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0. 붓끝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4 00:56:24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

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

서윤은 붓을 손에 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붓대는 차갑고 매끈했다. 너무 가벼워서 도리어 무거웠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곧장 물건을 내려 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 한씨는 늘 말했다. 얌전해야 한다고, 월령 언니보다 먼저 나서면 안 된다고, 큰어머니 앞에서는 웃음을 낮추고 대장군 앞에서는 말을 줄이라고 했다. 손님 앞에서는 서두르지 말고, 글씨는 곧게 쓰고, 눈물은 고운 때에 흘려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서윤은 그 말들을 모두 외웠다.

외우면 사랑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집 안의 모든 길은 이상하게도 월령에게 먼저 닿았다. 부엌에서 새로 찐 약식도, 포목점에서 들어온 고운 비단도, 친척 어른들의 칭찬도, 심도윤의 짧은 눈길도.

월령 언니는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말을 부드럽게 하면 사람들이 더 다정하다고 했고, 눈을 내리깔면 더 가련하다고 했다. 웃지 않아도 품위가 있다 했고, 아파 보여도 마음이 깊다 했다.

서윤은 거울 앞에서 그 표정을 몇 번이나 따라 해 보았다.

속눈썹을 조금 천천히 내리고, 목소리를 한 치 낮추고, 손끝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런데 같은 표정을 지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은 달랐다.

어린것이 벌써 꾀를 부린다.

얌전한 듯해도 속이 많구나.

서윤은 붓을 꼭 쥐었다.

자녕궁에서는 달랐다.

태후마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글씨를 배웠느냐 물었고, 부끄럽다면서도 손은 곧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누군가 처음으로 월령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먼저 쓸모를 본 것 같았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아가씨."

금지의 목소리였다.

서윤은 급히 붓을 베개 아래로 밀어 넣었다가, 곧 다시 꺼냈다.

숨길 필요가 없었다.

태후마마께서 내려 주신 것이었다.

"들어와."

금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남쪽 연못가의 밤 이후, 금지는 서윤 앞에서도 말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둘째 부인께서 주무셨는지 살피라 하셨습니다."

"잤다고 해."

"예?"

"잤다고 하라고."

서윤의 말끝은 조금 날카로웠다.

금지는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곧 후회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은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녀는 붓대를 어루만지며 다시 낮게 말했다.

"내가 피곤해서 그래. 놀라지 마."

금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 안의 침묵은 오래된 먹물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심가의 다음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궁에서 입고 돌아온 옷들은 따로 빨았다. 우물가에서는 계집종 둘이 회청색 치마와 연두색 비단 자락을 펼쳐 놓고 물에 담갔다 빼기를 반복했다. 향을 빼기 위해 말린 쑥과 갈분을 조금 풀었고, 빨래판 위에서는 비단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부드럽게 났다.

청아는 월령의 소매를 뒤집어 보며 눈을 찌푸렸다.

"아가씨, 여기는 조금 금빛이 남은 것 같습니다."

월령은 손을 멈췄다.

어제 자녕궁에서 손수건 너머로 받았던 잔.

흰 찻물 위로 돌던 아주 옅은 금빛.

입술에 닿지 않았어도 궁의 것은 늦게 드러난다던 낮은 목소리.

월령은 소매 끝을 받아 보았다. 햇빛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물을 아주 조금 묻히자 섬유 사이에 실금처럼 옅은 빛이 떠올랐다.

"이 옷은 따로 말려."

"태울까요?"

청아가 겁먹은 눈으로 물었다.

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태우면 태운 자리가 남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 월령은 잠시 침묵했다.

이런 말을 언제부터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을까.

불길.

타는 비단 냄새.

별궁의 창문 너머로 흔들리던 붉은빛.

월령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물기를 빼고, 서원당 안쪽 약재 서랍 아래에 넣어 둬. 아무도 만지지 않게."

"예, 아가씨."

청아는 곧장 움직였다. 겁이 많아도 손은 야무졌다. 젖은 옷자락을 접는 손끝이 빠르고 반듯했다.

부엌 쪽에서는 아침죽 냄새가 올라왔다. 어머니의 기침이 아직 남아 있어 찹쌀을 묽게 끓이고, 배를 얇게 저며 꿀에 재웠다. 장작 값이 올랐다고 부엌 하인이 투덜거렸고, 다른 하인이 북문군 군량이 늦으면 경안 장작도 덩달아 귀해진다며 맞장구쳤다.

황궁의 흰 잔과 부엌의 장작 값.

멀리 있는 것 같아도 모두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월령은 그 줄이 목을 조르기 전에 먼저 손끝에 감아야 했다.

그날 하루, 자녕궁에서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서윤의 방에는 먹 냄새가 짙어졌다.

그녀는 아침마다 붓을 닦았다. 물그릇을 바꾸고, 벼루를 갈고,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흰 종이를 펴 놓았다가 다시 접었다. 한씨는 처음에는 그것을 기특하게 보았다. 딸이 태후의 은혜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닷새가 되자, 한씨의 눈 밑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부름이 오지 않는 은혜는 때로 꾸짖음보다 사람을 오래 흔든다.

월령은 서원당에서 어머니의 탕약을 식히며 그 변화를 보았다.

한씨의 말이 부드러워질수록 서윤의 손은 더 굳었다. 서윤은 웃고, 예를 갖추고,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자꾸 동쪽 대문 쪽으로 미끄러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다시 불러 줄 누군가를.

"영아."

어머니가 낮게 불렀다.

월령은 숟가락을 멈췄다.

"예, 어머니."

"서윤이를 미워하니?"

탕약 위로 김이 얇게 흔들렸다.

월령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미워한다.

그렇게 말하면 쉬웠을 것이다.

예전의 밤들을 떠올리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녀함, 위조된 서신, 울먹이던 목소리, 그리고 눈물로 덮인 배신.

그러나 지금 서윤은 아직 열다섯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어른 흉내를 내고, 월령의 그림자 바깥에 서기 위해 손끝이 아프도록 붓을 쥐는 아이.

죄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직 지어지지 않은 죄까지 베어낼 수는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월령은 조용히 말했다.

"미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미워하기만 하면 그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오래도록 월령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붙잡으려 하느냐."

"붙잡고 싶은데..."

월령은 웃으려 했다. 웃음은 입술 끝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손을 내밀면 빼앗는다고 여길까 봐 겁이 납니다."

어머니의 손이 월령의 손등을 덮었다.

"사람을 붙잡는 일은 약보다 어렵다."

그 말은 따뜻했고, 아팠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마침 그때 바깥에서 청아의 발소리가 급히 다가왔다.

"아가씨."

문밖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숨이 빨랐다.

"자녕궁에서 상궁마마가 오셨습니다."

문상궁은 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얇은 긴장이 남았다. 옷은 짙은 먹빛에 가까운 청색이었고, 소매 끝에는 아주 가는 금선이 한 줄 놓여 있었다. 걷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지만 서두르는 법도 없었다.

심가 안채의 하인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허리를 숙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사람은 명령보다 더 오래 훈련된 예법 앞에서 먼저 몸을 낮춘다.

문상궁은 어머니에게 먼저 예를 갖췄다.

"태후마마께서 심 부인의 차도를 물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몸을 낮추었다.

"마마의 은혜가 과합니다."

"마마께서는 과한 은혜를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문상궁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웃음도, 위협도 없었다.

그래서 더 피하기 어려웠다.

문상궁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비단 상자의 각을 손끝으로 맞추었다. 봉인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궁녀의 소매가 상자에 닿지 않았는지 차례로 살피는 동작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칼보다 오래 갈린 예법이 사람의 숨을 낮추었다.

그녀는 뒤따르던 궁녀에게 눈짓했다. 궁녀가 낮은 비단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흰 내지 스무 장과 작은 먹 하나, 그리고 비단 끈으로 묶인 봉서가 놓여 있었다.

"자녕궁 내지입니다."

그 말에 한씨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 조심스러워졌다.

한씨는 손수건을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접힌 모서리가 조금씩 비뚤어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윤은 숨을 멈췄다.

월령은 내지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평범한 종이처럼 보였다. 흰빛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표면이 너무 고왔다. 그러나 종이 한 장의 네 모서리에 아주 희미한 선이 있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고, 등불 아래에서야 살아날 금빛.

궁의 종이는 글씨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손끝의 물기와 지워진 망설임까지 오래 붙잡았다.

"마마께서 심 소저의 글씨를 곱게 여기셨습니다."

문상궁의 시선이 서윤에게 닿았다.

서윤은 그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졌다.

월령은 그 붉어짐을 보며 속이 서늘해졌다.

태후는 다시 부르지 않았다.

대신 부름보다 오래 남을 물건을 보냈다.

"부끄럽습니다, 상궁마마."

서윤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달았다.

어른스러우려 애쓴 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부끄러움은 글씨에 오래 남습니다."

문상궁은 비단 끈을 풀어 봉서를 열었다.

"마마께서 자녕궁에 걸 새 계절문을 고르십니다. 심 소저께서 이 글귀를 정서해 올리시면, 마마께서 친히 보시겠다 하셨습니다."

한씨가 숨을 삼켰다.

친히.

그 말은 꿀처럼 달고, 칼처럼 얇았다.

서윤의 손끝이 금방이라도 붓을 찾을 듯 움직였다.

월령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상궁마마."

문상궁의 눈이 월령에게 닿았다.

"말씀하십시오, 심 아가씨."

"서윤이는 아직 어립니다. 자녕궁에 올릴 글이라면 제가 곁에서 함께 살펴 주는 것이 어떨까요?"

월령의 말은 나긋했다.

막는 말이 아니라 돕겠다는 말처럼 들리게 눌렀다.

문상궁은 잠시 월령을 보았다.

그 눈빛은 차갑지 않았다. 그저 비어 있었다. 비어 있으므로 무엇이든 담을 수 있었다.

"자녕궁의 글은 손을 빌릴 수 없습니다."

대답은 정중했다.

"다만 심 아가씨께서 곁에 앉아 먹을 갈아 주시는 일은 마마께서도 흐뭇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월령은 더 말할 수 없었다.

막으면 질투가 되고, 물러서면 문이 열렸다.

어느 쪽도 깨끗한 길은 아니었다.

문상궁은 내지 상자를 내려놓았다.

"내지는 스무 장입니다. 완성본 한 장과 버린 초고까지 모두 비단 끈으로 묶어 내일 묘시 전까지 올리십시오."

버린 초고까지.

월령의 손끝이 소매 안에서 굳었다.

서윤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니, 들었어도 뜻을 몰랐을 것이다. 붓을 받은 아이는 종이를 쓰는 일만 생각한다. 종이가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문상궁은 더 머물지 않았다.

돌아서는 소매 끝에서 금선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이 사라진 뒤에도 방 안의 공기는 오래 반짝였다.

그날 오후, 심가의 마당은 평소처럼 움직였다.

부엌에서는 어머니의 저녁 탕약을 달였고, 행랑채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옮겼다. 마구간의 어린 종은 말굽에 낀 진흙을 긁어내며 궁에서 온 상궁의 걸음이 사람 같지 않았다고 낮게 수군댔다. 포목점 심부름꾼은 남운로에 비가 와 비단 값이 오를 거라 했고, 장부를 보던 둘째 숙부는 그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세상은 여전히 쌀과 장작과 비단 값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심가 안쪽 작은 서실에서는 흰 종이 스무 장이 사람의 숨을 조금씩 낮추고 있었다.

서윤은 붓을 들었다.

월령은 곁에 앉아 먹을 갈았다.

먹이 벼루에 닿을 때마다 낮고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둥글게 갈린 먹물이 천천히 깊어졌다. 서윤은 첫 장을 펴고 한참 동안 글자를 쓰지 못했다.

"천천히 해도 돼."

월령이 말했다.

"묘시 전까지라면 밤은 길어."

"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세요."

서윤이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무엇을?"

"천천히 해도 된다고요."

붓끝이 종이 위에서 아주 작게 떨렸다.

"하지만 언니는 언제나 먼저 해내시잖아요."

먹물 한 방울이 붓끝에 맺혔다.

떨어지기 직전의 검은 물방울.

월령은 숨을 크게 쉬지 않았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해낸 것이 아니었다.

너무 늦게 배운 것들이 많았다.

너무 늦게 알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도 많이 늦어."

월령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서윤의 눈이 그녀에게로 올라왔다.

"언니가요?"

"응."

월령은 웃었다.

"그러니 네가 쓰는 동안 나는 먹을 갈게. 급하면 글씨가 먼저 다친다."

서윤은 잠시 월령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고마움과 의심이 함께 스쳤다. 한쪽은 손을 내밀고 싶어 했고, 다른 한쪽은 그 손이 자기 붓을 빼앗으러 온 것인지 재고 있었다.

월령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먹을 갈았다.

서윤은 첫 글자를 썼다.

꽃.

획은 곧았으나 힘이 조금 과했다. 다음 글자는 조금 흐렸고, 세 번째 글자에 이르러서야 손이 풀렸다. 서윤은 숨을 내쉬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완성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초고였다.

글씨를 쓰기 전, 서윤은 빈 종이 한쪽에 작은 글을 적었다가 지웠다. 처음에는 계절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월령은 먹을 갈다 말고 그 글자의 일부를 보았다.

언니는 궁을...

다음 글자는 먹으로 덮였다.

왕부...

그 아래도 검게 지워졌다.

월령의 손목이 아주 작게 굳었다.

서윤은 급히 종이를 접으려 했다.

"그건..."

"초고야."

서윤의 목소리가 빨랐다.

"어차피 같이 올리라 하셨잖아요."

월령은 종이를 빼앗지 않았다.

지금 빼앗으면 서윤은 다시 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자녕궁은 월령이 붉은 담 앞에서 숨을 고르지 못했다는 일과 왕부의 이름을 함께 손에 넣는다.

먹물이 벼루 안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월령은 그 흔들림을 보며 겨우 목소리를 낮췄다.

"서윤아."

"예."

"초고도 글이야. 글은 네 마음보다 오래 남아."

"저는 거짓말을 쓴 게 아닙니다."

서윤의 눈동자가 젖었다.

"언니가 궁에서 무서워하신 것, 왕부 사람들이 언니만 살피는 것, 다들 보았잖아요. 저만 본 게 아니잖아요."

말끝이 떨렸다.

상처가 글자보다 먼저 나왔다.

월령은 서윤을 탓할 수 없었다.

서윤은 독을 품은 아이였지만, 동시에 상처를 품은 아이였다. 그리고 궁은 상처가 말이 되기 전부터 그것을 알아보고 있었다.

"알아."

월령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본 것은 네가 본 것이야."

서윤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보았다고 모두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 말에 서윤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결국 쓰지 말라는 말씀이시잖아요."

"아니."

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을 자녕궁에 먼저 맡기지 말라는 말이야."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에 먹 냄새가 짙어졌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윤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 아가씨께 전할 물건이 있습니다."

서윤은 놀라 붓을 떨어뜨릴 뻔했다.

월령도 숨을 멈췄다.

윤백은 언제나 너무 조용히 나타났다.

문을 열자 그는 손바닥만 한 납작한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강무진은 조금 뒤의 회랑 그림자 안에 있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서 있는 위치는 서실 안을 지나가는 모든 하인의 시선을 막고 있었다.

"왕야께서 보내셨습니다."

윤백은 아주 공손했다.

서윤의 눈이 월령과 상자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또 언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들리는 것 같았다.

월령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윤백은 그 시선을 눈치챈 듯, 한 박자 늦게 상자를 조금 낮췄다.

"심가 두 아가씨께 필요한 물건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은 교묘했다.

서윤의 얼굴에서 날이 조금 빠졌다.

윤백은 속으로 어디까지 헤아리는 사람일까.

월령은 상자를 바로 받지 않았다.

윤백이 먼저 열었다.

안에는 얇은 비단 장갑 두 켤레와 작은 사기병 하나, 그리고 손수건보다 작은 흰 천 조각이 있었다.

"내지에 손을 대기 전 쓰라 하셨습니다."

윤백이 말했다.

"자녕궁 내지의 금선은 종이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누른 손과 지운 자리의 소매 끝에 옮습니다."

"옮는다고요?"

"거두러 온 사람은 종이보다 손을 먼저 본다 하셨습니다."

"물로 씻으면 번지는 것이 있고, 기름으로 닦으면 붙는 것이 있으니, 먼저 마른 천으로 누르라 하셨습니다."

월령은 사기병을 보았다.

"무엇입니까?"

"쌀뜨물을 가라앉혀 위의 맑은 물만 받은 것입니다. 독은 아니고, 향도 없습니다."

윤백은 아주 엄숙하게 덧붙였다.

"맛도 없습니다."

강무진의 헛기침이 들렸다.

서윤이 눈을 깜빡였다.

월령은 이런 때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윤백은 태연했다.

"왕야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은 짧습니다."

월령의 손끝이 멈췄다.

"손끝에 남는 것이 가장 늦게 들킨다."

그 말이 방 안의 먹 냄새 위로 내려앉았다.

서윤은 뜻을 다 알지 못해도 표정이 굳었다.

월령은 알았다.

자녕궁 내지.

금선.

초고.

손끝.

위지헌은 이미 어디까지 읽은 것일까.

그는 이 방에 없는데도, 붓끝에 맺힌 먹물의 무게까지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믿고 싶었다.

그 두 감정이 같은 자리에서 자라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고맙다고..."

월령은 말을 멈췄다.

누구에게.

왕부에.

왕야께.

위지헌에게.

윤백의 눈이 아주 잠깐 웃었다.

"왕부에 전하겠습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들이 물러간 뒤, 서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서윤은 장갑을 한참 보았다.

"언니."

"응."

"섭정왕 전하는 왜 이런 것까지 아세요?"

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

심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위명서를 견제하기 위해서.

혹은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이유.

어느 쪽도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섭정왕 전하는 원래 길목을 잘 보시는 분이야."

월령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아직 걷기도 전에."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언니는 그게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다.

월령은 속으로 대답했다.

그가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너무 가까이 다가와도 자신이 피하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남긴 감송향이, 살구꽃이 없는 방에서도 자꾸 숨을 붙드는 것도.

"무서워."

월령은 작게 말했다.

서윤이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월령은 손수건으로 손끝을 눌렀다.

"그래도 무섭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는 없잖아."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령은 비단 장갑 하나를 서윤 앞으로 밀었다.

"쓰자."

서윤은 망설이다 장갑을 끼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초고를 다시 펼쳤다.

흰 종이는 등불 가까이에서 아주 조금 다른 얼굴을 보였다. 네 모서리의 금선이 살아나고, 서윤이 지운 먹자국 아래에 처음 썼던 글자의 눌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언니는 궁을 무서워한다.

왕부 사람들이 언니를...

그 뒤는 흐려져 있었다.

서윤의 얼굴이 하얘졌다.

"저는 이런 줄..."

"알아."

월령은 서윤의 말을 끊지 않으려 했으나, 그 아이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부드럽게 받았다.

"이제 알면 돼."

서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는 왜 화를 안 내세요?"

월령은 종이 위의 눌린 글자를 보았다.

화를 낼 수 있었다.

내야 했다.

그러나 화는 쉬운 길이었다. 쉬운 길은 대개 누군가가 미리 닦아 놓은 길이었다.

"화를 내면 네가 다시 혼자 쓰게 될까 봐."

그 말은 너무 솔직했다.

서윤은 울음을 삼켰다.

월령은 초고를 접지 않았다.

"완성본은 깨끗하게 올리자. 초고는..."

그녀는 말을 멈췄다.

자녕궁은 버린 초고까지 요구했다.

숨기면 불충이 된다.

그대로 올리면 문이 열린다.

월령은 처음으로 자신이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밤이 완전히 내렸을 때, 월령은 혼자 후원으로 나왔다.

살구꽃은 많이 졌다.

꽃이 진 자리에는 작은 푸른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 단단하고 떫을 열매였다. 봄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바뀐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후원 담장 너머에서 기척이 났다.

월령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기척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심가의 후원은 오늘도 밀실이 아니군요."

월령이 낮게 말했다.

측백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위지헌이 걸어 나왔다.

먹빛 장포가 밤과 거의 같은 색이었다. 그는 등불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길을 틀리지 않았다.

"밀실이라 믿으면 위험하다."

그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손은?"

월령은 손을 숨기려다 멈췄다.

숨기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는 아주 희미한 금빛이 남아 있었다. 장갑을 꼈는데도, 초고를 펼칠 때 묻은 모양이었다.

위지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분노가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월령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많이 묻었습니까?"

"아직은 적다."

그가 가까이 왔다.

감송향이 밤공기 아래로 낮게 깔렸다. 살구꽃이 거의 지고 없는데도, 월령은 꽃잎이 다시 숨결 끝에 걸리는 것 같았다.

위지헌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다만 자기 손수건을 펼쳐 월령의 손끝 아래에 받쳤다.

"손가락을 펴라."

명령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월령은 손가락을 폈다.

위지헌은 사기병의 맑은 물을 손수건 끝에 묻혔다. 물기가 손끝에 닿기 전, 그는 잠시 멈췄다.

"차갑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차가울 것이라고 알려 주는 일.

그런 작은 예고가 왜 이토록 다정하게 느껴지는지 월령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물기 젖은 천이 손끝을 눌렀다.

차가운 감각이 먼저 오고, 그 뒤에 위지헌의 손등에서 묻은 낮은 온기가 따라왔다. 그는 손가락을 문지르지 않았다. 누르고, 떼고, 다시 누르는 방식으로 금빛을 걷어 냈다.

"문지르면 번진다."

그가 말했다.

"궁의 종이는 흔적을 붙잡는다. 손끝, 물기, 지운 먹. 네가 숨겼다고 생각한 것부터 남긴다."

"서윤이가 초고에..."

월령은 말을 멈췄다.

위지헌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네 이름인가."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월령은 속눈썹을 내렸다.

"제가 붉은 담을 보고 숨을 고르지 못한 일과... 왕부 이야기가 조금요."

위지헌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금빛보다 짧은 멈춤이었다.

"왕부 이야기는 지워라."

"그 아이가 직접 쓴 마음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위지헌은 다시 손끝을 눌렀다.

"글은 마음보다 오래 간다. 특히 궁으로 들어가는 글은."

월령은 손끝을 바라보았다.

"제가 빼앗으면 서윤이는 더 깊이 숨을 겁니다."

"안다."

그가 너무 빨리 대답했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위지헌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언제나처럼 서늘했다. 그런데 그 서늘함 안쪽에는 이상한 고요가 있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같은 문 앞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막지 마라."

그가 말했다.

월령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대로 올리라는 뜻입니까?"

"아니."

위지헌은 고개를 저었다.

"문은 닫지 말고, 길목을 바꿔라."

월령은 숨을 멈췄다.

위지헌은 그녀가 알아듣기 쉬운 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했다.

"바둑에서 상대가 네 돌을 보며 들어오면, 그 돌을 치우는 것이 늘 답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치우면 상대는 다른 곳을 본다. 두면 그 돌만 본다. 대신 그 돌 뒤에 네 집을 만들면 된다."

월령은 천천히 이해했다.

"초고를 완전히 숨기지 말고, 자녕궁이 보고 싶어 할 만큼만 남기라는 뜻이군요."

위지헌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정말?"

낮은 물음이었다.

월령의 심장이 한 박자 엇나갔다.

"제가... 잘못 알아들었습니까?"

"아니."

그가 손끝의 마지막 금빛을 눌러 걷었다.

"너는 너무 빨리 알아듣는다."

그 말이 꾸지람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었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차갑게 말하는데, 이상하게 숨이 가빠졌다.

위지헌은 손수건을 접었다. 금빛이 묻은 면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네 숨이 흔들렸다는 말은 남기지 마라. 왕부라는 두 글자도."

위지헌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태후가 보아야 할 것은 네 마음이 아니다. 서윤이 붓을 쥔 채 오래 망설였다는 흔적만 남겨라."

"자녕궁이 서윤의 마음을 볼 수 있게요?"

"마음 전부가 아니다."

위지헌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월령은 그가 아주 잠깐 자신의 손가락을 받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문 앞의 그림자만."

바람이 불었다.

살구꽃은 거의 없었지만, 작은 푸른 열매들이 가지 끝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월령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그림자만 보이면, 태후는 더 기다리게 하겠군요."

"그래."

"서윤이는 더 애가 탈 테고요."

"그렇다."

"그러면..."

월령은 입술을 눌렀다.

"그 아이가 너무 아프지 않겠습니까."

위지헌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차가워서 월령은 순간 자신이 또 지나치게 무른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지헌의 다음 말은 뜻밖에 조용했다.

"아프지 않게 데려오는 길은 없다."

그가 말했다.

"다만 죽는 길과 아픈 길이 있으면, 아픈 길을 남겨야 한다."

월령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잔인한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들렸고, 동시에 믿을 수 있었다.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까요."

월령이 물었다.

위지헌은 그녀를 보았다.

"살릴 것이다."

확답이었다.

너무 단정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월령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치적인 이유로요?"

위지헌의 시선이 멈췄다.

밤공기 속 감송향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네가 살리고 싶어 하니까."

월령은 숨을 잃었다.

그 말은 너무 곧았다.

돌려 말하지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리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월령은 고개를 돌렸다.

후원 끝의 어둠을 보았다.

정치적인 보호라고 생각해야 했다. 섭정왕은 심가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큰 판에 이롭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이 서윤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니, 그 약한 고리를 관리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왕야께서는 참..."

말이 끝나지 않았다.

"참?"

위지헌이 낮게 물었다.

월령은 더 곤란해졌다.

"무섭습니다."

솔직한 말이 새어 나왔다.

위지헌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는 물러났다.

멀어지는 감송향이 이상하게 아쉬웠다.

월령은 그 아쉬움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 묘시 전, 자녕궁으로 올라간 것은 완성본 한 장과 초고 열아홉 장이었다.

완성본은 깨끗했다.

서윤의 글씨는 밤새 몇 번의 떨림을 지나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계절문에는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기 전의 비 냄새가 담겼고, 마지막 획은 지나치게 힘주지 않아 보기 좋았다.

초고에는 지운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월령의 이름은 없었다.

왕부라는 글자도 없었다.

대신 한 장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먹 번짐이 있었다. 오래 망설인 사람이 붓을 들었다 내린 흔적. 태후가 준 붓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 애쓴 아이의 조심스러움. 누군가에게 선택받은 기쁨을 놓치기 싫어 밤새 종이를 지킨 마음.

자녕궁이 보고 싶어 할 그림자만 남긴 흔적이었다.

문상궁은 비단 끈으로 묶인 종이 묶음을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떠나기 전, 월령의 손끝을 보았다.

아주 잠깐.

월령은 소매 안으로 손을 감추지 않았다.

손끝에는 아무 빛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자녕궁에서는 등불이 조금 늦게 꺼졌다.

태후는 완성본을 먼저 보았다. 글씨는 깨끗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 보지 않았다.

그녀가 오래 본 것은 초고였다.

금선이 들어간 내지는 등불 아래에서 아주 희미하게 속을 드러냈다. 지운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종이의 가장자리에는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붓을 들었다가 내린 자리, 먹을 머금었다가 삼킨 흔적, 누군가 말하지 않은 말을 끝내 쓰지 못한 손의 그림자.

태후의 손끝이 그 그림자 위에 멈췄다.

"누가 곁에 있었구나."

문상궁이 고개를 숙였다.

"심월령 아가씨가 먹을 갈았다 들었습니다."

"그 아이만으로는 아니다."

태후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흰 내지 가장자리의 금선이 아주 잠깐 빛났다.

"섭정왕의 손은 보이지 않아도 흔적이 곧다."

방 안은 조용했다.

태후는 웃지 않았다.

"심서윤은 다시 부르지 마라."

문상궁은 이미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예, 마마."

"다만 다음에는 종이가 아니라 사람을 보자꾸나."

태후의 시선이 닫힌 창 너머 어둠으로 향했다.

"기다리게 두면, 사람은 자기가 열린 줄도 모르고 문을 연다."

등불 아래에서 작은 붓끝이 한 번 젖었다.

먹물은 아직 종이에 닿지 않았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 빛

    한씨는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서원당 옆 작은 방에는 따뜻한 물이 놓였고, 청아가 급히 데운 죽도 한 그릇 놓였다. 이번 죽은 타지 않았다. 청아는 그것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상 위에 올렸다."이번에는 바닥까지 살아 있습니다."그녀가 낮게 말했다.은호가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봐도 됩니까.""너는 이제 감별관이니?""어제 제가 맞았습니다."청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은매가 아주 작게 웃었다.그 웃음은 눈물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월령은 그 작은 소리를 마음에 담았다. 밤새 편문 앞에서 본 것들, 한씨의 무너진 얼굴, 서윤의 떨리던 손, 잘린 붓끝에 묻은 예부의 붉은 실이 아직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청아는 죽의 바닥을 확인했고, 은호는 그 확인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그 사소함 덕분에 아침은 겨우 아침다웠다.서윤은 한씨 곁에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손을 잡지는 못했다. 대신 이불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붙잡고 있었다. 한씨는 그 손을 보았고, 보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서윤아."한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서윤의 어깨가 움찔했다."예, 어머니."그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어제와 달랐다. 어머니 마음에 들려고 꾸민 어른의 말이 아니라, 다칠까 봐 조심하는 딸의 말이었다.한씨는 오래 침묵했다."어미가 너를 아낀다."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예.""그 말로 네가 다친 것이 없어지지는 않겠지."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한씨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밤새 울지 않은 눈은 오히려 더 붉었다."나는 네가 뒤에 서는 것이 싫었다. 내가 평생 그렇게 서 있었으니, 너는 앞으로 가길 바랐다."그녀의 시선이 월령을 향했다가 곧 떨어졌다."그러다 네 등을 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윤의 손이 이불을 더 세게 쥐었다.한씨는 그 손을 보았다."어젯밤 네가 월령이를 사람이라 했지."서윤은 고개를 숙였다."예.""어미는 너도 사람이라는 걸 자꾸 잊었다."방 안이 조용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 밤

    남쪽 편문은 낮에도 어두운 곳이었다.담장이 높고, 늙은 측백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웠으며, 문 아래 돌계단에는 햇빛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곳의 흙은 늘 조금 눅었다. 집 안에서 버린 물이 몰래 흘러드는 자리라 했다.밤에는 그 어둠이 더 깊어졌다.등불 하나가 멀리 회랑 끝에서 흔들렸고, 편문 앞에는 사람 그림자 셋이 서 있었다.월령은 걸음을 늦췄다.위지헌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뛰지 마라.혼자 앞서지 마라.그 말을 정치적 수로 이해하려 애썼지만, 몸은 그보다 먼저 기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불안을 꾸짖는 소리가 아니라, 넘치는 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주는 듯한 소리였다.월령은 숨을 고르게 했다.서윤은 편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잠옷 위에 급히 걸친 외투가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머리도 제대로 묶지 못했다. 어른스럽게 꾸민 얼굴이 아닌, 잠을 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한씨가 서 있었고, 문밖에는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있었다.금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떨고 있었다.문밖의 여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손은 숙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굳어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아니라, 비단 끈과 열쇠를 오래 다룬 손이었다.궁녀의 손.문상궁의 사람."숙모."월령의 목소리는 낮았다.한씨의 어깨가 움찔했다.서윤은 돌아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언니."그 한마디에 죄책감이 먼저 묻어났다.월령은 서윤을 보았다."춥겠다."서윤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예?""밤공기가 차. 외투를 여미렴."서윤은 손을 들어 외투를 여몄다. 손이 떨렸다.한씨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도 단정했다. 급히 나온 사람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단정함이 오히려 더 절박해 보였다. 무너질 사람은 때로 가장 반듯하게 앉아 무너진다."큰아가씨."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밤중에 여기까지 오다니, 몸이 상합니다.""숙모께서도 밤중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6. 손

    새벽이 오기 전의 집은 가장 솔직했다.낮에는 예법이 사람을 세우고, 밤에는 두려움이 사람을 눕힌다. 그러나 새벽 직전의 어둠에는 누구도 완전히 서 있지도 눕지도 못한다. 닫힌 문 안쪽에서는 잠든 척하는 숨이 얇아지고, 깨어 있는 등불은 심지를 낮춘 채 오래 버틴다.월령은 서원당 곁 작은 서실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낮췄고, 탁자 위에는 서윤의 오래된 글과 허도겸이 보낸 등초, 문상궁의 먹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종이와 먹과 사람의 손. 전부 말이 없는데도, 방 안은 너무 많은 말로 가득 찬 듯했다.그녀는 위조된 글의 마지막 획을 다시 보았다.받겠다.그 끝이 유난히 무거웠다.서윤은 끝을 그렇게 누르지 않는다. 서윤의 글은 끝에 이르면 오히려 가벼워졌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손은 마지막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이 글은 마지막에서 힘이 들어갔다.누군가 결말을 꼭 눌러 닫은 것이다.마치 도망갈 문을 막듯이."잠을 자지 않았군."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월령은 숨을 멈추었다가, 곧 자신을 꾸짖듯 천천히 내쉬었다.위지헌이었다.그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먹색 대창포 자락에는 새벽 안개가 아주 희미하게 묻어 있었고, 젖은 돌을 밟고 온 듯 신 끝이 어두웠다. 감송향이 서실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월령은 일어나 예를 갖췄다."왕야.""앉아 있어라."말은 낮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그는 곧 자신이 너무 짧게 말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덧붙였다."네가 일어서면 종이가 날린다."월령은 잠시 멈췄다.그 말이 명령인지 배려인지 구별하지 못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그는 탁자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그녀가 숨을 더 조심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감송향은 이미 가까웠다. 월령은 그 향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먹을 보았느냐.""예.""무슨 생각을 했지."월령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자녕궁의 종이, 서윤의 글씨, 문상궁의 먹. 세 가지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 선

    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았다.심가의 안채에는 등불이 오래 남았다. 서원당 처마 아래 작은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약방 쪽에도 낮은 불빛이 흔들렸다. 하인들은 평소보다 발소리를 낮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전체가 숨을 작게 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월령은 목갑 속 먹을 다시 닫았다.문상궁이 두고 간 먹과 같은 냄새.그 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궁의 물건은 여러 손을 지난다. 문상궁이 들고 왔다고 해서 문상궁이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태후의 뜻이라 해도 태후가 직접 먹을 갈았을 리 없고, 위명서가 필요로 했다고 해서 그가 손끝에 먹을 묻혔을 리 없다.궁의 명은 대개 남의 손끝에 묻어 왔다.손끝은 씻기 쉽고, 명은 더 쉽게 사라졌다."언니."서윤이 아주 낮게 불렀다.월령은 고개를 돌렸다.서윤은 아직 붓함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얇게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다시 접지 못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걸,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있었겠지."월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래서 월령은 말을 낮췄다."하녀가 보았을 수도 있고, 숙모께서 보셨을 수도 있고, 글씨를 가르치던 사람이 기억했을 수도 있어.""그럼 제가...""아니야."월령은 서윤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네가 누군가에게 칼을 준 것이 아니야. 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칼로 갈았을 뿐이야."서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하지만 조금 덜 무너진 얼굴이었다.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그때 청아가 조심스럽게 낮은 상 위에 찻잔을 올렸다."차는 아니고 보리물입니다.""왜 그렇게 작게 말하니.""궁에서 차가 나오면 늘 일이 생겨서요."청아는 아주 진지했다."소인은 당분간 차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은호가 작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리도 볶으면 검습니다."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런 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4. 먹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을 잃은 아이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려 보였다. 조금 전까지 찹쌀떡 접시를 들고 어른스러운 말을 고르던 입술은 이제 색을 잃었고,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방 안에는 눌어붙은 죽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창을 열었는데도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불에 닿은 곡식의 냄새는 사람의 옷자락보다 오래 방 안에 머문다. 궁에서 온 글 한 줄도 그랬다. 읽히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곳마다 얇게 달라붙었다.심월령은 기윤이 전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심월령은 황실의 은혜를 달게 받겠다.그 글씨가 서윤의 손과 닮았다고 했다.닮았다.같다고 못 박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칼보다 얇은 말이었다.서윤의 손끝이 떨렸다."저는 쓰지 않았어요."목소리가 작았다."언니, 저는 정말...""알아."월령은 너무 빨리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급한 믿음은 때로 믿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는 서윤의 손을 보았다. 찹쌀가루가 아직 손톱 가장자리에 희게 끼어 있었다. 궁의 종이를 만진 손이라기보다, 부엌에서 반죽을 조금 망친 아이의 손이었다."네가 쓰지 않은 것 알아."서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런데 왜 제 글씨와 닮았을까요."그 물음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부끄러움이 있었다.월령은 그 부끄러움을 알아보았다.서윤은 늘 남의 마음에 드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말투, 어른들이 기특하다 여기는 자세, 태후가 눈길을 줄 만한 글씨. 자기 이름을 쓰기 전에 남의 눈이 좋아하는 선을 익힌 아이였다."혹시."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적이 있어요."방 안이 조용해졌다.청아는 놀라 숨을 삼켰고, 은매는 은호의 어깨를 조금 더 감쌌다. 기윤은 문가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으나, 그 침묵도 들은 사람의 침묵이었다.월령은 서윤을 재촉하지 않았다."어릴 때요. 큰어머니께서 언니 글씨가 곱다 하셨고, 아버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3. 사흘

    심월령.그 이름이 자녕궁 안에 떨어진 순간, 향로의 연기마저 잠시 길을 잃은 듯했다.궁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낮췄고, 내관은 두루마리를 든 손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붉은 비단 끝에 매달린 금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창밖으로 들어오던 봄빛은 바닥의 옥돌 위에서 차갑게 식어, 사람의 얼굴마다 다른 그늘을 얹었다.독고 태후는 웃지 않았다.웃지 않는 얼굴이 더 온화해 보일 때가 있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누구의 목숨을 조르는 덫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마땅히 놓아야 할 비단끈이라는 듯했다.월령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손끝은 소매 안에서 차가웠으나 떨리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너무 큰 파도가 오면 사람은 먼저 젖는 대신 굳는다. 숨도, 눈물도, 두려움도 한 박자 늦게 온다.문밖에서 위지헌의 그림자가 길게 들어왔다.감송향이 자녕궁의 단 향을 조용히 밀어냈다. 마른 흙과 오래된 나무, 차갑게 말린 약재의 향. 그 향은 소리 없이 다가왔으나, 자녕궁 안의 누구도 모른 척하지 못했다."그 교서를 멈추십시오."위지헌의 목소리는 낮았다.낮은데도 먼 기둥까지 닿았다.태후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이미 읽혔습니다, 섭정왕.""읽힌 것과 행해지는 것은 다릅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궁녀 하나가 본능적으로 물러났고, 내관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길을 비켰다. 그는 누구에게도 소리치지 않았다. 칼을 뽑지도 않았다. 다만 걸어 들어왔다. 그 한 걸음마다 자녕궁의 공기가 뒤로 밀렸다.태후의 눈빛이 아주 작게 깊어졌다."황제의 어보가 찍힌 교서입니다.""그러므로 더더욱 예를 갖춰야 합니다."위지헌은 두루마리를 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태후에게 있었다. 황제의 숙부이자 섭정왕인 자가 태후를 향해 예를 잃지 않는 거리. 그러나 그 예의 아래에는 누구도 밟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심가 여식은 지금 예부와 호부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궁중 내지 유출과 군량 장부 조작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