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카시안은 조건서의 마지막 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그 아래 적힌 한 줄이 가슴을 꿰뚫었다.
전하께서 없는 미래입니다.
종이를 쥔 오른손이 떨렸다.
카시안은 구겨진 모서리를 천천히 폈다. 엘로이즈가 남긴 글자를 단 하나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전하.”
맞은편의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영애께서 다른 조건을 요구하셨습니까?”
“아니.”
카시안은 조건서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했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재산도 자유도 아니었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
처형대에서 엘로이즈를 잃고 보낸 열이레 동안에도 생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정보관이 들어와 봉인된 보고서를 내밀었다.
“성 베르나 구호원의 아동 인계가 중단됐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정체를 감춘 여인이 절차상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구호원장이 서명을 거부했고, 목격자가 늘어나자 신전 측이 물러났습니다.”
보고서에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아.
전생에서 엘로이즈가 남긴 실종 아동 명단의 첫 줄. 신전 지하의 빈 침상에도 같은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그 여인은?”
“낡은 옷으로 얼굴을 가렸답니다. 신전 보호 규정 제12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멎었다.
지금의 엘로이즈가 알기에는 지나치게 오래된 조항이었다.
설명되지 않는 위화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눌러 버렸다. 에버하르트가의 후계 교육에서 배웠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까지 죽음을 기억한다고 믿을 수는 없었다.
“인계 문서는 확보했나?”
“부본은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늘 저녁, 에버하르트가의 인장 관리관 베른이 신전의 호출장을 들고 저택을 빠져나갔습니다.”
“인장 관리관이?”
“예. 대신전 서쪽 회랑으로 들어간 뒤 행적이 끊겼습니다.”
정보관이 말을 이었다.
“같은 시각, 공작가의 퇴직 운송인들이 강변 검문소 주변에서 신전 사람들을 추적했습니다. 공작저에서도 무언가를 알아챈 듯합니다.”
신전의 인계가 실패한 직후, 인장을 관리하던 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공작가는 운송 경로를 뒤쫓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이 번개처럼 이어졌다.
아이들은 늘 구호 물자와 함께 이동했다. 귀족가의 정식 문서가 붙은 짐칸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운송망이다.”
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발행되는 에버하르트가 명의의 운송 명령을 전부 주시해.”
“황실이 공작가 문서를 막으면 반발이 일어날 겁니다.”
“막지 마.”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검문소마다 사본만 남기고 통과시켜. 목적지와 운송 대상, 최종 인수자를 전부 보고해.”
훔친 문서가 향하는 곳이 곧 신전의 다음 은신처였다.
데미안이 물었다.
“영애께도 알릴까요?”
카시안은 잠시 침묵했다.
엘로이즈는 자신이 없는 미래를 원했다.
그런데도 위험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알리지 마.”
그녀가 알면 자신의 개입부터 거부할 것이다.
카시안은 그것을 선택이 아니라 위험으로 판단했다.
“그녀의 사람에게 손대지는 마라. 다만 누가 접근하는지는 모두 기록해.”
데미안이 고개를 숙였다.
카시안은 품 안의 조건서를 눌렀다.
그녀가 원하는 미래에서 자신이 지워져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미래에 엘로이즈가 다시 죽는 것만은 허락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라도, 자신이 먼저 모든 칼날을 부러뜨릴 것이다.
결혼식은 라비엔에서 열렸다.황궁 대예배당도,대신전의 중앙 성소도 아니었다.에버하르트 성의 작은 예식실이었다.엘로이즈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곳을 골랐다.카시안도 동의했다.그날 아침,집무실 책상 위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었다.혼인 헌장 최종본.그리고 작은 반지함.엘로이즈는 반지함부터 열었다.비어 있었다.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한때는 아무것도 넣지 않기 위해 남겨 둔 상자.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간직했던 것.오늘도 아직 비어 있었다.엘로이즈는 그대로 뚜껑을 닫았다.예식실에 들어가자 카시안이 기다리고 있었다.제복은 입지 않았다.황실을 상징하는 망토도 없었다.그에게 왕관은 없었다.필요하지도 않았다.카시안이 그녀를 보고 웃었다.“왔어.”엘로이즈도 그의 앞에 섰다.“네.”하객석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에버하르트 전 공작.세라피나.북부에서 다시 수도와 라비엔을 오가게 된 로웬.새 아스트라 운영위원들.베아트리체도 가장 뒤쪽에 앉아 있었다.초대장은 카시안이 직접 보냈다.국정에 의결권은 없었고,카시안의 삶에도 더 이상 답을 정할 권리는 없었다.대사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그에 대한 교리 심판과 법적 책임 심사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모르텐의 재판도 마찬가지였다.모든 일이 오늘을 위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그래도 오늘 결혼할 수는 있었다
겨울이 끝날 무렵,아스트라 장기운영 보고서가 라비엔에 도착했다.엘로이즈는 첫 장만 오래 읽었다.넉 달.지역별 철수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안전 상한을 넘긴 사람은 없었다.북부는 자체 유지량을 먼저 확보한 뒤 남은 출력만 보냈고,두 차례의 지역 이탈에도 다른 지점으로 부담이 자동 전가되지 않았다.문제도 있었다.폭설 때 연락이 늦어진 지역이 있었고,교대 인력이 부족한 지점도 있었다.완성된 체계는 아니었다.그래도 사람 하나를 의자에 묶지 않고 겨울을 넘겼다.엘로이즈는 마지막 장에 적었다.〈차기 운영안에 교대 인력 확충 및 지역 감사 보완 필요.〉그리고 보고서를 덮었다.오늘 그녀가 처리할 문서는 따로 있었다.정오가 되자 에버하르트 성의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라비엔의 관리들.가신들.각 마을의 대표들이 자리를 채웠다.카시안도 뒤쪽에 앉아 있었다.중앙 비상조정관도,전 황태자도 아니었다.초청 명단에는 단순히 적혀 있었다.〈카시안 발렌티스 — 승계자의 개인 초청객.〉에버하르트 공작이 중앙으로 나왔다.그의 앞에는 세 가지가 놓여 있었다.가문의 인장.영지 장부.공작위 승계문.“엘로이즈 에버하르트.”“네.”그녀가 앞으로 걸어갔다.아버지가 물었다.“이 땅과 이 이름에 따르는 권리와 책임을 받겠느냐.”전생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황후가 되기 전이었다.그때 그
혼인 헌장 초안은 사흘 동안 네 번 바뀌었다.카시안이 먼저 추가한 조항이 있었다.〈배우자의 공적 지위는 혼인을 이유로 승계·확대되지 않는다.〉엘로이즈가 읽고 물었다.“전하를 위한 조항입니까?”“둘 다를 위한 거야.”카시안이 말했다.“네가 공작이 된다고 내가 라비엔에서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그는 다음 줄을 짚었다.“내가 공직을 맡는다고 네가 그 책임까지 같이 져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엘로이즈는 그대로 두었다.그녀가 추가한 것은 다른 조항이었다.〈공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각자는 독립된 당사자로 판단하며, 혼인 관계를 협상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카시안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도 좋아.”“반대할 줄 알았습니다.”“왜?”“부부가 공개적으로 다른 편에 설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카시안은 잠시 생각했다.“그럴 수도 있지.”“전하와 제가 서로 반대되는 정책을 지지해도요?”“응.”“제가 전하의 안건을 막아도?”“그럼 설득해야겠지.”그가 말했다.“남편이라서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엘로이즈는 마지막 수정 표시를 지웠다.그날 오후,법무관이 형식 검토를 마친 초안을 돌려줬다.황실 혼인법과 충돌하는 조항 없음.에버하르트의
책임 심의가 끝난 다음 날,엘로이즈는 라비엔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수도에서 더 처리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아스트라 장기운영 규정은 시행 단계에 들어갔고,카시안의 중앙 비상조정관 임기도 시작됐다.세라피나의 교리 심의는 대신전 내부 절차로 넘어갔다.남은 것은 각자가 맡을 일이었다.엘로이즈에게도 있었다.에버하르트 공작이 보내온 문서였다.〈라비엔 공작위 승계 절차 개시 요청.〉엘로이즈는 마지막 장에 서명했다.이제 공식적인 후계 절차를 시작할 수 있었다.그날 오후,카시안이 찾아왔다.“바빠?”“지금은 아닙니다.”그는 맞은편에 앉았지만,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엘로이즈가 먼저 물었다.“무슨 일입니까?”“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그 말에 엘로이즈는 펜을 내려놓았다.“물어보세요.”카시안은 천천히 말했다.“언젠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놀라서가 아니었다.언젠가는 나올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 질문을 들은 순간,전생의 결혼이 먼저 떠올랐다.황후가 되기 위한 교육.황실로 옮겨진 재산 관리권.공식 행사에서 먼저 불리던 남편의 이름.에버하르트보다 발렌티스가 앞섰던 모든 순간.카시안이 덧붙였다.“지금 하자는 뜻은 아니야.”엘로이즈가 그를 봤다.“알고 있
최종 책임 심의는 공개로 진행됐다.엘로이즈는 방청석에 앉았다.오늘은 조사자가 아니었다.이미 제출할 기록은 모두 제출했다.심의위원장이 첫 장을 읽었다.“베아트리체 발렌티스 황후.”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베아트리체는 피고석이 아니라 증언석에 앉아 있었다.황후의 관도 쓰지 않았다.“영아 교체 승인.”다음 장.“카시안 발렌티스의 생모 기록 폐기 승인.”다음.“황자의 적법한 지위를 명료하게 하라는 포괄적 정치 지시.”그리고 마지막.“원문과 다른 신탁 공표본을 사전에 확인하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위원장이 말했다.“네 사실 모두 최종 확인됐습니다.”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들었다.“이의 없습니다.”변호인이 움직였지만,그녀가 손을 들어 막았다.위원장이 물었다.“최종 진술하시겠습니까?”“하겠습니다.”베아트리체는 방청석을 보지 않았다.“당시 제국에는 황자가 필요했습니다.”익숙한 말이었다.“황실의 피를 가진 아이가 있었고, 죽은 제 아이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둘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누군가 숨을 삼켰다.“신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문장을 쓰지는 않았습니다.”그녀가 말했다.“하지만 그 거짓이 내 선택을 지켜 준다는 것을 알았고, 막지 않았습니다
세라피나가 성녀직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한 날,대신전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엘로이즈는 본전 안쪽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세라피나의 앞에는 두 장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하나는 성녀 사임서.다른 하나는 새로 작성된 직무 선언서였다.대사제가 물었다.“결정했습니까?”“네.”세라피나는 사임서를 먼저 집어 들었다.한동안 바라보다가,옆으로 밀어 놓았다.“저는 성녀직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회의실 여기저기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라피나가 두 번째 문서를 펼쳤다.“하지만 이전과 같은 성녀로 남지도 않겠습니다.”대사제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입니까?”“성녀가 아스트라의 최종 제물이 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규정한 모든 해석을 거부하겠습니다.”그녀는 한 줄씩 읽었다.성녀의 신력은 대신전의 소유가 아니다.아스트라 참여 여부는 성녀 본인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안전 상한과 철수권은 다른 참여자와 동일하게 적용한다.성녀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제한할 수 없다.그리고 마지막.〈성녀의 사명은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희생이 정당한지 묻는 데에도 있다.〉대사제가 낮게 말했다.“전통을 다시 정의하겠다는 겁니까?”세라피나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혼자 정의할 권한은 없습니다.”그녀가 답했다.&l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