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늘 송원영은 짙은 초록색 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덕에 도자기 같은 하얀 피부가 더 도드라져 보였고 목에 건 진주 목걸이도 유난히 반짝였다.성숙한 매력에 회사 임원 특유의 날카로운 카리스마까지 넘쳤다.그 모습에 송수정은 순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눈가가 시큰거리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차오르며 시야가 흐려졌다.송수정은 거의 도망치듯 àl'aube를 빠져나갔다.송수정이 떠난 뒤 송원영은 하던 주문서를 마저 처리한 뒤에야 고개를 들어 맞은편 소파에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노현우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전에 노준서 씨가 지유 씨 휴대폰에도 몰래 프로그램을 설치한 적 있었어요. 노 대표님도 시간 날 때 휴대폰 한번 확인해 봐요."노현우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제자리에 서서 줄곧 쳐다보고 있던 김지유를 바라보았다.김지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복잡한 눈빛이었다.김지유와 송원영이 근거 없는 추측으로 함부로 사람을 의심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노현우도 알고 있었다.목이 바짝 타들어갔다.비룡 주얼리의 기밀 자료를 집에 가져오거나 개인 휴대폰에 저장해 둔 적은 없었다.하지만 최근 노준서가 자주 찾아온 건 사실이었다.집에서 몇 번 자고 가기도 했다.그동안 노현우의 서재에도 분명 들어간 적이 있었다.하나씩 떠올리자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와 노현우를 완전히 집어삼킬 듯했다.숨이 막힐 것 같았다.노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송원영이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에 사인했다."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계약서를 두 부로 나눠 한 부는 송원영에게 건네고 나머지 한 부는 노현우가 챙겼다.비틀거리는 뒷모습을 보는 김지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송원영이 까딱하고 턱짓했다."따라가 봐. 지금 저 상태로 운전이나 하겠어? 지유 씨가 노 대표님 좀 데려다줘."서둘러 뒤쫓아 나간 김지유는 복도에서 노현우를 발견하고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랐다.처음엔 옆에 있는 김지유도 알아채지 못한 노현우였다.김지유가 팔을 붙잡자
송수정이 애처로운 얼굴로 송원영을 바라보았다."언니, 나 안 믿는 거 알아. 그래도……"송수정도 결국 말끝을 흐리고야 말았다.어릴 때부터 대놓고, 아니면 몰래 송원영한테서 얼마나 많은 걸 빼앗았는지 셀 수도 없지만 그래도 너무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곁에 있던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고 배신당하는 게 이렇게 아프고 두려운 줄 몰랐다.이제야 잘못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송수정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송원영한테 미안하지만 자신도 이미 벌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송원영은 송수정을 힐끗 쳐다볼 뿐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송수정이 잘못을 뉘우치든 말든 상관없었다.과거의 일도, 송씨 집안 사람들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송원영이 옆에 있던 메모지를 집어 들고 딱 잘라 말했다."돈은 보내줄 테니까 차용증 써.""응. 꼭 갚을게."수술비가 얼마나 드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송원영이 망설이는데, 노현우가 다가왔다."제가 낼게요.""노 대표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노현우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준서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탓이에요. 이분 수술비와 앞으로 필요한 영양비는 제가 낼게요."노현우는 송수정한테 입금용 QR 코드를 받아 천만 원 정도를 입금했다."이 정도면 될까요?""네, 충분해요. 그런데 누구세요……"노현우를 쳐다보는 송수정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자세히 보니 노준서와 조금 닮은 얼굴이었다.지금 송수정은 노준서와 관련된 모든 것이 진심으로 두려웠다.노현우가 차분하게 말했다."준서는 제 동생이에요. 그동안 제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가르침에 소홀한 탓이에요."예전 같았으면 노현우 같은 엘리트에게 송수정이 먼저 다가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 모든 남자를 멀리하고 싶었다.뒤로 조금 물러나 휴대폰에 입금된 금액을 확인하던 송수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 누군지 알겠다. 노준서가 당신한테서 비룡 그룹 기밀을 빼내 팔아넘길 거라고 했어요."또
오랜 세월 함께 지낸 노현우지만 노준서의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송수정이 두려움을 억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준서야, 나 무서워……네 아이잖아! 설 대표님 때문에……아이한테 영향 줄까 봐 걱정되지도 않아?"그 말을 들은 송원영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웃었다.송수정도 아주 구제 불능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순간에 노준서한테서 말을 끌어낼 줄 알았다.노준서는 송수정 옆에 노현우가 있다는 걸 알 리 없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아이 낳으라고 한 적 없다고! 네가 낳기로 했으면 그 대가도 네가 감당해야지!""설 대표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복인 줄 알아. 요즘 운이 좀 안 좋다고 그 아이로 액땜하려는 거라고."송수정이 목메어 말했다."하지만 네 아이잖아……"노준서는 차갑고 잔인했다.사형 집행인이라도 된 듯 몇 마디 말로 송수정 배 속 아이의 운명을 정해버렸다."나는 앞으로 아이가 더 생길 거야. 송수정, 넌 내 아이를 낳을 자격도 없어."송수정은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노현우가 손을 뻗어 전화를 끊었다.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노준서가 뱉은 몇 마디 말만으로 온몸이 굳고 소름이 돋기 충분했다. 평생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동생을 이제야 처음 제대로 알게 된 기분이었다.임신부로 액땜하는 건 강성시 유흥가에서 흔한 일이었다.노현우도 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사업하는 사람들이 액운을 임신부 배 속 아이한테 떠넘기는 짓을 액땜이라 불렀다.그때만 해도 노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평생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운명의 부메랑이 되돌아와 노현우의 뺨을 후려친 것처럼 화끈거리도록 아팠다.노준서의 말을 끝까지 들을 용기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대체 어디서 저런 천박한 짓을 배운 걸까?자리에서 일어나던 노현우는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김지유가 다가와 부축하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갈라진 목소리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송수정은 허겁지겁 배달 음식을 먹었다.먹을수록
울면서 계속 하소연하는 송수정은 입만 열면 노준서의 잘못을 늘어놓았다.송원영은 비서에게 물을 가져오게 해 송수정에게 마시라며 건넸다.카펫 위에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민지강이 차마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지금 송수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한쪽 발은 맨발이고 다른 쪽에는 발에 맞지도 않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발목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가슴팍에는 요리하다 묻은 얼룩까지 남아 있었다.얇은 티셔츠 아래로 불룩한 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과거의 일과는 상관없이,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저 밑바닥까지 내몰려 엉망이 된 여자였다.송원영은 재촉하지 않았다.휴대폰으로 비서한테 자기 카드로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문해 송수정한테 가져다주라고 했다."일단 일어나. 오늘 노준서 씨와 싸운 거야?"송수정은 결국 멘탈이 무너지고 말았다."언니는 걔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 어떻게 그럴 수가……"송수정은 이를 악물고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고 송원영은 듣는 내내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노준서가 미친 걸까?노현우는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노준서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가 치밀었다."이봐요, 지금 하는 말 전부 책임져야 해요! 준서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송수정은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아니라고요? 뭐가 아닌데요? 당신이 임신한 것도 아니고 다른 남자한테 팔릴 뻔한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서 무슨 중립인 척이에요!"노현우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관자놀이를 짚었다.그때 계약서 출력을 마친 김지유가 송원영 비서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송원영이 턱짓으로 음식을 송수정에게 주라고 했다."일단 먹어. 다 먹으면 내가 데려다줄게.""싫어, 나 안 돌아가. 나 데려가면 안 돼!"송원영은 김지유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김지유가 놀라며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노준서가 다른 남자
남자의 눈빛에 송수정은 소름이 끼쳤다.노준서가 데려온 남자가 왠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게다가 떨어질 줄 모르는 끈적한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노준서가 송수정을 끌어당겨 옆에 앉히고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구 설 대표님이야."송수정은 얌전히 인사했다.설 대표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뻗어 송수정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송수정이 피하려 하자 노준서가 오히려 앞으로 떠밀었다.송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경악한 채 노준서를 쳐다보았다.노준서의 속셈을 송수정은 당연히 알 수 있었다.노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착하지,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집까지 제공해 줬잖아. 이 집안에 조금은 보탬이 돼야지.""하지만 나는……""이렇게라도 안 하면 설 대표님이 널 거들떠도 안 볼걸."송수정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손발이 덜덜 떨렸지만 노준서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친 순간, 두려움을 억누르며 설 대표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노준서는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식사를 마친 설 대표가 송수정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송수정이 설 대표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리듯 말했다."저 뭐 좀 사올게요, 바로 밑이라 금방 다녀올게요."설 대표에게 돈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다.뭘 살 거냐고 묻자 송수정은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설 대표의 팔을 끌어안고는 노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아니면 네가 사다 줄래?"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사다 줄 여유가 없었던 노준서는 송수정의 신분증을 가져가며 경고했다."허튼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무슨 수작을 부려. 나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잖아."그건 노준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노준서는 휴대폰을 돌려주고 돈을 조금 이체한 뒤 빨리 다녀오라고 했다.송수정은 순순히 따르는 척 설 대표의 팔을 붙잡고 아쉬운 듯 애교까지 부리며 전혀 거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그 모습에 노준서도 경계를 풀었다.문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세워 탄 송수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출발, 출발해주세요……"그제야 정작 도망치고 보니
한여름날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에 송수정은 짜증이 확 났다.점점 불러오는 배를 내려다보던 송수정이 손을 얹고 혼잣말했다."애만 낳으면 준서도 나를 버리지 못할 거야……"송수정은 여전히 아이로 노준서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요즘 노준서는 송수정이 아이를 낳겠다고 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심지어 산전 검사를 받으라며 돈까지 주었다.하지만 송수정과 결혼하거나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노준서가 집에 돌아오자 송수정은 허리를 짚어 불룩해진 배가 더 도드라지게 하며 다가갔다. "준서야, 왔어……"노준서가 송수정을 힐끗 보았다.솔직히 송수정은 얼굴이 제법 예뻤고 임신하고도 못생겨지기는커녕 피부가 뽀얗고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아 더 예뻐 보였다.노준서는 슬슬 짜증이 났다.노준서의 시선이 송수정의 배를 스쳤다. 배 속에는 노준서의 아이가 있었다.노준서는 송수정이 아이를 낳든 말든 상관없었다.하지만 송수정이 살갑게 다가오자 또 짜증이 치밀었다.노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짜 낳을 거야?"송수정이 노준서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그래도 우리 아이잖아, 차마 지울 수가 없었어…… 사람 찾아서 초음파 사진 봐달라고 했는데 아들이래!"마음이 답답해진 노준서는 송수정의 손을 뿌리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나는 너와 결혼 안 할 거야. 낳고 싶으면 낳아, 그리고 네 선택이니까 네가 책임져."송수정이 억울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책임지라니, 대체 뭘 어떻게 책임지라는 거지?자기 한 몸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 갓난아기까지 키우라는 건가?"준서야……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우리 책임질 생각이 없다는 거야?"노준서가 싸늘하게 송수정을 바라보았다."내가 낳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네가 굳이 낳겠다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그래도 네 아이이기도 하잖아……""나는 앞으로 아이가 더 있을 거야. 부모가 바라지도 않는데 태어난 아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노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