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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제1조 이전, 5년 전 3월

작가: Jino
last update 게시일: 2026-10-15 08:38:37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

(계약은 그날 밤 시작됐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그보다 훨씬 먼저 시작돼 있었다.)

이현의 휴대폰은 따뜻했다. 방금까지 주머니에 있던 온기였다.

서윤은 연락처를 열었다. 민지가 어깨 너머로 목을 뺐다. 로비의 사람들 몇이 걸음을 늦췄다.

ㅈ. 정. 정서윤.

그냥 정서윤이었다. 괄호도, 하트도, 수식어도 없이.

"……이게 다예요?" 민지가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트도 없어요? 이모티콘 하나도?"

"이름이 제일 정확하니까요." 이현이 말했다.

"선배는 '공수'까지 붙였는데!"

"그건 서윤 씨가 정확한 거죠. 저 공수 얘기 많이 하니까."

민지는 한숨을 쉬며 씨름 방에 무언가를 적었다. 로비에 멈춰 있던 사람들도 싱거운 표정으로 흩어졌다. 서윤은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돌려주면서 이상하게 조금 서운했다. 뭐를 기대했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공수." 회전문을 나서며 이현이 말했다.

"그건 입사 석 달째에 저장한 거예요. 그땐 진짜 공수 얘기밖에 안 했잖아요."

"지금은요?"

"……지금도 해요."

"그럼 계속 공수로 두세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공개 연애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첫 주에만 사람들이 자리로 찾아왔고, 둘째 주부터는 다들 익숙해졌다. 이현은 아침마다 서윤의 자리에 컵을 놓고 갔다. 옆자리 민지는 첫날 그 컵의 '1/2'을 보고 비명을 질렀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컵이 오기 전에 서윤의 책상 한쪽을 치워 두었다.

한번은 개발팀 막내가 이현이 컵을 놓고 간 뒤 서윤의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정 선임님, 그 컵에 적힌 거요. 선임님이 매일 직접 쓰시는 거예요?"

"응. 왜?"

"아뇨, 저희한테는 커밋 메시지도 세 글자로 쓰시는 분이라서요. '수정함'. 그게 다예요."

서윤은 컵을 돌려 봤다. '시럽 1/2, 얼음 조금'. 그리고 그 밑에 오늘은 한 줄이 더 있었다. '오후 회의 자료 11쪽 오타'.

"……이건 업무 지시네."

"그것도 컵에 쓰세요?" 막내가 경악했다.

서윤은 11쪽을 열었다. 오타가 있었다. '까치'가 '까지'로 되어 있었다.

회의에서는 여전히 싸웠다. 포스트잇 조항대로였다. 씨름 방은 시즌2의 첫 전적을 '정서윤 3승 차이현 3승'으로 기록했다. 방장은 공지에서 "사귀는 사이에 이 정도면 오히려 건강하다"고 평했다.

서윤만 알았다. 그 한 달 동안 기준표의 항목이 두 개 더 늘었다는 걸.

12월 셋째 주, 팀 송년회가 열렸다. 회사 근처 고깃집. 긴 테이블 두 개.

서윤은 맥주를 반 잔 마셨다. 볼이 빨개졌다. 민지가 "선배 볼 좀 봐" 하며 사진을 찍으려 했고, 이현이 말없이 서윤 앞의 맥주잔을 치우고 사이다를 놓았다.

"우와." 민지가 말했다. "사귀는 거 맞네."

"원래 치워 줬어요." 이현이 말했다. "회식 때마다."

"언제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대각선 자리에서 손이 안 닿아서 옆 사람한테 부탁했지만."

서윤은 사이다를 마시다 멈췄다. 작년 송년회. 누군가 '정 선임 그만 마셔' 하며 잔을 가져갔었다. 옆자리 개발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서윤은 그때 궁금해하지 않았다.

열 시쯤, 팀장이 계산을 하러 일어나다 이현을 불렀다. 법인카드 한도가 모자라 선임 카드로 나눠 내야 한다고 했다. 이현이 일어나며 휴대폰을 서윤 앞에 놓았다.

"폰 좀 봐 주세요. 할머니 전화 오면 받아 주시고요. 이 시간에 가끔 하세요."

"잠겨 있잖아요."

"0302요."

이현은 카운터 쪽으로 갔다. 서윤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할머니 전화는 오지 않았다. 대신 화면에 뜬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글씨가 여전히 컸다.

[글꼴 크기가 최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아직도 안 바꿨어?"

본부장 앞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도. 서윤은 웃음이 나왔다. 반쯤은 술기운이었다. 그녀는 0302를 눌러 잠금을 풀었다. 글꼴 크기를 적당히 줄였다. 할머니가 보실 때 조금 작다고 하실 정도로만.

그리고 장난기가 올라왔다. 맥주 반 잔만큼의 장난기.

연락처를 열었다. 정서윤. 편집을 눌렀다. 이름 칸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

'갑'.

저장을 누르려는 순간, 편집 화면 맨 아래가 눈에 들어왔다. 글꼴이 줄어서 이제야 한 화면에 다 보였다. 회색의 작은 글씨.

'추가한 날짜: 2021년 3월 2일'.

서윤은 그 줄을 한참 봤다.

2021년 3월 2일. 입사 연수 첫날이었다. 강당. 계단 단체사진. 조별 발표. 준비한 원고를 덮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로 시작했던 날.

추석 점심상이 떠올랐다. 둘째 이모가 턱을 괴고 물었다. 언제부터 좋아했어? 이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연수 때 발표하는 걸 봤어요. 그날 집에 가서 번호를 저장했습니다.'

서윤은 그걸 연기라고 생각했다. 디테일이 훌륭한 연기. 개발자라서 그런가, 하고 감탄까지 했다.

연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날짜는.

서윤은 머리를 굴렸다. 기획자답게. 반론부터.

연수 첫날 조별 연락망이 돌았다. 백 명 가까운 신입의 번호가 한 장에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번호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날 이현이 동기들 번호를 전부 저장했을 수도 있었다. 체계적인 사람이니까. 반듯한 사람이니까.

서윤은 연락처 목록으로 돌아갔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입사 동기 이름을 하나 골랐다. 개발팀의 오한결. 이현과 같은 조였던 사람.

편집. 맨 아래.

'추가한 날짜: 2023년 5월 14일'.

같은 조였던 사람은 2년 뒤였다. 서윤은 다른 동기를 하나 더 열었다. 2022년. 또 하나. 2024년.

2021년 3월은 하나뿐이었다.

할머니 앨범이 떠올랐다. 강당 앞 계단. 모두가 카메라를 볼 때 혼자 옆으로 돌아간 고개. 서윤은 그때 '딴짓했네'라고 웃었다. 그 시선이 사선으로 사람들 머리 위를 건너 어디에 닿는지, 손가락으로 따라가 놓고도 그냥 웃었다.

같은 날이었다. 사진과, 번호.

그런데 머릿속 한쪽에서 편의점 파라솔 아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4조를 말했을 때, 피식 웃으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5년 전 3월에 번호를 저장한 사람이, 왜 그렇게 웃었을까. 앞뒤가 맞지 않았다. 기획서였다면 논리 오류로 반려했을 것이다. 서윤은 둘 중 하나가 틀렸다는 것만 알았다. 어느 쪽인지는 몰랐다.

서윤은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켜진 채였다. 편집 화면에는 여전히 '갑'이 저장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 차이현(공수). 편집. 맨 아래.

'추가한 날짜: 2021년 6월 11일'.

입사 석 달째. 첫 협업 회의 다음 날. 이 사람이 '이 기능은 일정상 불가'라고 적은 기획서를 들고 집에 와서, 분이 안 풀려 저장했다. 이름 뒤에 '공수'를 붙이면서.

석 달. 그녀가 이 사람의 번호를 처음 저장하기 석 달 전에, 이 사람은 이미 그녀의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밀번호.

0302.

서윤은 숨을 멈췄다. 방금 자기 손으로 누른 네 자리 숫자. 3월 2일.

우연일 수도 있었다. 생일일 수도 있었다. 이현의 생일이 언제였더라. 5년을 같은 층에서 일했는데 서윤은 그것도 몰랐다. 이 사람은 그녀의 시럽 비율과 얼음 양과 빨대 씹는 버릇과 고사리와 콩송편을 알았는데.

"서윤 씨."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돌아오고 있었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저장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연락처 목록으로 돌아갔다. 목록 맨 위에, 기호와 한글 사이 어딘가에 새 이름이 떠 있었다.

'갑'.

이현이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을 봤다.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일자가 아니었다. 전혀.

"……이거 서윤 씨가 한 거죠."

"장난이에요. 원래대로 돌려도 돼요."

"안 돌릴 건데요."

"……글꼴도 줄여 놨어요. 할머니 보시기에 조금 작을 수도 있어요."

"감사합니다."

이현이 사이다를 한 모금 마셨다. 고깃집 안은 시끄러웠다. 팀장이 건배사를 하고 있었고, 민지가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누구도 테이블 이쪽 끝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서윤은 사이다 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물어볼까. 묻지 말까. 기획자의 머릿속에서 슬라이드가 마구 넘어갔다. 물으면. 대답이 '연기'라면. 대답이 '연기가 아니'라면. 그리고 제4조.

결국 입이 먼저 움직였다. 맥주 반 잔 탓이었다.

"차이현 씨."

"네."

"추석 때 이모들한테. 입사 첫날 번호 저장했다고 한 거요."

이현의 손이 사이다 잔 위에서 멈췄다.

"그거, 연기였죠?"

이현이 서윤을 봤다. 고깃집의 소음이 멀어졌다. 서윤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봤다. 첫 글자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ㅇ'인지 'ㄱ'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화면에 발신지가 떠 있었다. '파란등대 스튜디오'.

이현이 화면을 봤다. 표정이 잠깐 굳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일어났다.

"잠깐만요. 이건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고깃집 밖으로 나갔다. 유리문 너머로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통화는 이십 분 동안 이어졌다. 서윤은 그동안 사이다를 두 잔 마셨다. 탄산이 목을 찔렀다. 유리문 너머의 뒷모습은 한 번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5년 동안 회의실에서 늘 서윤을 향해 있던 사람이었다.

돌아온 이현은 서윤 옆에 앉았다. 서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이다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스카우트 제안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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