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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제5조, 설까지 남은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38:43

제5조. 본 계약의 기간을 설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 연장한다.

(냅킨 뒷면. 날짜를 세기 시작하면 계약서는 달력이 된다.)

"파란등대 스튜디오요." 이현이 말했다.

송년회가 끝나고 둘은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12월 밤공기가 맵게 코끝을 찔렀다. 서윤은 목도리에 턱을 묻었다.

"들어 봤어요. 요즘 잘나가는 데잖아요."

"개발 리드 자리래요. 새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맡기겠다고."

"조건은요?"

"지금보다 연봉이 꽤 많아요."

"위치는요?"

"본사가 부산이에요."

서윤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늦추면 안 될 것 같았다. 부산. 기차로 두 시간 반. 솔뫼리 본가보다 멀었다.

"언제까지 답해야 돼요?"

"1월 중에요. 입사는 3월이고."

3월. 서윤은 머릿속으로 달력을 넘겼다. 1월, 2월 설, 그리고 3월. 제5조가 끝나고 한 달 뒤였다. 계약이 끝나고, 연수 첫날 같은 계절이 다시 오고, 그때쯤 이 사람은 부산에 있을 것이다.

"기획자 입장에서 보면요." 서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같게 나와서 다행이었다. "좋은 조건이에요. 리드 자리에, 새 프로젝트에, 연봉까지. 커리어로 보면 안 갈 이유가 없죠."

"그렇죠."

"고민할 게 뭐가 있어요."

"몇 개 있어요."

"뭔데요. 말해 봐요, 정리해 줄게요. 장단점 표로."

"표로요?"

"기획자니까요."

이현이 짧게 웃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하나. 까치 오픈이 설 일주일 전이에요. 제가 짠 구조라서, 오픈은 보고 가고 싶어요."

"그건 3월 입사면 되잖아요. 오픈 보고 가면 돼요."

"둘. 할머니요. 부산 가면 청매골이 더 멀어져요."

"할머니는 요즘 문자를 잘하시니까요. 사진도 보내시고."

"셋."

이현이 말을 멈췄다. 서윤은 기다렸다. 셋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을 봤다.

"셋은요?"

"……아직 정리가 안 돼서요. 표에 넣기 어려워요."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았다. 셋이 무엇이든,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현이 걸음을 멈췄다. 횡단보도 앞이었다. 빨간불이었다.

"서윤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방금 말했잖아요. 기획자 입장에서."

"기획자 말고요."

신호등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17. 16. 15.

서윤은 목도리에서 턱을 들었다. 기획자 말고. 그럼 뭐로 대답해야 하지. 여자친구로? 가짜인데. 동기로? 원수로? 갑으로?

떠오르는 문장은 하나뿐이었다. 세 글자짜리. 그리고 그 세 글자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냅킨 앞면 네 번째 줄을 발동시킬 문장이었다.

"……좋은 조건이면 가야죠." 서윤이 말했다. "계약은 설까지니까, 상관없고요."

신호가 바뀌었다. 초록불. 이현은 바로 걷지 않았다. 일 초쯤 서 있었다. 그리고 걸었다.

"그렇네요." 그가 말했다. "상관없네요."

역 입구에서 둘은 헤어졌다. 방향이 달랐다. 이현은 영수증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두 번 접었다가, 다시 넣었다. 반듯하게 접지 않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서윤은 그걸 보고 돌아섰다.

소문은 이틀 만에 퍼졌다. 개발팀 막내가 탕비실에서 조용히 말한 게 시작이었다.

"차 선임님 부산 가신대요."

민지가 서윤 자리로 의자를 굴려 왔다. 평소처럼 신난 얼굴이 아니었다.

"선배, 괜찮아요?"

"뭐가."

"차 선임님요. 부산."

"왜, 우리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서윤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요즘 장거리 연애 많이 해."

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서윤을 보다가 책상 위에 초콜릿 하나를 놓고 갔다. 포장지에 볼펜으로 작게 적혀 있었다. '선배 힘내요. 친구분도.'

팀장도 들었다. 오후에 서윤을 조용히 불렀다.

"정 선임, 차 선임 얘기 들었지?"

"네."

"잡을 거야?"

서윤은 대답을 고르다가 웃었다. "팀장님이 잡으셔야죠. 팀 개발 리드인데."

"내가 잡아서 잡힐 놈이면 벌써 잡았지."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놈 5년 동안 이직 제안 네 번 받았어. 네 번 다 안 갔어. 이유는 한 번도 말 안 했고."

"……네 번이요?"

"그래서 이번에도 안 갈 줄 알았는데. 이번엔 고민을 하더라고. 처음으로."

그 주 목요일 회의는 까치 오픈 일정 점검이었다. 설 연휴 일주일 전 오픈. 남은 작업을 하나씩 짚던 중에 이현이 말했다.

"오픈 이후 유지보수 담당은 따로 정해 두죠. 인수인계 문서는 제가 1월 안에 쓰겠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여섯 명이 커피를 들었다가, 아무도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인수인계요?" 서윤이 물었다.

"혹시 몰라서요. 문서는 있으면 좋잖아요."

"오픈 석 달 뒤에 2차 업데이트 있는데요. 까치 색 추가. 그건 누가 해요?"

"그러니까 인수인계를……."

"색 추가는 차이현 씨가 짠 구조잖아요. 다른 사람이 손대면 깨진다고, 차이현 씨가 그랬잖아요. 깨지는 걸 미리 말하는 게 개발이라면서요."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목소리가 올라가 있었다. 한 톤이 아니라 두 톤. 연기가 아니었다.

이현이 서윤을 봤다. 서윤은 기획서를 봤다.

"정 선임." 팀장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회의가 끝나고 씨름 방에는 한 줄만 올라왔다.

[방장: 오늘 중계는 쉰다.]

서윤은 자리로 돌아와 한참 동안 모니터를 봤다. 네 번. 5년 동안 네 번을 안 갔다. 그리고 이번엔 고민을 한다. 이번이 뭐가 다른데.

답은 뻔했다. 이번엔 서윤이 '가야죠'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씨름 방의 강력한 요청으로 데이트를 했다. 방장이 공지까지 올렸다. [시즌2 특별 편성: 두 사람 크리스마스이브 일정 공개 요망]. 둘은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정말로 나갔다. 가짜 연애는 증거가 필요했다.

광장에 큰 트리가 서 있었다. 사람이 많았다.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서윤은 묻지 않았다. 필요하냐고. 그냥 잡았다. 깍지가 한 번에 맞았다.

트리 아래에서 이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할머니였다. 글꼴은 서윤이 줄여 놓은 크기 그대로였다.

[할머니: 크리스마스에 둘이 뭐 하나]

[할머니: 사진]

두 번째 문장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현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트리를 배경으로, 둘이 화면 안에 들어갔다. 이번엔 주먹 하나만큼의 틈도 없었다. 추석 전 카페에서 반 뼘을 옮기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찰칵.

화면 속 서윤은 웃고 있었다. 이번엔 언제 웃었는지 기억이 났다. 이현의 어깨가 제 어깨에 닿은 순간이었다.

이현이 사진을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할머니: 인자 싸운 사람들 같지 안타]

받침이 또 틀렸다. 서윤은 그 문장을 소리 내지 않고 두 번 읽었다. 싸운 사람들 같지 않다. 할머니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석 달 만에.

"선물 있어요." 트리 앞에서 이현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저도요."

동시에 내밀었다. 동시에 열었다.

서윤의 상자에는 유성 매직이 네 자루 들어 있었다. 검정, 파랑, 빨강, 초록. 컵에 써도 번지지 않는 종류였다.

"……매직이요?"

"컵에 쓰시라고요. 시럽 1/2, 얼음 조금."

"차이현 씨가 써 주잖아요."

이현은 트리를 올려다봤다. "제가 없어도 쓰실 수 있게요. 카페 사장님은 바쁘시니까."

서윤은 매직 상자를 닫았다. 뚜껑이 잘 안 닫혔다. 두 번 만에 닫혔다.

이현의 상자에는 보온 텀블러가 들어 있었다. 남색. 뚜껑에 서윤이 매장에서 부탁해 새긴 글자가 있었다.

'뜨거운 거, 식혀서'.

"여름에도 뜨거운 거 마시잖아요. 김 나는 거 그냥. 식도에 안 좋다니까요."

이현이 텀블러 뚜껑의 글자를 엄지로 쓸었다. 한 번, 두 번.

"……부산 가서도 쓰라고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면 가라는 말이 됐다. 아니라고 하면 가지 말라는 말이 됐다. 둘 다 할 수 없었다.

"어디서든 쓰라고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집에 돌아와 서윤은 매직 네 자루를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부엌에서 컵 하나를 가져와 검정 매직으로 적었다. '시럽 1/2, 얼음 조금'. 글씨가 삐뚤었다. 이현의 글씨처럼 반듯하지 않았다.

그녀는 컵을 한참 봤다. 제가 없어도 쓰실 수 있게요. 그 사람은 이미 없어진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지 마요.

그 세 글자는 계약서 어디에도 없었다. 부칙에도, 개정 포스트잇에도, 뒷면 제5조에도. 그리고 그 세 글자를 말할 수 있는 조항은 딱 하나였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조항.

서윤은 지갑을 열고 냅킨을 꺼냈다. 석 달 사이 너무 많이 접혔다 펴져서, 냅킨은 이제 천처럼 부드러웠다. 스탠드 불빛에 펼쳤다. 앞면.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제2조. 밑줄 두 번의 제3조. 그리고.

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서윤은 그 문장을 기획서 검토하듯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 구멍이 없는지. 빠져나갈 해석이 있는지.

서로에게.

손가락이 그 단어에서 멈췄다. 서로에게. 한쪽만이 아니라, 서로. 그렇다면 한 사람만 빠진 건 파기 사유가 아닌 게 아닐까. 쌍방이어야 발동하는 조항이라면. 그렇다면 서윤 혼자 빠진 건, 그러니까, 아직은.

그 해석에 매달리려는 순간이었다.

제4조 끝, 접힌 자국이 지나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언가가 스탠드 불빛에 걸렸다. 볼펜 자국. 너무 작아서 지금까지 접힌 주름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

서윤은 냅킨을 불빛 가까이 가져갔다.

글씨였다. 서윤이 쓴 적 없는, 아주 작고 반듯한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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