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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계단 위, 신황 아미노의 연설이 시작됐다.
“인간은, 이 세계인 에테르의 자비로 선하게 태어납니다.”
그의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으며 답을 내리는 입술은 작게 말려 올라가 군중으로 하여금 신황을 절대자로 믿게 했다.
“그러므로 선함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미노는 자신의 양손을 펼쳐 투명하지만 밝게 빛나는 푸른 불꽃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마치 작은 별빛 같기도 했고 어린 물고기 같기도 했다.
아미노는 자신의 양손 위에서 뛰 노는 빛을 군중에게 보였다.
감탄하는 군중들의 어수선함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함을 지키고 이 세계, 에테르에 감사하십시오.”
가련한 인간들의 눈동자에는 그가 신과 같이 보였다.
잃어버렸던 신의 재림을 보는 듯한 벅참과 감동이 그들 사이사이로 침투해 아스라이 스며들었다.
신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성해 보이도록 미소를 머금었다.
“보십시오.”
그는 강한 목소리로 짧게 말하며 푸른 빛이 감도는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불꽃은 그의 손짓을 따라 물결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미노의 손을 떠나 그의 옆에 버려진 포대 자루처럼 꿇어앉은 병든 자의 머리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피부 위로 고름이 터져 흘러 흉측해진 얼굴이 마치 신화 속 괴물과 같은 형상을 가진 인간이었다.
“에테르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미노의 손이 그자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군중들의 소란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에테르는 선을 지킨 인간을 굽어살피십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신황은 잿빛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내리며 곧바로 그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련히 빛나던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더니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
사위는 조용했고 그 누구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광장을 신황 아미노는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병든 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그는 더 이상 병든 자가 아니었다.
깨끗하고 맑은 피부가 감격에 찬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미노! 아미노!”
순식간에 함성과 경탄이 광장을 휘어 감았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환호했고 살아난 자는 고개를 조아렸다.
아미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미천한 인간들을 진정시켰다.
“보십시오. 믿으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는 뒤에서 대기하던 신관에게 커다란 모자를 넘겨받아 자신의 머리 위로 씌워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산다면 이 세계, 에테르는 보답할 것입니다. 나, 아미노를 통해서 말입니다.”
“와아아아!!”
밝고 따듯한 오후의 햇살이었다. 신황 아미노를 비추고 있는 것은.
밝고 따듯한 신앙심이었다. 신황 아미노가 이끌어낸 것은.
이 모든 것을 군중들 사이에서 올려다 보던 현자의 눈 아이작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광장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
아이작은 어디든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였다.
이 세계인 에테르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사명을 부여받은 다섯의 현자 중 하나였다.
그는 신목의 형상을 가진 에테르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며 그를 위해 현자의 눈을 부여받았다.
에테르는 아이작의 눈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지혜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눈으로 그것을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아이작은 그것을 삶의 이유로 삼았다.
하지만 그것은 방관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씩 인간적인 감정을 잃어갔고 점차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가 지나가면 모두가 뒤를 돌아 그를 살폈으나 그것은 선망과 존경의 시선이 아닌,
‘두려움인가.’
큰 덩치와 후드 사이로 보이는 칠흑 같은 머리칼에서 비롯된 낯선 경계였다.
현자의 눈은 그렇게 광장의 수많은 인파에서 멀어지면서 자신의 뒤에 달라붙는 시선들을 알지 못해 무시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없는 존재로 여겼으니까.
[현자의 눈을 가진 아이작이여. 에테르를 도와 세계를 지탱하는데 그 사명을 다하라.]
어쩌면 아이작은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살아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존재.
그러니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
그는 후드를 더욱 깊게 쓰며 주변을 살폈다.
이미 그를 신경 쓰는 이가 없었음에도.
아이작은 후드 너머로 보이는 태양을 잠시 눈에 담았다. 그러자 그의 온통 회색으로 물든 눈이 빛을 받아 더욱 희게 변했다.
햇빛이 따듯했다.
그는 지상에 드리우는 햇살 그 너머를 보듯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리고 숲의 한 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시시.”
아이작의 앞에는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건강하고 아름다운 빛깔의 사슴이 서 있었다.
뚜렷한 눈동자는 나무 사이사이로 투과되는 빛을 받아 물결보다 찰랑였고 윤기나는 털은 그 어떤 요정보다 아름다웠다.
그는 손을 뻗어 사슴의 작고 어린 머리를 쓰다듬었다.
숲은, 숲의 현자인 시시가 가꾸고 생명을 지키도록 사명을 받은 살아 있는 땅이었다.
그녀는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요정이었고 세계 에테르를 만든 여신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자녀였다.
시시는 현자로서 온 힘을 다해 세계의 숲과 생명을 지킬 것을 맹세했었다.
세계의 출현 때부터 지금까지.
“잠시.”
아이작은 어느새 사슴을 따라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회색빛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줄기가 튼튼하고 잎사귀에 윤기가 흐르는 나무 앞에서 기록을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따스함이 드리우는 이 숲을.
그 어떤 조악한 어둠과 악이라도 이곳에서라면 치유되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시시의 숲을.
발에 치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여전히 시시, 그녀의 숨결이 닿아 있음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하지만 불행은 둘이 신전을 감쌌던 메데이아의 줄기를 넘어갈 때, 다시 발밑에 모습을 드러냈다.“이게 무슨 일인가!”시작은 신전에 들어가 잊었던 병사들로부터였다.아비규환인 그곳에서 그들은 꽤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당장 몸이 성한 자는 부상자를 데리고 숲을 나가라!”“저 검은 구슬에 몸이 닿아서는 안됩니다!”이 모든 움직임과 소리를 들은 아이작이 아르텐시아의 잡은 손을 잡아당겼다.“조심하십시오. 천천히 내려오세요.”그는 말과 다르게 더욱 서둘렀다.“아이작, 우리는 숲을 빠져 나갈테니 걱정하지 말거라.”조급함을 눈치챈 아르텐시아는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면서도.“네. 그럼요 아르텐시아.”서쪽으로 향하는 숲의 입구는 지척에 있었다.아이작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등 뒤로 들렸던 부산함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던 탓이었다.그는 안심이 불러온 과장된 평온이 허상에 빠지게 할 줄 몰랐다.‘이 숲을 나가면, 잠시만 쉬자고 해야겠다. 아르텐시아도 피곤할거야.’그는 라리아의 집에서 피를 토했던 그녀를 기억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엄청난 함성이었다. 꽤 많은 병사가 아이작과 입씨름을 한 병사에게 동조하고 있었다.“더 들을 것도 없다. 아이작.”그때, 진정한 악신이 서슬 퍼런 눈을 하고 그들을 바라봤다.그녀의 어깨 위에는 크기는 크지 않았으나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게 할 악의 구가 살벌하게 떠 있었다.“뚫린 입이라고 한낱 벌레보다 못한 대거리를 하는구나.”“뭐, 뭐라?!”“너희 인간들은 곱게 만들어준 입으로 시궁창을 헤매니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아르텐시아….”아르텐시아는 애틋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작에게 작게 웃어 보이고는 작고 마른 손을 유려하게 움직여 악의 구에서 여러 알갱이를 만들어 냈다.그것은 저잣거리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슬과 비슷해 보였다.악의 구에서 나온 알갱이들은 아이작과 아르텐시아의 주변에 머물며 스산한 빛을 내뿜었다.병사들의 눈동자에 그것은 어떠한 공포심을 유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한가지는 바로 해야겠구나.”그녀는 선연하게 드러나는 분노를 지우지 않은 채 웃어 보였다.그때,
불온한 기운이 내려앉는 메데이아의 줄기 위를 넘어 신전 앞마당으로 침투하려 하고 있었다.기어코 메데이아의 줄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아이작은 아르텐시아의 손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눈동자를 굴려 그 너머를 살폈다.“아르텐시아.”새카만 어둠은 닮은 인간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신전의 앞마당 뒤, 메데이아의 줄기가 얼기설기 얽혀있는 지척에 마침내 그의 시선이 닿았다.긴 생각이 필요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지금까지의 시간과 순간이 마치 주마등과 같았다면 어서 깨어나야 했다.“…못해도 수백, 수천이군.”아르텐시아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깨에 한기가 느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그녀는 뒤로 돌아 아이작의 시선을 따라갔다.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달빛이 어지러이 흘러 내렸다.그 아래, 르완의 병사들이 아직 죽지 않은 숲을 밟고 서 있었다.“…….”아이작은 동요하듯 크기를 키워가는 악의 구를 보며 아르텐시아에게 속삭였다.“이토록 많은 병사를 보낸 것을 보면, 완전한 죽음 또는 생포가 목적일 겁니다.”“…어느 쪽이라 생각하지?”“둘 다이겠지요.”아르텐시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아이작의 팔을 잡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그들은 동시에 말했다.“나를 죽이고 당신은 생포할 목적일 겁니다.”“너를 죽이고 나를 데려갈 생각이구나.”“아미노의 명령이겠죠.”“아미노에게 데려가기 위해서.”결국은 다시 아미노였다. 아르텐시아는 이가 갈렸다.교묘하고 약삭빠르기가 마귀와 다를 데가 없었다.아이작의 현자의 눈을 통해 이곳을 살피지 못하니 그가 가진 정보력을 의심해 이런 다음 수를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더이상은 참지 못하겠구나, 아이작.”“생각보다 수가 많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감히, 너의 숨을 빼앗으러 온 것들이다. 난 이들의 숨을 갈취하는데 망설이지 않아.”아마도 병사의 수는 이 신전을 감싸고 마을에까지 닿아 있을지도 몰랐다.아르텐시아와 아이작이 짐승들을 처리하는데 시선을 빼앗겨 있을 때 이미 지척에 와있던 자들이다.분
아르텐시아를 가리고 선 그는 오래된 고목과도 같았고 단단한 요새와도 같았다.그리고 그의 손안에서 에테르의 창은 어느 때 보다 밝게 빛났다.“…그래, 아이작.”아르텐시아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긴 세월 동안 이어진 신뢰는 이깟 불안에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굳건해졌다.그 시선의 끝은 아이작의 어깨 너머에 있었다.아르텐시아는 신전 주변을 제외하고 꽤 많은 면적의 숲의 생명력을 빼앗아 악의 구를 더욱 키우기 시작했다.이제 메데이아의 뿌리는 피를 갈구하며 신전 위의 하늘을 덮어버렸다.완연한 어둠. 심연과도 같은 그것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소리마저 차단된 공간 속에서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짐승은 울음을 삼키고 메데이아는 활기를 멈춘 그때.두 사람에게 신호는 필요 없었다. 촤악!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아이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크아아아!”“깨갱!”아르텐시아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지만 빛을 잃지 않은 그 푸름을 쫓았다.그 푸른 빛은 옅은 잔
***“이, 이게 무슨! 누구냐! 내 신전을 이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이!”아르텐시아의 고통이 담긴 목소리가 신전에 닿았다.그녀는 신전 문 앞에 다다라서 털썩 주저앉았다.발에 채며 나부꼈던 메데이아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이어서 아이작이 그녀의 뒤를 따라 곁에 앉았다.“이런! 아르텐시아!”“…아이작. 보아라 나의 아이들이 이토록 고통을 받았구나.”“당신을 괴롭게 만들다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내야겠습니다!”“아니다, 그럼 안돼. 너까지 다치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아르텐시아…….”그는 결국 손에 얼굴을 묻으며 눈물을 삼키는 아르텐시아가 안타깝다는 듯 신음했다.아르텐시아는 아이작의 위로를 받으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참담함이 서린 눈동자는 형태가 남아 있는 메데이아 꽃에 닿아 있었다.“내 힘이 온전치 못해 신전과 숲과 메데이아를 지키지 못했구나….”“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르텐시아.” 부스럭, 부스럭.아르텐시아와 아이작의 눈동자가 시선의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마주쳤다.생명력이 사라지는 숲의 마지막 움직임이 타인에 의해 들려왔다.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이작, 저 병사 중에 아는 얼굴이 있느냐?”“없습니다.”“다 죽었으니까?”“네, 다 죽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두.”아르텐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놀랄 일도 아니었다.처음 이상함을 느낀 것은 신전의 조사를 텐죠우의 자식들이 했다는 것이었다.짐승은 말을 하지 못 한다.하지만 인간들은 생각과 말을 할 줄 알았다.그러니 텐죠우의 자식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르완의 병사들이 숨어있던 고위 신관이나 제물들을 찾도록 내버려 둔 거다.“명분 자체를 없앤 거야.”병사들은 지루한 임무에서 신이 나 있었을 것이다.물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짐승들이 수를 부풀려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병사들이 취한 것들은 모두 텐죠우의 자식들이 도로 가져갔습니다. 아미노에게 갔죠.”수법이란 이런 것이었다.아미노로서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터였다.명분, 경계. 그것들로부터 오는 반발심? 모두 죽이면 그만이었으니까.“그러나 오늘은 다 죽이지 못할 것이다.”아르텐시아의 검푸른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너와 내가 있으니까.”“아르텐시아….”“우리는 아미노의 수를 죽이는 거다.”말을 끝낸 그녀의 어깨 위로 조금 전보다 더욱 위험한 악의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