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급한 대로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요. 내일 나가서 편한 옷들 좀 사 올게요.”
우진이 곱게 갠 옷가지를 내놓았다. 식사를 마쳤다고 해서 또 도희를 묶진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도희는 뭔가가 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요.”
문을 나서려던 우진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어차피 창문도, 현관문도 안 열릴 테니까.”
우진은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도희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우진이 나간 문만 쳐다봤다. 다시 들어오지는 않을까 싶어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문밖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도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혹시 겁을 주려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껏 당겨보았다.
덜컹-
창문이 미세하게 흔들릴 뿐 열리지는 않았다.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온몸의 힘을 실었다.
“제발….”
소용없었다.
도희는 망설이다 방문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실은 고요했다.
식사를 하며 봐두었던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도희는 맨발로 소리가 나지 않게 한 걸음씩 현관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
현관문 앞에 도착한 도희가 잠금장치를 살폈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그제야 우진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창문도, 현관문도 안 열릴 테니까.
처음부터 자신이 이렇게 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도희는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헛웃음이 났다. 절망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온 도희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납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대체 자신을 왜 데려온 걸까.
돈도, 원장님에 대한 원한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 자신이 결혼하기 싫어했다는 이유뿐일까.
그보다 파혼을 축하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기억 안 나면 됐어요.’
식탁에서 들었던 말까지 떠올랐다.
우진은 분명 자신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도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강우진이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도희는 묶였던 손목을 내려다봤다. 손과 발은 자유로워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시 문을 열어볼까 생각했지만, 현관 앞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웨딩드레스도 벗지 못한 채 침대에 몸을 웅크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울고, 고민하고, 다시 우는 일을 반복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한 가지 생각만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체 나를 왜 데리고 온 것일까.
그러다 어느 순간, 도희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우습게도 몇 주 만에 푹 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개운하게 눈을 뜬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시계나 휴대전화가 없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잠결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슬며시 눈을 떴을 때 우진이 문가에 서 있었다. 꽤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말없이 불을 끄고 나갔다. 도희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
옷을 갈아입고 고민하던 그녀가 방문 앞을 서성였다. 문에 귀를 댔다. 거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일어났어요?”
마침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우진은 현관문을 마저 잠그며 말했다.
“어제 말한 것처럼 편한 옷들 좀 사 왔어요. 배고프죠? 점심 만들어줄게요.”
도희의 시선이 우진에게서 현관문으로 옮겨갔다.
어젯밤 자신이 아무리 당겨도 꿈쩍하지 않던 문이었다. 그런데 우진은 너무도 쉽게 그 문을 열고 밖을 드나들었다.
순간 도희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이 집에 혼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알았다면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봤을 텐데.
아쉬움과 함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납치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집을 비운 우진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호, 혹시…. 지금 몇 시예요?”
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장 봐 온 것들을 꺼내놓으며 벽시계 아래에 있는 꽃병을 가리켰다.
“저거 기억나요?”
꽃병에는 하얀 안개꽃과 파란 장미가 섞여 꽂혀있었다.
“네?”
“결혼식 전날, 퇴근 시간 30분 전. 강우진.”
그제야 기억이 났다. 강우진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는지.
결혼식 전날이었다. 퇴근을 30분도 남겨두지 않은 시각에 갑작스러운 꽃다발 주문이 들어왔다.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생각으로 주문을 받았다.
이상한 건 요청사항이었다. 꽃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 완성된 꽃다발을 가게 앞에 놓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도희는 꽃다발을 만들어 문 앞에 두고 퇴근을 했었다.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도희는 꽃병을 살폈다. 안개꽃과 파란 장미.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꽃다발이었다. 그리고 그 꽃이 지금 자신을 납치한 남자의 집에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연이 아니었다.
도희는 꽃병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파란 장미 사이로 작은 안개꽃들이 촘촘하게 섞여 있었다. 포장지는 사라졌지만, 자신이 만든 꽃다발이 분명했다. 꽃의 배치까지 기억났다.
그렇다면 꽃을 주문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도희는 서늘해진 팔을 감싸 쥐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 남자는 언제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럼….”
우진이 장바구니에서 우유를 꺼내다 말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처음부터 저를 알고 있었어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처음부터라는 게 언제부터죠?”
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우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점심 뭐 먹고 싶어요?”
“그게 지금 중요해요?”
처음으로 도희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우진이 눈을 깜빡였다.
“중요하죠.”
“….”
자신을 납치한 와중에도 식사가 중요하다는 우진. 그런 우진의 행동이 도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우진의 손이 멈췄다.
도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이었다. 우진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을 본 것은. 하지만 우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밥은 먹어야 하니까.”
“그게 무슨….”
도희가 따져 물으려는 순간 다시 한번 우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도희를 힐끗 보고는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잡아 들었다.
“잠깐만.”
우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조금 닫고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네.”
“….”
“알고 있어요.”
짧은 대답만 몇 번 이어졌다.
도희는 듣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몇 분이 흐르고, 우진이 전화를 끊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얼굴이 조금 전보다 붉어진 그는 답답한 듯 숨을 한 번 삼켰다.
“경찰이죠? 사람들이 저 찾고 있는 거 아니에요?”
도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찾겠죠. 하지만 경찰은 아니에요. 물론, 도희 씨를 찾는 전화도 아니고.”
“….”
우진은 평온함을 되찾은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우진의 대답에 도희는 실망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해요?”
“뭐가요?”
“누가 날 찾는 순간 당신은 바로 체포될 텐데, 왜 이렇게 태연하냐고요.”
우진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못 찾을 테니까.”
확신하듯 말하는 우진에 도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했으면 그리도 당당하게 말할까. 궁금했다.
“찾는 시늉은 하겠죠. 체면이 있으니까.”
“….”
“그 사람들이 도희 씨가 사라진 게 정말 걱정돼서 찾는 걸까요?”
도희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기분이 나빠서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사라졌으니 모두가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원장님도, 자신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사람도 어떻게든 자신을 찾으려고 할 거라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도희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사한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혼식 당일 신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사실을 우진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자신을 이곳에 가둔 우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자신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무엇보다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왜 그런 것까지 알아요?”
도희가 낮게 물었다.
우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진에게서 나온 다음 말은 꽤 의외였다.
“그때가 지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풀어줄게요.”
“….”
“이번에는 꼭…. 자유로워질 수 있게.”
초인종이 울렸다. 초저녁 즈음이었다.우진이 택배를 받아 들어왔다.“….”내용물을 확인한 우진의 손이 멈췄다.상자 안에는 낡은 공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모서리가 닳아 해지고, 군데군데 얼룩까지 진 오래된 공책이었다.우진은 한참이나 망설였다. 꺼내지 못했다. 기억, 또는 기망이 떠올랐다.자신에 대한 책망이 가득한 그것을 잊을 리가 없었다.열네 살의 자신이 매일 밤 끌어안고 살았던 일기장이었다.“뭔데 그래요?”뒤따라 나온 도희의 목소리에 우진이 황급히 상자를 닫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무것도 아닌 사람 표정이 아닌데.”우진은 대답을 흘려버린 채 상자 옆면에 붙은 송장을 확인했다.발신인은 없었다. 없어도 알 것 같았다. 그것을 여태 보관하고 지금 이 시점에 보낼 사람. 단 한 명이었다.강인구.우진은 도희의 눈치를 살피며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도희는 별다른 의심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4월 12일도희가 꽃을 주웠다.운동장에 핀 조그마한 꽃이었다.예쁘냐고 물어봐서 예쁘다고 했다.
알 수 없는 기억에 놀라 손을 빼려던 찰나, 우진에 의해 당겨진 도희는 침대에 넘어지고 말았다. 손목을 잡힌 채 중심을 잃은 도희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이, 이봐요…! 지금 뭐 하는….”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진이 몸을 일으켰다.어느새 도희의 양손은 머리맡에 붙들려 있었다. 숨이 저절로 삼켜졌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우진의 얼굴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전혀 달랐다.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듯 초점이 없는 눈. 그런데도 자신을 붙든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내가 가라고 했지.”도희는 당황했다. 벗어나려 양팔에 힘을 주었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진의 시선이 점점 또렷해졌다.한동안 도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도희야?”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도희는 자신을 짓누르는 힘보다 순간적으로 그 목소리에 더 놀랐다.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아주 오래전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았다.‘도희야.’희미한 목소리가 겹쳤다.하지만 기억을 붙잡기도 전에 손목의 통증이 도희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누군가가 아니었다.자신을 결혼식장에서 납치한 강우진이었다.도희가 숨을 멈췄다.‘도희 씨’가 아니었다. 분명 ‘도희’라고 했다.“손….”도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것 좀 놔줘요.”그제야 우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 듯했다. 도희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손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아….”우진이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자유로워진 도희는 곧바로 침대 끝까지 몸을 피했다. 붙잡혔던 손목이 욱신거렸다. 도희는 손목을 감싸 쥔 채 우진을 경계했다.“미안해요.”우진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 식지 않은 땀이 이마와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꿈을 좀 꿔서….”“무슨 꿈이요?”“….”우진의 눈빛이 도희에게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별거 아니에요, 도희 씨.”도로 ‘도희 씨’였다.조금
우진은 급하게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도희는 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우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도희 씨….”우진이 낮게 도희를 불렀다.“우리, 나갈래요?”-우진의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도희는 창밖만 내다봤다.며칠 만에 보는 바깥이었다.지나가는 사람들,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낯설었다.“어디 가는 거예요?”“그냥요.”“그냥 어디를 가요.”도희가 그를 힐끗 바라봤다.아까부터 이상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강우진 씨.”“….”“나 어디 데려가는 거예요?”신호가 붉게 바뀌었다. 차가 천천히 멈췄다.우진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됐다. 도희를 내려주고 돌아가면 된다. 그럼 끝이었다.우진이 옆을 슬쩍 바라봤다. 도희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저렇게 내려서면 다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돌아보지 않는 편이 맞았다. 자신
다음 날 아침.도희가 방문을 열었을 때 우진은 거실에 없었다.식탁 위에는 간단한 아침 식사만 놓여 있었다.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손을 댈 생각은 들지 않았다.잠을 설친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밤새 몇 번이나 문밖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지만, 우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누구를 죽여달라고 했는지, 자신은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났다.도희는 의자를 빼려다 말고 식탁 끝을 짚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려진 아침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 자신이 느꼈던 공포마저 별일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 기분이었다.도희가 식탁 앞에 서 있던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우진이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먼저 눈을 피한 건 우진이었다.“일어났어요?”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소의 목소리였다.그게 도희의 신경을 더 긁었다.도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우진이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동안에도 그를 지켜봤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다급하게 문 앞까지 찾아왔으면서, 지금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어젯밤에 누구랑 통화한 거예요?”우진의 걸음이 멈췄다.“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데요?”“….”“죽여달라는 건 또 누구고요?”“도희 씨.”“그것도 그 계획이라는 거랑 관련 있는….”순간 우진이 빠르게 다가왔다.“읍…!”커다란 손이 도희의 입을 틀어막았다.도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쉿…!”우진이 아주 작게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급해 보였다.우진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도희도 천천히 그 시선을 따라갔다.천장 구석.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우진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내렸다.그리고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얘기해요.”“저게 뭐예요?”“보지 마요.”도희
“이번에는…?”이상했다.어제부터 몇 번이나 그랬다. 처음 자신의 이름을 물었을 때도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꽃다발을 보여주며 결혼식 전날의 일을 떠올리게 한 것도 그였다. 마치 자신만 모르는 무언가가 둘 사이에 있는 것만 같았다.도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우진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도희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방금 ‘이번에는 꼭 자유로워질 수 있게’라고 했잖아요.”“….”“이번에는, 이라고….”우진은 장바구니 속 물건들을 괜히 계속 정리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우진의 침묵은 부정이라기보다 인정에 가까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도희는 확신했다. 자신은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도희를 바라보던 그가 낮게 물었다.“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요?”“뭘요?”“아무것도 아니에요.”“강우진 씨!”처음이었다. 도희가 우진의 이름을 똑바로 부른 것은. 우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차분해진 우진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장바구니에 있는 것들을 마저 정리했다.“오믈렛, 괜찮죠?”우진은 도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도희는 더 묻지 않고 우진을 바라봤다. 대답을 피하는 게 오히려 대답처럼 느껴졌다.우진은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와 달걀을 차례로 넣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손이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왜 말 안 해줘요?”“뭘요?”“나랑 어디서 만났는지.”냉장고 문이 닫혔다.우진이 한동안 손잡이를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알아서 좋을 거 없어요.”“그건 제가 판단할게요.”“….”처음으로 우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도희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그때,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우진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었다. 짧은 진동과 함께 화면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그가 급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지만 도희가 한
“급한 대로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요. 내일 나가서 편한 옷들 좀 사 올게요.”우진이 곱게 갠 옷가지를 내놓았다. 식사를 마쳤다고 해서 또 도희를 묶진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도희는 뭔가가 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요.”문을 나서려던 우진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어차피 창문도, 현관문도 안 열릴 테니까.”우진은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도희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한동안 우진이 나간 문만 쳐다봤다. 다시 들어오지는 않을까 싶어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문밖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도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창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혹시 겁을 주려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껏 당겨보았다.덜컹-창문이 미세하게 흔들릴 뿐 열리지는 않았다.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온몸의 힘을 실었다.“제발….”소용없었다.도희는 망설이다 방문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거실은 고요했다.식사를 하며 봐두었던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도희는 맨발로 소리가 나지 않게 한 걸음씩 현관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현관문 앞에 도착한 도희가 잠금장치를 살폈다.그리고 손잡이를 잡았다.움직이지 않았다.다시 한번.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그제야 우진의 말이 떠올랐다.어차피 창문도, 현관문도 안 열릴 테니까.처음부터 자신이 이렇게 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도희는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헛웃음이 났다. 절망스러웠다.방으로 돌아온 도희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납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대체 자신을 왜 데려온 걸까.돈도, 원장님에 대한 원한도 아니라고 했다.그렇다면 정말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