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제1조. 정서윤과 차이현은 서로에게 계속 빠진다.
(연애 기획서 v1.0. 적용 범위에 고속도로가 포함되는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설 연휴 셋째 날 아침, 솔뫼리 대문 앞은 추석보다 붐볐다.
엄마는 남색 흰꽃 보자기를 두 개 쌌다. 하나는 서윤 몫, 하나는 이현 몫. 이현 몫이 더 무거웠다.
"이건 김치. 이건 전. 이건 식혜. 병 뚜껑 꽉 닫았다."
"엄마, 서윤 거보다 이현 씨 게 더 커."
"너는 사 먹잖아. 이현이는 해 먹어."
틀린 말이 아니라서 서윤은 반박하지 않았다.
큰이모는 고추장 한 통을 따로 챙겨 줬다. 지장 찍고 남은 그 종지의 친척이었다. 둘째 이모는 서윤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다가 이현의 목을 힐끗 보더니, 목도리를 하나 더 가져왔다. 막내 이모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대신 이현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폰."
이현이 휴대폰을 건넸다. 막내 이모는 뭔가를 한참 두드리더니 돌려줬다.
"내 번호 저장했다. 서윤이가 딴소리하면 연락해."
"……저장명은 뭐로 하셨어요?"
"막내 이모. 그리고 괄호 치고 '주선 실패'."
이현이 웃음을 참았다. 서윤은 참지 못했다.
아빠는 트렁크에 막걸리 두 병을 조용히 실었다. 그리고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이현이 창문을 내리자, 아빠가 몸을 숙였다.
"다음 추석에."
"네."
"화투. 계산하지 말고."
"네. 이길 때는 이기겠습니다."
"그래야지." 아빠가 창틀을 두 번 두드렸다. 그게 아빠식 포옹이었다.
차가 출발하자 복실이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백 미터쯤 달려오다가 멈춰 서서 한참 꼬리를 흔들었다. 사이드미러 속에서 점이 될 때까지.
"복실이가 이현 씨를 더 좋아해요."
"배 보여 준 사람한테만 그래요. 저도 배 보여 준 적 없는데."
"그건 다행이에요."
뒷좌석에서 할머니가 끌끌 웃었다. "둘이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청매골까지는 한 시간 반이었다. 할머니는 출발 십 분 만에 잠이 들었다. 분홍 보자기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창 쪽으로 기대고. 조용해지자 차 안에 히터 소리만 남았다.
서윤은 컵홀더의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거의 녹았다. 그래도 시럽 반의 맛은 그대로였다.
"어제 그거요." 서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우산 얘기. 처음 들었죠."
"네."
"어떻게 생각해요."
이현은 한동안 앞만 봤다. 트럭 한 대를 추월했다. 그리고 차선을 다시 바꾸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날 제가 어깨가 젖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좀 억울했거든요. 우산을 제일 작은 걸로 골랐으니까."
"그거 이현 씨가 일부러 고른 거잖아요."
"그래서 억울했죠. 근데 그 작은 우산 덕에 넘어오셨다니까." 이현이 핸들을 쥔 손가락을 한 번 폈다 쥐었다. "앞으로 우산은 무조건 제일 작은 걸로 살게요."
"비 오는 날마다 젖으려고요?"
"왼쪽만요. 오른쪽은 서윤 씨 쪽이라."
서윤은 창밖을 봤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들키기 싫어서. 유리창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소용없었다.
청매골에 도착하니 이현의 어머니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은 끼고 있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다 들었다."
"……누구한테요?"
"어머님이 어젯밤에 전화하셨어. 한 시간." 어머니가 잠이 덜 깬 할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냅킨이랑 고추장이랑 괄호랑 다 들었어. 우리 아들이 몰래 괄호를 썼다며."
이현이 트렁크 문을 열다 멈췄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방에 모셔 드리고 돌아와서, 서윤의 두 손을 잡았다. 청매골 첫 방문 때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잡았다.
"미안해. 우리 애가 좀 치사하지."
"아뇨, 어머님. 저도 가짜였으니까 비긴 거예요."
"비겼어?" 어머니가 이현을 돌아봤다. "너 여자랑 비겼대. 싸워서."
"비긴 게 아니라 제가 진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어머니가 서윤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트렁크에 분홍 보자기를 하나 더 실었다. 엄마의 남색 보자기 두 개 옆에 분홍 하나. 트렁크가 명절 색으로 꽉 찼다.
"서윤아." 어머니가 차 문을 닫아 주며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다음 달쯤 내가 서울 한번 갈게."
"아, 네. 오시면 제가 맛있는 거……."
"아니, 밥 말고." 어머니가 차창 너머로 이현을 가리켰다. "이놈 집 검사하러. 너무 반듯하게 사는 거 아닌지. 사람 사는 집 같은지. 너도 같이 봐 줘."
"……네?"
"같이 봐 줘. 우리 편 해 줘야지."
차가 청매골을 빠져나오는 동안 서윤은 창문에 이마를 댔다. 동맹이 하나 더 생겼다. 이번엔 이현 편이 아니었다.
둘만 남은 차 안은 이상하게 넓었다. 뒷좌석에 할머니가 없으니 뒤를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옆만 신경 쓰였다.
서윤은 이현의 휴대폰을 봤다. 거치대에 꽂혀 내비게이션을 띄우고 있었다. 어제 그 알림. '내년 추석'. 제목 없는 일정.
"네비 제가 볼게요." 서윤이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길 알아요."
"경로 바꾸면 더 빠를 수도 있잖아요."
"안 빨라요. 확인했어요."
"달력 앱이 네비랑 연동돼 있을 수도 있고요."
이현이 한 손으로 휴대폰을 거치대에서 뽑아 자기 쪽 문 주머니에 넣었다. 운전하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네비 없이 가요?"
"길 알아요. 9년째 명절마다 다녔어요."
"그럼 아까는 왜 켰어요."
"서윤 씨가 불안해할까 봐요."
"지금 불안해요."
"그건 다른 이유로 불안한 거잖아요."
서윤은 팔짱을 꼈다. 막내 이모처럼. 이현은 그걸 곁눈으로 보더니 웃음을 삼켰다. 5년 동안 회의실에서 그녀가 팔짱을 끼면 그는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지금은 덮을 노트북이 없어서, 대신 라디오를 켰다.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둘 다 아는 노래였다. 둘 다 따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둘 다 손가락으로 박자를 탔다. 서윤은 무릎 위에서, 이현은 핸들 위에서.
같은 박자였다. 서윤은 그걸 알아채고 손가락을 멈췄다. 이현도 멈췄다. 또 동시였다.
"……따라 하지 마요."
"서윤 씨가 제 박자 따라 한 거예요."
"제가 먼저 시작했어요."
"확인할 방법이 없네요."
"그러니까 그냥 제가 먼저라고 해요."
"부칙은 이제 없어서요. 져 드릴 근거가 없어요."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차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추석 귀경길보다는 나았다. 두 시간쯤 달려서 휴게소에 들렀다.
호두과자 줄은 똑같이 길었다. 이현이 줄을 섰고, 서윤은 옆에 섰다. 추석에는 서윤이 화장실 줄에 선 사이 이현이 혼자 사 왔다. 이번엔 같이 줄을 섰다.
"몇 개 살까요?" 이현이 물었다.
"큰 거요."
"큰 거 드시면 저녁 못 드시잖아요."
"저녁은 이현 씨가 해 줄 거잖아요."
말하고 나서야 서윤은 멈췄다. 이현도 멈췄다. 호두과자를 굽던 직원만 멈추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녁 해 줄 거잖아요."
"그 앞에요."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5년 동안 '차이현 씨'였다. 회의실에서도, 메신저에서도, 파라솔 아래에서도. 성까지 붙여야 싸움이 성립하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방금 성이 빠졌다. 호두과자 줄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이현 씨요." 서윤이 말했다. 이번엔 일부러. "왜요. 안 돼요?"
이현은 대답 대신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직원에게 말했다.
"큰 거 두 봉지 주세요."
"한 봉지면 되잖아요."
"기념이에요."
"뭐 기념이요."
"성 빠진 기념이요. 5년 11개월 만에."
"그것도 세요?"
"방금부터 세요."
차에 돌아와서 서윤은 호두과자 봉지 두 개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따뜻했다. 하나를 꺼내 반으로 갈라 이현 입 앞에 내밀었다. 운전 중이라 손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현은 잠깐 망설이더니 받아먹었다. 그리고 앞만 보며 씹었다. 너무 반듯하게.
"뜨거워요?"
"……아뇨. 적당해요."
"귀가 빨간데요."
"히터 때문이에요." 휴대폰이 쉬지 않고 울렸다. 가족 단톡방이었다.
[큰이모 님이 방 이름을 '정씨네 명절 준비위원회(사돈 포함)'로 변경했습니다.]
[큰이모 님이 할머니 님을 초대했습니다.]
[큰이모 님이 청매골 어머님 님을 초대했습니다.]
[할머니: 반갑다]
[할머니: 다들 떡국 먹엇나]
[둘째 이모: 사돈 어른 환영합니다. 인원 16명 됐습니다.]
[막내 이모: 어머님 혹시 약사 선 명단 아직 갖고 계세요? 저 치과 명단 있는데 교환하실래요]
[청매골 어머님: 이제 필요 없어서 찢으려고요]
[막내 이모: 저도요]
[아빠: 막걸리]
아빠는 단어 하나만 보냈다. 누구도 그 뜻을 묻지 않았다. 다들 알았다. 조심해서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날 때쯤 서윤의 휴대폰에 다른 알림이 떴다. 가족 단톡방이 아니었다. 민지였다.
[민지: 선배 설 잘 보내셨어요?]
[민지: 근데 급한 거]
[민지: 씨름 방 공지 바뀜]
캡처가 한 장 따라왔다. 방장의 공지였다. 방장이 누군지 이제는 전 직원이 알았지만, 방장은 여전히 공지에 서명하지 않았다.
[속보. 연휴 끝나고 첫 출근일, 인사팀 고 과장님이 12층 방문 예정. 손에 든 것: 사내 연애 신고서 두 장.]
서윤은 화면을 이현 쪽으로 돌렸다. 이현은 앞을 보며 운전하다가 신호에 멈춰서 화면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신고서는 누가 먼저 써요?"
"그걸 왜 지금 싸워요."
"신고하는 순서가 교제 순서가 되니까요." 이현이 액셀을 밟았다. "저는 2021년 3월 2일로 쓸 거예요."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