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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작가: 윤아
복도는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제나와 경후는 한 발짝 간격을 유지하며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펫 위를 걷는 하이힐 굽 소리가 조용히 묻히며 사라졌다.

눈살을 찌푸린 제나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등 뒤로는 무거운 침묵과 함께 누군가의 조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묵직하고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불편한 시선이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붙었다.

마치 먹잇감을 조용히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 같았다.

‘이런 시선, 정말 견디기 힘들어.’

제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 순간, 경후의 차갑고 깊은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차 대표님, 그렇게나 나에게 눈을 뗄 수 없나?”

딱 들켰는데도 경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었고, 시선을 피하는 법도 없이 여전히 태연했다.

남자의 눈빛은 변함없이 제나에게 닿아 있었고, 언제나처럼 고고한 여유가 묻어났다.

그러다가,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의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별로.”

그 짧은 두 글자에, 제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별로라면서, 마치 평생 여자 한 번 못 본 사람처럼 계속 쳐다봐?”

방금 연회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제나에게 시선을 주목했다.

그 시선에는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경멸, 악의, 경이로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고 불편했던 건, 바로 경후의 시선이었다.

‘설마 내 착각인가?'

방금 경후와 눈을 마주친 순간, 제나는 남자의 눈에 스쳐 지나간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바로 소유욕.

그리고 여자를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망.

그러나 잠시 뒤 다시 바라본 경후의 눈동자는,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흔들림 없는 평온함만 담고 있었다.

이때, 경후는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온 건, 일부러 사람들 시선을 끌려고 한 거 아니고?”

“눈에 띄는 옷?”

제나는 순간적으로 자기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와인 레드 컬러의 드레스.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색감.

오프숄더 디자인 위로 깔끔하게 정리된 제나의 쇄골과 가녀린 목선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몸매가 드러나는 핏.

이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 연주는 감탄하며 말했다.

“언니, 오늘 이 연회장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언니예요, 백 퍼센트 확신해요!”

‘그런데 차경후는 도대체 왜 ‘눈에 띄는 옷’이라고 한 거지?’

‘이 남자, 혹시 보는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제나는 비꼬는 듯한 투로 말을 꺼냈다.

“아, 깜빡했네요. 차 대표님 마음에 들려면, 윤 씨 자매 같은 스타일이어야 했죠?”

곧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요, 차 대표님. 아무리 기다리기 힘들다 해도 며칠 차이인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

“아직 이혼 절차도 채 끝나지 않았잖아요. 공식 석상에 애인을 데려오는 건 좀 성급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괜히 둘 다 이미지 망가뜨리지 말고, 조금만 자제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제나의 목소리에는 짙은 조소가 묻어났다.

마치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윤세린 씨도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오늘 이 모습이 운 나쁘게 ‘솔직한’ 언론사 기자들에게 찍힌다면, 애인의 커리어를 끝장낼 수도 있겠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경후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천천히 제나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단 한 걸음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확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남자의 그림자가 여자를 가득 덮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깊고, 위협적이었다.

“뭐라고 했어?”

‘뭐야, 이 분위기?'

제나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들었다.

‘고작 말 몇 마디 장난에 반응이...’

‘이혼하기로 한 이상, 이제는 끝난 사이 아닌가?’

‘그런데... 왜?’

‘왜 이 남자한테서 이런 분노가 느껴지는 거지?’

‘설마... 지금 내가 윤세린의 앞길을 놓고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제나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조용했던 복도 끝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이 가볍게 툭 끊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고령의 집사 한이철이 방 안에서 나왔다.

그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 회장님께서 계속 찾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경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방 안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노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정신은 또렷했고, 붉은빛이 감도는 홍목 의자에 앉아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경후를 발견한 노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우리 손자.”

경후는 준비해 온 선물을 건네며 간단히 말했다.

“할아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차정환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시선이 경후의 뒤로 들어온 제나를 향하는 순간, 그 미소는 점차 사라졌고, 눈빛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뭐지, 이 분위기?’

제나는 그 눈빛을 느끼고도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준비한 선물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할아버님, 부디 앞으로도 쭉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하지만 차정환은 제나가 주는 선물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손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싸늘한 눈길로 제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었고, 분명한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제나의 손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내가 뭐 그렇게 큰 잘못이라도 했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경후를 바라봤는데, 혹시라도 경후가 무슨 말을 해 줄까 싶었다.

도움의 손길? 그런 거 바라지도 말라는 듯이.

경후는 마치 제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이 인간, 진짜 답 없네.’

제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님, 이건 정성을 담아 준비한 선물입니다.”

그 순간, 차정환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부의 선물, 받을 수 없다. 도로 가져가거라.”

제나는 그 말을 듣고도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찝찝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차정환은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느리게 말했다.

“손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 모르는 건가?”

“그저 제가 차씨 가문으로 시집온 것 때문에 저를 미워하시는 건가요?”

제나는 차정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문득 느릿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와 경후 씨는 곧 이혼할 테니까요.”

그 순간, 차정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분명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방금, 그 반응 뭐지?’

제나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그러나 그녀가 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차정환이 손을 흔들었다.

“됐다. 나 피곤하니 그만 나가 보거라.”

경후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 할아버님.”

그러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제나는 몇 초간 그대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 역시 선물을 다시 손에 쥔 채 방을 나섰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상해. 차 회장의 태도는 단순한 반감이 아니었어.’

‘나를 싫어하는 이유도, 단순히 내가 차씨 가문에 시집온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

방에서 나오자마자, 제나는 연주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낮고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가서 옷 갈아입어.”

제나는 멍한 얼굴로 경후를 쳐다봤다.

“뭐?”

그는 한결같은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옷 갈아입으라고.”

제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싫어.”

그러자 경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제나, 옷 갈아입어.”

그러나 제나는 아예 못 들은 척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강한 힘이 여자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제나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경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했어.”

제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뭘 입든 안 입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경후의 얇은 입술이 차갑게 열렸다.

“참 보기 딱하군.”

‘뭐라고?’

제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당신이 보기 딱하다고 하면 나는 갈아입어야 해? 그동안 내가 당신 비위 맞춰주면서 살았더니, 이제는 내가 당신 말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보네?”

그녀는 남자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이거 놔! 미쳤어?”

그리고 몇 걸음 나아가려는데, 경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하제나.”

제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경후의 다음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옷 갈아입어.”

제나는 천천히 돌아섰고, 경후의 짙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눈매에 싸늘한 도전적인 빛이 스쳤다.

“만약, 내가 끝까지 갈아입지 않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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