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 안개가 내려앉았다. 얇고 흰 안개가 물 위의 달도, 버드나무 그림자도, 멀리 별채의 등불도 한 겹씩 지워 갔다.
벌레 소리마저 돌 틈으로 잦아든 그 어둠 속에, 월령이 서 있었다. 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들기 위해 고른 빛이었다. 곁에 선 청아는 자꾸 소매 끝을 만졌다.
낮 동안 본 것들 — 독향이 남은 탕약, 은매의 젖은 눈, 서윤의 치맛자락에 번진 검은 흔적 — 이 아직 어린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청아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월령의 가슴 한쪽을 아프게 했다.
"아가씨."
청아가 입술만 움직이듯 속삭였다.
"정말 여기 계셔도 괜찮을까요?"
월령은 대답 대신 청아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주인과 시녀라는 이름을 잠시 걷어 내면, 어둠 속에 선 것은 동갑내기 어린 처자 둘이었다.
"누가 오면 소매를 잡아. 소리는 내지 말고."
월령은 연못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억은 늘 뒤늦게 왔다.
어머니의 흰 천이 걸린 뒤에야 탕약의 냄새를 떠올렸고, 오라비의 군보가 피로 젖은 뒤에야 봉인의 붉은 먹이 번져 있었음을 기억했다.
불이 꺼진 방에 남은 연기처럼.
이번에는 기다릴 차례였다.
저들이 손을 뻗는 순간을.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청아의 손이 월령의 소매를 잡았다.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연못가로 들어섰다.
걸음은 낮고 빨랐고, 익숙한 길을 지나면서도 세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가려졌으나, 월령은 그 몸가짐을 알아보았다.
금지.
서윤의 처소에서 서신을 나르던 아이였다. 악해서라기보다, 살아남는 법을 너무 일찍 배운 몸가짐이었다.
잠시 뒤 담장 아래에서 마른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심가의 하인은 아니었다.
옷은 평범한 장정의 차림이었으나, 어깨는 좁고 턱은 말랐으며, 걸음은 빠르다가도 멈출 때마다 발끝을 먼저 거두었다. 궁에서 오래 산 사람의 걸음이었다.
허리끈의 매듭도 달랐다.
두 번 감고 안쪽으로 눌러 숨긴 매듭. 외궁의 하급 내시들이 사복을 입을 때 쓰는 방식이었다.
낮에는 누구의 눈에도 걸리지 않지만, 밤에는 그 매듭 하나가 길을 말해 주었다. 사내는 말을 하기 전마다 혀끝으로 앞니를 한 번 눌렀다.
급한 말을 억지로 얇게 눌러 펴는 버릇처럼 보였다.
황궁.
월령은 손끝을 접었다.
이렇게 이른 때부터.
그녀가 살구꽃 아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웃던 시절부터, 황궁은 이미 심가의 담장 밖에 손을 대고 있었다.
"조 내…"
금지가 입을 열다 급히 혀를 깨물었다. 사내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이, 이름."
첫 음절이 작게 걸렸다.
그는 곧 목을 가다듬었다.
"이름은 내려놓고 말하라."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약이 입에 닿지도 못했습니다. 큰아가씨가 약방에 드는 바람에…"
"또."
조계라 불릴 뻔했던 사내가 끊었다. 높게 뜨는 소리를 억지로 눌러 낮춘 탓에, 말끝이 마른 쇠붙이처럼 긁혔다.
"담장에도 귀가 있다."
"서원당의 마님께서 약을 드시지 못했습니다."
"크, 큰아가씨가 눈치챘나."
그는 제 혀가 먼저 걸린 것을 싫어하듯 입술을 다물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 서원당에서 조금 이상했습니다. 둘째 부인께 향을 보라 하시고, 제 아가씨 치맛자락을…"
"그 아이는 그런 눈을 가진 적이 없다."
조계가 희미하게 웃었다.
"순하고 무른 심가의 금지옥엽이지. 겁이 나면 보이는 것마다 붙잡는 법이다."
그래.
나는 그런 아이였지.
월령은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부르면 대답하고, 울면 달래 주고, 손을 내밀면 믿었다.
그래서 끝내 제 목에 죄패를 걸었다.
"윗전께서는요?"
금지가 물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안개 속에서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삼전하께서 기다리라 하셨다."
이 말만은 또렷했다.
누군가에게 여러 번 외워 들은 문장처럼. 그 두 글자가 젖은 공기를 갈랐다.
청아가 숨을 들이켜려는 순간, 월령은 조용히 그 입을 덮었다. 아이의 숨이 손바닥 안에서 뜨겁게 떨렸다.
삼전하.
위명서.
아직 황제가 아닌 남자.
아직 그녀를 높은 단 아래 세우지 않은 남자. 그런데도 이름만으로 목 안쪽에 오래된 피 맛이 올라왔다.
출정은, 닷새 뒤로 정해졌다.경화제는 끝내 군량 결재를 내렸다. 다만, 절목의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북변의 군권은 섭정왕에게 주되, 도성 순검은 그가 없는 동안 다시 예부와 나누어 둔다는 줄이었다.한 손으로 군량을 내리고, 다른 손으로 순검을 반쯤 거둔 셈이었다.위지헌은 그 줄을 읽고, 더 청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는지, 그는 오래 아는 형의 속을 읽었다.*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왕부의 살구나무 아래에 섰다.꽃이 진 자리에, 이제 푸른 열매가 맺혀 있었다. 지난봄에 핀 꽃이, 여름을 향해 익어 가고 있었다.지난겨울, 이 나무는 헐벗은 가지였다. 봄에 꽃을 피웠고, 그 꽃이 지고 이제 열매를 맺었다. 한 나무가 한 해에 세 얼굴을 지나는 동안, 두 사람도 이별과 재회와 혼례를 지났다."지난겨울에는, 제가 봄을 셌어요."월령이 말했다."이번에는요?""이번에는, 봄을 세는 대신 다른 걸 해요."월령이 소매 안에서 검은 바둑돌 하나를 꺼냈다. 지난겨울, 그가 흰 돌을 가져가고 그녀에게 남긴 돌이었다."이 돌을, 이번에는 제가 쥐고 있을게요. 문밖에서 기다리는 대신, 문 안에서 셈을 할게요. 연이라는 이름이 누구인지, 왕야가 북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 손으로 알아낼게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혼자 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지난겨울에 이미 보았다."위험한 셈이다.""알아요."월령이 낮게 웃었다."그래서 왕야가 돌아올 자리를, 제가 지켜 둘게요."*닷새 뒤, 북문에 다시 북경군이 도열했다.지난겨울과 같은 아침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월령이 심가의 딸이 아니라 왕부의 안주인으로 그 자리에 섰다.위지헌이 말에 올랐다. 그의 품속에는, 지난겨울과 같은 흰 바둑돌이 들어 있었다.다만 이번의 두 돌은, 지난겨울과 짝이 달랐다. 지난겨울 검은 돌은 심가의 딸이 소매에 넣었고, 이번 검은 돌은 왕부의 안주인이 방첩 장부 곁에 놓았다. 같은 두 돌이, 다른
봄이 반쯤 깊었을 때, 북에서 두 번째 파발이 들었다.첫 파발은 첩보였다. 두 번째는,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흑령이 삭원 너머 골짜기 둘을 넘었다. 겨울에 잃은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국경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심도윤의 북문군이 얇게 막고 있었으나, 오래 버틸 셈은 아니었다.지난겨울 흑령을 하루로 끝낸 것은, 눈이 저들의 방패가 되어 준 살구골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봄에는, 그 방패가 저들에게 없었다. 그러나 국경 안쪽은 지형이 달랐다. 저들이 안으로 들수록, 이번에는 지형이 저들의 편이 되었다.첫 파발과 두 번째 파발 사이가, 짧았다. 저들의 발이 빠르다는 뜻이었다.*위지헌은 그 파발을 어전으로 가지고 들었다.경화제 앞에, 북변의 군량 절목이 다시 올랐다. 지난달 비워 둔 결재 칸이, 아직 그대로 비어 있었다."폐하."위지헌이 말했다."흑령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군량 결재를 내려 주십시오."경화제는 그 절목을 오래 보았다.돌려준 순검패와, 비워 둔 결재 칸이, 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황제는 섭정왕에게 자리를 돌려주었으나, 그 자리의 군량은 아직 제 손에 쥐고 있었다."북에 다시 나가려느냐."경화제가 물었다."제가 아니면, 흑령을 아는 장수가 없습니다.""가례를 올린 지, 한 달이다."황제의 목소리에, 국사 아닌 것이 잠깐 스쳤다.경화제는 정치에서는 절제된 성군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만은, 형의 목소리가 잠깐 앞섰다. 늦둥이 아우가 오래 혼자였던 것을 아는 형이었다. 이제 겨우 곁에 사람을 둔 아우를, 한 달 만에 다시 북으로 보내는 자리였다.위지헌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제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그 자신도 무겁게 알았다. 흑령을 아는 장수가 그뿐이라는 것은, 이 집을 또 비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날 밤, 위지헌은 안채로 늦게 들었다.월령은 그가 무슨 말을 가지고 왔는지, 얼굴을 보고 먼저 알았다."북에, 다시 가시는군요.""…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봄이 얕게 오는 동안, 자녕궁의 그늘도 조금씩 옮겨 갔다.숙비는 지난겨울 순검권이 섭정왕에게 돌아간 뒤로, 예전처럼 판을 크게 벌리지 못했다. 내명부의 문 하나는 아직 그 손안에 있었으나, 그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었다.향을 사르지 않는 정갈함으로 내명부를 오래 쥐었던 사람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문 하나와 줄어든 발길뿐이었다. 숙비는 그것을 소리 내어 아쉬워하지 않았다. 다만, 옥반지를 다시 끼지 않은 손을 소매 안에 자주 넣었다.설련은 그 조용해진 자녕궁을 떠나 있었다.지난겨울, 숙비의 손을 놓겠다 한 뒤였다. 숙비는 붙잡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넘어지거든 다시 오라고만 했다.설련은 아직, 넘어지지 않았다.*자녕궁을 나온 뒤, 설련이 제 발로 한 일은 죽은 군졸의 마지막 명패를 그 집에 돌려보내는 것이었다.지난겨울부터 미뤄 온 일이었다. 자녕궁의 향안 위에 오래 놓여 있던 패. 작은 새가 새겨진 패였다.설련은 그 패를 들고, 임가의 낡은 집을 찾아갔다.죽은 군졸의 누이가 문을 열었다. 설련은 그 앞에서 잠깐 말을 잃었다.고모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누군가의 문 앞에 서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지난겨울 한 번, 죽은 군졸의 집에 새 명패를 전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집 아이가 '누나는 안 무서워요' 했다. 오늘은, 그 걸음의 두 번째였다.무서웠다. 그러나 두 번째 걸음은, 첫 걸음보다 반 뼘 덜 무서웠다."…이 패를, 돌려드리러 왔습니다."설련이 낮게 말했다.누이는 그 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울지 않고, 설련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설련은 그 숙임 앞에서, 제가 한 일의 무게를 처음으로 온전히 느꼈다.*같은 봄, 삼황자부에서는 위명서가 늦도록 등잔을 켰다.책상 위에는, 월령의 이름이 적힌 봉서 사본이 더는 놓여 있지 않았다. 지난겨울, 주란이 그 종이를 대신 태운 뒤였다.위명서는 이제, 그 이름을 밤마다 보지 않았다.다만 그 자리에, 빈 데가 남았다. 그 빈 데를 무엇으로 채울지
칠복의 빚은, 하루 만에 왕부의 손으로 옮겨졌다.허도겸이 짠 셈은 깔끔했다. 독고가 셈방은 빚 하나가 남에게 넘어간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노름꾼의 빚 한 줄이었다. 그것이 왕부의 것이 되었다는 것까지는, 저들도 아직 몰랐다.마 어멈은 이제, 월령이 고른 밤을 통에 넣어 보냈다.가짜 밤이었다. 불이 꺼지는 자리도, 섭정왕이 드나드는 문도, 왕부가 보이고 싶은 대로 그려졌다.밤마다, 왕부는 저들에게 보여 줄 그림을 지었다. 실제로 불이 꺼지는 자리와, 종이에 점으로 찍히는 자리가 달랐다. 저들이 사 가는 것은, 이제 왕부가 파는 가짜 밤이었다.마 어멈은 그 종이를 넣을 때마다 손이 떨렸으나, 월령은 재촉하지 않았다. 늘 떨며 넣던 사람이 갑자기 떨지 않으면, 그것이 도리어 티가 났다.*그 가짜 밤을 사 가는 자를 따라, 강무진이 그림자로 붙었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보고했다."통은 저잣거리 셈방을 지나, 도성 밖으로 나갑니다. 성 밖 옛 역참 자리에서, 한 사람이 그것을 거둡니다.""이름은."위지헌이 물었다.강무진이 잠깐 말을 골랐다."거두는 자들이, 그 사람을 '연 어른'이라 부릅니다."연.형부의 장부에 이름 없이 남았던 글자였다. 가례를 흠집 내려다 물러난 손. 도성 밖으로 나갔던 그 이름이, 왕부의 가짜 밤을 거두고 있었다.물러난 척, 눈 하나를 심어 두고 간 것이었다. 도성 밖에서 그 눈이 보내오는 밤을 받아 읽으며 다음 수를 고르는 손. 쫓기지 않으려고 성을 나갔으되, 성 안을 계속 들여다보는 자리였다."쫓을까요."강무진이 물었다."쫓지 마라."위지헌이 말했다."쫓으면, 저쪽이 눈을 하나 잃은 것을 안다. 우리가 그린 밤을, 계속 사 가게 두어라."*그날 밤, 월령은 그 이름을 위지헌에게서 들었다.연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녀의 손끝이 잠깐 식었다."아는 이름이냐."위지헌이 물었다.월령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전생에,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폐위된 뒤였다. 냉궁의 문밖에서, 누군가 낮게 그
"서방의 빚이, 독고가 상단에 잡혔구나."월령이 낮게 말했다.마 어멈의 눈이 커졌다. 제 입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안주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그 빚을 못 갚으면 서방의 목숨이 위태롭고, 그래서 이 집의 밤을 그려 저 통에 넣어 보냈고.""…죽을죄를 지었습니다."마 어멈이 무릎을 꺾었다. 열아홉 해 이 집의 문을 지킨 손이, 마당 흙 위에 짚였다.마 어멈의 등이 떨렸다. 벌을 기다리는 떨림이었다. 왕부의 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열아홉 해 이 집의 문을 지킨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월령은 그 떨리는 등을 잠깐 보았다. 벌을 주려고 그 통을 연 것은 아니었다.월령은 그 어깨를 내려다보았다.벌하기는 쉬웠다. 이 종이 한 장이면, 마 어멈은 왕부의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죄인 하나를 내치는 것으로는, 그 종이를 사 간 손까지 닿지 못했다.*월령은 마 어멈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을 물었다."통을 돌려받는 사람은, 늘 같은 장사치니.""…아닙니다. 기름 장사치는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통은 저잣거리 어느 셈방으로 들어간다고만 들었습니다.""그 셈방이, 독고가의 것이고."마 어멈이 고개를 숙였다.월령은 잠깐 생각했다.빚에 잡힌 사람을 벌하면, 빚을 놓은 손은 다음 사람을 잡을 뿐이었다. 이미 이 집에 든 눈 하나를 뽑아 내는 것으로는, 저들이 새 눈을 심는 것을 막지 못했다.*그날 밤, 월령은 위지헌에게 마 어멈의 이름을 말했다.이번에는, 다 풀어 말했다. 빚과, 통과, 바늘로 눌러 그린 밤까지.위지헌의 눈이 한 번 서늘해졌다. 제 집의 밤이 담 밖으로 팔려 나갔다는 것에, 그의 턱이 잠깐 굳었다.그러나 그 서늘함은, 마 어멈에게로 가지 않았다. 가난한 자의 빚을 사서, 그 빚으로 사람의 눈과 손을 사는 자에게로 갔다. 위지헌은 그 자를 아직 보지 못했으나, 그 수법은 알았다."그 사람을 내치겠느냐.""아니요."월령이 말했다."내치면, 저들은 왕부 안에 새 사람을 심으면 그만이에요. 이미 든 눈 하나를,
엿새가 다시 돌아왔다.이번에는, 월령이 먼저 행랑 마당으로 내려갔다.안주인이 아침에 집을 도는 것은 흔한 일이라, 마 어멈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월령이 기름 드는 문 곁에 선 것을 보고, 그 야무진 손이 한 박자 굳었다.행랑 마당에는 아침 냄새가 가득했다. 물 뿌린 흙과 갓 지핀 아궁이 연기, 지고 온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은 냄새였다.다만 오늘은, 그 냄새 속에 안주인이 서 있었다.기름 장사치가 통을 부렸다.넷이 들어왔다.마 어멈이 빈 통 하나를 집었다. 늘 하던 대로, 그 안에 접은 종이를 넣으려 손이 움직였다."마 어멈."월령이 불렀다.마 어멈의 손이 통 위에서 멎었다."그 통, 내가 보아도 되겠니."*마 어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손에 든 빈 통을 내려놓지도, 건네지도 못한 채 마 어멈이 그 자리에 굳었다. 기름 장사치가 눈치를 보며 한 걸음 물러섰다.행랑 사람 몇이 마당 가장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주인이 문지기를 세워 통을 청하는 아침은, 열아홉 해에 없던 아침이었다.마 어멈의 입술이 한 번 달싹였다. 무슨 말을 고르려다, 그 말을 삼켰다. 삼킨 자리에서, 목울대가 한 번 힘겹게 움직였다."마마님, 이것은…""내려놓아라."월령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행랑 마당의 아침 소리가 그 한마디에 잠깐 멎었다.높이지 않아도, 안주인의 한마디는 마당을 멎게 했다. 마 어멈은 그 조용한 무게 앞에서 더 버티지 못했다.마 어멈이 빈 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열아홉 해, 이 집의 문을 여닫던 사람이었다. 제가 넣은 것을 도로 꺼내지도 못한 채, 통만 내려놓았다.월령은 그 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기름내가 밴 통 바닥에, 접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여러 번 접어 손톱만 하게 만든 종이였다.월령은 그 종이를 폈다.*종이에는, 먹으로 쓴 글자가 없었다.다만, 바늘로 눌러 만든 자국이 몇 개 찍혀 있었다. 빛에 비추어야만 보이는 자국이었다.글자를 쓰지 않은 것은, 글을 읽을 줄 아
태후의 초대장은 향이 없었다.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아침 부엌에서는 멥쌀 씻는 물소리가 나고, 무쇠솥 가장자리에는 지난밤 끓여 둔 닭죽의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행랑 쪽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패며 낮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구간에서는 젖은 짚을 갈아내는 냄새가 느리게 흘러왔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그런데 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집 안의 모든 소리가 반 박자씩 늦어졌다.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의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대고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살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