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
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
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
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
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
“사람 말.”
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
“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
†
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
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
“증언?”
“예.”
“그게 뭔데.”
“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
한나가 종이 묶음을 봤다. 인주를 봤다.
“그거 하면 아가씨한테 좋아?”
카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모릅니다. 좋을 수도 있고, 아가씨가 가짜라는 것도 같이 드러납니다. 근데 아가씨가 무엇을 했는지가 같이 적힙니다. 신전이 무엇을 안 했는지도.”
한나가 카일을 오래 봤다. 그리고 팔짱을 풀었다.
“여기서 해. 대장간. 의자 갖다 놓을게.”
†
첫 번째. 한나.
한나가 대장간 의자에 앉았다. 앞치마를 털고. 손을 무릎에 올리고. 카일이 맞은편에 앉아 펜을 들었다. 루카스가 옆에 서서 종이를 눌렀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4월 5일 밤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4월이라. 아가씨가 처음 온 건 3월이야. 강림식 전. 신을 신고 왔더라. 신전 사람이 아니고 그냥 시장에서 쑥 사 들고 길 잃은 아가씨인 줄 알았지. 우리 바울이 그때 무릎이 까져서 울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쑥을 찧어서 붙여 줬어. 그게 처음.”
카일이 적었다. 「3월. 대상이 바울 무릎에 쑥.」
“그다음 강림식 하고 나서 밤에 오기 시작했어. 맨발로. 남은 수프 단지 안고. 우리 바울 열날 때 밤새. 그다음 마리 기침할 때. 그다음 페터 영감 다리. 그다음 열병. 열병 때는 아가씨가 처방을 다 가르쳐 줬어. 버드나무 껍질 한 줌 물 세 사발. 쑥 다섯 잎 꿀 한 숟가락. 손 씻고 그릇 따로 쓰고 이불 삶고.”
한나가 하나씩 손가락으로 셌다. 다 외우고 있었다.
“신전은?”
카일이 물었다.
한나가 웃었다. 그리고 대장간 문을 열어 두었다. 카일과 루카스가 언덕을 다 오를 때까지. 화로 불빛이 골목을 비췄다. 대장장이 남편이 문가에 기대 둘이 사라지는 쪽을 봤다. 「저 기사 양반, 처음엔 무섭더니.」 한나가 대답했다. 「지금도 무서워. 근데 우리 편이야.」 코웃음.
“신전? 봉쇄했지. 다리 막고 길 막고. 장작도 못 들어오게. 그리고 단 위에서 아가씨 세워 놓고 사흘 기도하게 했지. 그동안 우리는 여기서 아가씨가 가르쳐 준 대로 했어. 그리고 열병이 끝나니까 신전에서 그러더라. 성녀 기도가 거두었다고.”
한나가 대장간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반쯤 남은 장작더미.
“기도가 장작도 패 줬나 보지.”
카일이 적었다. 한나 말 그대로. 「기도가 장작도 패 줬나 보지.」
다 적고 나서 카일이 종이를 돌려 한나 앞에 놓았다.
“읽어 드릴까요.”
“읽어 봐.”
카일이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기도가 장작도 패 줬나 보지」에서 한나가 웃었다.
“그거 진짜 적었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좋아.”
한나가 엄지를 인주에 꾹 눌렀다. 종이 맨 아래에 찍었다. 붉은 엄지. 크고 굵은. 대장간 아낙 엄지.
†
두 번째. 대장장이 남편. 「아가씨가 우리 바울 발을 밤새 주물렀어. 나는 쇠는 두드려도 자식 열은 못 두드렸는데.」 손도장.
세 번째. 첫째 집 아이, 열병 첫 환자. 열두 살. 이름을 쓸 줄 알았다. 「토마스」. 삐뚤게. 「기사 아저씨 망토 덮고 나았음. 리아 누나가 발 주물렀음.」
네 번째. 무두질 공방 주인. 「일꾼 둘 잃었소. 하나는 열병, 하나는 봄에. 신전에 장례 부탁하러 갔더니 헌금부터 내라더군. 아가씨는 돈 얘기 한 번도 안 했소.」 손도장.
다섯 번째부터는 줄이 생겼다.
대장간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소문이 퍼졌다. 「들꽃골 아가씨 일로 기사 양반이 말을 받는대.」 날품팔이, 빨래꾼, 공방 일꾼, 우물가 아낙, 강가 어부. 줄이 대장간 앞에서 우물까지 이어졌다.
카일은 줄을 봤다.
백탑 앞 줄. 열네 살. 사흘. 기적을 기다리는 줄.
이 줄은 반대였다. 기적이 아닌 걸 말하러 온 줄.
카일 손이 펜을 꽉 쥐었다.
루카스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대장님. 종이 모자라요.”
“…사 와.”
“예!”
루카스가 뛰어갔다. 시장 쪽으로. 이번엔 진짜 시장 쪽.
†
여섯 시. 해가 기울었다. 줄이 아직 남아 있었다.
페터 영감 차례가 왔다. 지팡이를 짚고 절룩이며 의자에 앉았다. 바지를 걷었다. 정강이 흉. 지난달 카일이 감은 천은 풀려 있었다. 부기가 다 빠져 있었다.
“나는 할 말이 많소.”
“예. 다 적겠습니다.”
“4월 9일. 기적의 날. 나는 줄 맨 끝에 앉아 있었소. 단 위에선 절름발이가 지팡이를 던지고 뛰더군. 그 녀석, 나는 아오. 남문 밖 주막에서 노름하는 놈이오. 다리 멀쩡하오. 은화 셋 받았다고 그날 저녁 주막에서 자랑하더군.”
카일이 펜을 멈췄다. 긴 기록에 적었던 것. 「사제 둘의 대화. 은화 셋씩. 새 지팡이.」 그게 확인됐다. 페터 영감 입으로.
“주막 이름은.”
“붉은 수탉. 남문 밖. 주인이 내 사촌 동생이오.”
카일이 적었다. 「붉은 수탉. 주인 증언 가능.」
“그리고 아가씨가 단에서 내려왔소. 맨발로. 내 다리를 보더니 칼을 달라고 하더군. 기사 양반한테. 그리고 불. 그리고 물. 기사 양반이 투구로 물을 퍼 왔지. 그건 기사 양반도 보셨으니 내가 말 안 해도 되겠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본 건 증거가 약합니다.”
“…왜?”
카일은 대답을 고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감시 기사가 감시 대상한테 마음을 줬다고 할 겁니다. 대주교 쪽에서.”
페터 영감이 카일을 봤다. 오래. 그리고 웃었다. 크게. 무릎을 쳤다. 성한 쪽.
“마음을 줬다고? 그게 무슨 흠이오. 나는 그 아가씨한테 다리를 줬소. 한나는 아들을 받았고. 잿골이 다 뭘 하나씩 줬지. 기사 양반은 마음을 준 거고.”
영감이 카일 앞 종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것도 적으시오. 「잿골 사람들은 다 뭘 하나씩 줬다」고.”
카일은 적었다. 손이 떨렸다. 글씨가 조금 삐뚤어졌다.
†
일곱 시. 바울 차례였다. 줄 맨 끝.
바울은 아홉 살이었다. 글을 몰랐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발이 땅에 안 닿았다.
“바울. 본 거 말해 봐.”
바울이 생각했다. 오래. 그리고 말했다.
“리아 누나가 발 주물렀어.”
“응.”
“내 발이 차가웠는데 누나 손이 따뜻했어.”
“응.”
“그리고 누나가 노래 불렀어. 들꽃은 밤에도 피고.”
“…응.”
“그리고 누나 발이 더러웠어. 맨발이라서. 근데 누나는 내 발만 닦았어. 자기 발은 안 닦고.”
카일이 펜을 멈췄다.
“그리고 그다음 날 누나가 또 왔어.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바울이 손가락으로 셌다. 열 개를 다 펴고 나서 멈췄다.
“더 많아. 손가락이 모자라.”
카일이 적었다. 바울 말 그대로. 「손가락이 모자라.」
다 적고 나서 카일이 인주를 내밀었다. 바울이 엄지를 대려다 멈췄다.
“아저씨, 나 그림 그려도 돼?”
“…그림.”
“손도장 말고. 누나 그림.”
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몽당 연필을 꺼냈다. 에마 것과 비슷한.
바울이 종이 맨 아래에 그렸다. 연필을 주먹으로 쥐고. 혀를 내밀고.
사람 하나. 동그란 머리. 땋은 머리 한 줄이 등 뒤로. 길쭉한 몸. 팔 두 개. 그리고 다리 두 개. 다리 끝에 발. 발가락 다섯 개씩. 꼼꼼하게. 열 개.
신발이 없었다.
“누나야.”
바울이 말했다. 그림을 카일에게 내밀며.
“맨발.”
†
밤 아홉 시. 대장간.
줄이 끝났다. 카일 앞에 종이 더미. 루카스가 셌다.
“마흔세 장이요. 손도장 서른하나, 이름 열하나, 그림 하나.”
마흔세 장. 그 겨울 마흔. 이번엔 마흔셋. 죽은 사람이 아니라 말한 사람.
한나가 화로 앞에서 그걸 봤다. 팔짱을 끼고.
“그거 들고 가면 아가씨 나와?”
카일은 종이 더미를 봤다. 바울 그림이 맨 위에 있었다. 맨발.
“…나오게 하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는 안 해?”
카일이 한나를 봤다. 한나가 웃었다. 피곤한 얼굴로.
“아가씨가 그러더라. 기사 양반은 「확인했습니다」 하면 약속하는 거라고. 그 말 하면 다 한다고.”
카일은 종이 더미를 끈으로 묶었다. 단단히. 매듭. 성녀에게 배운 매듭. 들꽃골 약초꾼 딸의. 한나가 그 매듭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아가씨 매듭이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나가 웃었다.
“…확인했습니다.”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에 장작을 하나 넣었다.
†
밤 열한 시. 서쪽 성벽 망루.
카일은 비번이 아니었다. 근무도 아니었다. 그냥 올라갔다. 종이 더미를 옆에 두고. 등불.
6층 촛불이 켜져 있었다.
카일이 덮개를 닫았다 열었다. 네 번.
네 번은 처음이었다. 둘이 정한 건 없었다. 그냥 많이 하고 싶었다. 마흔세 장이라고. 잿골이 다 뭘 하나씩 줬다고.
6층 촛불이 꺼졌다. 켜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카일이 손을 멈췄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촛불이 계속 깜빡였다.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셀 수 없이. 미친 듯이.
카일은 등불을 쥔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내서. 망루에서. 혼자.
성녀가 뭘 아는지 몰랐다. 에마가 쪽지로 잿골 소식을 전했을지도. 아니면 그냥 네 번이 많아서. 많으니까 더 많이.
카일은 덮개를 닫았다 열었다. 성녀가 멈출 때까지.
『감시 보고서 — 9월 4일
대상: 잿골 주민.
특이 사항: 증언 마흔셋. 손도장 서른하나, 이름 열하나, 맨발 그림 하나.』
(25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