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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화. 살고 싶으면 보여줘

Author: 혜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07:08:30

005화. 살고 싶으면 보여줘

“넌 아직 죄인이 확정된 게 아니니까 서 있어.”

벨리사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장례당 안에는 향 냄새가 짙었다.

촛농이 타고 내려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불꽃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관 위의 금빛 문장이 번들거렸다.

오델린은 내 오른쪽 뒤편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고, 벨리사는 그 옆에서 끝까지 서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관을 바라봤다.

적어도 겉으로는.

실제로 보고 있던 건 관이 아니라 유리처럼 반사되는 검은 장식판 위 벨리사의 얼굴이었다.

그 애는 웃지 않았다.

평소라면 불리할수록 더 예쁘게 웃었을 텐데, 지금은 입술이 굳어 있었고 손가락만 상복 옆선을 붙들었다 놓았다.

겁먹었다.

장례 의식이 시작되자 사제가 앞으로 나왔다.

긴 기도문이 이어졌다.

선황의 업적.

제국의 번영.

백성을 향한 자비.

나는 그 말들을 듣고도 특별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좋은 황제였을 수도 있었다.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오델린과 벨리사가 내 일상을 통제하는 걸 알면서도 그가 가장 자주 한 말은 하나였다.

“황후의 뜻을 따르거라.”

그래서 관 앞에서도 눈물보다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왜 죽었지.

정말 심장이었나.

기도가 끝났다.

사제가 물러나고 황실 악단의 낮은 현악기가 장례당을 채웠다.

나는 앞에 놓인 향을 집어 불을 붙였다.

첫 번째 향은 황제가 들었다.

두 번째는 황후.

세 번째는 황녀.

원래라면 그 순서였다.

나는 첫 번째 향을 꽂은 뒤 뒤를 돌아봤다.

오델린이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에 묻었던 회색 먼지는 이미 시녀가 조용히 털어냈지만, 검은 천에 눌린 흔적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내 앞까지 와 향을 받아 들었다.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을 붙이고, 아버지의 관 앞에 서서 정확한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완벽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상했다.

오델린은 향을 꽂고 뒤로 물러났다.

이번엔 벨리사의 차례였다.

그 애는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나는 그걸 봤다.

향을 받아드는 순간 손끝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불꽃이 향 끝에 붙지 않고 한 번 꺼졌다.

사제가 다시 촛불을 내밀었다.

벨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 했지만 두 번째로 향을 가져갈 때는 손목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었다.

“조심해.”

내가 말했다.

벨리사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다.

“뭘.”

“떨어뜨릴까 봐.”

대꾸하지 않았다.

불이 붙었다.

벨리사는 관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아까보다 더 이상한 걸 봤다.

관이 아니라 관 옆의 사제를 봤다.

정확히는 사제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은빛 약함을.

궁정 사제들은 장례 중 실신하는 유족을 위해 진정 향과 약을 가지고 다녔다.

벨리사가 왜 그걸 보는지 바로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억해 뒀다.

벨리사는 향을 꽂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장례가 이어질수록 벨리사의 손만 달라졌다.

치맛자락을 잡았다가, 엄지 옆을 누르고, 마지막에는 두 손을 겹쳐 감췄다.

오델린은 그걸 보고 손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닿지는 않았지만 딸의 손을 덮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벨리사가 잠깐 어머니를 봤다.

오델린은 앞만 보고 있었다.

여전히 딸을 지키고 있었다.

장례가 끝났을 때는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귀족들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나는 끝까지 남아 아버지 관 앞에 서 있었다.

오델린과 벨리사도 남았다.

굳이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모든 사람이 나간 뒤 장례당 문이 닫혔다.

촛불만 남았다.

“이제 가도 돼요.”

내가 말했다.

오델린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북궁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요.”

벨리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델린이 딸을 봤다.

“벨리사.”

“엄마 먼저 가.”

“같이 가자.”

“잠깐 폐하랑 얘기할 게 있어.”

말투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처럼 자신만만하지 않았다.

오델린도 느낀 모양이었다.

회색 눈이 딸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무슨 얘기인지 내가 함께 들어도 되겠니?”

“안 돼.”

벨리사가 너무 빨리 답했다.

그 짧은 말 뒤에 스스로 당황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오델린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둘을 번갈아 봤다.

“난 상관없어요.”

내 말에 오델린이 이번에는 나를 봤다.

“벨리사가 원한다면 둘만 이야기하게 두겠습니다.”

그 말은 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벨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엄마.”

조금 부드러워졌다.

“먼저 가 있어.”

오델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게 와.”

“알았어.”

오델린이 장례당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벨리사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나는 그걸 보고 확신했다.

오델린 앞에서는 말하기 싫은 게 있다.

“말해.”

벨리사가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장례당은 넓었다.

사람이 빠져나가니 촛불만 많아 보였다.

나는 관 옆에 있던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서서 할 거야?”

벨리사는 내 행동을 보다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낮은 탁자 하나가 있었다.

예전에는 늘 벨리사가 앉아 있었고 나는 서 있었다.

지금은 둘 다 같은 높이에 앉아 있었다.

“뭘 조사하고 있어?”

벨리사가 먼저 물었다.

“아까 오델린에게도 물어봤잖아.”

“엄마한테 대답 안 했잖아.”

“너한테는 해야 해?”

“나와 관련된 일이면.”

“관련됐다고 생각해?”

벨리사의 눈이 조금 좁아졌다.

또 계산이 시작됐다.

어떤 답이 안전한지 찾고 있었다.

“그건 네가 알려줘야지.”

“나 아무것도 몰라.”

너무 빨랐다.

나는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뭘 모르는지도 안 물었는데.”

벨리사의 입술이 닫혔다.

그 애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봤다.

“아버지 죽음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벨리사의 손이 탁자 밑으로 내려갔다.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심장병이라고 했잖아.”

“누가?”

“의관이.”

“어느 의관.”

“궁정의관이겠지.”

이번에는 말끝이 조금 흐렸다.

“이름은?”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웃지 않았다.

벨리사는 내 표정을 읽으려 했다.

예전에는 이 애가 내 얼굴을 읽었다.

기분이 나쁜지.

울 것 같은지.

겁먹었는지.

이제는 반대였다.

“너 죽는 거 무서워하지.”

벨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뭐?”

“죽는 거.”

“누가 안 무서워해.”

“오델린은 별로 안 무서워 보여.”

“엄마 얘기가 왜 나와.”

“비교하기 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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