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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걸어 나오다

Autor: moominkiller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9-01 22:54:29

늙은 후궁을, 황후가 거두었다.

시끄러운 국문은 없었다. 잊힌 별당에 숨어들고, 정비의 산실에 적련초를 놓은 후궁이었다. 그것만으로, 황후가 그 여인을 조용히 내명부 밖으로 물릴 명분은 넉넉했다.

경화제도, 그 물림을 어전의 침묵으로 윤허했다.

시끄러운 벌은 이야깃거리를 남겼고, 이야깃거리는 다음 손을 조심하게 했다. 조용한 물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연'의 다음 손이 어디까지 잘렸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

끌려 나가면서도, 늙은 후궁은 발버둥 치지 않았다.

도리어 고요했다. 오래 해 온 일 하나가 끝난 사람의 고요였다.

그 여인이, 문을 나서기 전 월령을 한 번 돌아보았다.

"…이 자리는 물러나오. 그러나 명부는, 이미 다음 손에 넘겼소."

월령의 손끝이 식었다.

"'연'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다 하지 않았소. 나는 물러나도, 명부는 남소. 그대의 아이가 오는 봄에, 그 명부를 든 다음 손이 올 것이오."

그 말을 남기고, 늙은 후궁은 문밖으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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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24. 문 밖의 사람

    황후가, 향로의 재를 초야의 얼굴에 뿌렸다.재가 눈에 들자, 초야가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향낭을 쥔 손이, 허공에서 흔들렸다.그 틈에 설련이 향낭을 빼앗아, 물그릇에 처넣었다. 마른 붉은 꽃잎이 물속에서 풀어졌다.초야가 눈을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았다. 오래 도망쳐 온 몸은, 눈이 멀어도 발이 먼저 문을 찾았다."…잡아! 문을 막아!"황후가 소리쳤다. 그러나 산실 안에는, 그 여인을 힘으로 막을 손이 없었다. 산모와, 시비와, 늙은 황후뿐이었다.설련이 초야의 옷자락을 잡았다가, 그 힘에 밀려 넘어졌다.*"…마마님, 지금이에요!"청아가 소리쳤다.월령의 통증이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왔다. 향낭은 물에 잠겼고, 초야는 눈을 감싸 쥐었고, 산실은 아수라장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아이가 나오려 했다."마마님, 눈 뜨세요! 정신 놓으면 안 돼요!"청아가 소리쳤다.월령의 눈이 자꾸 감겼다. 통증과, 옅게 남은 향이 그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배에 힘을 주며, 눈을 떴다."…안 놔. 이 아이는, 내가 낳아.""초야를 잡아라!"황후가 명했다.그러나 그 명을 받을 금군이, 문 안에는 없었다. 문밖의 위지헌이 그 명을 들었다. 그의 손이 칼자루로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벨 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벨 수 있는 것은, 그 문 안에 없었다."…월령아."위지헌이 문밖에서 낮게 불렀다.반나절 동안, 그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가 안에서 정신을 놓으려는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낮게 이름을 불렀다."…듣고 있느냐. 나, 여기 있다."안에서, 월령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감기던 눈이 다시 떠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그 소리는 닿았다. 늦지 않은 소리였다.그러나 초야는, 재를 뒤집어쓴 채로도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눈이 멀어도, 나갈 문은 아는 몸이었다.*산실 문이, 그 순간 벌컥 열렸다.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자리에, 위지헌이 서 있었다.들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23. 소매 안의 것

    초야의 손이 소매에서 나왔다.작은 것이 쥐여 있었다. 마른 붉은 꽃잎을 뭉친, 향낭이었다."태울 것도 없습니다."초야가 낮게 말했다."지친 숨 가까이 두기만 하면 됩니다. 산기에 지친 숨은, 이 향을 이기지 못하지요."그 여인이, 향낭을 쥔 손을 월령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물러서라."황후의 목소리가 산실을 갈랐다. 그러나 초야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물러설 수 없습니다, 마마. 이 일은 오늘 밤으로 정해진 일이라."*설련이, 그 손목을 잡았다.두 손이 향낭 하나를 두고 실랑이했다. 늙지 않은 초야의 힘이, 설련의 손을 조금씩 밀어냈다. 향낭이 다시 월령의 얼굴 쪽으로 기울었다."…놓으십시오."설련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손은 떨리지 않았다."놓아라, 아이야."초야가 낮게 말했다."이 일은 너보다 오래된 일이다. 너 같은 아이가 막을 일이 아니야.""…압니다."설련이 손목을 더 세게 쥐었다."오래된 일인 거, 저도 압니다. 그래서 막습니다."초야가 설련을 보았다. 재를 뒤집어쓰기 전의, 아직 고요한 눈이었다."…너도 자녕궁의 그늘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냐. 그 그늘이 무엇을 시키는지, 너는 알 텐데.""알아서, 나왔습니다."설련이 손목을 더 세게 쥐었다."그 그늘이 무엇을 시키는지 알아서, 저는 거기서 나왔어요."초야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다시 고요해졌다."…나온다고 벗어날 것 같으냐. 명부에 한번 오른 이름은, 지워지지 않아.""그럼 오늘, 지우는 걸 보여 드리지요."설련이 이를 악물었다.향낭이, 두 손 사이에서 다시 한 번 기울었다.*월령의 통증이, 다시 밀려왔다.산기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향낭이 코앞에서 실랑이하는 그 순간에도, 아이는 나오려 했다."…마마님!"청아가 월령을 부축했다.월령은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흐려지면 저 향에 지고, 정신을 붙들면 아이를 낳는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했다."…청아야."월령이 통증 사이로 낮게 불렀다."네, 마마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22. 이름이 뭐지

    "…초야라 하옵니다."산파가 답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월령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배를 짚었다."초야."월령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초야. 처음 듣는 이름이구나.""…궁에 든 지, 오래되지 않았사옵니다.""그런데 어찌, 내 산실에 들었지.""내명부에서 보내셨습니다."초야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물음마다, 미리 준비한 답이 있는 사람이었다.통증이 한 차례 지나갔다. 그 사이에도, 월령의 눈은 산파의 손을 놓지 않았다."네 손에서, 향이 난다.""산실에 향을 조금 피웠사옵니다. 산모의 마음을 가라앉히는—""물려라, 그 향."초야는 향을 물리지 않았다. 도리어, 향이 밴 소맷자락을 월령의 얼굴 쪽으로 반 뼘 더 가져왔다."산모가 향을 가려서는, 순산이 어렵습니다.""…가라앉히는 향이라며.""예. 아주, 깊이 가라앉히지요."*윗자리에서, 황후가 눈을 들었다."무슨 향이냐.""…자경향이옵니다, 마마. 산실에 흔히 쓰는—""내가 들인 산실에, 내가 모르는 향이 있구나."황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산파의 손이, 잠깐 멎었다."자경향에서, 남쪽 절터 냄새가 나느냐."황후가 낮게 물었다.초야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월령이, 통증 사이로 초야를 보았다."…네가, 다음 손이구나.""다음 손이요?"초야가 옅게 웃었다."저는 그저, 오래된 명부에 이름을 잇는 사람입니다. 마마의 어머니 때에도, 마마 때에도 있던 이름을요."월령의 손끝이 식었다. 늙은 후궁이 넘겼다던 그 명부가, 이 젊은 손에 들려 있었다."이름은 늙어도, 명부는 늙지 않지요.""…그 명부를, 오늘 밤 네 손에서 끊는다."월령이 통증 사이로 낮게 말했다."산모가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한데요.""산모라서 하는 말이다. 내 아이 위에서 그 명부를 잇게, 두지 않아."*그때, 청아가 나섰다."마마님, 그 향… 저 알아요."청아는 왕부에서 기름통에 그려진 밤을 여러 번 나른 아이였다. 그 향을, 코가 먼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21. 봄이 오던 밤

    살구가 다시 꽃을 피운 봄, 월령의 산기가 왔다.예정보다, 이레 일렀다.*곤원전 곁 산실에 등이 환히 밝혀졌고, 그 문 앞에 위지헌이 서 있었다.반나절째였다."…아직, 멀었느냐."문 안으로는, 그의 걸음이 들지 못했다. 그는 그 한 뼘 앞에서 물었다."초산이라, 오래 걸립니다."상궁이 문틈으로 아뢰었다."안에, 누가 있지.""황후마마와, 어의와, 산파와… 왕부에서 온 시비 둘이 있사옵니다."위지헌은 그 문을 오래 보았다.장인 심도윤이 그 곁에 함께 서 있었다. 딸의 산기 소식에, 갑주도 벗지 못하고 달려온 걸음이었다."…초산은, 다 이렇게 깁니다."심도윤이 낮게 말했다. 위로하는 법을 모르는 노장이, 제 딴에 건네는 말이었다."압니다.""…그런데도, 서 있는 게 낫지요."두 사내가 그 문 앞에 나란히 섰다. 하나는 아비, 하나는 지아비였다. 둘 다 그 문 안으로는, 한 걸음도 들지 못했다.위지헌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모았다. 신음 한 번에 어깨가 굳었고, 소리가 잦아들면 다시 풀렸다.한 식경에 한 번씩, 안에서 상궁이 문틈으로 짧게 아뢰었다."아직, 이옵니다."그 '아직'이라는 말을, 위지헌은 반나절 동안 여러 번 들었다. 들을 때마다, 그는 문지방을 한 번씩 내려다보았다. 넘고 싶은 문이었다. 넘을 수 없는 문이었다.그 문 하나가, 반나절째 그를 붙들고 있었다.*산실 안에서, 월령은 이를 악물었다.청아가 손을 잡았고, 설련이 더운 물을 날랐다. 황후는 윗자리에 앉아, 드나드는 손을 눈으로 세었다."…아파."월령이 낮게 신음했다."조금만요, 마마님. 이제 곧이에요."청아가 그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저도 처음 드는 산실이라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도, 안주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산파가 월령의 곁에 붙었다. 며칠 전 내명부에서 보낸 손이었다. 손이 야무지고, 말이 적었다."황후마마께서 직접 내력을 살피어 들이신 손이라 하옵니다."어의가 낮게 아뢰었다.황후는 그 산파를 한 번 보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20. 걸어 나오다

    늙은 후궁을, 황후가 거두었다.시끄러운 국문은 없었다. 잊힌 별당에 숨어들고, 정비의 산실에 적련초를 놓은 후궁이었다. 그것만으로, 황후가 그 여인을 조용히 내명부 밖으로 물릴 명분은 넉넉했다.경화제도, 그 물림을 어전의 침묵으로 윤허했다.시끄러운 벌은 이야깃거리를 남겼고, 이야깃거리는 다음 손을 조심하게 했다. 조용한 물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연'의 다음 손이 어디까지 잘렸는지 가늠하지 못했다.*끌려 나가면서도, 늙은 후궁은 발버둥 치지 않았다.도리어 고요했다. 오래 해 온 일 하나가 끝난 사람의 고요였다.그 여인이, 문을 나서기 전 월령을 한 번 돌아보았다."…이 자리는 물러나오. 그러나 명부는, 이미 다음 손에 넘겼소."월령의 손끝이 식었다."'연'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다 하지 않았소. 나는 물러나도, 명부는 남소. 그대의 아이가 오는 봄에, 그 명부를 든 다음 손이 올 것이오."그 말을 남기고, 늙은 후궁은 문밖으로 사라졌다.*월령은, 그 별당을 나섰다.내명부의 안쪽에서, 경계 쪽으로. 두 생 만에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걸음이었다.전생에 이 안쪽은, 그녀가 끌려 들어와 죽은 자리였다. 곁에 아무도 없이, 아무도 오지 않는 줄 알고 눈을 감은 자리. 그 안쪽에서 이번 생에는, 회임한 몸으로 제 발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지난 생을 거슬렀다. 끌려 들어가던 걸음을, 걸어 나오는 걸음으로. 죽으러 들던 자리에서, 아이를 품고 나오는 자리로.경계 앞에, 위지헌이 서 있었다.*내명부의 경계까지 온 위지헌은, 그 안으로 한 걸음도 들지 못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전생에 그가 늦었던 그 경계였다. 이번 생에 그는, 그 경계 앞에서 그녀가 걸어 나오기를 지키고 있었다.월령이 그 경계를 넘어서자, 위지헌이 그녀를 안았다.내명부 밖이었다. 이제 그의 손이 닿는 자리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오래 그녀를 안았다. 세게 당기지 않았다. 다만, 두 생을 건너 처음으로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9. 마주 앉다

    옛 산실이 열리자, '연'은 궁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그러나 이번에는, 자취를 감출 자리가 없었다.월령은 옛 산실을 열기 전에, 이미 궁의 문마다 사람을 세워 두었다. 강무진이 성문 밖을, 설련이 내명부의 안쪽을 살폈다. '연'이 옛 산실에서 몰려 나오면, 그 발이 어디로 가는지 보려는 것이었다.*설련이, 그 늙은 후궁의 자취를 곤원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옛 별당에서 찾았다.버려진 별당이었다. '연'은 옛 산실을 떠나, 또 다른 잊힌 자리로 옮겨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리의 문마다 월령의 사람이 서 있었다.숨을 자리가 없어진 '연'은, 도망치지 않았다.도리어, 그 별당의 문을 스스로 열었다.*월령이 그 별당으로 향할 때, 위지헌은 내명부의 경계 앞에 섰다.거기까지가, 그의 걸음이 닿는 자리였다. 사내의 걸음은 그 안으로 들지 못했다. 두 생에 걸쳐 '연'이 숨어 온 자리가, 바로 그 사내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였다."…혼자, 괜찮겠느냐."위지헌이 낮게 물었다. 아내를 그 안으로 홀로 들여보내는 것이, 그의 얼굴에 오래된 아픔으로 스쳤다.전생에, 그는 그 경계 밖에서 늦었다. 이번 생에도, 그는 그 경계 앞에 서 있었다."괜찮아요."월령이 낮게 답했다."이번에는, 제가 걸어 들어가는 거예요. 끌려가는 게 아니라."*별당 안에, 늙은 후궁이 앉아 있었다.주름진 얼굴이었다. 종묘에서 위지헌과 눈을 마주친 그 얼굴. 붉은 꽃을 들고 형장을 지켜보던, 그 얼굴.월령이 그 앞에 섰다.두 생 만에, 처음으로 마주 보는 얼굴이었다. 전생에 월령은, 이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이번 생에, 그 얼굴을 살아서 마주 보고 있었다."…앉으시지요."늙은 후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별당에 든 손님을 맞듯, 고요한 목소리였다.*월령은 앉지 않았다."당신이, '연'이군요.""'연'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늙은 후궁이 옅게 웃었다."다만 지금은, 내가 그 이름을 쓰고 있소."월령의 손끝이 식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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