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현장은 언제나 슬픔이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하늘마저 이를 아는 듯 이내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고은영은 사실 이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태현에게 의심을 살까 우려되어 어쩔 수 없이 배준우와 함께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그러나 장례식장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태현이 고희주의 장례식을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치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량천옥 씨는 왜 안 왔어요?”고은영은 목소리를 낮춰 배준우에게 물었다.“정확한 상황은 나도 몰라.”배준우는 담담히 대답했지만 그 역시 마음속으로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고은영은 곧장 나태현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이런 자리에 량천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의심을 사기 쉬운 상황이었다.‘량천옥이라면 분명 이 정도는 예상해서 알아서 잘할 사람인데...’하지만 오지 않았으니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고은영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고은영은 영정사진 앞에 꽃을 올리고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배준우에게 조용히 말했다.“이젠 그만 돌아가요.”배준우는 알겠다며 나태현에게 다가가 짧게 인사했다.“은영이가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해서 이만 가볼게요.”나태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도 깊고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이런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견딜 수 없었다. 아니,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차 안에서.창밖의 비가 차창을 조용히 적시는 가운데, 고은영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장례식 말이에요. 생각보다 더 크게 치렀던데요. 꽤 많은 가문 사람들도 와 있었고...”“나 대표님이 치른 장례식인 만큼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빠질 수 없었겠지. 네 오빠들도 올 거야.”배준우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전 더 이상 그 사람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고은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방금 장례식장
그날 오후, 낡은 단칸방 안에서.량천옥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맞은편에는 딸 량의가 앉아 있었다.고은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한 달, 량의는 도저히 이 허름한 셋방에서 홀로 지내는 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데려가려고 말이다.“그만 돌아가세요. 전 당신 보고 싶지도 않아요.”량천옥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량의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이 조여왔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흐른 것도 아닌데 그녀는 어느새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그 아이는 이미 떠났어.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너를 갉아먹지 마. 너에겐 아직 윤이가 있잖아.”배윤이라는 이름에, 량천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 그녀는 이내 다시 말없이 입꼬리를 내렸다.“그 애는 배항준의 아들이에요.”“천옥아, 너...”량의가 입을 열자 량천옥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됐어요. 나가세요. 나가라고요!”그녀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그 누구도 몰랐다.‘돌아가라니? 어디로?’여기는 고은지가 집이라 불렀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희주를 기다릴 수 있다면서 말이다.‘그렇다면 나도 이 자리에서 희주를 기다릴 수 있는 건 아닐까?’희주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자 량천옥의 혼란스러운 의식 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그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기억이 어지럽게 뒤엉켰고 감정도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희주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량천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 희주가 아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 왜 지금까지 그걸 잊고 있었던 걸까? 희주가 은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천옥아, 지금 어디 가는 거야?”갑작스레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본 량의는 당황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하지만 량천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량의는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량천옥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차단한
퇴원 후, 나태현은 곧장 남해로 향하지 않고 그대로 천락 그룹으로 복귀했다. 나태범은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린 줄 알고 안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회사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나태현은 단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그리고 곧이어 양지호가 요 며칠 내내 장례식장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이 귀에 들어왔다. 게다가 나태현이 고희주의 장례를 준비 중이라는 말까지 들려왔다.그날, 긴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을 나선 나태현은 무표정으로 사무실로 향했다.일주일 내내 그의 얼굴에서는 단 한 번도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무실 문을 열자 나태범이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태현은 아무 말도 없이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그 무심한 태도에 나태범의 숨소리가 급하게 섞였다.“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나태범의 목소리는 한껏 격앙돼 있었다. 하지만 나태현은 그저 물을 들이마실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나태범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애 하나를 가지고 무슨 장례를 치러? 게다가 감히 우리 나씨 가문 묘지에 묻겠다고?”나태범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삼켰고 그의 눈썹은 분노로 일그러졌다.나태현은 묵묵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일 뿐,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무시해 버린 것이다.“내 말 안 들려?”나태범의 고함이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그런데도 나태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 어떤 반박도, 설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 대신 침묵으로 나태범과 선을 긋고 있었다.“이런 싸가지 없는 놈! 너, 진짜 나를 미치게 할 작정이냐?”“좋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그 아이를 우리 나씨 가문의 묘지에 묻는 건 안 돼. 그랬다간 내가 직접 파서 끄집어내 줄 테니까!”그 말은 이미 협박을 넘은 저주에 가까웠다.‘량천옥의 외손녀를 나씨 가문 묘지에 묻겠다고? 어딜 감히...’그건 나태범에게
하지만 배준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무언의 침묵이 오히려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어떤 소식도 들려올 게 없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량천옥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켜더니 마치 가슴 한복판이 눌리는 듯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은영은 이미 알아버렸다.‘역시 이번에도 언니에 대한 소식은 없었구나...’“은영아, 예전 일은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 네가 필요로 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줘. 내가 너를 지킬게.”량천옥은 조용히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영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녀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예전의 량천옥은 자신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날카롭고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대했고 그녀 앞에 서면 항상 마음이 굳어지곤 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고은영에게 그런 말을 꺼낸 건, 그녀가 고은지에게 있어서 어떤 여동생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은지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어릴 적부터 자신이 지켜보며 자라온, 그 하나뿐인 동생인 고은영이었다.고은영은 뜨거워진 눈가를 애써 감추며 말없이 량천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목이 뻣뻣하게 굳어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전에 그녀가 했던 유전자 검사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량천옥과 이상하리만치 일치했었다. 그 이후로도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못했지만 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량천옥은 조용히 봉투 하나만 두고 떠났다.그녀와 고은영 사이는 그 어떤 말도, 감정도 필요 없었다. 이제는 그저 고은지라는 이름만으로도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봉투를 조심스레 열었다. 안에 담긴 것은 모두 직접 만든 아기 옷들이었다.고은지가 떠나기 전 고은영의 아이를 위해 한 땀 한 땀 지어준 작고 따뜻한 옷들이었다.그걸 보는 순간, 고은영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눈물은 이미 그
한편, 량천옥은 완전히 미쳐버렸다.한 달 동안,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바다든 육지든, 날이 밝고 어둠이 내려도 상관없이 고은지를 찾아내기 위한 무차별적 수색을 진행했다.그리고 이 사건과 연관된 자들은 그 누구도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지씨 가문은 결국 파산했고 지신혜는 고의적 살인죄로 구속되었다. 비록 사형은 면하겠지만 무기징역에 처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량천옥의 광기는 단숨에 강성 상류층을 뒤흔들었다.딸을 잃고 난 뒤, 그녀는 완전히 무너졌고 남은 건 복수뿐이었다.지씨 가문을 정리한 지금, 그녀가 향할 곳이 어디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란완 리조트.안지영은 창밖을 한 번 바라본 뒤, 무거운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은영을 살폈다.“됐어, 은영아. 저 정도면 너 대신 복수는 충분히 해준 셈이야, 안 그래?”그녀의 말에는 씁쓸한 위로가 섞여 있었다.고은지를 해친 자들이 철저하게 무너졌으니 속 시원해야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고은영의 얼굴엔 그 어떤 안도감도, 만족도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누가 벌을 받는 장면이 아니라 고은지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었으니까.안지영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한숨 섞인 말투로 거듭 달래주었다.“한 달 동안 준우 씨가 너 챙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너 몸도 많이 약해졌고 아이도 위험했잖아.”고은영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지신혜는 정말 다시는 못 나오는 거 맞아?”마침내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조심스러웠다.안지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못 나오지. 량천옥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절대 놓아줄 리 없지.”그녀의 말엔 확신이 실려 있었다.“나는 오히려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다고 봐.”고은영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안지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파산하고 나면 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잖아. 그 후엔 정말 바닥의 삶이 시작되는 거야. 그게 진짜 벌이지.”이게 바로 량천옥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그녀는 단칼에 베는 복수보다
나태범의 눈가엔 깊은 주름 대신 걷잡을 수 없는 걱정이 드리워져 있었다.‘만약 량천옥이 지씨 가문을 무너뜨린 다음, 진짜로 나씨 가문을 타깃으로 삼는다면?’나태범은 지금 이 나이에 그걸 온전히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미쳐버린 사람 앞에서 어떤 이성이 통하겠는가.병실 안.나태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나태범이 병실을 떠날 때 그대로의 자세, 그대로의 표정이었다.남해에서도 그랬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절벽 끝자락에 앉아 있었다.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세상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나태현은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었다.그때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배준우가 들어섰다. 그는 나태현의 몰골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배준우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또 한 개비를 꺼내 나태현 쪽으로 건넸다.하지만 나태현은 손조차 내밀지 않았고 배준우는 말없이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배준우는 고은지의 실종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원래부터 량천옥을 증오했다. 그 여자를 혐오했기에 애초에 고은지를 향한 감정조차 애써 눌러왔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도 그는 이미 그녀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란완 리조트 위층에 직접 아파트까지 살 정도로 말이다.그런데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고은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배준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희주의 유골은 오늘 아침, 용산 장례식장으로 옮겨졌어요. 지금은 냉장 보관실에 있고.”희주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나태현의 텅 빈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고 숨소리마저 흐트러졌다.그는 희주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낼 자신도 없었다. 희주는 자신과 고은지 사이에서 태어난 단 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한 아이, 태어나서부터 상처뿐인 삶을 살았고 결국 그렇게 조용히 떠나간 그 아이 그뿐이었다.나태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