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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Author: 서린화
금영이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자, 반듯한 본문 사이로 빛바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필법이 채 완성되지 않은, 제법 앳된 필체였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는 단순한 지형 기록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펼쳐 보니 각지의 민속과 기이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한 구절이 금영의 시선을 붙들었다.

“먼 북쪽에는 영물, 거대한 곤(鯤)이 존재한다.”

그 옆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주석이 달려 있었다.

“만일 그 곤을 타고 천지를 유람할 수 있다면, 이 작은 모퉁이에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금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정말로 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의 주필이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아니.”

금영은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

"하지만 신녀는 이 세상에 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영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아니, 설령 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품은 뜻을 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넓은 바다에 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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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질 무렵이었다.날은 이미 어스름해지고 있었지만 방 안의 촛불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아 사방이 어둑했다.하지만 서 황후의 눈에는 오히려 그 희미한 촛빛이 따스하게 느껴졌다.방 안에 흐르는 공기마저 어딘가 아련하고 은근한 정취를 머금은 듯했다.서 황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갔다.황제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서 황후는 뒤에서 두 팔을 뻗어 황제를 끌어안았다.황제의 등에 뺨을 기대며 나직이 말했다.“폐하, 오늘 신첩을 불러 주셔서…… 신첩은 참으로 기쁘옵니다.”그러나 돌아오는 황제의 목소리에는 옅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리 기쁜가?”서 황후는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신첩이 폐하와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보낸 지도 참 오래되었사옵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사옵니까.”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오늘은 신첩이 곁에서 정성껏 모시게 해 주시겠사옵니까?”하지만 서 황후가 더 움직이기도 전이었다.황제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힘이 어찌나 강한지 서 황후는 순식간에 뒤로 떼어졌다.뜻밖의 움직임에 그녀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간신히 몸을 바로 세운 서 황후가 불안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폐하? 혹 심기가 불편하시옵니까? 원 귀비가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사옵니까?”그녀는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원 귀비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궁중의 법도에도 익숙하지 않사옵니다. 폐하의 총애를 믿고 조금 제멋대로 굴며 폐하께 제 뜻을 따라 달라 한들 이상한 일도 아니옵니다…… 부디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마시옵소서.”황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서 황후를 한번 바라보았다.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황후는 참으로 귀가 밝군.”서 황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황제는 후궁 사람들이 자신의 행적을 캐묻고 엿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서 황후가 황급히 변명했다.“신첩이 일부러 알아보려 한 것은 아니옵니다. 그저 폐하께서 난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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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은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서 황후의 말을 들은 이전이 얼른 비위를 맞추듯 말했다.“마마, 복안 내관이 직접 모시러 왔으니 틀림없사옵니다. 게다가 소인이 듣기로는 오늘 폐하께서 지란원에 들르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심기가 불편하신 채 자리를 뜨셨다고 하옵니다. 필시 원 귀비마마께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옵니다.”그 말을 듣자 서 황후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안이 순식간에 가셨다.입가에는 어느새 기쁜 기색까지 번졌다.“분명 폐하께서 어제 림비의 거짓 회임 사건을 더는 추궁하지 않으시니, 원 귀비가 심통을 부리다가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야.”환옥이 웃으며 맞장구쳤다.“원 귀비마마께서는 어찌 아시겠사옵니까. 마마와 폐하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해 온 부부이시니, 그 정이 어찌 다른 사람과 같겠사옵니까.”조씨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기회이옵니다. 오늘만큼은 폐하의 마음을 다시 마마께로 돌려놓으셔야 하옵니다.”그 말을 들은 서 황후가 곧바로 명했다.“본궁의 옷을 갈아입혀라!”이번에는 잠자리에 들기 위한 옷이 아니었다.서 황후는 빛깔이 화사한 선홍빛 봄옷으로 갈아입고, 일부러 평소보다 한층 젊어 보이도록 치장했다.뒷모습만 보자면 열여섯 꽃다운 처녀라 해도 믿을 만큼 고왔다.손복안도 서두르지 않고 서 황후가 치장을 마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다행히 서 황후 역시 황제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오래 꾸미지는 않았다.마침내 화사한 얼굴로 손복안의 안내를 받아 황제를 만나러 나섰을 무렵, 금영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그때 금영은 아기 황자를 품에 안고 달래고 있었다.밖에서 들어온 해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금영의 눈치를 살폈다.금영이 그런 해수를 보고 물었다.“무슨 일이냐?”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마마,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청풍각으로 부르셨사옵니다.”황제가 사람들을 이끌고 춘산 사냥터로 온 뒤, 후궁의 비빈들에게는 저마다 머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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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는 찻잔을 흘끗 바라보았다.찻물은 아직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 가득 차 있었다.보아하니 여비와 림비도 막 도착한 모양이었다.황제가 웃으며 물었다.“왜 그러느냐? 짐이 괜히 방해한 것이냐?”이어 조금 뜻밖이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림비야 그렇다 쳐도, 짐은 네가 여비와도 이리 어울릴 수 있을 줄은 몰랐구나.”그 말을 들은 금영은 속으로 생각했다.‘폐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여비가 까다로운 성정이라는 걸 분명 알고 계셨던 거네. 그런데도 줄곧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던 거고.’하지만 이제 금영은 황제가 여비를 총애해서 그녀의 제멋대로인 성정을 받아 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황제가 후궁의 일에 애초부터 아무런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따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금영이 나긋하게 말했다.“신첩은 귀비이니, 후궁의 비빈들과 원만히 지내며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온화하던 황제의 표정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참으로 사려가 깊구나.”금영이 입궁하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가장 흡족해했던 것은 분수를 알고 사려 깊은 궁비였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금영이 이렇듯 흠잡을 데 없이 처신하는 모습을 보니, 도리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가슴속에서 치밀었다.금영은 과연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것일까.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괜스레 마음이 뒤숭숭해져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황제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해수가 다과를 들고 돌아왔을 때는 마침 황제가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해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벌써 가셨사옵니까?”금영 역시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자신이 딱히 잘못 말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멀쩡하던 황제가 어째서 갑자기 토라진 사람처럼 가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금영은 해수가 가져온 복숭아꽃 과자로 시선을 돌렸다.하나를 집어 살짝 베어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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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황후의 폐립은 황제가 가볍게 던진 한마디로 당장 결정될 만큼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상관없었다.황제의 마음속에 씨앗 하나만 심어 둘 수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싹을 틔울 터였다.어쩌면 훨씬 전 금영이 심어 둔 그 씨앗은 이미 남몰래 뿌리를 내리고 새순까지 내밀었는지도 몰랐다.*다음 날.금영이 눈을 떴을 때 황제는 이미 정사를 논하러 나간 뒤였다.이날 황제는 장안과 송염 두 사람을 파격적으로 발탁했다.장안은 본래 예부시랑이었는데, 이번에 곧바로 예부상서로 승진하여 기존 예부상서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올랐다.예전에 금영이 입궁할 당시, 서 황후 측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앞길을 막았었다.그때 금영의 편에 서서 입궁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장안이었다.본래부터 서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청렴한 문관 계열이기도 했다.송염은 이부에 들어갔다.비록 사품 벼슬에 불과했지만 결코 낮은 자리는 아니었다.더구나 송염은 올해 막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었다.장원을 한 것도 아니고 셋째로 급제했을 뿐이었다.그런 그가 단숨에 사품 관직에 올랐으니, 이미 상당한 파격 인사였다.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이, 금영은 옷을 갈아입고 림비를 데리고 서 황후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환옥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황후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옵소서.”금영은 못내 아쉬웠다.오늘 다시 한번 서 황후의 속을 긁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서 황후는 화가 날수록 평정심을 잃기 쉬웠다.스스로 빈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그녀를 끌어내릴 날도 그만큼 가까워질 터였다.금영이 막 돌아서려던 그때, 조씨가 안에서 나왔다.“원 귀비마마, 황후마마께서 들라 하시옵니다.”금영은 림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서 황후는 이미 의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붉은 비단옷에는 금실로 봉황 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여 있어 더없이 귀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하지만 아무리 분을 두껍게 발라도 눈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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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그때, 서 황후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곧 선혈 한 모금이 입가로 흘러나왔다.태자는 그 모습을 보고 순간 굳어 버렸다가 황급히 서 황후를 부축했다.목소리에도 걱정이 묻어났다.“어마마마.”서 황후는 태자를 바라보았다.눈빛에는 깊은 상심이 어려 있었다.“네 아바마마가 본궁을 의심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너마저……”태자 역시 줄곧 의아했다.평소 어질고 현숙하던 서 황후가 어째서 갑자기 금영을 그토록 몰아붙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런데 서 황후가 이토록 상심한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일었다.“어마마마,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 소자가 어마마마를 의심해서는 아니 되었사옵니다.”잠시 말을 고르던 태자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다만 오늘 일에 정말 누군가 손을 쓴 것이라면, 그 사람이 금영일 리는 없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도 금영을 오해하지 말아 주시옵소서.”서 황후가 이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지금 이 순간에도 태자 앞에서 금영의 흉을 본다면, 태자가 또다시 자신에게 등을 돌릴지도 몰랐다.서 황후는 가슴을 누른 채 거친 숨을 천천히 가라앉혔다.그러고는 힘겹게 말했다.“오늘은 본궁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경솔하게 굴었구나. 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대체 누가 본궁과 금영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것인지부터 살펴야겠어.”태자는 그제야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역시 어마마마께서는 현명하시옵니다. 이번 일은 분명 현 귀비의 소행일 것이옵니다!”태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당부했다.“어마마마, 부디 그 여인의 계략에 넘어가지 마시옵소서.”서 황후는 눈앞의 태자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되었다. 본궁이 조금 피곤하구나. 너도 돌아가 쉬거라.”태자는 서 황후의 지친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마마마, 태의를 불러 진맥이라도 받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서 황후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본궁의 몸은 본궁이 가장 잘 안다. 그만 가 보거라.”그제야 태자는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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