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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솔뫼리 부속 합의서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39:55

솔뫼리 부속 합의서 제1조. 가짜로 시작한 죄는 명절로 갚는다.

(작성: 큰이모. 용지: 1월 달력 뒷면. 인주가 없어서 고추장.)

"청매골서부터요?"

서윤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작은방 문이 다시 빼꼼 열렸다.

할머니는 서두르지 않았다. 식혜 잔을 밥상에 내려놓고, 치마 무릎을 한 번 쓸고, 그다음에 말했다.

"사진 때문이다."

"사진이요?"

"니가 처음 보낸 사진." 할머니가 이현을 가리켰다. "둘이 증명사진 찍듯 서 있는 사진. 사귀는 놈들이 그렇게 서 있나. 계약하는 놈들이 그렇게 서 있지."

이현이 눈을 감았다. 서윤은 그 사진을 기억했다. 뒷골목 카페의 노란 조명 아래, 증명사진처럼 굳은 두 사람이 사업 파트너처럼 나란히 선 첫 장. 이현이 제일 자연스럽다며 할머니한테 보낸, 망한 사진.

"그래서 청매골 오라 했지. 눈으로 볼라고."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와서 보니까 확실하더라. 가짜다. 손을 잡긴 잡는데, 대문 앞에서 잡았다가 마루 올라오면서 놓을 궁리를 하더라고. 둘 다."

서윤은 할 말이 없었다. 정확했다.

"근데." 할머니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정자 가는 길 모퉁이에서 이상하더라. 가짜는 모퉁이 돌면 손 놓는다. 아무도 안 보니까. 근데 안 놓대. 둘 다 안 놓고 걸어가더라."

큰이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이모는 수첩에 '모퉁이'라고 적고 밑줄을 그었다.

"그래서 알았지. 아, 가짜로 시작했는데 진짜 되는 중이구나. 그럼 됐다. 가만 두면 된다." 할머니가 식혜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앨범 보니까 이놈은 처음부터 진짜였고."

"……할머니, 그럼 여태 알면서 모른 척하셨어요?"

"손주며느리 곱다고 문자 보낸 거는 진짜다." 할머니가 서윤을 봤다. "가짜한테 그런 문자 안 보낸다. 나는 받침은 틀려도 사람은 안 틀린다."

엄마가 부엌 문턱에서 코를 훌쩍였다. 아빠는 막걸리 잔을 할머니 쪽으로 밀었다. "사돈 어른, 한 잔 더 하시지요."

"점심 먹고. 판결 보고."

점심은 떡국이었다. 아무도 판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서윤은 떡국 떡을 하나씩 셌다. 스물세 개째에서 이현이 자기 그릇의 동그랑땡 하나를 서윤 그릇으로 옮겼다.

"긴장하면 단백질이요."

"그런 말 누가 했어요."

"방금 생겼어요."

둘째 이모가 숟가락을 든 채 수첩에 한 줄을 추가했다.

상을 물리자 큰이모가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 냈다. 읍내 정미소에서 나눠 준 달력이었다. 이미 지나간 1월 장을 부욱 찢었다. 뒷면이 하얬다.

"판결 대신 합의로 한다. 우리 집은 원래 그렇다."

큰이모가 볼펜을 들었다. 달력 뒷면 맨 위에 크게 적었다.

'솔뫼리 부속 합의서'

"부속이요?" 서윤이 물었다.

"너네 새 계약서 있다며. 거기 붙는 거다. 본계약은 너네가 쓰고, 우리는 부속만 쓴다. 우리가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이현이 작게 감탄했다. "구조가 좋네요."

"칭찬하지 마요. 조항 나오면 후회해요."

큰이모가 제1조를 적었다.

"제1조. 가짜로 시작한 죄는 명절로 갚는다. 추석과 설에는 둘이 솔뫼리로 온다."

"청매골은요?" 할머니가 물었다.

큰이모가 잠깐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청매골 포함. 동선은 을이 짠다.'

"을은 예외 아니었어요?" 서윤이 이현에게 속삭였다.

"동선은 제 전문이라서요."

"제2조는 나." 둘째 이모가 손을 들었다. "동그랑땡 반죽은 서윤이, 뒤집기는 이현이. 추석 때 보니까 이 사람이 뒤집는 게 모양이 더 좋더라. 서윤이는 반죽을 잘 치대. 힘이 좋아."

"이모, 그게 칭찬이에요?"

"관찰이다."

"제3조." 큰이모가 이어 받았다. "경조사는 둘이 같이 간다. 누구 결혼식이든 돌잔치든. 하나만 오면 둘째가 반드시 물어본다."

"물어본다." 둘째 이모가 확인했다.

"제4조는 사돈 어른 쪽 요청으로." 큰이모가 할머니를 봤다.

"화투에서 져 주는 거 금지." 할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추석 때 이놈이 사돈네서 계산해서 져 줬다며. 그거 우리 집안 망신이다. 이길 때는 이겨라."

이현이 입을 열려다 닫았다. 아빠가 옆에서 드물게 크게 웃었다. "그럼 제가 이제 못 이기겠네요."

"못 이긴다. 우리 손주는 계산하는 놈이다."

"할머니 저 윷놀이 졌잖아요."

"그건 내가 이긴 거지 니가 진 게 아니다."

그리고 막내 이모 차례였다. 막내 이모는 청문회 내내 제일 분해하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봤다. 그녀는 한참 달력 뒷면을 노려보다가 볼펜을 받아 들었다.

"제5조는 내가 쓴다."

그녀는 볼펜 끝으로 냅킨을 톡톡 쳤다. 밥상 한쪽에 여전히 펼쳐져 있던, 조항 네 개짜리 가짜 계약서.

"너네 이거, 기간을 써 놨지. 추석 자정까지. 그러다 설까지 늘렸고."

"네."

"그래서 가짜였던 거야. 끝을 정해 놨으니까." 막내 이모가 서윤을 똑바로 봤다. "1년 뒤 추석에, 이런 걸 새로 써 와라. 냅킨이든 뭐든. 이번엔 기간 없이."

마루가 세 번째로 조용해졌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볼이 뜨거웠다. 막걸리는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옆에서 이현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냅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1조의 번진 '자정까지'를. 오래.

"……그게 벌이에요, 이모?"

"벌이지. 나는 치과 원장을 잃었어." 막내 이모가 코를 찡그렸다. "간호사한테."

"원장님은 이모 거 아니었잖아요."

"내가 개원 화분까지 보냈어."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나도 하나. 단서다."

큰이모가 제5조 아래에 공간을 남겼다. 할머니는 볼펜을 쥐지 않고, 말로 불렀다.

"증손주는 천천히 봐도 된다. 나 오래 살란다."

이현이 기침을 했다. 크게. 서윤은 밥상 모서리만 봤다. 7년째 '증손주 보고 죽겠다'던 분의 첫 번째 철회였다. 작은방에서 누군가 "증손주가 뭐야?" 하고 물었고, 큰이모네 큰손주가 "쉿" 했다.

"자, 날인." 큰이모가 서랍을 뒤졌다. "인주가 어디 갔나."

"없어요, 언니. 작년에 복실이가 먹었잖아요." 엄마가 말했다.

큰이모는 부엌으로 가더니 종지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빨갰다.

"고추장이다. 찍어라."

"이모, 이거 문서가……."

"우리 집은 원래 이렇다."

서윤은 엄지를 고추장에 찍었다. 이현도 찍었다. 둘은 달력 뒷면 맨 아래에 나란히 지장을 눌렀다. 빨간 엄지 두 개. 서윤의 것이 조금 더 컸다. 힘이 좋아서.

이모 셋과 할머니와 엄마가 차례로 찍었다. 아빠는 막걸리 잔을 든 손으로 찍다가 번졌다. 마지막으로 큰이모가 복실이의 앞발을 들어 구석에 꾹 눌렀다. 복실이는 발을 핥았다. 맛있다는 얼굴이었다.

서윤이 고추장 묻은 엄지를 휴지로 닦고 있을 때, 막내 이모가 이현을 불렀다. 마루 끝, 신발 벗어 놓는 댓돌 앞이었다. 서윤은 부엌에서 손을 씻는 척하며 귀를 열었다.

"야, 차 서방."

서방이라는 말에 서윤은 수도꼭지를 잘못 돌려 손등에 찬물을 맞았다.

"네."

"진짜 5년이었어?"

"……네. 정확히는 5년 11개월이요."

"달까지 세냐."

"개발자라서요."

막내 이모가 한숨을 쉬었다. 길었다. 치과 원장과 개원 화분과 공짜 스케일링이 전부 들어 있는 한숨이었다.

"그 5년 동안 쟤랑 뭐 했는데."

"싸웠습니다. 회의에서요. 스물네 번 졌고, 서른한 번 이겼어요."

"그것도 세?"

"서윤 씨는 스물네 번만 세요. 자기가 이긴 것만."

부엌에서 서윤은 물을 잠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5년 동안 이긴 횟수만 셌다. 진 횟수는 셀 생각도 안 했다. 이 사람은 둘 다 세고 있었다.

"……너 바보구나." 막내 이모가 말했다.

"할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근데 그런 바보가 오래 가." 막내 이모가 이현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치과 대기실에서 나올 때보다 훨씬 약하게. "백 원장은 3주 만에 간호사한테 갔어. 너는 5년을 기다렸고. 내가 졌다. 인정."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제5조나 잘해."

막내 이모가 돌아서다 부엌 쪽을 봤다. 서윤과 눈이 마주쳤다. 막내 이모는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가 서윤을 가리켰다. 다 봤다는 뜻이었다.

"원본은 내 장롱에 둔다. 사본은 알아서 찍어 가라."

이현이 휴대폰을 꺼냈다.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사진을 확인하고 서윤에게 화면을 보여 줬다.

"사진첩 맨 위에 올라갔어요."

"새 계약서 위에요?"

"부속이니까 그 다음 칸으로 옮길게요."

서윤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고추장 지장 여덟 개와 개 발바닥 하나. 그 위에 조항 다섯 개. 그리고 사진 위로, 방금 들어온 알림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이현의 달력 앱이었다.

'일정이 추가되었습니다. 내년 추석.'

제목은 없었다. 이현이 재빨리 화면을 껐다.

"……방금 뭐예요?"

"일정이요." 이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귀가 빨갰다. "아직 공개 전이라서."

"저번에 집에서 달력 넘길 때도 그 말 했잖아요."

"그땐 진짜 공개 전이었고, 공개했잖아요. 설에."

"그럼 이것도 공개할 거예요?"

"네. 기한 내에요."

"기한이 언젠데요."

이현이 대답 대신 밥상 위를 봤다. 달력 뒷면의 제5조. 막내 이모의 크고 삐뚤빼뚤한 글씨. '1년 뒤 추석. 이번엔 기간 없이.'

서윤도 그걸 봤다. 그리고 다시 이현을 봤다. 그는 벌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복실이의 고추장 묻은 발을 물티슈로 닦아 주면서. 너무 반듯하게,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일 년. 이 사람은 공수 계산이 끝나면 절대 일정을 미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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