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을은 예외)
(괄호 안 네 글자는 을의 글씨다. 갑은 석 달 동안 그걸 접힌 주름인 줄 알았다.)
맨눈으로는 읽을 수 없었다.
서윤은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냅킨을 스탠드 아래에 펴 놓고 화면을 최대로 확대했다. 추석 밤 작은방에서 이현이 사진첩을 확대하던 것과 똑같은 손짓이라는 건,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초점이 흔들렸다가 잡혔다.
괄호. 그 안에 네 글자.
(을은 예외)
볼펜 잉크가 거의 날아가 있었다. 첫날 밤 파라솔 아래, 맥주 캔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이 자리를 적셨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글씨는 반듯했다. 오해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람 글씨였다.
서윤은 기억을 되감았다. 편의점. 땅콩 봉지. 그녀가 '갑 정서윤'이라고 쓰고 볼펜을 넘겼다. 이현이 '을 차이현'이라고 썼다. 글씨가 의외로 반듯했다. 그녀는 그 서명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냅킨을 반으로 곱게 접어 내밀었다.
접기 전에, 볼펜이 한 번 더 움직였을까. 서명을 하면서, 손목만 살짝 옮겨서.
"을은 예외."
소리 내어 읽어 봤다. 방이 조용해서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기획자는 문장을 두 번 읽는다. 쓴 사람이 의도한 뜻과, 읽는 사람이 받아들일 뜻. 서윤은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적었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해석 A. 을은 이 조항에서 제외. 을은 빠질 일이 없으니까. 애초에 해당 사항 없음.
해석 B. 을이 빠져도 계약은 깨지지 않는다. 을은 빠져도 계속 옆에 있겠다.
B를 적고 나서 서윤은 한참 화면을 봤다. B라면. B가 맞다면, 그건 서명하던 그 순간 이 사람이 이미.
그녀는 B 밑에 근거를 적었다.
번호 저장일 2021년 3월 2일. 비밀번호 0302. 단체사진의 시선.
그리고 A 밑에도 적었다.
제4조를 말했을 때의 웃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질투냐고 물었을 때, '계약 관리예요.' 스카우트 얘기에 '상관없네요.' 인수인계 문서. 매직 네 자루. '제가 없어도 쓰실 수 있게요.'
B의 근거는 전부 5년 전이었다. A의 근거는 전부 요즘이었다.
사람은 변한다. 기획서도 버전이 올라간다. 5년 전 3월에 번호를 저장한 이유가 무엇이었든, 지금의 이 사람은 부산 지도를 보고 있었다. 지금의 이 사람은 괄호 안에 자기를 빼 두었다.
서윤은 메모장을 닫았다. B를 믿고 싶었다. 믿고 싶은 걸 믿는 건 기획자가 제일 먼저 버리는 습관이었다. 유저가 이렇게 느낄 거라는 얘기지, 내가 원하는 얘기가 아니다. 5년 전 그 강당에서 그녀가 직접 한 말이었다.
냅킨을 접었다. 모서리를 두 번. 오늘은 반듯하게 접히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은 묻기로 했다. 그게 공정했다. 반박도 듣지 않고 기획서를 반려하는 건, 5년 동안 이현이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묻는 문장을 메모장에 적어 봤다.
'냅킨에 을은 예외라고 쓴 거, 무슨 뜻이에요?'
너무 직접적이었다. 지웠다.
'혹시 냅킨에 뭐 더 쓰셨어요?'
모르는 척하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지웠다.
'차이현 씨는 제4조에 해당 없어요?'
이건 거의 고백이었다. 서윤은 휴대폰을 이불 위에 던졌다. 기획서 한 장은 삼십 분이면 쓰는 사람이, 질문 한 줄을 한 시간째 못 쓰고 있었다.
결국 메모장에는 한 단어만 남았다. '내일'.
다음 날 아침, 서윤은 여덟 시에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상계단 문을 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아래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차이현입니다."
서윤은 계단 난간에서 멈췄다. 한 층 아래, 층계참. 이현의 뒤통수가 보였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네, 조건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돌아가야 했다. 남의 통화를 듣는 건 반칙이었다. 추석 전 탕비실에서 그가 그녀의 알림을 봤을 때, 그녀가 먼저 '남의 폰을 봐요?' 하고 쏘아붙였다. 서윤은 발을 뒤로 뺐다. 계단이 삐걱거리지 않게.
"답은 설 지나고 드려도 될까요."
발이 멈췄다.
"지금 맡은 게 설까지라서요. 그리고 그 전에……." 이현이 잠깐 말을 끊었다. 층계참의 창밖을 보는 것 같았다. "정리할 게 하나 있어서요."
서윤은 난간을 쥐었다. 쇠가 차가웠다.
"네. 설 끝나면 다 정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숨을 쉬었다. 길게. 그리고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윤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소리 없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책상 위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할머니: 손주며느리 설에 떡국 떡 뽑앗다]
[할머니: 두 되]
두 되. 둘이 먹을 만큼이라는 뜻이었다. 서윤은 휴대폰을 엎었다. 엎은 채로 한참 손바닥을 그 위에 얹어 두었다.
설까지. 정리할 게 하나. 설 끝나면 다 정리하고.
제5조가 끝나는 날이었다. 설 연휴 마지막 날 자정.
그러니까, 계약이 끝나면 정리하고 떠난다. 정리할 '하나'가 무엇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설에 할머니 떡국을 먹고, 솔뫼리에 인사를 가고, 자정이 지나면 양가에 '성격 차이'를 통보하고, 부산으로.
깔끔한 설계였다. 이 사람은 늘 그랬다. 깨지는 걸 미리 말하고, 끝나는 걸 미리 준비했다. 인수인계 문서처럼. 매직 네 자루처럼.
해석 A.
서윤은 서랍을 열었다. 매직 네 자루가 들어 있었다. 검정을 꺼냈다. 출근길에 산 아이스 바닐라라떼 컵을 돌려, 옆면에 적었다.
'시럽 1/2, 얼음 조금'.
삐뚤었다. 그래도 읽을 수는 있었다.
여덟 시 반, 민지가 출근했다. 코트를 벗다가 서윤의 컵을 봤다.
"어? 선배 오늘 커피 직접 샀어요?"
"응."
"글씨도 직접 쓰셨네요? 차 선임님 글씨 아닌데."
"응. 매직 선물 받았거든."
"오,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차 선임님이 매직을?" 민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로맨틱한 거 맞죠, 그거?"
"실용적인 거지."
아홉 시 오 분 전, 이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손에 컵 두 개. 하나는 그가 크리스마스에 받은 남색 텀블러였다. 뚜껑의 '뜨거운 거, 식혀서'가 형광등에 반짝였다. 다른 하나는 종이컵. 옆면에 반듯한 글씨.
그는 늘 하던 대로 서윤의 책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멈췄다.
서윤의 책상 위에 이미 컵이 하나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시럽 1/2, 얼음 조금'.
"……사 오셨어요?"
"네. 오늘은 제가 샀어요."
"말씀하시지."
"매직 쓰라고 주셨잖아요. 써 봐야죠. 선물인데."
이현은 손에 든 종이컵을 내려다봤다. 잠깐, 아주 잠깐, 그 컵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5년 동안 회의실에서 한 번도 망설이는 걸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이건." 그가 말했다.
"민지 주세요. 민지 라떼 좋아해요."
"저요?" 민지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이현은 민지의 책상에 컵을 내려놓았다. "시럽 반이에요. 괜찮으면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현이 개발팀 쪽으로 돌아갔다. 걸음은 평소와 같았다. 반듯했다. 너무 반듯했다.
민지가 받은 컵을 들고 서윤을 봤다. 그리고 서윤의 컵을 봤다. 두 컵에 적힌 문장은 토씨 하나까지 똑같았다. 글씨만 달랐다. 하나는 반듯하고, 하나는 삐뚤었다.
"선배." 민지가 속삭였다. "무슨 일 있어요?"
"없어."
서윤은 자기 컵의 빨대를 물었다. 씹지 않았다. 씹으면 들킬 것 같았다.
점심때 민지가 까치 테스트 버전을 들고 왔다. 유저마다 까치 색이 무작위로 배정되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선배도 한 번 해 봐요. 편지 쓰면 까치 색 나와요."
서윤은 아무렇게나 한 줄을 쓰고 전송을 눌렀다. 까치가 날아올랐다. 회색이었다.
"……회색도 있었어?"
"열두 번째 색이요. 차 선임님이 마지막에 넣으셨어요. '기분 안 좋은 날 쓰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래요."
서윤은 회색 까치가 화면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걸 끝까지 봤다. 편지를 물고, 느리게. 날개가 다른 색보다 조금 더 천천히 접혔다. 그건 버그가 아니라 설계 같았다.
오후 세 시, 메신저가 울렸다.
[차이현: 오늘 저녁 시간 돼요?]
[차이현: 할 말이 있어요.]
서윤은 그 두 줄을 오래 봤다. 할 말. 아침에 비상계단에서 들은 목소리가 다시 재생됐다. 설 끝나면 다 정리하고.
정리를 설까지 미루지 않기로 한 걸까. 아니면 설에 할머니 앞에서 들킬까 봐 미리 입을 맞춰 두려는 걸까. 헤어지는 날의 대본을.
어느 쪽이든, 오늘은 듣고 싶지 않았다.
[정서윤: 오늘은 야근이에요. 까치 문구 검수.]
[차이현: 그럼 기다릴게요.]
[정서윤: 늦게 끝나요. 먼저 가세요.]
한참 뒤에 답이 왔다.
[차이현: 네.]
한 글자였다. 5년 동안 회의록에서 수백 번 본 대답이었다. 그런데 메신저 창 안에서는 처음 보는 글자처럼 짧았다.
서윤은 그날 밤 열한 시까지 문구를 검수했다. 검수할 문구는 여덟 시에 이미 끝나 있었다. 사무실 불이 하나씩 꺼졌다. 개발팀 쪽 마지막 불은 열 시 반에 꺼졌다. 그녀는 그 불이 꺼지는 걸 모니터 너머로 봤다. 먼저 가라는 말에 네, 라고 해 놓고 열 시 반까지 남아 있었다는 뜻인지, 그냥 일이 많았다는 뜻인지. 서윤은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해석이 너무 많았다.
계약이니까. 설까지니까. 끝나는 날을 아는 사람들은 미리 거리를 재 두는 거라고, 그녀는 자기 컵의 삐뚤어진 글씨를 보며 생각했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커피가 오가지 않은 날이었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