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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의 그 밤에도 눈이 내렸다.
설봉산 자락, 돌계단 백스물여덟 개를 올라야 닿는 작은 당집 기와는 반쯤 무너졌고, 문짝은 안쪽에서 잠가 둔 지 오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문이 열리면 재앙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무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고, 아무도 찾지 않았다. 당집 안에는 여우가 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스물몇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뼈대가 드러날 만큼 창백한 피부, 서리 내린 못처럼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 뒤로 아홉 갈래의 꼬리가 어른거렸다. 그중 여섯은 이미 빛이 바랬고, 셋만이 아직 은빛으로 살아 있었다. 마지막 꼬리가 남았을 때 그는 사람이 된다. 그 사실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사람이 되는 일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사람은 배신하고, 원망하고,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족속이었다. 그런 것들에게 목숨 하나를 걸 만한 가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마을 아래에서 횃불이 올라왔다. "여우다! 여우가 재앙을 불렀어!" "당집을 태워라! 저것을 태워야 비가 온다!" 가뭄이 백 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여섯 아이가 앓아누웠고, 마을의 우물은 바닥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원인을 찾아야 했다. 사람은 언제나 원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약한 것을 찾아야했다. 여우는 문틈으로 횃불을 바라보았다.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때였다. "서리야." 문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골 무녀 봉이었다. 그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었다. 천 년 전, 눈 내린 숲에서 얼어붙어 죽어가던 새끼 여우를 발견한 것도 봉이었고, 그에게 밥을 주고 사람의 말을 가르친 것도 봉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쉽게 남을 저버리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 역시 봉이었다. "문 열어. 나야." "가." "서리야, 문 열어." "가면 되잖아." 여우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어. 처음엔 나를 신이라고 부르고, 다음엔 나를 짐승이라고 부르고, 마지막엔 나를 불태우려고 해. 너도 그중 하나야" 문이 흔들렸다. 봉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너는 나를 미워해도 돼"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문을 열어야 해.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왜" "네가 여기서 죽으면 안 되니까" 여우는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 오래되어 닳아 있었다. 마치 날이 무뎌진 칼날 같았다. "죽지 않아 나는 신력이 있어 이깟 불쯤이야" "불이 네 몸을 죽이는 게 아니야" 봉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뒤에 오는 게 널 죽여 아무도 널 믿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백 년, 이백 년, 천 년을 사는 게 널 죽인다고" 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쾅! 문이 부서졌다. 봉이 몸으로 문을 밀어 연 것이었다. 그녀의 옷자락에는 불티가 붙어 있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작은 청동거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둥근 테두리에 구름무늬가 새겨진 거울 여우가 오래전 봉이에게 건넸던 물건이었다. "이거, 돌려주러 왔어" "내가 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래도 네가 나한테 준 거니까" 봉이는 거울을 여우에게 내밀었다. 여우는 받지 않았다. "이제 와서 뭐 하러" "약속하러" 봉이 문턱에 주저앉았다. 밖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리야" "……." "나는 네가 사람을 미워하는 거 이해해" 봉은 피 묻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나도 사람이니까 나도 널 많이 아프게 했으니까" 여우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한테 미안했어" "알아" "그리고 하나만 약속해 줘" 봉이 청동거울을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여우의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봉의 손끝은 뜨거웠다. "천 년 뒤에, 내 자손이 이 거울을 돌려주러 올 거야" 여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꼭 한 번만 더 믿어봐" "……." "한 번만" "천 년?" "응." 봉이 웃었다. "천 년" "그때는 너도 없겠지"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없어" 여우는 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 죽기 직전에 짓는 웃음같이 보였다. "또 그렇게 날 두고 갈 거야." "미안해" "봉이" "응?" 여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쨍그랑! 창문이 깨졌다. 횃불이 안으로 던져졌다. 불길이 순식간에 바닥에 번져지고 있었고,봉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리 앞을 가로막았다. "봉이!" 그녀는 아홉 갈래 꼬리 중 하나를 붙잡았다. 여우의 신력이 폭발했다. "살아 있어, 서리야" "봉이!" "천 년만"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당집은 불길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마을에는 삼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산을 올라와 빌어도 당집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봄이 오고,여름이 지나고,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설봉산 자락에는 다시 눈이 내렸다. --- 천 년 동안 여우는 그 안에 있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돌계단은 이끼로 뒤덮였고, 사람들은 그 신당의 이름을 잊었다. 당집에 남은 것은 낡은 현판에 희미하게 새겨진 세 글자뿐이었다. 서리당. 그곳은 버려진 신당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버리기로 마음먹은 신당이었다. 서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봉했다. 누군가 오면 또 다칠 테니까 아무도 오지 않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으니까 천 년의 마지막 밤 눈이 내렸다. 서리는 마루에 앉아 손바닥 위에 놓인 청동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뒷면에는 봉이의 서툰 글씨가 남아 있었다. 한 번만 더 믿어봐 서리는 손끝으로 그 글씨를 천천히 쓸었다. 천 년 동안 몇 번이나 쓸었는지 셀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마침내 그 약속을 포기하기로 했다. 천 년이면 충분했다. 신력은 아홉에서 셋으로 줄어 있었다. 남은 셋마저 스스로 태워버리면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이 되면 백 년쯤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죽는 게 오히려 좋았다. 끝이 있으니까 사람을 믿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났다. 서리는 고개를 들었다. 천 년 만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또각 또각 눈을 밟는 발소리가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서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사람들은 구미호를 두려워했다. 사람의 간을 먹고, 달빛 아래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천 년을 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천 년을 산다는 것이 어떤 외로움인지 한 번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고, 또다시 믿었다가 상처받는 일이 반복되면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서리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요괴 한때 사람들의 기도를 받던 신당의 수호자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과 배신으로 신당은 버려졌고, 서리 역시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렇게 천 년을 홀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백스물여덟 개의 돌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오는 소리 마지막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서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낡은 당집의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 년 전과 똑같은 눈 내리는 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봉이 아니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스물몇 살의 젊은 여인이었다. 눈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얇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여기가 맞을까" 그녀의 이름은 '서연' 이였다. 서연은 사람을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 일찍 배워버린 여자였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연이어 상처를 받고,기댈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조차 밀려난 뒤,그녀에게 남은 것은 낡은 가방 하나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남긴 편지 한 장, 청동거울 하나 뿐이었다. 편지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람을 믿기 어려운 날이 오거든 산 너머 낡은 신당을 찾아가렴 그곳에는 네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있단다. 진실은 그 말을 믿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믿을 힘이 없어서 온 것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붙잡을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진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천 년 동안 닫혀 있던 문이,아주 천천히 열렸다. 그 순간 서리와 서연은 시선이 마주쳤다. 한 사람은 천 년 동안 사람을 믿지 못했고, 한 사람은 살아오며 사람을 믿는 법을 잃어버렸다. 서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서리의 시선이 서연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천 년 전 봉이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그 청동거울이었다. 서리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걸" 서연이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잠시 망설인 그녀가 말했다. "할머니가 꼭 이곳에 돌려주라고 했어요"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 앞에,봉의 약속을 품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리는 문득 깨달았다. 천 년 전 봉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천 년만 그 약속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돌계단은 정확히 백스물여덟 개였다. 서연은 계단을 하나씩 세며 산을 올랐다. "스무 개…… 스물한 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밤은 이미 깊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늘게 흩날리던 눈이 어느새 제법 굵어져 있었다. 검은 구두 위로 하얀 눈이 쌓였고, 오래된 돌계단에도 얇은 눈이 내려앉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아!……." 발끝이 미끄러졌다. 급히 옆의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손전등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계단 양옆의 나무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순둘…… 예순셋……." 서연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깊은 산속에 있는 낡은 신당을 왜 찾아가고 있는지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매번 같았다. 할머니 때문이었다. 한만월 세상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임종을 사흘 앞두고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할 만큼 단단했다. "서연아" "응, 할머니" "설봉산에 가거라" 서연은 눈물을 참으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거기 서리당이라는 신당이 있어" "신당?" "문을 열고…… 불을 켜" "할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거울을 돌려줘" "무슨 거울?"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그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부탁해" 서연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소리야? 거기에 누가 있는데?" 할머니는 한참 동안 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천 년 전의 그 밤에도 눈이 내렸다.설봉산 자락, 돌계단 백스물여덟 개를 올라야 닿는 작은 당집기와는 반쯤 무너졌고, 문짝은 안쪽에서 잠가 둔 지 오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문이 열리면 재앙이 나온다고 믿었다.그래서 아무도 열지 않았다.아무도 올라오지 않았고, 아무도 찾지 않았다.당집 안에는 여우가 있었다.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스물몇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뼈대가 드러날 만큼 창백한 피부, 서리 내린 못처럼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 뒤로 아홉 갈래의 꼬리가 어른거렸다.그중 여섯은 이미 빛이 바랬고, 셋만이 아직 은빛으로 살아 있었다.마지막 꼬리가 남았을 때 그는 사람이 된다.그 사실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사람이 되는 일이 무엇이 대단하다고사람은 배신하고, 원망하고,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족속이었다.그런 것들에게 목숨 하나를 걸 만한 가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그날 밤, 마을 아래에서 횃불이 올라왔다."여우다! 여우가 재앙을 불렀어!""당집을 태워라! 저것을 태워야 비가 온다!"가뭄이 백 일째 이어지고 있었다.여섯 아이가 앓아누웠고, 마을의 우물은 바닥을 드러냈다.사람들은 원인을 찾아야 했다.사람은 언제나 원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약한 것을 찾아야했다.여우는 문틈으로 횃불을 바라보았다.서운하지 않았다.오히려 익숙했다.그때였다."서리야."문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당골 무녀 봉이었다.그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었다.천 년 전, 눈 내린 숲에서 얼어붙어 죽어가던 새끼 여우를 발견한 것도 봉이었고, 그에게 밥을 주고 사람의 말을 가르친 것도 봉이었다.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쉽게 남을 저버리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 역시 봉이었다."문 열어. 나야.""가.""서리야, 문 열어.""가면 되잖아."여우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어.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