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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파도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3 13:31:04

호치민의 새벽은 무겁고 습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도로 위의 빗방울이 길게 흘러내렸다.

한적한 항구 구석, 낡은 창고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수진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 펜으로 표시된 선들이 국경을 가로지르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캄보디아, 라오스, 광저우, 그리고… 부산.

그녀의 손이 그 마지막 지점을 멈췄다.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하네.”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이 바다는, 나를 불러.”

그녀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불꽃이 켜지는 순간, 벽에 걸린 사진 하나가 드러났다.

젊은 시절의 수민, 그리고 그 옆의 강혁.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수진은 사진을 오래 바라보다 손끝으로 천천히 접었다.

“언니, 이번엔 내가 선택할게.”

서울. 국정원 구본청.

새로 부임한 감찰관이 내부 정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무실 구석, 강혁은 흰 봉투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여진이 남긴 USB가 있었다.

그는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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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21. 붉은 바다를 건너온 이름

    바다는 여전히 붉었다.새벽이 끝나갈 무렵, 태양은 수평선 위에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짙은 회색 안개 사이로 두 척의 배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엔진 소리는 없었다.단지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두드리며 흩어지는 소리만이 그 고요한 재회의 배경음이었다.수진은 손잡이를 쥔 채 선실 밖으로 나섰다.그녀의 눈동자엔 피로와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고, 햇빛이 그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다.멀리서 다가오는 또 다른 배 그 위에 서 있는 남자.흰 셔츠의 소매가 바람에 펄럭였다.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단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였다.그들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파도 위에서, 그들의 눈빛이 부딪혔다.“……린자오밍.”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리고 낮게 대답했다.“……이제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요.”그는 조용히 웃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김수진.”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끝자락에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그는 다시 물었다.“살아 있었군.”“살아 있었죠. 죽을 만큼 살았어요.”“그럼 다행이네.”“…….”“죽지 않아서.”그 말이, 그녀의 심장을 흔들었다.단 한 문장인데, 그 안에는 분노도, 미안함도, 사랑도 섞여 있었다.그녀는 시선을 피했다.“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예요.”“너를 찾으려고.”“왜요.”“아직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둘의 배가 닿았다.철제 선체가 부딪히며 짧은 금속음이 났다.그녀는 천천히 사다리를 타고 그의 배 위로 올랐다.바다 냄새, 소금기, 그의 숨결. 모두 낯익었다.그리고 그 낯익음이 두렵게 느껴졌다.“이제 뭐가 남았죠?”그녀가 물었다.“우릴 이렇게 만든 사람들.”“배신구요.”“그래.”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이번엔 같이 하자.”“같이?”“혼자서 끝낼 생각은 하지 마.”“…….”“이제 네가 혼자가 아니니까.”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그 말이 낯설고, 동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20. 붉은 파도

    호치민의 새벽은 무겁고 습했다.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도로 위의 빗방울이 길게 흘러내렸다.한적한 항구 구석, 낡은 창고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수진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빨간 펜으로 표시된 선들이 국경을 가로지르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캄보디아, 라오스, 광저우, 그리고… 부산.그녀의 손이 그 마지막 지점을 멈췄다.“결국, 다시 돌아가야 하네.”그녀의 눈빛은 단단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이 바다는, 나를 불러.”그녀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불꽃이 켜지는 순간, 벽에 걸린 사진 하나가 드러났다.젊은 시절의 수민, 그리고 그 옆의 강혁.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수진은 사진을 오래 바라보다 손끝으로 천천히 접었다.“언니, 이번엔 내가 선택할게.”서울. 국정원 구본청.새로 부임한 감찰관이 내부 정리를 진행하고 있었다.사무실 구석, 강혁은 흰 봉투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여진이 남긴 USB가 있었다.그는 잠시 망설였다가, 컴퓨터를 켰다.화면이 켜지고, 암호가 입력되자 파일 하나가 떴다.Project_Illumination_Record_Alpha그의 손이 멈췄다.클릭.화면엔 CCTV 영상이 재생되었다.한 연구소의 실험실,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그리고 유리 캡슐 안의 한 여자.“……수민.”그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눈을 감고, 전극이 연결된 상태였다.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사랑은, 지워지지 않아요.’그 순간, 배신구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럼, 널 지우지.”총성이 울렸다.화면이 꺼졌다.강혁은 손을 떨어뜨렸다.눈앞의 불빛이 멀어졌다.그의 머릿속은 고요했다.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그리고,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수진의 목소리였다.“당신은 살아야 해.”그는 눈을 감았다.“그래. 이제는 내가 살아남아서 끝까지 보게 될 거야.”늦은 밤, 부산 남항.어둠 속에 정박한 배 위로 여자의 그림자가 올라탔다.그녀는 모자를 눌러쓰고, 어깨 위의 배낭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9. 복수를 끄고 삶을 켜다

    새벽의 바다는 잿빛이었다.해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낮게, 길게 울렸다.물결이 부서질 때마다 하얀 거품이 피어올랐다.그 위로, 배 한 척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배의 갑판에 앉은 여자가 있었다.짙은 네이비 코트를 입고, 손에는 작은 나침반을 쥐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있었다.“……남서풍.”그녀의 목소리가 바다 위로 스쳤다.“그는 이 바람을 기억할까.”그녀의 눈동자엔 아직도 불길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불은 사라졌지만, 냄새는 남는다.그건 복수의 냄새이자, 살아남은 자의 냄새였다.“이젠, 내 이름도 바람에 맡길게.”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린자오밍… 그 이름으로.”며칠 전, 서울의 한 병원.서여진은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침대 옆에는 무장 경호원이 서 있었다.그녀의 입술은 터져 있었고, 눈빛은 흐릿했다.문이 열리자, 강혁이 들어왔다.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이제야 보네.”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여진은 미소를 지었다.“살아 있었네요.”“네가 흑거미를 추적했지.”“했죠.”“왜?”“당신을 지키려고.”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그녀의 눈빛 속엔 여전히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그건 집착이 아니라, 미련이었다.“서여진.”“왜요.”“지금이라도 그만둬. 이건 네가 감당할 일이 아니야.”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강혁 씨, 사람은 감당 못할 일만 사랑하게 되잖아요.”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너답네.”“수진 씨는요?”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살았어.”“그럼 됐네요.”“뭐가.”“당신은 결국 그 여자에게로 가겠죠.”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내가 그 여자를 닮으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요?”“…….”“그런데 당신은 한 번도 나를 보지 않았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렸다.“이젠 괜찮아요. 대신… 그 여자가 죽지 않게만 해줘요.”그녀는 천천히 웃었다.“그게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8. 피로 쓴 약속

    새벽, 비가 그쳤다.서울의 하늘은 유리처럼 투명했지만,그 투명함 속엔 오래된 상처가 비치고 있었다.강혁은 국도변 쉼터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작은 봉투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그 안엔, 수진이 남기고 간 금속 조각이 들어 있었다.‘PROJECT 照明 – For S.M.’그 글자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문지르며 속삭였다.“이 피로 쓴 약속…이젠 내가 끝내야겠네.”그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안엔 결의가 타오르고 있었다.그는 휴대폰을 켜서 오래된 번호 하나를 눌렀다.“……서여진, 나야.”“당신, 아직도 살아 있었군요.”“지금 어딨어?”“잡혔어요.”“뭐?”“배신구가 나를 찾았어요. 내가 내부 문건을 빼돌린 걸 알아챈 모양이에요.”그는 숨을 삼켰다.“위치는?”“명동 지하, 구 연구소 터. 照明 프로젝트가 있던 곳이에요.”“거기엔 들어가면 안 돼. 그건 이미 지워진 공간이야.”“그럼… 누가 그걸 지웠을까요? 배신구예요.”그녀의 목소리는 잠시 떨렸다.“수민 씨를 죽인 이유도 그거였어요. 그녀는 실험을 중단시키려 했어요.그게 照明의 진짜 목적이었거든요.”그는 숨을 멈췄다.“……무슨 소리야.”“照明은 인간의 감정을 복제하고, 그걸 통제하려는 시스템이었어요.감정 없는 정보원. 감정을 삭제한 인간.”“……그런 짓을 왜.”“국가의 명분 아래서요.”잠시 침묵. 그녀의 숨소리가 이어졌다.“수민 씨는 그 실험의 첫 번째 대상이었어요. 그녀는 사랑을 기억하고 싶어했죠. 당신과의 기억을.”강혁의 눈이 흔들렸다.“그럼… 그녀가 나를 떠난 건”“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배신구가 말했죠. 그녀가 실패하면, 당신을 제거하겠다고.”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그 여자는 결국 죽었잖아.”“아니요. 죽인 건, 시스템이에요. 감정을 끝내 지우지 못한, 인간 그 자체를.”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감정을 지운다… 사랑을 없앤다…”그는 작게 웃었다.“그래서 照明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7. 복수가 아닌 약속의 시간

    비는 새벽 내내 내렸다.서울은 온통 검게 젖어 있었다.전날의 폭발로 도시 한복판의 건물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차가운 연기와 타버린 철골 냄새,그리고 어딘가에서 섞여 나온 피 냄새가 공기를 눌렀다.그 잔해 속에서 강혁이 걸어 나왔다.그의 옷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이마에는 피가 흘렀다.한쪽 손엔 여전히 그녀의 라이터가 쥐어져 있었다.불은 꺼져 있었지만, 그의 손바닥은 뜨거웠다.“……살아있었구나.”그는 낮게 중얼거렸다.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라이터의 불빛.그건 그녀가 남긴 신호였다.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그는 무너진 벽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다.벽 틈에서 작은 백합 한 송이가 떨어져 있었다.잿더미 속에서도 하얗게 피어 있던 그 꽃.그는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었다.“린자오밍…”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 이름은 잿더미 속에서도 빛을 가졌다.그는 고개를 숙였다.“이번엔, 내가 널 찾아갈 거야.”며칠 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창고.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수진이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불에 그을려 끝이 검게 타 있었고,몸 여기저기에는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눈은 맑았다.그 눈에는 살아남은 사람의 이유가 담겨 있었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벽에는 간이 침대와 상자 몇 개, 그리고 녹슨 금속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거울 속에는, 더 이상 꽃집의 플로리스트가 아닌 여자가 서 있었다.린자오밍.그녀는 손으로 거울을 만졌다.“……당신이 나를 이 이름으로 다시 불러줄 때까지, 난 이 얼굴로 살아야겠지.”문이 열렸다.그녀의 앞에, 검은 옷의 여자가 서 있었다. 흑거미였다.“살아있었군, 내 애.”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죽은 줄 알았는데.”“죽었어야 했겠죠.”“그럼 왜 살아있지?”“그 사람 때문이에요.”“강혁?”“네. 그는 불을 지켰어요.”흑거미는 짧게 웃었다.“아직도 감정 같은 걸 믿는구나.”“감정은 무기예요. 그리고,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6. 어둠의 길 위에서

    비는 낮부터 내리고 있었다.서울의 하늘은 잿빛으로 눌려 있었고,그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같은 색이었다.차창에 맺힌 물방울이 서서히 흘러내릴 때마다, 세상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수진은 검은 우비를 걸치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손에는 금속 케이스 하나가 들려 있었다.그 안에는 배신구의 계좌와 ‘照明 프로젝트’ 원본이 들어 있었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걸었다.뒤를 돌아봤다.검은 SUV 두 대가 골목 입구에 멈춰 있었다.사람들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비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라이터를 꺼내 손에 쥐었다.불은 켜지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이건 단순한 복수가 아니야.’‘이건 언니가 시작한, 그리고 내가 끝내야 할 싸움이야.’그녀는 골목 끝 작은 시장으로 몸을 숨겼다.향신료 냄새와 젖은 생선 비린내가 섞인 공기 속에서,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간판 위에 새겨진 세 글자. 해남회관.그 이름이 그녀의 심장을 세게 두드렸다.그곳은 강혁이 마지막으로 남긴 주소였다.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당신도… 이 길 위에 있겠죠.”서울 외곽, 낡은 여관방.강혁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밖은 여전히 비. 그의 손에는 수민의 녹음기가 있었다.“강혁 씨, 사람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죄가 아니에요.”그 목소리가 방 안을 떠돌았다.그는 눈을 감았다.“그 목소리… 아직도 나를 붙잡는군.”전화기가 울렸다.익숙한 이름, 서여진.“……무슨 일이야.”“당신, 지금 어딨어요?”“숨는 중이지.”“그 여자, 린자오밍. 지금 국정원이 추적 중이에요.”“…….”“그녀가 자료를 훔쳤어요. 배신구의 비밀 계좌 전부.”“그럼 그녀가… 그 자식과 싸우고 있다는 거네.”“아니요, 그녀는 혼자 싸우고 있어요. 당신이 필요해요.”그의 숨소리가 바뀌었다.“위치는?”“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이 있어요.‘백합이 다시 피는 곳.’ 그게

  • 내 여친은 린자오밍!   33. 어둠을 끌고 다니는 빛

    비가 그친 아침,하늘은 유리처럼 맑았다.밤새 내리던 비가 남긴 물방울들이 창문마다 맺혀 있었다.세상은 잠시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수진은 일찍 문을 열었다.꽃잎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그녀는 그 작은 구슬들을 닦아내며 낮게 중얼거렸다.“세상은 늘 무너진 다음에만 깨끗해지네.”유리문 너머로 강혁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젖은 셔츠,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눈빛만은 전날과 달랐다.그녀는 조심스레 웃었다.“오늘은 날이 참 좋네요.”“그래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묘하게 잠겨 있었다.그녀는 눈치를 챘다.그가 이

  • 내 여친은 린자오밍!   32. 거짓의 온도

    새벽은 차가웠다.바다 위엔 아직 안개가 남아 있었고,선착장에 매달린 밧줄이 바람에 흔들리며 낮게 울었다.강혁은 물안개 속을 천천히 걸었다.손에는 낡은 서류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보조 연락자: 린자오밍.’그 이름이 종이 위에서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그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봤다.“린자오밍….”입 안에서 굴러나오는 이름이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단순한 기록의 흔적일 뿐인데, 왜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들릴까.그는 눈을 감았다.그녀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비가 오면 믿으세요.”그때의 눈빛, 그리고

  • 내 여친은 린자오밍!   31. 입술 끝에 맺힌 낯선 이름

    흐린 하늘 아래, 해남 바다는 잿빛이었다.조용한 물결 위로 바람이 낮게 깔리고,갯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묵직한 울림을 냈다.강혁은 오래된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며칠 전, 폐기 예정이던 구 자료실에서 우연히 찾아낸 한 묶음의 문서 때문이었다.“캄보디아 프놈펜 작전 / 기밀 등급 C-27.”서류 상단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그는 조심스럽게 문서를 펼쳤다.낡은 종이에서 묘한 냄새가 났다.먼지가 피어오르는 사이, 그의 눈이 멈춘 곳엔 한 장의 보고서.‘이중첩자 김수민 / 사망 처리.’그리고 그 밑에 희미하게 지워진

  • 내 여친은 린자오밍!   30. 그녀의 그림자를 안은 밤

    저녁이 내려앉은 바다엔 검은 물결만이 남아 있었다.햇빛이 남기고 간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별이 뜨기엔 너무 이른 어둠이 밀려왔다.수진은 가게의 불을 하나씩 끄고 있었다.꽃잎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하루 종일 손님이 많았던 날,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고요했다.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집처럼.그녀는 유리문을 닫으려다 멈췄다.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검은 외투, 젖은 머리카락. 강혁이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꽃 냄새가 나서요.”“이 밤에도요?”“밤이니까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아요.”그의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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