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소개팅이라니. 내가 미쳤지!’
단영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수아를 보러 가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낯선 사람을 만나러 가다니. 그것도 남자를.
만약 오늘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귀찮을 정도로 계속되는 연두의 집요한 연락을 피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조차 합리화일뿐 결국엔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그 죄책감은 곧바로 수아의 얼굴을 불러왔다. 또렷한 눈망울, 가끔은 고집스레 입술을 꾹 다무는 표정, 그 모든 게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아의 얼굴과 함께 자꾸 우석이 떠올랐다.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부부 아닌 연인 사이에도 사귀다가 헤어지면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는 법인데 우석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물론 담담한 척을 했는지, 정말 담담했는지는 모른다.
내가 그 사람은 아니니까.하지만 그때, 우석은 왜냐고 묻지도 무엇 때문이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질문은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마지막까지 그러마로 일관해 단영의 가슴에 차가운 금을 새겼다.
헤어짐의 이유를 한 번쯤 물어 주어야 했을 그가.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단영은 수아에게 주기 위해 사 두었던 것들을 끄집어냈다.
동화책, 학용품, 알록달록한 머리끈, 작은 티셔츠…… 예쁘게 포장할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봉투는 날이 갈수록 부풀어 갔지만 수아의 반응은 처음 같지 않았다. 무엇을 내밀어도 예전처럼 눈을 반짝이지 않는 아이. 그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이, 엄마의 마음까지 꿰뚫는 듯 아렸다.
갑자기 수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하룻밤이면 되는데, 그 하루를 기다리는 게 이렇게나 못 견디게 그리움에 사무칠 일이었나.
밤 열 한 시가 다가오는 시각, 단영은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충동적으로, 우석에게.
신호음이 채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흘러들었다.
- 응. 나야.
순간, 단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말문이 막힐 만큼 당황스러웠다.
“혹시 지금 집이야?”
- 응. “수아는? 수아는 뭐해? 좀 바꿔줄 수 있어?” - 수아 지금 자는데……. 책 읽어주니까 한참 재미있게 듣더니 조금 전에 잠들었어.잠시 정적이 흘렀다.
“책도…… 읽어줘?”
단영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놀람과 서운함과 알 수 없는 따뜻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 가끔. 매일은 아니고.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그 속엔 묘한 결이 담겨 있었다. 아이를 재우며 동화를 읽어주는 일상, 그 평범한 시간이 단영의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그래. 그랬구나.”
단영은 애써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짧은 대답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작은 원망과 안도, 미안함과 감사, 그리고 어쩌면 잔잔한 그리움까지.
우석에게도 그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한 집에 살 때 우석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집에 들어오는 것도 사나흘에 한 번이 고작, 그마저도 거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다가 눈만 뜨면 또 나가기가 바빴다.
식구라고 하기에도 한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었던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데다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었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탈 없이 자라난 수아가 기적일 정도였다.
물론, 그 모든 건 우석의 어머니 희수가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 참, 내일 온다며. 두 시라고 그랬나?
“으응. 혹시 조금 일찍 가도 되나?” - 그럼. 당연하지. 수아 좋아하겠다. 나도 내일 시간 있는데 데리러 갈까?부드러운 말투에 실린 다정함이 어색했다. 불쑥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연우석의 통화 말투가 원래 이랬던가. 생각해보니 둘이서 전화 통화를 했던 게 잘 기억나지 않는다.“아냐. 택시 타고 갈게.”
- 내가 너 지내는 곳 알게 되는 게 좀 그런가? “아니, 그렇다기보다…….” - 그런 거 아님 데리러 갈게. 보니까 올 때마다 뭘 잔뜩 가져오던데 들고 오기 무겁잖아.우석의 말은 결코 억지스럽지 않았다. 단영의 불편함을 무심히 덮어버리는, 그저 자연스러운 배려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나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 단영을 더 흔들어 놓았다. 이혼을 했으니 당연히 멀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자신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니.
잠시 망설이다가 단영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이혼을 결심하고, 독립을 하기 위해 마련한 병원 근처의 작은 공간. 연두 정도만 가끔 걸음 하는 이곳에 우석이 온다면……?
그가 들어서는 순간을 상상하자 기분이 묘했다. 우석이 절대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공간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가 한 번쯤 와 주었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이 뒤엉켜 올라왔다.
- 주소 문자로 남겨줘. 내일 열 시까지 갈게.
“여, 열시?” - 내일 보자, 단영아. 잘자!뚝 전화가 끊겼다. 서둘러 끊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우석에게는 사람을 참 어쩔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결국 주소를 적어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엇.
다음 날 아침.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단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인터폰 화면에 비친 우석의 얼굴.
현관을 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꽃망울이 막 맺힌 작은 화분과 밑반찬이 가득 담긴 통들을 양손에 들고서 우석이 서 있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 열두 평짜리 오피스텔의 좁은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분명 어색한데, 묘하게 따스했다.
“들어가도 돼?”순간적인 머뭇거림 끝에 단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아담하네. 불편한 건 없고? 아, 이거. 너 데리러 간다니까 수아 할머니가 싸주시네.”
“언제 이걸 다.”냉장고 문이 열리고, 반찬통들이 하나씩 들어갔다.
“집에서 밥은 잘 안 해 먹나 봐? 냉장고가 텅 비었네.”
“으응. 보통 밥은 병원에서…….” “그래, 그랬겠다. 바쁘니까.”우석의 시선이 그녀의 손 끝과 표정에 머무르는 게 느껴졌다. 단영은 애써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렸다.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그래. 아, 그리고 이거.”우석이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늘 그랬듯 담담한 얼굴로. 그러나 손끝은 조금 굳어 있었다.
양쪽 모두 협의한 이혼이었고, 위자료를 요구한 적이 없는데도 우석은 이혼이 성립된 이후 벌써 넉 달째 꼬박꼬박 봉투를 건네왔다.
“나 이거 못 받겠어. 수아를 내가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불편해.”
단영은 봉투를 밀어내며 단호히 말했다.
“나도 많이는 못 넣었어. 잘 모아뒀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써.”
우석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함이 있었다. 그녀를 향한,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은 책임감을 담기라도 하듯.
그때 인터폰이 다시 울렸다. 화면에는 연두가 서 있었다.
“잠시만.”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얼마 뒤 연두가 현관을 두드렸다. 오프 날 가끔씩 찾아올 때가 있지만 이렇게 전화도 없이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단영은 연두가 방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지난 밤, 그렇게 소개팅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니 상대가 연두에게 불만을 호소했을 거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하필 우석이 와 있을 때라니. 단영이 주저하자, 연두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야, 오단영 문 열어!”
단영이 힐긋 보자 우석이 자신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문이 열리자,
“너는 소개팅 자리를 그렇게 박차고 나오면 어떡해? 어라?”
이게 도대체 무슨 그림인가.
연우석 저 위인이 이 집에 있는 건 뭐며 자연스럽게 우석을 집에 들인 오단영의 꿍꿍이는 뭐란 말인가.“나 차에 있을게. 친구랑 얘기하고 내려와. 차 지하 주차장에 세워뒀어.”
일면식이 있는 연두에게 우석이 눈인사를 하고 나간 이후, 연두는 따지기라도 할 것처럼 단영에게 거리를 좁혀왔다.
“너 사실대로 말해라. 방금 상황, 뭐야?”
“뭐긴. 별 거 아냐. 오늘 수아 보러 가는 날이라 데리러 왔어.” “그러니까 이혼한 남녀가 왜 서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그런 짓들을 하느냐고!”연두는 아주 작정을 한 듯 쏘아붙였다.
“니들 혹시, 연애하니?”
긴 하루였다. 이른 시간 출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겠다는 단영을 달래고 우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이든 수아의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희수가 앉아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네.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부러 멋쩍은 미소를 짓곤 애교를 부리며 수아를 번쩍 안아 드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희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임 여사, 지금 울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우석은 정색을 하며 희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구나? 혹시 어디 아파?” 희수의 앞에 바짝 얼굴을 마주댄 우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맑고 선한 눈동자, 절대 나쁜 짓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는 건지 좀 말해 보지?” 어려운 얘기였지만 말을 꺼내야만 했다. 희수는 간신히 운을 떼었다. 쉽지 않은 얘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희수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우석에게 변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래서 식당이든 커피숍이든 우석에게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주고 싶어 남아 있던 아버지의 유산과 살고 있던 집을 담보해 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황망한 결론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주변보다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대출금은 다 날린 거야?” 우석이 정신을 차리려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지, 우석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 희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석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겉돌기만 하던 시간을 거스르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마
“오 선생님 기다린 남자분 꼭 연예인 같아요. 맞죠? 일반인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지? 키도 엄청 크고요!” “난 지난번에 본 적 있지. 그때도 ER에 왔었어. 오 선생님 당직 때. 아마 오 선생님 전 남편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련의 시절에도, 한결이 호감을 가진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처음엔 그런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가끔은 그런 관심을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쏠려 있을 때라면. 한 번 마주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 처음 태성의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그 남자, 연우석의 몸에는 이상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고작 배우지망생 주제에 눈빛은 대담했고, 상대의 속을 꿰뚫듯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수십 년씩 내공을 쌓은 배우들의 그것처럼 만만치 않은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으니까. 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며 분위기는 또 어떠했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같은 남자인 한결의 눈에도 첫인상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재수 없게도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왜 아직도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런데, 그래서 뭐? “거 일들 안 하나?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 있을 때 차트도 정리하고 어? 환자들 상태도 체크하고, 어!?” 애먼 데로 화살이 돌아갔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며 한결은 결국 연두를 호출했다. 엄마 친구 딸인 이유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사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엄친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 준 탓에 요즘 그의 심사가 이토록 사납다. “바쁘신 교수님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언제 보아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연두 앞에서 한결은 대뜸 말을 꺼냈다. “에프터 서비스.” “에고. 단영이 일이라면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결은 테
“나 일하는 곳 처음 와 보지? 한 번 구경할래?” 그날 밤, 단영은 처음으로 우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JULY를 찾았다. 단영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손님맞이 단장을 마친 라이브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태성은 놀라움이 넘어서 경탄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그런 단영의 모습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나 처음 본다. 맞지? 그…….” 처음으로 우석이 가게에 데려온 여자였다. 우석과 함께 등장한 단영을 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태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호칭을 고르는 새 우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무대 위 기타가 놓인 스툴 앞에 앉았다. “나 여기서 노래해. 옆에선 소극장 공연도 하고 있고.” 우석은 그동안 밤마다 늦었던 이유를 변명이라도 하듯 기타를 둘러매며 중얼거렸다.“어우, 우석이 노래 잘해요. 완전 가수! 가수! 우리 카페 스타죠. 스타!” 그러나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려 기를 쓰는 태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난 번에 명함 받아둔 걸 전해주려 그랬는데…… 내가 어디다 뒀더라?” 태성이 주머니며 카운터 앞을 부산하게 뒤적거리는 동안, 기타 튜닝을 마친 우석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형, 나 그런 거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좀 받지? 아니, 받아야 돼, 너!” 태성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하나도 아니고 수 개의 기획사 명함을 단영에게 건넸다. 막 기타 연주를 시작한 우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얼결에 명함을 받아든 단영의 눈이 이게 뭔가 싶어 휘둥그레지자 태성은 자기가 마치 우석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떠들어댔다.“막 스무 살이나 됐을까. 어디서 기가 막히게 잘생긴 놈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땐 아직 가게가 자리도 잡지 않았을 땐데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했죠. 노래 같은 거 못해도 무대에 그냥 세워 놓기만 해도 완전 그림이 되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실력은 더 기가 막히네? 보니까 한예종 학생이래. 키 크지,
“간단한 처치예요. 봉합, 소독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오 선생은 가서 허기나 채우고 오지? 십분만 쉬겠다면서?” 환자 하나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이례적일 정도로 ER 내부가 고요했기 망정이지 옥신각신하는 한결과 단영을 잠자코 보던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스페셜 리스트까지는 됐고, 간단한 처치라니 여기, 오단영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는 친근한 표현에 한결의 눈빛이 일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해 나갔다.“개인적인 친분이라면 나도 좀 있지 않나? 우리, 서로 구면인 것 같은데. 배우 지망생 씨.” 태성의 가게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우석도 한결의 존재가 JULY에서 잠시 스쳤던 남자와 동일인이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우석은 굳이 단영을 사이에 두고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한결은 먼저 당당히 알은 체를 해왔다. 그 분위기가 묘했다. 단영은 그 틈을 비집고 다가와 우석의 치료에 열중했다.“많이 베었네. 어쩌다 그랬어?” “사과 깎다가. 수아가 사과 먹고 싶대서.” 밥은 왼손으로, 글씨는 오른손으로, 양손을 쓰기는 하나 배트를 잡는다던가 공을 던진다던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보니 우석은 칼질이 몹시 서툴렀다. “어머니께 좀 부탁하지 그랬어.” “잠깐 외출하신 틈에.” “몇 바늘 꿰매야 할 거야. 덧나지 않게 약 잘 챙겨 먹어.” 성가시다는 듯이 얘기하곤 있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우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고, 단영은 손을 이렇게 다쳐 가지고 와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우석이 얄미워 힐긋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료와 함께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줄곧 느껴지던 어색하고도 따가운 시선. 그 눈빛의 출처를 감지한 단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 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 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 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