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자네가 요청한 프로그램 장비일세."
"감사합니다."
윤국장과 승주는 검은색 자동차에서 은밀하게 접촉했다. 의외로 윤국장은 직접 차를 운전하고 승주와 약속한 장소로 나왔다. 정명 국제학교와 차로 30분거리에 떨어져 있는 인적이 드문 공터였다.
"아직 정명쪽에서는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네. 그건 자네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겠지."
"..."
"장비의 사용법은 익히 알테고. 어디에 쓸건가?"
"... 결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발견 못하면 윤국장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승주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포커페이스를 윤국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윤국장은 마치 승주의 그런 속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너그러운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실패를 두려워말게. 지나고보면 피가되고 살이되는 법이니까."
"...네."
"몸 조심해. 가봐."
승주는 고개를 살짝 돌려 윤국장에게 목례한뒤 윤국장의 차에서 내렸다. 윤국장의 차는 빠르게 공터를 빠져나갔고, 승주는 그 자리에서 차가 안 보일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요청한 물건을 즉시 자신에게 가져다주었던 상사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이었다. 승주는 더욱 증거를 잡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장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반드시 증거를 잡아낼거야, 정명그룹을 조각조각 찢어발겨버릴거니까.."
..
새벽 1시. 칠흑같은 어둠이 정명 국제학교의 정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우아하고 찬란하던 정원은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달빛까지도 구름에 가려 한치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승주는 블랙의 전신수트를 입었다. 두건을쓰고, 마스크를 눈 바로 밑까지 끌어올려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몸에 밀착된 수트는 승주의 굴곡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새벽1시부터 3시까지. 단 두시간이다.'
승주는 경비원도 잠시 눈을 붙이는 시간이라는 걸 퇴근할때 경비원가 짧은 대화로 알고 있었다. 경비원은 신입 사서인 승주에게 그 어떤 경계심도 갖지 않고, 막간의 눈을 감는 타임이 있어 할만하다는 투로 말했다.
승주는 학교의 cctv 사각지대를 파악하고 재빨리 학교 안으로 진입했다. 경비실에서 경비원이 눈을 붙이고있는것을 창문으로 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경비원 근처에 있는 출입카드를 집었다.
[드르렁~ 드르렁~]
경비원은 세상모르게 잠들어있었다. 그의 휴대폰이 책상위에 있었지만 타이머가 120분에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을뿐 그 어떤 존재감도 없었다. 승주는 출입증으로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낮에 다녀왔던 데이터센터가 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불이 꺼져서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몇 시간 전에 와봤던 곳이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승주가 학교에 진입하자 구름이 점차 걷어지면서 학교 안으로 푸른 달빛이 들어왔다.
'헉...헉..'
숨도 쉬지 않고 몇 분을 달렸을까. 5층 데이터센터 앞에 섰다. 배낭에 메고 있던 장비를 꺼냈다. 생각보다 첫 출근부터 수확이 있는것 같아 승주는 흥분되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승주는 자신은 역시 '현장 스타일' 이라는 생각이 들어 실웃음이 나오려는걸 억지로 참았다.
'집중해, 집중. 여기서 들키면 끝이야.'
장비세팅이 끝난 승주는 데이터센터의 문을 경비원의 출입카드로 열었다. 학교가 멈춘 이 시간에도 서버는 24시간 돌아가고 있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듯한 이 곳은 낮과 밤이 없는 오로지 기계음만 가득한 시간이 멈춘듯한 곳이었다. 승주는 적막속에 기계의 세상으로 삼켜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으로 한발짝 더 들어선 순간이었다.
[탕!!]
'헉!!!'
승주는 누군가에게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혀 벽에 가둬지고 말았다.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승주의 얼굴은 벽에 짓이겨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한 손으로 승주의 양손을 뒤로 제압하고 있었다.
온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사내의 육중한 몸은 승주의 움직임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듯 바위처럼 단단하게 미동하지 않았다.
승주는 그럴수록 더욱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고, 급기야 벽을 발로 밀어 사내를 밀어내려는 순간 그는 승주의 두건을 거칠게 벗겨버렸다. 그리고 얼굴을 밀착해서 승주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서슬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밀어내는 순간, 너는 죽는다."
승주는 그가 자신의 양손을 한 손으로 제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옆구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총구-가 승주의 옆구리에 단단히 꽂아져 있었다. 잘록한 허리는 그 사내가 승주의 치명적인 명치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누구야, 당신."
"상황파악이 안되나본데, 그 질문을 스스로 하다니."
"!!"
승주는 자신이 이 공간의 침입자입을 깨달았다. 급작스러운 공격에 실수한 자신을 자책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거 놔."
"못 하겠다면?"
"놓으라고, 개자식아."
"개자식이라. 역시 입이 거치네."
승주는 사내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아냈다. 승주의 귓가에서 들리는 소름돋는 그 저음의 보이스는
오늘 아침 커텐 뒤에 있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남자가 두건을 벗겨버리면서 머리를 감싸고 있던 비니까지 함께 벗겨졌고, 승주의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졌다.
잠입하면서 체력을 소모한 탓에 땀이 났고, 땀에 늘러붙은 승주의 머리카락은 승주의 기분을 더 나락까지 가게 만들었다.
"손바닥 벽에 붙여."
남자는 총구를 더욱 옆구리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승주의 양손을 제압하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잡힌것 만으로도 승주의 양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총구를 느끼며 승주는 두 손을 들어올려 벽에 짚었다.
그가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옆구리에 총을 맞아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승주는 숨이 거칠어졌다.
'첫 임무, 첫 현장에서 나는....결국.... 아니야, 안돼. 이렇게는... 그럴 수 없어!!'
승주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그대로 몸을 돌려 총구가 있는 쪽으로 돌려차기를 날렸다!!
'여기가 어디지?'승주는 눈을 떳지만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양 손은 머리위로 묶여져 있었고, 너무 두껍지 않은 서걱거리는 이불이 덮여져 있었다. '100% 복사가 되었고, 장비를 빼려고 잡은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승주가 손을 빼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자유로운 다리로 이불을 걷어차버렸다. 순간 한기가 확 몰려왔다.분명 목부터 발목까지 한 번에 가려지는 수트를 입은 상태였는지, 이불을 걷어차 버리니 다리가 맨살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이거? 누가 내 옷을 벗긴거야!"버둥거렸지만 손목의 매듭이 더 조여지는것만 같았다. 까슬거렸던 느낌은 승주가 더욱 몸부림치자 손목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생채기가 난 곳에 또 다시 천이 쓸리니, 점점 상처가 심해지고 있었다. "누구야! 놔줘!!"태민혁은 호텔방 한 쪽에 놓여진 안락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승주가 몸부림칠수록 손목은 벌게졌고, 태민혁은 그게 신경쓰여 죽을것 같았다. "쓸데없는 짓, 그만 둬."승주는 움직임을 멈췄다. 혼자서 몇 분이나 난리는 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자신이 몸부림 치는것을 이제껏 지켜봤다는 소리였다. "당신 누구야?"태민혁은 목에는 음성변조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승주는 태민혁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 했다. "태민혁의 덫에 걸릴뻔 한걸 도와준 구세주.""개소리 집어치워!!"태민혁은 승주의 반응이 예상보다 흥미로웠다. 그래서 조금 더 놀려주기로 결심했다."그 수트는 정말 위험해. 알고있어?""당장 내 옷 내놔!! 이 손목 풀어, 이 개자식아!""누가 그 옷을 너에게 입혔는지 몰라도, 넌 그 사람을 믿으면 안돼."승주는 윤국장이 떠올랐다. 자신이 오늘 다시 학교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거라는걸 말하지 않았는데도 윤국장은 새로운 수트를 보냈었다. "그게 무슨소리야? 알아듣게 말해!!""순진하군."태민혁은 승주에게서 그 수트를 벗길때 느꼈던 흥분감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루카스?""아까 그랬잖아요. 이 호텔은 룸에서 보는 서울 야경이 환상적이라고, 같이 보자고.""...?"승주는 그제서야 자신이 대충대충 대답한 내용이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바코드 배열을 전산으로 맞추느라 정신이 없어서 네네-, 좋네요. 하면서 호응했던 것인데, 루카스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루카스,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얘기해줄게요. 여기선 남녀가 호텔방에 그것도 같은 직장 동료끼리 그러지 않아요.""너무 길게 말해서 이해 안돼요."루카스는 천연덕 스럽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렸다. "아, 그래요?승주는 능숙하게 완벽한 발음으로 똑같은 내용을 영어로 말했다. 루카스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승주는 조금 더 단호한 목소리로 불어로 같은 내용을 이야기 했다. 승주의 외국어 차력쇼에 근처에 있던 교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 사실을 승주는 몰랐다. 루카스는 더 해보라는 듯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피식- 웃었다.'이 새끼가, 웃어?!'승주는 스페인어, 중국어로 똑같은 말을 루카스에게 퍼부었다."누구야? 우리 학교 선생님인가?'"아까 조회시간에 못 봤어? 새로 온 사서 선생.""어머, 무슨 사서가 외국어를 저렇게 잘 해?"교사들이 수군거리기자 승주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영회였지만 각자 먹기 바빴던 선생들이 승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니, 선생님! 이렇게 외국어를 잘하세요?""도대체 몇 개국어를 하신거에요? 와, 지금 내가 본것만 4개국어야~""하하,,,아니그냥 조금이요...감사합니다.."승주가 민망한듯 겸손하게 손사레를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세나가 코웃음을 쳤다. "내용이 중요하죠, 지금 루카스 선생님한테 호텔방 가자고 꼬신거잖아요?"세나의 말이 끝나자 선생들이 경악했다. 승주는 기가막혀서 입이 떡 벌어졌다."지금 무슨 그런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하시는거에요?! 그런거 전혀 아니거든요?!""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루카스쌤이랑 호텔방가서 서울야경 보자는 얘기를
학교가 끝나고 교사들은 JM HOTEL 디너뷔페로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승주가 도착했을땐 이미 여러 명의 선생님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승주는 자신과 나이그 비슷해보이는 여자 선생님들이 앉아있는 무리에가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박은정 선생님 대체교사로 근무하게된 한승주입니다."승주의 말에 여자 선생님들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중에 한 명 단발머리에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 김세나가 말했다. "박은정? 그게 누구지?""세나쌤, 기억 안나요? 만삭이었던 도서관 사서요." "아~ 노산했다는 그 분?"세나의 말에 다른 두 여선생이 꺄르르 웃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들에게 노산은 놀림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박은정 사서가 승주에게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승주는 기분이 나빴다. "노산이든 초산이든, 아기를 출산했다는 것 자체는 대단한 일이죠."승주의 말에 세나가 표정을 구겼다. 다른 두 선생도 세나의 눈치를 보며 승주를 위 아래로 깔아보며 귓속말을 했다. "세나쌤이 누군지 모르나봐요.""그래봤자 계약직. 무시하세요, 세나쌤."승주는 자신의 귀에 다 들리는 귓속말에 기가막혔다. 태민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이들 옆에 앉으려고 했는데 하는 꼬라지를 봐서는 머리가 텅 비었을게 뻔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승주가 짧게 말하고 뒤돌아 가려는 순간"Hi, Red hood."루카스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여기 앉을거에요?"루카스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루카스가 곁에 다가오자 조금 전 까지 승주를 깔봤던 세 명의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승주를 바라봤다. 루카스를 데리고 자신들 옆에 앉아달라는 것이었다. 승주는 사실 루카스와 단 둘이 따로 떨어져 앉는 것도 부담스러웠다."네. 여기 앉으세요, 루카스.""Okay~ Hi, Ladies~""Hi~"세 여자들을 루카스가 바로 맞은편에 앉자 승주는
승주는 서하준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눈만 깜빡거렸다. 손목에 느껴지는 강한 힘과는 다르게 서하준의 눈빛은 반쯤 풀려있어서 누가봐도 이제 막 자다깬 게슴츠레한 눈이었다. "이거 안놔?"고운 목소리가 나올리 없었다. 붙잡힌 손목 쯤이야 180도로 꺾어서 녀석의 팔을 빠지게 할까 진지하게 고민중인 승주였다. "근데 누구세요? 도둑?"도둑이란 말에 괜히 가슴 한 켠이 찔린 승주는 당황했지만 자신은 선생이고 녀석은 선생이란 사실을 일깨워주리라 마음먹었다."서하준? 내가 기억나지 않는구나. 난 기억나는데.""무슨..?"승주는 한 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승주의 기세에 약간 주눅이 든 서하준이 손목을 잡고있던 힘을 풀었다. 승주는 그 때를 놓치않고 제 손을 완전히 빼버렸다. [팍-]"화장실에서, 여학생이랑 너랑. 내가 너 구해준거 기억안나?"서하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저, 나쁜 일을 당했어요, 라고 말한게 바로 너."서하준은 승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하준이 앉아있던 의자가 쿠당탕- 뒤로 넘어졌다."그, 그만하세요.""도와달라며? 왜 그냥갔어? 지금이라도 학폭위에 신고할래?""미쳤어요?!!"서하준이 소리쳤다. 조용한 도서관에 서하준의 목소리만 울려퍼졌다. 승주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쉬었다. "쌍방, 맞지? 한 번만 더 학교에서 그랬다간-""알지도 못 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서하준은 승주를 잠시 노려보았다. 승주도 서하준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두 번 속지 않아, 이 날라리녀석.'서하준은 승주에게 뒤를 돌아 도서관 출구쪽으로 나갔다. 승주가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는데 서하준이 냉큼 몸을 돌려 다시 돌아왔다.'뭐야? 할말이 남은거야?'서하준은 넘어졌던 의자를 다시 세운뒤 일부러 크게 소리내어 제 자리에 밀어넣었다. [쾅!]그리고 다시 승주를 째려보고는 도서관 출구로 나갔다. '어쭈, 요것봐라? 성질있네? 내가 너 같은 후배놈들을 한 두번 본줄 아냐?'승주
"오늘 두 번째로 이 학교에 왔어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사장님."승주는 싱긋 웃는 미소를 태민혁에게 보내는것도 잊지 않았다.태민혁과 밀착된 순간을 떠올려 보면, 그가 자신을 알아볼 수 도 있었기에머릿속으로 수 십번 연습했던 말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잡아떼자. 증거도 없잖아. 데이터센터에 진입할때도 cctv 사각지대로만 움직였으니까.'승주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태민혁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느긋한 몸짓으로 오히려 승주보다 더 여유를 부렸다."똑같은 자세를 해보면 기억이 나려나?"정색을 하거나 화를 내면서 추궁할 줄 알았던 태민혁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나오자 승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누구도 서로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태민혁은 지난 밤 이 여자에게서 해소되지 못 한 갈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여기서, 다시 너를 먹을까.'[에에엥-]둘 사이의 적막을 깨버린 사이렌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혹시 경찰에 신고하셨어요?!""신고는 그쪽이 해야하지 않나. 뭔가를 잃어버렸으면.""!!"'사이렌 소리 때문에 순간 방심했다. 스스로 자수하는 꼴이나 다름없어. 한승주, 나가 죽자, 죽어...'승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이 되는 태민혁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고 했다. 결국 승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나 커텐을 치고 창 밖을 바라봤다.운동장으로 구급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곧 이사장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승주가 이사장실 문을 열고 나가자, 강대한이 박은정 사서를 들쳐안고 구급차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강슨생~!!! 나 살려줘! 아악!!!"박은정 사서는 강대한의 목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선생님, 구급차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승주는 강대한과 눈이 마주쳤지만 워낙 상황이 시급한지라 아무말도 나누지 못 했다. 박은정 사서가 걱정이 된 승주는 강대한의 뒤를 따라 나섰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승주는 태민혁이 자신에게 질문을 한 건지, 명령을 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말투는 분명히 질문이고 끝이 물음표인데, 도저히 거절하기 힘든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첫 출근인데 이사장이 면담을 원할 수도 있지.'"네, 알겠습니다."승주는 짧게 묵례하고 교무실 쪽으로 돌아섰다."아는 사이야?"강대한이 승주와 함께 교무실로 걸어가며 물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그게 아니라면 이사장님이 너를 따로 부를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첫 출근인데 면담이라도 하려나 봐. 아, 우리 학교에서는 동창인 거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어? 굳이 그럴 필요 있나?""응.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승주는 걸음을 멈추고 강대한을 똑바로 쳐다봤다."알았지, 대한아?"강대한은 진지하고 단호한 승주의 태도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끄덕였다.승주는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 강 선생님."강대한은 어릴 적 한승주의 명성이 다시금 떠올랐다. 학교뿐만 아니라 그 동네에서 한승주는 유명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데 얼음같이 차가웠던. 별명이 '엘사'였다. 어느 날 '엘사'가 자신이 속해 있는 문예부에 들어왔을 때 승주를 처음 만났다. 각자 시를 쓰고 그 시를 낭송하던 동아리 활동에서 승주가 시를 낭송하는 날이면 동아리원이 아닌 학생들도 와서 승주의 낭송을 감상했었다.강대한이 상념에서 벗어나자 승주는 벌써 교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승주의 옆에는 박은정 사서가 있었다. 그녀는 만삭의 배를 지탱하기에는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선생님, 많이 불편하시면 보건실에 같이 가 드릴까요?"승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요. 교무회의는 끝나고 가야지."박은정 사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사십 대 초반인 그녀가 임신에 성공한 것은 난자를 냉동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미 체력은 40대였기에 모든 일상이 힘들었다.교무회의에서는 박은정 사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