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여름은 병원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변백호와 먼저 한바탕 말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전까지는 변백호가 설령 자신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더라도 양혁수에게 알리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지금 보니 변백호는 확실히 양혁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변여름의 만행을 폭로할 태세였다.일이 틀어지려는 순간, 허예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름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변여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현무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변여름의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양혁수가 ‘허예나’에게 얼마나 빠져든 건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허예나와 마주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이 시점에서 허현무의 아내는 아마 유산을 독차지하는 데만 신경을 쏟고 있을 것이며 허예나 모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게 뻔했다.그러니 양혁수가 허예나를 위해 나선다면, 두 사람이 만나는 건 필연적이었다.변여름은 여러 상황을 저울질하며 물었다.[집에서 장례는 어떻게 치른대요?][큰어머니가 한강시에서 장례식하고, 유골은 화서시에 있는 선산에 묻겠다고 하세요.][그럼 큰어머니는 예나 씨와 어머님께 어떤 태도인가요? 허씨 가문에 와도 좋다고 하셨나요?]이 질문이야말로 허예나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양혁수와의 만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변여름의 계획이 중요했다.[병원에 있을 때부터 큰어머니가 우릴 대하는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원래부터 우리 모녀를 경계했으니 이번엔 재산 문제로 저를 집에 못 들어오게 막을 겁니다.]변여름은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짐 챙기세요. 어머니 짐도 챙기시고 두 시간 후에 데리러 갈 테니까 직접 가서 조문하세요.][그래도...][예나 씨 몫의 재산은 제가 챙겨줄게요. 그리고 따로 100억 더 챙겨줄 테니까 수고비라고 생각하세요.]허예나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어 바로 승낙했다.다시 핸드폰을 확인하니 변백호가 계속 메시
변여름은 사람을 시켜 허예나 모녀를 집 안으로 데려가 줬고 차에서 내리던 허예나는 걱정이 가득했다.그러나 5분 뒤, 허예나는 아주 기뻐하는 목소리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름 씨, 저 지금 들어왔는데 큰어머니가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네.”변여름은 아주 침착했다.“지금 밖으로 조용히 나오셔서 저를 마중 오세요. 다른 사람이 저에 관해 묻는다면 어머님의 도우미라고 말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밖은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뚝뚝 떨어졌고 날이 어느새 어두워졌다.허예나는 우산을 쓴 채로 변여름과 함께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허예나는 변여름을 지민영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 줬다.“여름 씨, 죄송하지만 잠시만 여기에 계세요.”변여름은 창가 자리에 서서 커튼을 살짝 든 채로 정원 쪽 상황을 살폈다. 머릿속엔 방금 들어오던 경로와 저택 구조를 되짚었다.“저는 괜찮아요. 혹시 다른 사람이 예나 씨가 이곳에 온 걸 알고 있나요?”“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얼굴을 자주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꼭 외출해야 한다면 마스크 착용하세요.”허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그전에도 늘 그래왔어요.”변여름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현정임은 정원에 작은 추모식을 마련했고 허현무의 유골함도 곧 집으로 이송이 될 것이다. 이르면 오늘 저녁, 늦으면 내일 점심까지도 추모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 것이다.변여름은 작은 방에 머물며 양혁수의 일정을 살폈다.그런데!한 시간 전에 양혁수가 벌써 일정을 바꿔 비행기에 탑승한 게 아니겠는가! 사실을 알아차린 변여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허현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허현무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까 전전긍긍하며 몰래 양혁수에게 한가득 프로젝트를 떠안겼었다. 그래서 예정대로라면 적어도 3일 뒤에나 한강시에 돌아올 수 있는 일정이었다.그러니 양혁수가 지금 돌아온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변여름은 침묵했고
[내가 뭘 어떻게 도왔으면 하는데?]변여름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 본인이 허예나가 되어 당장이라도 양혁수를 만나고 싶었다.[정말 저를 도우실 건가요?]변여름이 다시 묻자 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봐서.]변여름이 재빨리 타자하는데 양혁수가 말을 보탰다.[살인, 방화는 안 돼.]변여름은 핸드폰을 꼭 쥐었다.‘그러니까 돕는다는 거네. 살인, 방화만 아니면.’변여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계속 질문을 이었다.[벌써 저택 정원에 추모식까지 마련해 뒀는데 내일 조문하러 올 거예요?][오전에 시간 되면 갈게.][오기 전에 꼭 연락해야 해요. 제가 마중 갈게요.]먼저 만나자고 하는 허예나에 양혁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사진으로 얼굴을 확인했으니 허예나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저도 모르게 내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양혁수는 이런 기대를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하였다. 온라인으로 만난 친구를 만나면 설레는 마음과 같은 거로 생각했다.[그래.]양혁수의 대답에 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다.[오늘은 더는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셔서 곁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아요.][응. 너도 일찍 쉬어.]평소와 다름없는 안녕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양혁수가 일정을 앞당겨 돌아온 건 허씨 가문에 조문하러 가기 위함이 맞았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허예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문에서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비행기에 오르면서도 양혁수는 이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여자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다니.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주선으로 만난 사이이고 그동안 그렇게 많은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으니 정이 든 것도 당연했다.다른 한편, 변여름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잠에 들 수 없었다.두근거리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양혁수의 마음속에 허예나가 들어선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양혁수는 멍하니 셔터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작은 문부터 셔터까지 거리가 있었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지 않는 이상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솔직히 말해 양혁수는 그렇게 전력 질주하는 게 귀찮았다.그리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셔터가 고장으로 인해 오작동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딸깍.셔터가 아예 닫히고 차고의 전등도 모조리 꺼졌다.순식간에 차고 안은 암흑이 되었다.‘허.’‘역시. 그러면 그렇지.’‘나를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다 이유가 있겠어.’7년 전이었다면 양혁수는 바로 작은 문을 걷어차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니 인내심이 는 건지 어린아이의 수작에 그렇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침착하게 핸드폰을 찾아 손전등을 켰고 켜자마자 작은 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문 뒤의 사람도 그 자리 그대로 멈췄다.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양혁수는 쯧 하고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그리고 예상대로 문이 열렸다.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양혁수의 뒤로 들려왔다.“이게 네가 날 만나자고 한 이유야?”말을 마치자마자 등 뒤로 다가온 소녀는 바로 양혁수를 덥석 안았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이 마치 몇 번이고 시물레이션을 해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핸드폰을 들어 주변을 환하게 비추려 했다.그러나 등 뒤의 사람이 한 발 더 빨랐고 양혁수의 손을 잡고 핸드폰을 빼앗았다.양혁수는 당연히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내어준 건, 차에서 내리며 외투를 걸치지 않아 얇은 셔츠만 입은 상태에서 등 뒤로 소녀의 말랑한 볼이 느껴져 반항할 의지가 사라진 것이었다.핸드폰을 뺏기고 2초 뒤 주변은 다시 캄캄해졌다.보통 캄캄한 게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양혁수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았고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하. 미치겠네.’“손 풀어.”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변여름은 고분고분 손을 풀고 망설임 없이 양혁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이라도 전등 켜면 방금까지는 장난이라고 쳐줄게.”양혁수의 말에 변여름이 바로 말을 이었다.“오빠, 혹시 내가 못생겼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굳이 얼굴을 보이지 않을 이유가 있어?”변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양혁수의 손을 잡고 서서히 제 얼굴에 내려놓았다.“직접 만져보세요. 이목구비가 어떤지 확인해 봐요.”양혁수는 침묵했다.손끝에 닿는 온도는 조금 차가웠고 피부는 깐 달걀처럼 매끈하고 보드라웠다.소녀는 양혁수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제 이마와 코와 입술이 손에 닿도록 했다.“어때요?”변여름은 낮은 소리로 물었고 양혁수는 몰래 숨을 참았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손을 휙 뺐다.“눈, 코, 입은 제 위치에 있네. 그럼 못생긴 건 아니지 뭐.”“제대로 만져봐요.”소녀는 다시 손을 잡아당겨 제 머리 위로 내려놓았다.양혁수는 손가락을 움찔했고 손끝에 머리핀이 닿았다.변여름은 잠시 멈칫한 양혁수가 느껴졌고 말을 덧붙였다.“내가 산 머리핀인데 고양이 캐릭터예요.”“...”‘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양혁수는 또 손을 빼내려 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손목을 잡고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그렇게 잡힌 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고 갑자기 유치한 생각이 떠올랐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계속 놀려주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양혁수는 풀어 헤친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겨주고 정확하게 귀를 잡고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오빠!”양혁수는 장난이었으나 가빠진 상대의 숨소리에 바로 힘을 풀고 손을 거뒀다.이에 변여름은 입을 삐죽였다.‘왜 손을 거두고 그래. 조금 놀란 거지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는데.’양혁수는 아예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 추모식 말고 오빠 따로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요.”변여름은 아주 솔직했고 제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양혁수는 살짝 찌푸리던 인상을 풀었으나 일부러 계속 쌀
양혁수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사실 고분고분 차에 오른 건 빠르게 차 안의 전등을 켜버려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차에 오르고 변여름은 양혁수의 옆자리에 찰싹 붙었고 점점 더 다가왔다.되레 당황한 건 양혁수 쪽이었고 밀어내지도 못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잠시면 되니까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바른대로 말해. 뭐 하려는 거야?”“설마 내가 허튼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 내가 걱정하지 않게 됐어? 넌 정말 그럴 것 같단 말이지.”“최대한 참아 볼게요.”변여름은 한 손으로 양혁수의 어깨를 꾹 눌렀다.만약 양혁수가 반대 손을 뻗는다면 바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변여름이 조금만 더 과감한 사람이었다면 양혁수의 다리 위를 올라탈 수도 있었다.그 모든 가능성이 양혁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는데 눈가에 천 조각이 느껴졌다.긴 천 조각은 정확하게 양혁수의 눈을 덮었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양혁수의 뒤통수에 매듭을 지었다.“이건 오빠 차니까 오빠가 전등이라도 확 켜버리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오빠 눈을 가려야겠어요.”“...”‘대체 무슨 의심은 그렇게 많은 건지.’변여름은 점차 렌즈에 적응이 되어 어둠 속에서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나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양혁수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다.그래서 상상으로 눈을 가린 양혁수의 모습을 떠올렸고 부드러운 손놀림과는 달리 머릿속엔 아주 불순한 생각만 가득했다.지금이라도 전등을 켜고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자. 다됐어요.”변여름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양혁수는 두 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랐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얌전히 제 자리에 앉아. 안 그러면 전등 확 켤 거니까.”“네네. 알겠어요.”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고분고분 옆자리에 앉았다.천 조작은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속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혁수는 당장
변여름은 아기 새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처럼 양혁수에게 음식을 넘겨줬다.“배불러.”양혁수가 멈추라고 하자 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에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제 입에 넣었다.양혁수는 그래도 오늘 저택을 찾은 그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아버지 화장 날짜는 정했어?”“내일이에요.”양혁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설마 다른 사생아가 찾아올까 봐 큰어머님이 급하게 화장 날짜를 잡은 거 아니야?”“네. 맞아요.”변여름은 허현무에 대한 질문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허예나 본인도 허현무에게 남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사건이 마무리된다면 변여름은 허예나 모녀가 편히 지낼 곳은 마련해 줄 것이다.양혁수는 허예나가 적어도 유산에 관해 얘기를 꺼내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허예나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사방이 캄캄해 상대가 잘 보이지는 않아도 양혁수는 상대가 저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유산 쟁탈이 아니라 고작 연애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변여름이 양혁수를 불렀다.“오빠, 차에 마실 물 있어요?”시간이 지날수록 양혁수는 허예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잠기는 걸 발견했다.그래서 손을 더듬어 생수를 찾아 허예나에게 건넸다.변여름은 생수를 받아쥐고 손쉽게 그 뚜껑을 열었다.그러나 이미 누군가 마신 건지 새 생수를 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두 사람은 모두 당황해 버렸다.생각해 보니 양혁수가 방금 마셨던 물 같았다.“앞에 있는 새 생수 가져다줄게.”변여름은 그 말을 무시하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그 물을 마시는 소리가 귓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쯧.’그냥 물을 마셨을 뿐인데 긴장한 양혁수가 느껴져 변여름은 그 상황이 조금 웃겼다.변여름은 이런 양혁수를 빤히 보다가 생수 뚜껑을 닫고 양혁수의 손에 생수를 쥐여주었다.양혁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생수를 원위치에 내려놓았다.그때, 변여름은 양혁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양혁수가 고개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양혁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변여름이 대답했다.“잠깐 기대고 있는 것도 안 돼요?”“...”양혁수는 길게 심호흡하고 뒷말은 삼켰다.이에 만족한 변여름은 양혁수의 오른쪽 팔에 더 바짝 다가가고 깍지 낀 손에도 더 힘을 주었다.양혁수는 과감하게 다가오는 허예나의 행동에 조금 적응이 된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상황이 점점 의아하게 느껴졌다.왠지 허예나는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지금껏 모두 계산된 행동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예나야.”변여름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봤다.양혁수도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혹시 전에 알던 사이이니?”의문문이었지만 왠지 확신에 찬 말투였다.변여름은 양심에 찔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그럼 날 기억은 해요?”“...”양혁수가 기억을 할 리가 없었다.그전에도 종종 이런 의심을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예나를 과거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넌 날 알고 있었던 거지?”양혁수는 질문을 바꿨다.하지만 변여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익숙함을 느끼는 양혁수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양혁수는 정말 과거에 허예나와 친분이 있었는데 자신이 홀라당 잊어버리는 무례를 저질렀을까 걱정을 했다.한참 침묵이 흐르고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맞아요. 난 오빠를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오빠를 노리고 온 것도 맞아요. 주선 상대가 오빠가 아니었다면 돈을 억만으로 줘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양혁수는 변여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대를 향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졌으며 왼쪽 손은 저도 모르게 조명 버튼을 찾았다.궁금증이 발동하는 순간 양혁수는 행동으로 옮겼다.고민하고 망설이는 건 전혀 양혁수다운 행동이 아니었다.대체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딸깍. 조명 버튼이 켜지고 주변이 환해졌다.갑자기 변덕을 부린 양혁수에 변여름은 헛숨을 들이마시었다.하지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