손바닥에 하얀 흉. 촛불에 덴 자리. 에마가 쑥을 발라 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에마 목소리가 아직 들렸다. 「아야야, 대장님 천천히요!」 보르크의 「시끄러워!」

성녀가 문을 활짝 열었다. 한 발 물러섰다. 카일이 들어갔다. 성녀가 문을 닫았다. 소리 없이.

†

방 안. 창가 탁자. 촛불. 질그릇 단지. 돌절구. 벽에 마른 풀 다발이 반으로 줄어 있었다. 침대보 없는 침대.

창가 탁자 위에 종이 봉지가 하나 있었다. 열린. 박하 사탕. 반쯤 남아 있었다.

성녀가 창가로 갔다. 카일에게 등을 보이고. 창을 열었다. 밤바람. 강 건너 왕성. 서쪽 성벽 망루. 등불이 몇 개.

성녀가 창틀을 짚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목소리가 낮았다. 덤덤했다. 대주교 집무실에서 「기도로는 열이 안 내려요」 할 때의 목소리.

카일은 성녀 등을 봤다. 맨발. 창틀을 짚은 손. 하얀 흉.

“안 괜찮습니다.”

성녀 어깨가 움찔했다.

“에마가 전했습니다. 제 말 그대로.”

“…전했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괜찮다고 합니까.”

성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이 한 걸음 다가갔다. 두 걸음. 성녀 바로 뒤.

“탑이 일곱 층입니다.”

“알아요.”

“꼭대기 난간 뒤에서 연기와 가루를 피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눈이 가려질 때.”

“알아요.”

“그러니 승천이라고.”

“알아요!”

성녀가 돌아섰다. 처음으로 소리를 높였다. 계단 3층 참에서 「그게 무슨 뜻인데요」 했을 때보다 더.

눈이 젖어 있었다. 그런데 울지 않았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 눈.

“다 알아요. 그래서 괜찮다고 한 거예요. 안 괜찮다고 하면 기사님이 와요. 담 넘어서. 그러다 걸리면 기사님이 끝나요. 단장님이 모은 거 다 끝나요. 잿골 사람들 손도장 다 끝나요. 오렌 사제님도, 에마도, 루카스 기사님도. 그래서 괜찮다고 한 거예요. 기사님 오지 말라고!”

성녀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데 왜 와요.”

카일은 성녀를 내려다봤다. 아주 가까이. 창틀과 카일 사이에 성녀가 서 있었다.

“…괜찮다고 해서 왔습니다.”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당신이 괜찮다고 할 때마다 안 괜찮았습니다. 금식 때. 계단에서. 편지 받고. 여섯 달 동안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괜찮다는 쪽지를 받고 왔습니다. 제일 안 괜찮은 쪽지라서.”

성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나. 버티던 게.

카일이 손을 들었다. 성녀 얼굴로.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볼에 닿았다. 젖은 볼. 차가웠다.

엄지로 눈물을 닦았다.

성녀가 움직이지 않았다. 카일 손바닥에 볼을 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카일 손 쪽으로. 기대듯이.

카일이 몸을 숙였다.

입을 맞췄다.

짧았다. 숨 한 번. 성녀 입술이 차가웠다. 그리고 떨렸다. 카일 입술도.

카일이 몸을 뗐다. 손은 볼에 둔 채로.

성녀가 눈을 떴다. 카일을 봤다. 아주 가까이. 젖은 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녀가 발끝을 들었다. 맨발 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카일 외투 깃을 두 손으로 잡았다. 끌어당겼다.

이번엔 성녀가.

조금 더 길었다. 숨 두 번.

†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겁고 규칙적인. 보르크. 그리고 그 아래 에마 목소리. 「대장님! 저 아직 발목이! 대장님!」

성녀가 카일 외투 깃을 놓았다.

“가요.”

“…예.”

“창으로요. 복도로 가면 마주쳐요.”

카일이 창을 봤다. 6층. 창 밖은 탑 바깥벽.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창 왼쪽으로 반 걸음. 홈통. 쇠로 된 빗물 홈통이 탑 벽을 따라 내려갔다. 5층 창 차양까지.

“그 홈통이요. 에마가 그러는데 5층 창 차양까지 가면 5층 복도로 들어갈 수 있대요. 5층 복도 끝에 다른 계단이 있어요. 사제들 쓰는 좁은 계단. 그건 뒤뜰 쪽문 말고 부엌으로 나가요.”

카일이 성녀를 봤다.

“…다 알아봤습니까.”

“두 달 동안 6층에 있었어요. 할 게 없었어요.”

발소리가 6층 계단참 가까이 왔다.

카일이 창틀에 다리를 걸었다. 몸을 반쯤 내밀었다. 홈통을 잡았다. 차가운 쇠.

성녀가 창가에 섰다. 카일을 봤다.

카일은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 성녀를 봤다. 달빛. 젖은 볼. 풀어진 머리. 그리고 왼쪽 귀 밑.

점.

강림식 날 밤. 첫날. 문틈으로 빵을 내밀던 사람. 땋은 머리를 풀어서 보이던. 단 위에서는 머리를 땋아서 못 본.

카일은 그 점을 처음 본 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보고서에 쓰지 않은 것. 긴 기록에도 쓰지 않은 것. 「왼쪽 귀 밑 작은 점.」 쓸 필요가 없어서 안 쓴 게 아니었다.

“…안 괜찮다고 하십시오. 다음엔.”

카일이 말했다. 홈통을 잡은 채로.

성녀가 웃었다. 젖은 얼굴로.

“안 괜찮아요.”

“확인했습니다.”

카일이 홈통을 타고 내려갔다. 쇠가 손바닥을 긁었다. 발이 탑 벽을 디뎠다. 한 칸, 한 칸. 위에서 창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문 열리는 소리. 보르크 목소리. 「성녀님, 아까 무슨 소리.」 성녀 목소리. 「에마가 넘어지는 소리요. 저도 들었어요.」

5층 창 차양. 카일이 그 위에 내려섰다. 차양 끝에서 창으로. 5층 복도. 아무도 없었다.

좁은 계단. 부엌. 뒷문. 뒤뜰. 창고 지붕. 담.

담 위에서 카일이 돌아봤다. 백탑. 6층 창. 촛불이 켜져 있었다.

꺼졌다. 켜졌다.

한 번.

카일은 등불이 없었다. 손을 들었다. 달빛 아래에서. 한 번 흔들었다.

강 건너 망루에서는 안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였을 것이다. 6층 창에서. 뒷담 위 검은 그림자가 손을 흔드는 게.

『감시 보고서 — 9월 16일

대상: 6층. 박하 사탕 반 남음.

특이 사항: 안 괜찮다고 함. 처음.』

(2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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