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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사라진 상궁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8 22:15:32

'연'의 얼굴을 이 아이가 오기 전에 봐야 한다는 말에, 위지헌은 오래 답하지 않았다.

궁 안 깊은 곳이었다. 순검도, 왕부의 눈도 함부로 닿지 못하는 내명부. 그 안에 든 얼굴을 보려면, 궁 안의 사람이라야 했다. 회임한 몸으로 그 깊은 곳을 뒤지는 것은, 위험했다.

"…네가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

위지헌이 낮게 말했다.

"그 몸으로, 그 깊은 곳은 안 된다."

회임을 안 뒤로, 위지헌은 그녀를 두고 하는 모든 셈에서 한 가지를 먼저 놓았다. 그녀의 몸. 두 생을 건너온 사람도, 이번 생에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저도 알아요."

월령이 답했다.

"제가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 안을 아는 사람이 우리 편에 있어야 해요. 궁 안에서, 그 처소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요."

*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다.

설련이었다.

자녕궁을 떠난 뒤로, 설련은 내명부의 잔심부름을 제 삯으로 맡아 하고 있었다. 처소들을 드나들며 향을 대고, 명패를 나르고, 차를 올렸다. 궁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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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06. 사라진 상궁

    '연'의 얼굴을 이 아이가 오기 전에 봐야 한다는 말에, 위지헌은 오래 답하지 않았다.궁 안 깊은 곳이었다. 순검도, 왕부의 눈도 함부로 닿지 못하는 내명부. 그 안에 든 얼굴을 보려면, 궁 안의 사람이라야 했다. 회임한 몸으로 그 깊은 곳을 뒤지는 것은, 위험했다."…네가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위지헌이 낮게 말했다."그 몸으로, 그 깊은 곳은 안 된다."회임을 안 뒤로, 위지헌은 그녀를 두고 하는 모든 셈에서 한 가지를 먼저 놓았다. 그녀의 몸. 두 생을 건너온 사람도, 이번 생에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저도 알아요."월령이 답했다."제가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 안을 아는 사람이 우리 편에 있어야 해요. 궁 안에서, 그 처소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요."*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다.설련이었다.자녕궁을 떠난 뒤로, 설련은 내명부의 잔심부름을 제 삯으로 맡아 하고 있었다. 처소들을 드나들며 향을 대고, 명패를 나르고, 차를 올렸다. 궁 안 깊은 곳까지, 그 걸음이 닿았다.다만 설련은, 한때 자녕궁의 사람이었다. 그 걸음을 믿어도 되는지, 월령은 아직 다 알지 못했다.그러나 지난겨울부터, 설련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자녕궁의 그늘을 벗고, 제 발로 명패를 돌려주고, 제 삯으로 궁을 걸었다. 도구였던 사람이, 제 뜻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며칠 뒤, 월령은 설련을 왕부로 청했다.설련이 들었다. 지난겨울 자녕궁의 그늘 안에 있던 걸음이, 이제 제 발로 곧게 서 있었다.지난겨울 자녕궁 문을 나서던 걸음과는, 다른 걸음이었다. 누구의 뒤를 따르는 걸음이 아니라, 제가 어디로 갈지 아는 걸음이었다. 월령은 그 곧아진 걸음을 잠깐 눈에 담았다. 자녕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 어디에 설지는, 그 걸음이 정할 것이었다."섭정왕비마마. 부르셨습니까.""부탁이 하나 있어."월령이 낮게 말했다."부탁하기 전에, 하나 물을게. 너는 지금, 누구의 편이니."설련은 그 물음 앞에서, 잠깐 말이 없었다.*"…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05. 경사

    경화제가 자리에서 일어선 뒤로, 궁이 움직였다.며칠 뒤, 어전에서 경사가 반포되었다.섭정왕비의 회임이 국가의 경사로 선포되었고, 왕부와 섭정왕비의 처소에 황실의 호위가 더해졌다. 아직 오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황제의 조카로 종묘의 그늘 아래 놓였다.온 궁이 그 경사를 감축했다.왕부의 대문에 황실의 등이 걸렸고, 심가에도 경사의 기별이 닿았다. 유씨는 그 기별을 받고 오래 울었다. 전생에 딸을 잃은 어미가, 이번 생에는 딸의 아이를 기다리게 된 봄이었다.심가의 대문에도, 오랜만에 붉은 등이 걸렸다. 지난 생에 딸이 형장으로 끌려가던 집이, 이번 생에는 경사의 등을 다는 집이 되었다.*그 경사 앞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노가의 명분이었다.정비가 후사를 보는데, 측실을 들일 까닭이 없었다. '후사를 돕는 자리'라던 노가의 명분은, 경사 하나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노예원은, 그 경사가 반포되던 자리에 있었다.제가 다회에서 알아낸 소식이, 며칠 만에 온 나라의 경사가 되어 돌아왔다. 몰래 쥐려던 패가, 남의 손에서 크게 펼쳐졌다. 그 여인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월령은 그 자리에서, 노예원을 한 번 보았다. 미워하는 눈이 아니었다. 다만, 네가 본 것을 내가 먼저 밝혔다는 눈이었다.노예원은 그 눈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재색으로도 야심으로도, 두 생을 건너온 눈을 마주 보기는 어려웠다.*경사가 반포된 그 밤, 왕부에 강무진이 들었다.이번에는,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도리어 무거웠다."안쪽 처소의 상궁이… 사라졌습니다."월령이 고개를 들었다."사라져?""경사가 반포된 그날 밤, 처소를 나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노 소저에게서 받은 서찰도, 남쪽으로 띄우던 길도, 모두 끊겼습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소식을 먼저 밝혀, '연'이 이 경사를 몰래 겨누지 못하게 막았다. 여기까지는, 월령이 그린 대로였다.그런데 '연'은, 겨누지 못하게 되자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상궁을 거두고, 서찰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04. 먼저 말하는 사람

    "저들보다 먼저?"위지헌이 되물었다."네."월령이 낮게 말했다."'연'이 이 소식을 무섭게 쓰는 건, 이게 감춰진 소식일 때예요. 감춰진 걸 저들이 알아내면, 몰래 겨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온 나라가 아는 경사가 되면요?"위지헌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몰래 겨눌 수 없다.""온 나라가 아는 경사를 몰래 겨누면, 그건 곧 역심이 돼요. 저들이 이 아이를 겨누는 순간, 저들이 먼저 드러나요. 그러니까 이 소식은, 숨기는 게 방패가 아니라 드러내는 게 방패예요."위지헌은 그녀를 오래 보았다.지난겨울 그가 '연'의 눈을 뽑지 않고 돌려 썼듯, 이번에는 그녀가 감출 소식을 도리어 드러내 방패로 삼으려 했다.*이튿날, 월령은 황후에게 들었다.내명부의 경사는 황후의 손을 거쳐 알려지는 것이 법도였다. 월령은 그 법도를, 이번에는 제 방패로 썼다."마마. 소녀, 회임하였습니다."황후의 부채가, 잠깐 멎었다."…경사로구나.""경사이옵니다. 다만 소녀, 이 경사를 조용히 두기보다 마마의 손으로 밝혀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온 궁이 함께 기뻐하는 경사로."황후는 월령을 오래 보았다.이 영리한 며느리가 왜 경사를 조용히 두지 않고 크게 밝히려 하는지, 황후는 다 묻지 않았다. 다만, 그 청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네 뜻이 그러하다면."황후가 낮게 말했다."이 경사는, 이 자리가 밝히마."황후는 그 이상 캐지 않았다. 다만, 며느리가 경사를 방패로 쓰려 한다는 것만은 눈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방패를 함께 들어 주기로, 말없이 정했다.*같은 날, 위지헌은 경화제에게 들었다.형과 아우가 마주 앉는 자리였다."형님."위지헌이, 오랜만에 그 호칭을 썼다."제게, 아이가 생겼습니다."경화제의 손이, 붓 위에서 멎었다.늦둥이 아우였다. 오래 혼자였던 아우였다. 그 아우가 곁에 사람을 두더니, 이제 그 사이에서, 아이가 오려 하고 있었다.경화제는 붓을 내려놓았다."…지헌아."황제가 아니라, 형의 목소리였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03. 낯빛

    "…마마. 혹시."노예원의 말이, 거기서 잠깐 멈췄다.말끝을 흐린 것은,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확신한 것을 이 자리에서 다 말하지 않는 것이, 그 여인의 수였다."혹시, 무엇입니까."월령이 되물었다. 낯빛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아니요."노예원이 옅게 웃었다."마마께서 피곤해 보이셔서요. 봄을 타시나 봅니다. 몸을 잘 살피셔야지요. 귀한 몸이시니."'귀한 몸'이라는 말에, 그 여인은 옅은 무게를 실었다. 아무 뜻 없는 인사 같았으나, 아는 사람에게는 다른 뜻이 들리는 말이었다."염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월령은 그 말을, 아무 무게 없이 받았다.*궁문을 나서는 가마 안에서야, 월령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화전 냄새에 멎었던 그 한 박자를, 노예원이 놓치지 않았다. 향에 약한 몸을, 그 여인이 확인했다.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을 보여 주고 오겠다 했으나, 몸이 한 박자 먼저 답을 흘렸다.이제 노예원은, 제가 본 것을 어딘가로 옮길 것이었다. 그 어딘가가, 문제였다.월령은 가마 안에서, 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아무 표도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표 없는 것을, 노예원 같은 눈은 냄새로 읽었다. 감추려 할수록, 감춘 것이 더 도드라졌다.그래서 감추는 것만으로는, 이 소식을 지킬 수 없었다. 월령은 가마가 왕부에 닿기도 전에, 이미 다른 길을 더듬고 있었다.*그 밤, 강무진이 왕부에 들었다. 걸음이 빨랐다."다회가 파한 뒤, 노 소저가 안쪽 처소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처소의 상궁이, 그 길로 서찰 하나를 남쪽으로 띄웠습니다.""남쪽.""'연'의 자취가 나던, 그 방향입니다."월령의 손끝이 식었다.노예원이 본 것이, 노예원의 조바심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상궁을 거쳐, '연'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위지헌의 눈이 서늘해졌다."그 서찰을, 막으랴."강무진이 낮게 물었다.막을 수 있었다. 남쪽으로 가는 파발 하나를, 강무진이 중간에서 세울 수 있었다.그러나 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02. 봄이 가기 전

    노예원의 다회는, 어원의 복사꽃 아래에 차려졌다.봄이 가기 전, 마지막 꽃놀이라 했다. 내명부의 여인 몇이 자리했고, 상 위에는 봄나물과 과실, 향이 짙은 화전이 올랐다.월령은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그 자리에 들었다.*노예원은 곱게 맞았다."섭정왕비마마. 이렇게 와 주시니, 다회에 빛이 납니다.""청해 주셔서 왔습니다."두 여인은 곱게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곱게 나누는 인사 아래로, 서로가 서로를 재고 있었다. 한쪽은 무엇을 감추려 하고, 한쪽은 그 감춘 것을 들추려 했다.봄이 가기 전 마지막 꽃놀이라는 말은, 겉의 이름이었다. 속의 이름은 따로 있었다. 노예원은 이 자리에서, 섭정왕비의 몸을 확인하려 했다. 향으로, 음식으로, 오래 앉히는 것으로.노예원이 직접, 화전 한 접시를 월령 앞으로 밀었다."마마, 이 화전이 별미입니다. 향을 진하게 넣어, 봄내가 물씬 나지요. 한 점 드셔 보세요."*월령은 그 화전을 보았다.향이 짙었다. 기름에 지진 냄새와, 꽃을 짓이겨 넣은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그 냄새가 코에 닿는 순간, 속이 울렁였다.회임한 몸은, 짙은 냄새에 약했다. 아침마다 옅은 죽 냄새에도 물리던 몸이었다. 하물며 기름에 지진 진한 화전이었다.향이 짙을수록, 몸이 먼저 답했다. 노예원이 굳이 향이 가장 진한 화전을 고른 것도, 그 답을 보려는 것이었다.월령은 그 울렁임을, 얼굴에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노예원의 눈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찌, 안 드십니까."노예원이 물었다.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눈은 다정하지 않았다."마마께서, 요즘 봄을 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입맛이 없으시면… 향이 진한 것이 도리어 힘이 되지요. 한 점만."노예원이 화전을 든 젓가락을, 월령 쪽으로 내밀었다.월령은 그 젓가락을 보았다.받아 먹으면, 속이 뒤집힐 것이었다. 받지 않으면, 향에 약한 몸을 저 여인이 확인할 것이었다. 어느 쪽을 골라도, 노예원의 눈에 답이 하나 놓였다.향에 약한 여인. 봄을 타는 여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01. 소식을 쥐다

    회임을 확인한 이튿날 아침, 위지헌은 월령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깨어서, 아직 잠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 아래 아직 아무 표도 나지 않은 자리를.월령이 눈을 떴다."…뭘 그렇게 보세요.""아직, 아무것도 안 보인다.""두 달인데, 뭐가 보이겠어요."위지헌은 그 말에 대답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전장에서 수천을 베던 손이, 그 자리에서만은 깃털을 얹듯 가벼웠다."…안 무거워요, 그 손.""무거울까 봐."월령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두 생을 건너온 사람이, 아직 오지도 않은 아이 앞에서 손 무게를 걱정하고 있었다."두 달이라 했지."위지헌이 낮게 말했다."그 밤이겠구나. 우리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한 밤."월령의 귓불이 옅게 붉어졌다. 두 생의 비밀을 다 꺼내 놓은 밤이었다. 숨길 것이 없어, 가장 뜨거웠던 밤. 그 밤에 이 아이가 왔다.월령은 제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그 밤을 오래 떠올렸다.*아침상을 물린 뒤, 두 사람은 이 소식을 어찌할지 이야기했다."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어머니껜 이미 아셨지만, 그 밖으로는 안 돼요. 이 소식이 궁에 퍼지면, 가장 먼저 아는 건 우리 편이 아니라 '연'일 거예요."위지헌의 눈이 서늘해졌다.'연'이 두 생에 걸쳐 지우려 한 것이, 이 아이였다. 그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은, '연'에게는 두 생을 건 마지막 표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소식을 쥐는 것도, 하나의 방패다."위지헌이 말했다."저들이 모르는 동안은, 저들이 겨눌 수 없다."*그러나 소식을 쥐고 있기에는, 이미 그 소식을 노리는 눈이 있었다.노예원이었다.측실 명분이 깨진 뒤로, 노예원은 물러나기는커녕 도리어 조바심을 냈다. 그 여인에게, 섭정왕비의 회임은 가장 무서운 소식이었다. 정비가 후사를 보면, 측실 자리마저 영영 사라졌으니까.그래서 노예원은, 월령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걸음이 무거워지지 않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 등불

    자녕궁에 가는 날, 경성의 거리에는 낮부터 등틀이 세워지고 있었다.상원절은 이미 지났지만, 대연의 봄에는 작은 등놀이가 자주 열렸다. 남쪽 수해지에서 올라온 장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종이등을 만들었고, 궁은 그것을 사들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양을 갖췄다. 거리의 아이들은 등불을 좋아했고, 어른들은 쌀값을 생각하며 그 빛을 보았다.빛은 늘 아름다웠다.그러나 빛을 밝히는 기름값은 누군가의 장부에 적혔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말이 없었다.오늘의 서윤은 옅은 연두빛 치마를 입었다. 한씨가 골라 준 옷이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9. 이름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8. 장부

    아이의 이름은 은호였다.은매가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는 거의 소리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은호야. 그 두 글자가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매는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동생이 깰까 봐 참는 울음이었다.은호는 작았다.일곱 살이라 들었지만, 마른 몸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손목에는 회색 실이 묶여 있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침을 참을 때마다 혀끝으로 이를 쳤다. 딱, 딱. 작은 소리는 방 안 사람들의 숨을 매번 붙잡았다.왕부 의원은 은호의 맥을 짚고 오래 말이 없었다.청아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7. 온기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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