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 두 시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현우였다. 조금 전까지 이층 끝방에서 서라를 품에 안고 있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안 잤네.”
현우는 셔츠 소매를 무심하게 걷어 올리며 침대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달짝지근한 향이 훅 풍겼다.
서라의 향수였다.
내 집, 내 침실까지 따라 들어온 그 저급하도록 달콤한 냄새에 나는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서라 씨는…….”
“재웠어.”
재웠어.
그 짧은 단어가 이상할 만큼 생생하고 기괴하게 귓전에 박혔다.
현우는 묵직한 손목시계를 풀어 협탁 위에 툭 던지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온 남편이 제 아내의 침실에서 잠자리를 준비하는 것처럼.
“여보.”
“왜.”
“오늘은…… 다른 방에서 주무시면 안 돼요?”
현우의 손이 멈췄다. 느릿하게 고개가 돌아왔다.
“뭐라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능적인 공포에 대답이 바로 뒤집혔다.
“……아니에요.”
현우가 피식 비웃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가장자리로 몸을 피하려 하자 현우의 억센 손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어딜 가.”
몸이 그대로 끌려가 등이 현우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혔다.
“여보…….”
“가만있어.”
허리를 옭아맨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현우가 내 목덜미 깊숙이 얼굴을 묻자 익숙하고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훑었다.
예전에는 아무런 의구심 없이 받아들였던 손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허리를 감은 그의 셔츠에서 서라의 냄새가 났다.
조금 전 그 팔 안에 누가 있었는지, 그 손이 누구를 만졌는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몸이 돌처럼 굳었다.
“왜 이렇게 뻣뻣해.”
현우의 손이 얇은 잠옷 자락을 밀어 올리며 허리를 쓸었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순간 침실 안이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 스스로가 먼저 놀랐다. 지난 수년 동안 한 번도 현우의 손길을 이렇게 막은 적이 없었다.
“이거 놔.”
현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잡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놓을 수 없었다.
“……싫어요.”
현우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뭐가 싫어.”
“오늘은…… 하지 마세요.”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현우가 거칠게 나를 뒤집어 침대에 눌렀다.
“서라랑 잔 거 때문에 이래?”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떨었다. 현우는 내 양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 머리 위로 짓눌렀다.
“대답해.”
“아파요…….”
“한지아.”
내 이름 석 자가 낮게 떨어지자 숨부터 죽였다.
현우는 내가 겁에 질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
“서라는 서라고 넌 너야.”
“…….”
“걔는 내 애 가진 여자고, 넌 내 아내야.”
현우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밖에서 누구를 안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눈앞이 아득해졌다.
“상관…… 있어요.”
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말한 순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뒤였다.
“뭐가 상관있는데.”
“……다른 여자 안고 있던 몸으로 저한테 이러는 거, 싫어요.”
현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억센 손가락이 내 턱을 움켜쥐었다.
“너 지금 나 거부하는 거야?”
무서웠다.
턱도, 짓눌린 손목도 아팠다. 당장이라도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현우가 가까워질수록 서라의 달짝지근한 향이 짙어졌다.
현우의 입술이 내려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이 뺨을 스쳤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왜? 한 과장이 한번 봐주면 되잖아.”지아는 서류를 밀어놓고 차분하게 말했다.“보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제가 최종 확인자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이 자료는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앞에서 어떤 기준으로 정리했는지도 모르잖아요.”“수치만 맞는지 보면 되지.”“그 수치가 왜 나왔는지까지 알아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죠.”지아는 서류 첫 장에 적힌 작성 부서를 손끝으로 짚었다.“작성한 팀에서 먼저 확인해 주세요. 그다음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제가 볼게요.”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물러서는 기색은 없었다.팀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봤다.“지난번에는 네가 다 봤잖아.”“그래서 이번에는 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지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지난번 납품 건도 제가 수정한 파일에 제 이름이 남았어요. 제가 도와드린 부분은 제가 책임지면 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지 않은 자료까지 제 이름으로 넘기면 나중에는 누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알 수 없잖아요.”회의실 문 앞에 서 있던 이건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조금 전부터 궁금했던 답을 뜻밖의 순간에 들은 기분이었다.한지아는 남의 일을 무조건 떠안는 사람이 아니었다.필요하면 자기 일이 아니어도 나섰지만, 그렇다고 남의 책임까지 대신 짊어지지는 않았다.도울 일과 책임질 일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그 차이가 이건에게는 꽤 인상적이었다.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책임감과 희생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었다.“알았어. 그럼 이것만 먼저 봐줘.”팀장이 결국 서류 한 부를 도로 가져갔다.“네. 확인할 부분 표시해서 보내주세요.”지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괜히 분위기를 풀려고 웃지도 않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았다. 해야 할 말을 했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듯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이건은 그런 지아를 잠시 바라봤다.자기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다.그는 원래 그런 사람과 일하는 걸 좋아
회의실 안의 변명이 뚝 끊겼다.잠시 눈치를 보던 물류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 기존 기준으로 발주를 넣고 나중에 수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그러면 일을 두 번 해야 하지 않습니까?”“그렇긴 합니다만, 지금 시스템을 수정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건의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한지아였다.노트북 가방과 서류철을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오늘 참석자 명단에는 없던 사람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자 시선이 잠시 멈췄다.며칠 전 기억 속에 떠올랐던 얼굴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이 훨씬 선명했다.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길어진 시선을 먼저 거뒀다.“한 과장, 여긴 왜 왔어?”전략기획팀장이 물었다.“박 선임님이 연락하셨어요. 안전재고 수량이 이상하다고 해서요.”지아는 빈자리를 찾는 대신 곧바로 노트북부터 열었다.“어디까지 확인하셨어요?”박 선임이 문제의 페이지를 내밀었다.지아는 화면과 자료를 번갈아 살폈다. 옆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상황을 설명했지만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필요한 내용을 모두 확인한 뒤에야 물류팀장을 바라봤다.“오늘 발주 마감 몇 시예요?”“세 시.”벽시계는 한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럼 시간 있어요. 전체를 기존 기준으로 넣지 말고 오류 난 세 품목만 먼저 빼주세요. 나머지는 계획대로 발주하고요.”전략기획팀장이 물었다.“시스템 수정이 두 시간 안에 돼?”“전체를 지금 바꾸면 안 되죠. 안전재고 기준값만 잘못 들어간 거니까 세 품목만 임시 승인으로 수정하면 돼요. 오늘 발주가 끝나면 전체 기준은 다시 확인하고요.”“승인은?”“물류본부장님 결재 받아야죠. 수정 근거는 제가 정리할 테니까 승인부터 바로 받아주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분위기가 달라졌다.조금 전까지 서로 책임을 설명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현장 점검 날, 한지아는 나타나지 않았다.명단을 확인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백림유통 물류센터에 들어선 순간, 이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전략기획팀에서는 김 대리와 박 선임만 나와 있었다.한지아는 없었다.그제야 이건은 자신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작 며칠 사이 몇 번 마주친 직원이었다.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다.이건은 별 의미 없는 생각이라는 듯 시선을 거뒀다.“대표님, 이쪽입니다.”백림유통 전략기획팀장이 앞장섰고, 이건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지난번 납품 오류 이후 백림유통은 수정 파일 관리 절차를 손봤다. 오늘은 바뀐 방식이 실제 현장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담당자들은 준비해 온 자료를 넘기며 달라진 절차를 차례로 설명했다. 설명만 들으면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오히려 너무 매끄러웠다.이건은 이런 보고를 수도 없이 받아봤다. 사고가 터진 뒤 만들어지는 대책은 언제나 완벽했다. 서류만 보면 같은 문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결국 문제는 사람이었다.절차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없었고, 사고가 생겼을 때 누가 판단하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졌다.그 예상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떨어졌다.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를 넘기던 물류팀장의 손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이거 지난번 기준 아닙니까?”전략기획팀장이 서류를 끌어당겼다.“아닙니다. 최종 수정본입니다.”“그런데 안전재고 수량은 왜 그대로예요?”맞은편에 앉은 실무자들의 표정이 하나둘 굳었다.이건은 문제의 자료를 끌어와 직접 확인했다. 지난번 오류가 발생했던 세 품목 가운데 하나의 안전재고 수량이 이전 기준 그대로 남아 있었다.“문제 있습니까?”이건의 낮은 목소리에 전략기획팀장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큰 문제는 아닙니다, 대표님. 아직 시스템에 최종 반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함께 확인한 건 알겠고,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회의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몇 사람의 시선이 오간 끝에 물류팀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전략기획팀 한지아 과장이 찾았습니다.”그 이름이 나오자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그 직원은 오늘 회의에 없습니까?”“한 과장이요?”전략기획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납품 건 담당자가 아니라서요.”또 같은 말이었다.담당자가 아니라면서 사고가 터졌을 때는 남아 문제를 해결했고, 보고서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정작 일이 끝난 뒤 열린 회의에도 들어오지 않았다.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잠시 팀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회의가 끝난 뒤 복도를 지나는데 열린 사무실 안쪽으로 익숙한 옆얼굴이 보였다.걸음이 느려졌다.한지아였다.어제와 달리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채 옆자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한 과장님, 어제 진짜 고마웠어요. 한 과장님 아니었으면 우리 다 죽었어.”물류팀 직원이 캔커피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자 지아가 웃으며 도로 밀어냈다.“됐어요. 나중에 우리 팀 야근할 때나 좀 살려줘요.”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시선이 오래 머물렀다.“그래도 보고서에 이름은 넣지 그랬어요.”“내 일도 아닌데 뭘 넣어요.”“파일 찾은 건 한 과장님이잖아요.”“찾은 사람이 뭐가 중요해요. 납품 제대로 나갔으면 됐지.”지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 어젯밤 내가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왜 혼자 남아 있습니까.그 여자에게는 설명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문제가 있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니 남았을 뿐이었다.“대표님?”앞서 가던 비서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그제야 내가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갑시다.”다시 걸음을 옮겼다.몇 걸음쯤 갔을 때 뒤쪽
“그래서 먹었다고 한 겁니까?”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되물었다.“대표님은 부모님한테 그런 거짓말 안 하세요?”뜻밖의 질문에 이번에는 내가 말문이 막혔다.잠시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안 하는 것 같군요.”“그럼 좋은 아들이신가 봐요.”눈썹이 슬쩍 올라갔다.나를 두고 좋은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여자는 내 반응에는 별 관심도 없는지 삼각김밥 포장을 뜯었다.“이제 먹습니다.”마치 이제 됐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또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 안쪽을 한번 눌렀다.“알겠습니다. 그럼 계속하세요.”이번에는 순순히 돌아섰다.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고개가 사무실 쪽으로 돌아갔다.여자는 벌써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다시 일에 빠져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옆에 있던 비서가 슬쩍 나를 바라봤다.“아시는 직원이십니까?”“아니. 오늘 처음 봤어.”“그런데 꽤 오래 계시길래요.”손목시계를 확인했다.정말 오래 있었다.굳이 돌아갈 필요도 없었고 왜 남아 있는지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삼각김밥을 먹든 말든 내가 신경 쓸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에도 방금 전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물류팀 일이라고 두고 가면 내일은 회사 일이 된다는 말.주머니에 손을 넣고 벽에 등을 기댔다.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다음 날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최종 납품 완료 보고서가 올라왔다.예정된 납품처에는 수량 이상 없이 모두 출고가 완료됐고, 전날 발생한 오류와 조치 과정도 시간대별로 정리돼 있었다.오후 7시 26분, 이중 파일 확인.오후 8시 03분, 최종 수량 재검증.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멎었다.그 아래에는 조치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물류팀 직원 둘과 영업팀 직원 하나가 전부였다.명단을 한번 훑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역시 없었다.펜 끝으로 종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서를 불렀다.“이게 최
사무실 구석에 켜진 모니터 불빛이 여자의 옆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내 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당황하는 기색도, 대표인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눈이 맑고 차분했다.돌아서려던 발이 그대로 굳었다.“혼자는 아니에요. 물류팀 직원들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본인 담당 업무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네. 저는 전략기획팀이에요.”“그런데 왜 아직 여기 있죠?”여자가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내일 아침에 납품이 나가야 하니까요.”“그건 물류팀 일 아닙니까?”“원래는 그렇죠. 그런데 지금 물류팀 일이라고 두고 가면 내일 아침에는 회사 일이 되잖아요.”손목시계를 확인하려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몇 시간째 회의실에서 들은 건 하나같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말뿐이었다.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목소리만 높이던 사람들과 달리, 정작 담당도 아닌 여자는 회사 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밤늦게까지 남아 있었다.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여자는 어느새 의자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이것만 마저 확인해야 해서요.”말은 정중했지만 뜻은 분명했다.이제 그만 가달라는 거였다.대표가 눈앞에 서 있는데도 자기 공을 설명할 생각도, 조금이라도 더 말을 붙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아직 자리를 뜨지도 않았는데 시선은 벌써 모니터로 돌아가 있었다.헛웃음이 나왔다.“아까 오류 난 파일 찾아낸 것도 본인입니까?”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네.”“어떻게 찾았습니까?”“수정 시간이 안 맞아서요. 누가 숫자를 잘못 입력했다면 같은 파일 안에 수정 기록이 남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파일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여자가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자 자연스럽게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여기요. 이 파일이 먼저 넘어갔고, 이쪽이 나중에 수정된 최종본이에요.”화면에는 두 파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