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사내 연애 신고서 제4항. 교제 시작일을 기재하시오.
(인사팀 양식. 칸 크기는 날짜 하나가 들어갈 만큼이다. 딱 하나.)
연휴가 끝난 첫 출근일, 12층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서윤이 자리에 앉자 사방에서 키보드 소리가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시작됐다. 아무도 서윤을 보지 않았다. 모두가 서윤을 보고 있었다.
"선배." 민지가 의자를 굴려 왔다. "고 과장님 열 시에 오신대요."
"알아."
"긴장되세요?"
"신고서잖아. 기획서도 아니고."
"선배, 기획서는 반려돼도 다시 쓰면 되지만요." 민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연애 신고서가 반려되면, 씨름 방이 일주일은 떠들어요."
서윤은 모니터를 켰다. 메신저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차이현: 출근했습니다. 커피 책상에 뒀어요.]
서윤은 책상을 봤다. 아이스 바닐라라떼가 있었다. 뚜껑 옆에 반듯한 글씨. '시럽 1/2, 얼음 조금'.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
'신고서는 제가 먼저 냅니다.'
서윤은 매직을 꺼냈다. 컵 옆면 빈 곳에 적었다. '안 돼요.' 그리고 컵 사진을 찍어 보냈다.
[차이현: 커피에 답장하지 마세요. 증거 남아요.]
[정서윤: 증거 남기려고 한 거예요.]
열 시 정각에 인사팀 고 과장이 12층에 나타났다. 워크숍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진첩을 만들던 그 과장이었다. 손에는 서류 봉투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씨름 방의 속보는 틀리지 않았다.
고 과장은 서윤의 자리에 먼저 왔다.
"정 선임님.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인사팀 권고 양식이에요. 강제는 아니고요. 같은 팀에서 교제하시는 분들 평가 공정성 확인용입니다. 연애를 막는 게 아니라, 나중에 서로 곤란하지 않게 하려는 거예요."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제목은 '사내 교제 신고서(권고)'. 항목은 다섯 개였다. 성명, 소속, 상대방, 교제 시작일, 비고.
"두 분 각자 따로 쓰시고, 금요일까지 인사팀으로 주세요. 따로요. 상의하지 마시고요."
"상의하면 안 돼요?"
"상의하면 날짜가 같아지잖아요." 고 과장이 사람 좋게 웃었다. "따로 써도 같으면, 그게 제일 좋은 거죠."
고 과장은 이현의 자리로 가서 똑같이 봉투를 건넸다. 이현은 받자마자 펜을 들었다. 고 과장이 황급히 말렸다. "차 선임님, 지금 말고요. 천천히요."
"천천히 할 게 없어서요."
씨름 방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서윤은 민지 쪽을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열한 시에는 까치 설 이벤트 결과 보고 회의가 있었다.
결과는 좋았다. 편지 작성 수가 추석 달토끼의 두 배였다. 색 개인화를 쓴 유저가 70퍼센트였다. 회색 까치를 고른 유저가 생각보다 많았다. 팀장이 슬라이드를 넘기며 흡족해했다.
"그래서 2차 업데이트. 색 추가. 정 선임, 몇 개 넣을 거야?"
"하나요." 서윤이 말했다. "열세 번째 색. 아이보리 계열이요. 흰색이랑은 달라요. 조금 누렇고, 따뜻하고, 오래된 종이 같은 색이요."
"좋네. 차 선임, 공수는?"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5년 동안 서윤이 말할 때만 하던 그 동작이었다. 이제는 회의실의 모두가 그 뜻을 알았다. 개발팀 막내가 커피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공수는 문제없어요. 색 코드 하나니까요. 다만 이름이 필요해요. 유저한테 보여 줄 색 이름이요."
"아이보리요."
"아이보리는 너무 흔해요. 다른 게임에도 다 있어요."
"그럼 차이현 씨 대안은요?"
이현이 아주 잠깐 서윤을 봤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냅킨색이요."
회의실의 공기가 멈췄다.
민지가 테이블 밑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팀장이 기침을 했다. 개발팀 막내 둘이 서로를 봤다. 디자인팀 신입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냅킨 사건은 씨름 방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방장도 몰랐다. 아는 사람은 이 회의실에 딱 둘이었다.
서윤은 이현을 노려봤다. 이현은 태연하게 화면을 봤다. 귀만 빨갰다.
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탁.
"……냅킨색은 유저가 무슨 색인지 몰라요."
"편의점 가면 다 알아요."
"편의점마다 냅킨 색이 달라요."
"회사 앞 편의점 기준으로요."
"그게 무슨 기준이에요."
"제일 가까운 기준이요."
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늘 하던 대로. 그런데 손이 조금 떨렸다. 웃음을 참느라.
"자, 자. 색 이름은 유저 투표로 가자. 후보 두 개. 아이보리, 냅킨색. 됐지?"
"네."
"네."
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테이블 밑에서 서윤의 운동화 코가 이현의 구두 코를 한 번 툭 찼다. 이현의 구두가 한 번 툭 되받았다.
회의가 끝나고 씨름 방 공지가 올라왔다.
[시즌2 연애 편 제1회: 냅킨색. 방장도 뜻을 모른다. 제보 바람.]
[민지: 방장님도 모르시면 끝난 거 아니에요?]
[개발팀 막내: 편의점 냅킨 색 조사해 왔습니다. 회사 앞 편의점은 아이보리 맞습니다.]
[방장: 수고했다. 그래서 무슨 뜻인데]
[개발팀 막내: 모릅니다]
서윤은 휴대폰을 엎었다. 옆자리에서 민지가 서윤의 지갑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지난가을, 서윤이 '냅킨 영수증'이라며 영수증 사이에 밀어 넣던 그 종이를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민지는 촉이 좋았고, 기억력은 더 좋았다.
"선배, 혹시 냅킨 영수증이……."
"몰라."
"아직 말 안 끝났는데요."
"그래도 몰라."
점심은 각자 먹었다. 신고서 때문이었다. 고 과장이 상의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둘 다 규칙에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서윤은 민지와 국숫집에 갔고, 이현은 개발팀과 구내식당에 갔다. 떨어져 앉아도 메신저는 울렸다.
[차이현: 국수 맛있어요?]
[정서윤: 상의 금지예요.]
[차이현: 국수는 신고서 항목이 아니에요.]
[정서윤: 국수 먹다가 날짜 얘기 나올 수 있잖아요.]
[차이현: 그럼 날짜 얘기만 빼고 해요.]
[정서윤: 날짜 말고 할 얘기가 없어요 지금.]
[차이현: 저는 많은데요.]
[차이현: 국물 흘리지 마세요. 흰 셔츠잖아요.]
서윤은 셔츠를 내려다봤다. 오늘 흰 셔츠를 입었다는 걸 그녀는 까먹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침에 커피 한 잔 놓고 가면서 그걸 봤다.
오후 세 시, 서윤은 신고서를 펼쳤다. 성명, 소속, 상대방까지는 쉬웠다. 볼펜이 교제 시작일 칸에서 멈췄다.
추석을 앞둔 그 주의 밤. 편의점. 냅킨. 그건 계약 시작일이었다. 가짜였다. 가짜를 인사팀에 낼 수는 없었다.
그럼 1월. 영하 오 도의 파라솔. 계약을 파기한 날. 가지 마요, 라고 말한 날. 좋아해요, 를 들은 날.
그게 맞았다. 쌍방이 된 날. 서윤은 반듯하지 않은 글씨로 적었다.
'1월 22일.'
그리고 신고서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를 닫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기획자는 근거가 있어야 날짜를 정한다. 근거는 충분했다.
퇴근 무렵 탕비실에서 이현을 만났다. 이현은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받고 있었다. 달토끼 머그컵이었다.
"쓰셨어요?" 이현이 물었다.
"상의 금지예요."
"썼는지만 물어본 거예요."
"썼어요. 이현 씨는요?"
"아침에 냈어요. 고 과장님 오시자마자."
"……벌써요?"
"천천히 할 게 없었다니까요."
서윤은 커피 머신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웅웅거렸다. 그 소리를 틈타 물었다. 규칙 위반인 걸 알면서.
"뭐라고 썼어요."
이현은 머그컵을 들고 김을 한 번 불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스펙을 읽는 목소리로.
"2021년 3월 2일이요."
서윤은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건 교제가 아니잖아요. 짝사랑이잖아요."
"교제의 정의가 뭔데요."
"쌍방이요."
"그럼 추석은요? 계약도 쌍방이었는데요."
"그건 가짜잖아요."
"가짜는 서윤 씨 쪽만이었다고 청문회에서 확정됐는데요. 고추장 지장까지 찍었고요."
"그건 가족 합의지 인사팀 합의가 아니에요."
"그럼 서윤 씨는 뭐라고 썼는데요."
"상의 금지예요."
"방금 제 날짜는 물어보셨잖아요."
"그건 확인이에요. 상의가 아니라."
"그럼 저도 확인만 할게요. 1월이죠."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게 대답이었다. 이현이 머그컵 너머로 작게 웃었다.
그때 탕비실 문이 열렸다. 고 과장이었다. 손에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침에 이현이 낸 봉투였다. 그리고 그 뒤로, 방금 서윤이 인사팀 우편함에 넣고 온 봉투도.
"아, 두 분 다 여기 계셨네요." 고 과장이 난처하게 웃었다. "이거 제가 둘 다 봤는데요."
"……네."
"날짜가 달라요.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6년 가까이 차이가 나요." 고 과장이 봉투 두 개를 둘에게 하나씩 돌려줬다. "그리고 제가 듣기로 공식 발표는 '작년 여름휴가 끝나고'였는데요. 두 분 다 여름이 아니시네요?"
서윤과 이현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11월 말, 화면 공유 사고 직후 팀장 앞에서 급히 꺼낸 설정이었다. 그 설정은 파라솔에서 계약과 함께 파기됐다. 인사팀에 통보하는 걸 잊었을 뿐.
"두 분 날짜가 다르면 반려입니다." 고 과장이 친절하게 웃었다. "금요일까지 하나로 맞춰 오세요. 근거도 같이요."
고 과장이 나가자 탕비실에 커피 머신 소리만 남았다. 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현의 휴대폰도 울렸다. 씨름 방이었다.
[긴급 투표. 두 분의 교제 시작일은? ① 작년 여름휴가 후(공식 발표) ② 공식 발표는 거짓말이었다 ③ 냅킨과 관련 있다]
[민지: 3번에 커피 쿠폰 다섯 장 겁니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