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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빛나냥
부서 전체가 새로 부임한 상사의 압박에 야근을 택했고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특히 권지헌이 지목까지 한 몇 명의 팀장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퇴근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허설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딸 연희가 언제 돌아오는지 묻는 전화였다.

허설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연희야, 할머니랑 같이 먼저 자. 엄마 좀 늦게 들어가."

연희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엄마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 연희랑 할머니 밥 조금만 먹을게."

허설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곧 울 것 같은 느낌에 허설아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머릿속엔 계속 연희의 앳된 목소리가 맴돌았다.

허설아는 엄마 성을 따랐고 허설아의 아빠는 연 씨였다.

아빠인 연동근이 돌아간 뒤 연동근을 그리워하던 허설아와 허민정은 연희에게 아빠의 성을 따르게 했다.

사실 연희가 권지헌의 딸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권지헌 본인조차 이 세상에 그의 핏줄인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올해 두 살인 연희는 면역 계통의 문제가 있어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다.

의사는 타고난 귀한 몸이라며 많은 돈을 들여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체질이라 했다.

연희를 데리고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매달 약값만 수백만 원이 들었다.

하지만 딸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어도 아깝지 않았다.

허씨 가문이 파산한 뒤, 허설아는 전에 갖고 있던 가방, 주얼리, 차와 집까지 팔아서야 겨우 일부 채무를 갚을 수 있었다.

지금은 허민정과 연희까지 약을 먹어야 했고 가족 모두가 허설아 한 사람의 수입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지헌을 본 순간 놀라서 도망가고 싶고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지만 절대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

허설아는 돈이 필요했다.

옆자리 동료가 연희 전화를 받던 허설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설아 씨 어려 보이는데 딸이 벌써 그렇게 큰 줄 몰랐어. 아이 아빠는?"

주변 사람들 모두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허설아는 가볍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 누워 있어. 매달 약을 써야 하거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분위기가 넘쳤다.

동료들 모두 입을 꾹 닫았다.

다들 허설아의 딸과 어머니의 몸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온 집안에 환자 뿐이고 허설아 혼자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말이잖아?

허설아도 진짜 강인했다.

동료들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빨리 퇴근하기 위해 남은 일에 몰두했다.

부서 밖에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인 구두가 보였다.

맞춤 수트를 입은 남자가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에선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지헌아? 내 말 들려? 엄마가 주말에 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 먹으래."

권지헌은 급히 방향을 틀어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간 없어."

"그럼 다다음 주는?"

"그때도 안 돼."

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밥 먹으러 오라는 강시우 엄마의 초대는 사실 핑계였고 권지헌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회사를 맡자마자 벌써 이렇게 죽기 살기로 일해?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저번에 설아한테 같이 밥 먹자고 했을 때도 시간이 없다 하더니 누가 보면 다들 대통령 선거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

허설아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강시우는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적인 실수였다.

어떻게 상대가 허설아와 사귀었던 권지헌이라는 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강시우는 이를 꽉 깨물고 입을 탁 쳤다.

'망할 놈의 입!'

절친인 강시우와 허설아는 대학 시절에도 맨날 같이 붙어 다니며 게임을 하곤 했다.

전엔 권지헌조차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 정도였다.

심지어 몰래 신경 쓰고 견제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허설아가 강시우를 남자로 안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농구할 때 강시우를 호되게 혼내줬는데 나중에 술을 마신 뒤에야 강시우가 이런 말을 했다.

"허설아가 예쁘긴 한데 누가 버텨내겠어? 성격이 난리도 아니야. 조금만 엇나가면 바로 따귀가 날아와. 지헌아, 설아가 네 뺨은 안 때리지?"

옆에서 누군가 바로 말했다.

"허설아가 지헌이를 깍듯하게 모셔도 모자랄 판에 뺨을 때려? 간덩이가 아무리 부어도 그건 못 하지!"

"하긴."

……

강시우가 막 다른 화제로 넘기려던 찰나, 권지헌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씨 가문 파산했어?"

강시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응, 몇 년 됐어. 지헌아, 허설아 이미 결혼까지 했는데 너 혹시 아직 못 잊은 건 아니지……"

"못 잊긴 뭘 못 잊어? 성동의 땅? 아니면 성북의 공장?"

이건 다 강원 그룹이 노리고 있는 프로젝트들이었다.

그 말을 들은 강시우는 정신을 차리고 흥분해하며 말했다.

"지헌아, 친구한테 국물이라도 좀 남겨줘야지!"

권지헌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강시우는 여전히 진땀이 났다.

'앞으로는 권지헌 앞에서 허설아 얘기를 꺼내면 안 되겠어.'

-

프로젝트 수정을 끝내고 나니 깊은 밤이 되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 동료들은 전부 퇴근했고 커다란 사무실에 허설아 혼자만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허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뻐근한 목을 풀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사무실 컴퓨터들이 다 꺼졌는지 확인하고 의자들도 전부 제자리에 밀어 넣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밤 깊은 시간, 빌딩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

허설아의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뒤에서 허설아의 구두 굽 소리보다 더 묵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남자 구두인 듯했다.

허설아는 모서리를 도는 순간 슬쩍 돌아보았다.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꽤 크고 머리가 허설아보다 거의 한 뼘 정도는 더 위에 있었다.

남자였다.

아무리 CCTV가 있다고는 해도 늦은 밤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 이 층에 올 리도 없고 방금 허설아가 분명 부서 사람들 모두 퇴근한 걸 확인한 상황이었다……

허설아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여름에 팔뚝에 솜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전에도 건물에서 심야에 퇴근하던 직원이 변태를 마주쳤다는 뉴스가 난 적 있었다.

그 뒤로 야근은 되도록 12시를 넘기지 말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허설아는 오늘 새벽 한 시 반까지 야근했다.

'이렇게 재수 없는 건 아니겠지?'

허설아는 덜덜 떨며 휴대폰을 꺼내 일부러 전화하는 척 연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세요? 자기야, 어디까지 왔어? 퇴근했으니까 빨리 데리러 와. 나 너무 졸려. 거의 도착했다고?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착각일지 모르지만 통화를 마치자 등 뒤에서 따라오던 발소리가 정말 멈췄다.

허설아는 안도의 숨을 쉬며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로 달려가서 덜덜 떨며 1층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고 서비스센터의 번호가 보이다가 화면이 꺼졌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도에 있던 사람은 방향을 틀어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공간에 라이터 불빛이 탁 튀더니 담배 연기가 피어올라 권지헌의 얼굴을 어스름하게 가렸다.

잠시 뒤,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가 손가락에 닿자 권지헌은 담배를 털어 끄고 정신을 다잡았다.

이 층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그냥 내려와 본 것뿐인데 야근하던 사람이 허설아일 줄은 몰랐다.

아픈 남편 먹여 살리느라 꽤 열심히 사는 듯했다.

권지헌은 휴대폰을 꺼내 조민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앞으로 자정 12시 넘기는 야근 시간은 야근 수당이 없다고 공지 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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